第九十章 일촌간극(一村間隙) (2)
기적이 일어났다!
“나온다!”
당홍이 동굴에서 걸어 나오는 사람들을 제일 먼저 봤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세 사람을 향해서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두 발이 얼어붙었는지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꼼짝할 수가 없다. 마음은 세 사람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지만, 몸은 목석처럼 굳어버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기적을 봤을 때 사람들은 종종 얼어버린다.
당홍이 그런 모습이다. 마음속에서 생기고 있었던 불안감이 싹 가시면서 몸이 딱딱해졌다.
도천패가 일어나서 당홍의 어깨를 살짝 어루만졌다.
“호발귀가 어떻게든 해낼 줄 알았는데, 정말 해냈네. 해낼 수 있다고, 해낼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사실은 힘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거든.”
당홍이 중얼거렸다.
도천패가 어깨를 만져주자 얼어붙었던 몸이 사르르 풀렸다. 그리고 마음속에 있는 말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웃었지만, 사실은 매우 불안했던 며칠 동안의 고민이 생생하게 묻어나왔다.
“당매만 그런 게 아니야. 우리 모두 마찬가지지. 며칠째 계속 투덕거리기만 하고, 나아지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고. 오죽 불안하게 만들었어야지.”
도천패가 말했다.
“그랬어?”
“그랬지. 홀리는 어떻게든 맑은 정신을 끌어낼 수도 있겠지만, 책사는 도저히 가망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혈마가 된 지 오래됐잖아. 너무 혈기에 젖어서.”
도천패가 활짝 웃는 낯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는 세 사람을 쳐다봤다.
호발귀와 등여산, 홀리는 동굴에서 걸어 나왔다.
옷이 온통 흙투성이에다가 찢어진 곳이 많아서 누더기를 걸친 모습이었다. 하지만 안색만큼은 팽팽하다 못해서 싱그럽게 빛나기까지 했다.
맑은 생기가 충만한 모습이다.
세 사람은 일행이 있는 곳으로 곧장 걸어왔다.
“괜찮으십니까?”
귀검이 즉시 호발귀 앞으로 다가가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귀검!”
파팟!
등여산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등여산은 귀검이 변화한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가 호발귀 편에 서서 혈천방과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녀는 그런 일이 벌어지기 훨씬 전에 혈마가 되었다.
홀리가 등여산의 손을 살며시 잡으며 말했다.
“귀검이 혈의검이야. 귀검은 혈의검의 진전을 이어받았대. 유진까지 모두.”
“그럼 지옥유부검이!”
등여산이 홀리를 쳐다봤다.
홀리가 맞는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혈의검의 무공만 이어받은 게 유지까지 이어받았다? 인세에 혈마가 나타나면 반드시 제거하라는 명령까지 물려받았다는 뜻이다.
물론 죽음의 구혼음소도 물려받았고.
등여산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혈의검의 진전을 고스란히 전해 받았다면 지금 귀검이 취하고 있는 모습도 이해가 된다.
혈의검은 혈마의 충북이자 충신이었다. 신하이자 친구였다.
귀검은 혈의검에게서 ’혈마의 수족’이라는 직위까지 이어받은 것이다.
등여산은 그제야 날카롭게 번뜩이던 눈빛을 풀었다.
“그럼 어떻게? 완전히 나은 건가? 혈마에서 싹 벗어난 거야?”
해자수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 얘기는 차분히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혈마에서 벗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도, 등매도, 홀매도. 우리 모두 아직은 혈마죠.”
일행의 눈에 실망이 어른거렸다.
“혈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다시 원점인가? 그래도 뭐…… 제정신이 들어온 걸 보니까 이 정도면 됐지. 킥킥! 하루를 살더라도 멀쩡한 정신으로 살면 되는 거야. 킥킥킥!”
해자수가 애써서 실망감을 추슬렀다.
정오가 넘었다.
호발귀는 계류를 찾아서 몸을 씻었다. 이가 득실거릴 것 같은 머리도 시원하게 감았다.
땀에 듬뿍 절어버린 옷을 벗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배도 고팠지만, 밥을 먹는 것보다도 씻는 것이 더 급했다.
이런 마음은 오물을 뒤집어써 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혈기가 오물은 아니지만, 제정신을 차리면 마치 핏속에 푹 잠겼다가 나온 기분이 든다.
몸이 간지럽고 찜찜해서 씻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개운해.”
“여벌의 옷이 있어도 다행이야.”
홀리와 등여산은 혈기를 깨끗이 잊어버린 듯 마음을 풀어놓고 시원함을 즐겼다.
두 여인은 호발귀와는 전혀 다른 상태다.
호발귀는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어도 몸에는 여전히 혈기가 들끓고 있다.
혈마와 인간이 공존한다.
반면에 두 여인은 혈기를 말끔히 잊어버린다. 해자수나 도천패처럼 어느 순간에는 혈마가 되겠지만, 그전에는 혈마와는 전혀 상관없는 인간처럼 지낸다.
그런 상태에서 혈마가 되었을 때, 은밀히 전개되는 암수에 대응하는 법만 익힌 것이다.
“모두 궁금해하는 것…… 말해줄게.”
호발귀는 일행을 모두 둘러앉혔다. 경계조차 설 필요가 없다. 지금 하는 말이 훨씬 중요하다.
살아남은 모든 사람이라고 해봤자 몇 사람 되지도 않는다.
일행 다섯 명과 귀검, 악불사왕의 진전을 이은 궁충, 그리고 순수하게 귀무살로 성장해 온 귀무살 네 명이 전부다.
호발귀까지 열두 명만 살아남았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진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어. 내가 경험한 사실을 말하는 것이니 진실이라고 말해도 무방할 것 같은데, 혈기가 워낙 넓고 깊어서 속을 알 수가 없어. 이게 맞다 싶다가도 틀리는 부분이 생기더라고.”
호발귀가 혈기에 대해서 입을 열었다.
“그래도 현재까지는 이것이 진실이라고 생각되는 건 있으니까 그런 부분만 얘기해볼게.”
모두 눈빛을 반짝이며 호발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중원 무림에서 혈마에 대해 가장 많이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호발귀가 하는 말은 또 다른 말이다. 며칠 동안 동굴 안에서 있었던 일을 말한다.
그리고 그 말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완전히 뭉개버릴 것이다.
“먼저…… 혈기는 생기야.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몸에서 떨어지지 않는 삶의 기운. 분명히 존재하는데 알지도 못하고, 이용하지도 못하는.”
호발귀는 가장 기본적인 부분부터 말을 시작했다.
“이 생기를, 이 힘의 존재를 정확하게 알고 이용하자는 것이 진기 무공이야.”
호발귀가 하는 말은 예닐곱 살짜리 코흘리개 꼬마들에게나 하는 말이다.
무공을 배우겠다고 문파를 초심자에게 선배들이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듯이 진기와 경맥을 설명해 준다.
그리고 이것은 진실이다. 이미 수많은 의원과 무인이 증명한 사실이다.
인간의 몸에 깃든 기운을 끌어내서 몸을 더 강하고, 빠르고, 굳건하고, 활력 있게 유지하는 것이 진기다.
건강을 위해서건 싸움이 목적이건 진기는 인간에게 힘을 넘겨준다.
생명을 더 강화해준다. 두말할 나위 없이 생기를 끌어내어서 이용한다.
“하지만 이 생기를 십분 이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진기 무공이 극성에 이르면, 그러니까 생기를 온전히 쓰기 시작하면 이유 모르게 오염이 돼. 혈기가 되는 거지.”
“주공의 말씀은 진기의 끝이 혈기란 말입니까?”
귀검이 물었다.
호발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는 말할 수 없고…… 진기는 생기를 이용하는 방법으로 시작했지만 사용하는 중에 파생되는 기운을 서로 조합하고 융합시키고 가공해서 더 강한 상승 무공을 펼치게 돼. 이 지점에서 생기와 진기 무공이 갈라지는데…… 지옥유부공, 암약혼기, 사령천공 등이 이쪽 부류에 속하지. 이런 무공들은 이미 진기 조합의 최상층부에 속하는 무공들이야.”
호발귀의 말은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이해가 되는 듯하면서도 되지 않는다.
그러면 처음 시작은 진기로 시작하되, 생기로 나아가는 것이 있고 진기 조합으로 제자리에서 강한 무공을 표출하는 무공이 있다는 말인가?
호발귀가 말했다.
“이 지점…… 진기와 생기의 갈래. 이 지점에서 생기로 들어선 사람이 우리 일곱 명이야.”
“이백 년 전 혈마도?”
해자수가 물었다.
“혈마도. 보통은 여기서 생기 쪽으로 가는 길이 막히는데, 우리는 그 길로 접어든 거지. 문제는 이 길로 접어드는 순간에 오염이 된다는 것.”
“그러면 우린 아직 오염이 되지 않은 건가? 킥킥!”
“나는 이미 생기 쪽으로 완전히 접어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아직 혼돈지역, 진기와 생기의 중첩 지역에 있는 것이고.”
호발귀는 중간에 툭툭 들어오는 질문에도 빠짐없이 대답해주었다.
한두 마디로 끝낼 이야기가 아니다. 아마도 아주 긴 이야기가 될 것이다.
호발귀는 자신이 경험한 모든 것을 낱낱이 얘기해 주었다.
오후 무렵에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밤이 깊어서야 끝맺을 정도로 긴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호발귀 상태에 대해서 명확히 알았다.
전신이 혈기에 휘감겨 있다. 오염된 생기, 혈기가 몸을 움직인다.
이 상태라면 호발귀는 당연히 미친놈처럼 펄쩍펄쩍 날뛰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멀쩡해 보인다. 그 이유가 ‘들끓는 혈기를 차분히 주시하는 나’가 있어서다.
내 몸에 두 개의 내가 있다.
몸을 움직이는 혈기가 있고, 혈기를 주시하는 내가 있다.
이 둘은 따로 분리되지 않는다. 하나다. 둘이면서 하나이고, 하나이면서 둘이다.
이것이 호발귀의 상태다.
호발귀 외에 다른 사람은 ‘주시하는 나’가 없다. 그래서 혈기가 일어나면 혈기에 휘말린다.
정신없이 휘말려 들어가서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른다.
몸과 뇌의 연결이 끊어진다.
‘주시하는 나’는 어려운 것이 아니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경험해 본 적이 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차분히 진기를 끌어 올리면 어느 순간 육신은 사라지고 흐름을 주시하는 나만 남는다.
경맥을 흐르는 기운을 주시한다.
이때, 진기는 액체처럼 뚜렷이 보인다.
감각으로 느끼는 것이지만, ‘보는 나’는 마치 물이 흐르는 것처럼 생생하게 주시한다.
진기 운공, 진기 운공 속에서 ‘주시하는 나’를 경험했다.
인간은 화가 치솟으면 화를 낸다. 이때는 ‘주시하는 나’가 없다. 오직 화에 휩쓸려서 불같이 성질을 낸다.
혈기에 휘말렸을 때와 전혀 다르지 않다.
여기서 ‘주시하는 나’를 끄집어낸다.
한편에서는 화가 일어나고 다른 한편에서는 화를 주시하는 내가 있다.
양의 성질을 지닌 화와 음의 성질을 지닌 ‘주시하는 나’가 마주치면 두 힘이 동시에 소멸된다.
화가 사라짐과 동시에 주시하는 자도 사라진다. 화가 사라지니 주시할 필요가 없지 않나.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것이 혈기에도 통한다. 아니, 완벽하게 같다.
평범한 사람이 무인이 되어서 진기를 지켜보듯이, 혈마도 차분히 수련해서 ‘지켜보는 나’를 찾아야 한다.
나를 찾지 못하면 혈마가 되고, 나를 찾으면 호발귀처럼 혈기에 휩싸인 상태에서도 정신을 잃지 않게 된다.
심등이 이룬 조견이다.
“생기가 오염되어서 혈기로 드러난 것이라면…… 오염된 부분을 씻어낼 수는 없을까?”
도천패가 말했다.
“모르지. 나도 아직 거기까지는 가보지 못했으니까.”
“주모, 주군의 말씀…… 시험해 봐도 됩니까?”
귀검이 등여산을 보며 말했다.
“지옥유부검을 피할 수 있다는 말요?”
“주군의 말씀을 믿지만…… 저도 제 검에 자신을 가지고 있어서. 무엇보다도 이런 일은 실제로 확인해 보는 것이 나중에 천살단이나 혈천방을 만났을 때도 안심될 겁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럼 책사가 또 혈마가 되어야 한다는 말인데, 그게 가당키나 해!”
해자수가 대뜸 쏘아붙였다.
“아뇨. 이건 귀검 말이 맞아요. 이런 일은 확인해 보는 게 좋죠. 하지만 오늘은……”
등여산이 난색을 보였다.
오랜 시간 동안 혈마가 되었다가 이제야 다시 맑은 정신을 찾았다.
그런데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혈마가 된다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
“당장 오늘 시험해보겠다는 것은 아니니까……”
“아니, 그게 뭐 어려워? 내가 할게.”
홀리가 나섰다.
“책사나 나나 이 부분에서는 같은 수준이니까. 나도 내가 사령천공 같은 것에 당하는 것은 내키지 않거든. 귀검, 지옥유부검 제대로 부탁해요.”
홀리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옆에 호발귀가 있으니까 가능한 거다. 혈마로 변해도 다시 맑은 정신을 찾아줄 사람이 있으니 마음 놓고 변할 수 있다.
“비무는 조금 있다가. 아직 말하지 않은 게 있거든. 구혼음소 부분인데. 기왕 비무를 하려면 이 부분도 시험해 볼 겸 며칠 있다가 하지. 구혼음소도 같이 시험하면 좋잖아.”
호발귀가 물을 마시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