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九章 사활수련(死活修鍊) (5)
탁!
혈기를 뻗어내어 생기도를 흐트러트렸다.
생기도가 흩어지자 등여산은 촌각도 지체하지 않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다짜고짜 공격을 가해왔다.
등여산은 어떤 움직임에 가장 익숙한가?
스스스슷!
손이 날아온다.
‘태산금나!’
등여산은 태산파 절학을 빠짐없이 수련했다.
여인의 몸이지만 명실공히 태산파 후기지수였다.
천살단 책사가 되기 전에 이미 태산파 고수로 명성을 휘날렸고, 그 당시 무명이 태산협녀(泰山俠女)였다.
태산협녀는 검사다.
설화팔보와 함께 어우러진 설화팔극검은 서릿발 같은 기세로 사마외도를 핍박했다.
당연히 등여산이 가장 애용하는 무공은 설화팔극검이어야 한다.
그런데 모든 무공을 제치고 태산금나, 금나수를 사용한다.
검법, 장법, 각법…… 모두 던져버리고 살상력이 제일 약한 금나수를 꺼내 들었다.
그녀가 정신을 잃었을 때, 미약 같은 것에 중독되어서 제정신이 아닐 때, 무의식중에 반격할 필요가 생겼을 때 등등 엉겁결에 한 수를 떨쳐내는 한 수가 바로 태산금나다.
자신도 모르게 펼치는 한 수, 몸이 가장 기억하고 있는 최고의 무공이다.
태산금나가 태산파 최고 무공이라는 말은 아니다.
그런 의미와는 거리가 멀다. 말 그대로 몸이 익히고 있는 무공이 태산금나라는 소리다.
이 말은 등여산이 태산금나를 가장 오랫동안, 혹은 가장 깊이 있게 수련했다는 말도 된다.
“카우 아만. 테리말라흐 에네기……”
호발귀는 구혼음소를 읊었다. 동시에 손가락을 곧추세워서 투골지를 뻗어냈다.
퍽! 퍽퍽! 퍽!
옆구리에 투골지가 작렬했다.
대횡혈(大橫穴), 복애혈(腹哀穴), 대포혈(大包穴), 옆구리 삼혈(三穴)에 투골지가 터졌다.
“케엑! 켁!”
등여산이 괴성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태산금나는 투골지를 잡지 못했다. 지법이 날아오는 것은 본 듯하다. 손목을 낚아채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간발의 차이로 손목을 잡지 못하고 옆구리를 강타당했다.
“큭큭! 크윽!”
등여산이 고통스럽게 비명을 내질렀다.
호발귀는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비명을 내지른 내지는 사람은 등여산이 아니다. 혈마다. 혈마가 고통스러워하는 괴성을 등여산이 고통스러워하는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
물론 등여산이나 혈마나 같은 사람이다.
혈마가 곧 등여산이다. 혈마가 당하는 육체적 고통은 등여산이 당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같은 몸이다.
다만 이 소리에 귀 기울이면 영원히 등여산을 찾아내지 못한다.
혈마가 된 그녀의 육신을 안쓰러운 눈으로 보면서 살아가야 한다. 아니면 자신이 직접 생명을 끊게 되거나.
“탄 투 마하 구저처 토파……”
호발귀는 눈을 질끈 감고 냉정하게 구혼음소를 읊었다.
구혼음소는 등여산을 편안하게 해준다. 생명체를 감지해내도 즉시 반응하지 않는다.
하지만 생명체가 존재하고, 어디에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히 인식한다.
호발귀는 평온한 구혼음소 외에 다른 구혼음소도 읊을 수 있다.
등여산의 혈기를 보면 즉각 그녀를 죽일 수 있는 음률이 떠오른다.
일부러 찾아낸 것이 아니라 혈기를 보기만 하면 살상 방법이 생각난다.
등여산도 생명체다.
호발귀의 혈기가 꺼트리고자 하는 푸른 빛이다.
혈기를 보고 푸른 빛을 꺼트릴 수 있는 살상의 구혼음소가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호발귀는 살상의 구혼음소를 읊지 않으려고 애썼다.
자연스럽게 입에서 툭 튀어 나가려는 것을 심등으로 눌러 앉혔다. 그리고 평온의 구혼음소를 읊는다.
살상의 구혼음소는 첫마디만 읊어도 당장 경각심을 돋군다.
사실 혈마에게는 인간이 펼치는 진기 무공은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는다.
살상의 구혼음소만큼 강한 자극을 주지 못한다. 진기 무공보다는 인간 그 자체가 더 강한 자극을 준다.
진기보다는 인간이 지닌 생기에 더 끌린다.
그러니 혈마를 훈련하는 데는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평온의 구혼음소가 한결 적합하다.
쒜에에엑!
투골지를 뻗어냈다.
호발귀는 더는 숨지 않았다. 구혼음소를 읊은 다음 곧바로 공격을 펼쳤다. 등여산의 등 뒤로 돌아가지 않았다. 다만 투골지를 전개하기 전에 기척은 완전히 숨겼다.
벌써 ‘뒤로 돌아가는 과정’ 한 단계를 생략했다.
퍼억!
“케엑!”
등여산이 복결혈(腹結穴)을 얻어맞고 괴성을 내질렀다.
혈기로 혈기를 타격하면 확실히 혈기가 극성화된다. 등여산이 굉장히 빠른 속도로 혈마가 된다.
또 혈기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성해진다.
혈기는 혈기를 충족시키고 보완시켜준다.
혈기격타는 상대방의 혈기를 무너뜨리지 못한다. 오히려 상승 작용을 일으킨다.
등여산이 발현한 혈기도 대자연의 기운이기 때문이다.
대자연의 기운은 결코 서로를 상쇄시키지 않는다. 보완하고, 충족시키고, 발전시켜준다.
다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대자연의 기운이 온전히 발현되지 못하고 혈성(血性)이 깃드니 이것이 문제다.
호발귀가 오염됐다고 표현하는 혈기다.
혈기에서 혈성만 제거하면 혈마가 발현하는 기운은 온전한 대자연의 기운, 생기가 된다.
이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이 바라는 하늘의 힘이 된다.
호발귀도 아직은 맑고 깨끗하고 순수해야 할 대자연의 기운이 왜 변질하였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다.
정신을 혼탁하게 하고, 인성을 소멸시키고, 살아있는 생명체만 보면 죽이려고 드는 이유가 분명히 있을 텐데.
지금까지는 이래서 생기가 혈기로 변했구나 하는 이유를 몇 가지 찾아냈지만, 어느 것 하나 정확하지 않다.
그런 이유들 모두가 생각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방법일 뿐이다.
퍼억!
투골지가 혈기를 때렸다.
투골지가 타격하는 부위는 혈도이지만, 정작 호발귀가 중점적으로 때리는 것은 혈기다.
확실히 이 방법은 호발귀도 편하다.
혈마에게는 혈기로 혈기를 친다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도 없다.
“케에에엑!”
등여산은 비명을 지르면 지를수록 흉성이 더 강해졌다.
혈기가 더 짙어졌다. 얼핏 보면 호발귀의 혈기가 등여산의 혈기를 물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점을 우려해서 혈기격타를 시전하지 않았던 것인데.
아니다. 등여산의 혈기가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혈기 격타가 아니었어도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만다.
등여산의 혈기가 짙어지는 것은 필연이다.
아무리 뜯어말려도 혈마의 혈기는 결국 최정점을 향해서 치닫는다.
혈기격타가 최정점으로 향하는 속도를 더 빨리 가속시키지만…… 가만히 내버려 두었어도 결국 이렇게 된다.
이제 호발귀는 필히 해야 할 일이 생겼다.
등여산의 혈기를 촉발시킨 만큼 그녀의 혈기가 최정점에 이르기 전에 조견을 깨우쳐줘야 할 의무가 생겼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그녀를 죽여야 한다.
호발귀는 생사를 결정짓는 훈련에 돌입한 것이다.
등여산은 최정점에 이르기 전에 조견을 깨우쳐야 한다.
본인 스스로 혈기를 환히 바라볼 수 있는 심등을 밝혀야 한다.
물론 심등을 밝혀서 얻는 조견은 반듯한 이지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정신이 멀쩡해야 한다.
혈마를 벗어나 등여산으로 돌아왔을 때만 가능하다.
그러니 당장은 호발귀가 원하는 대로 위험을 감지하고 반격을 가해와야 한다.
투골지에 대응하기만 하면 된다. 간단하지 않나.
투골지에 대응하면 암약혼기나 사령천공에도 반격할 수 있다.
천살단이나 혈천방 손에 잡힐 우려가 없다. 그러면 혈마로 놔둘 이유도 없다.
싸워라! 대응해라! 투골지를 물리쳐라!
쒜에엑! 퍼억!
“케엑!”
등여산이 비명을 내질렀다.
* * *
“아휴! 저거…… 뭔 사달이 나긴 했는데……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도체 알 수가 있어야지.”
해자수가 중얼거렸다.
등여산에 이어서 홀리가 비명을 내지르고 있다.
두 여인이 내지르는 비명은 잠시도 그치질 않는다.
마치 사람을 꽁꽁 묶어놓고 빨갛게 달군 인두로 허벅지를 지질 때처럼 처절한 비명이 연신 터져나온다.
호발귀가 일부러 두 여인을 때릴 리는 없다. 얼마나 사랑하는데 저토록 무지막지하게 때리겠나.
한 대, 한 대 격타할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것이다.
그런 아픔을 참고 격타하는 것이라면 이 격타는 피할 수가 없다는 거다.
“어쩔 수 없으니까 때리는 것이겠지만……”
“후후후!”
도천패가 웃었다.
“왜 웃어?”
“남 말 할 게 아니라서. 결국은 우리도 저런 식으로 두들겨 맞아야 한다는 소리잖소.”
도천패가 쓴웃음을 흘렸다.
“육신이 찢어져도 좋으니까…… 이걸 다스릴 수만 있다면 원이 없잖아? 호호!”
당홍이 말했다.
그들은 호발귀를 봤다. 멀쩡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고, 부러웠다.
또한, 호발귀의 멀쩡한 모습은 자신들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 주었다.
호발귀처럼 멀쩡해질 수 있다!
호발귀는 다른 혈마들보다 한발 앞서서 혈마가 되었다. 그리고 완전히 미쳤다가 다시 제정신으로 되돌아왔다.
호발귀는 지금도 혈마 상태다. 완전히 혈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겉보기에는 멀쩡하지 않은가.
호발귀를 보고 누가 혈마라고 손가락질할까.
멀쩡하다. 너무 멀쩡하다.
많이도 바라지 않는다. 딱 호발귀 정도만 되면 좋겠다.
호발귀 같은 상태에서 제대로 혈마 무공을 쓰기만 해도 거의 무적이다.
정신줄을 놓고 미치지만 않는다면 혈마 무공을 능가할 무공은 없다.
“그런데 말이야. 천살단주, 그 사람에게는 내 무공이 통하지 않았어. 멀쩡하게 받아내더라고.”
“통하지 않은 사람이 천살단주뿐이에요?”
당홍이 웃으며 말했다.
혈천방주, 그에게도 혈마 무공이 통하지 않았다. 홀리가 그를 제압하지 못했다.
정신을 잃은 후에 혈마가 아니라 잃기 전의 무공, 혈기에 물든 혈마 무공이 통하지 않았다.
물론 그 무공은 최정점에 선 혈마무공이 아니다. 진짜 혈마무공은 혈기에 완전히 물든 상태에서 펼치는 무공을 말한다.
즉, 호발귀가 펼치는 무공이 진짜 혈마무공이다.
그런 무공이라면 천살단주나 혈천방주도 단숨에 무너진다.
“오늘이 벌써 며칠째지?”
“나흘째요.”
“나흘…… 어휴! 그런데 이놈들은 이제 완전히 물러난 건가?”
해자수가 산 아래 계곡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직 있어. 사방을 에워싸고. 혈천방은 사마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것 같고. 천살단도 모종의 움직임이 있긴 한데 뭘 하는지는 모르겠고.”
귀검이 정보를 말해주었다.
“그놈들 참 어지간히 우리를 잡고 싶어 해. 우릴 잡아서 뭘 하려고 그럴까? 노예처럼 부려 먹으라고 그러는 건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
해자수가 말했다.
“일단은 그렇게 봐야죠. 뭐 우리 같은 노예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신나겠어요.”
도천패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 내 생각은 다른데?”
당홍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우리 같은 괴물이 한 명만 있다면 그건 반드시 잡아서 써먹어도 좋겠지만 벌써 여러 명이잖아. 천살단에서 한 명 잡고, 혈천방에서 한 명 잡고…… 그런 식이면 숫자 싸움이 되는 거지. 누가 더 많이 잡느냐는 문제가 되고.”
“후후! 그렇게 말하니까 우리가 꼭 인간 병기가 된 기분인데. 기분 나빠.”
도천패가 미간을 찡그렸다.
“사실이 그래. 우리 같은 괴물이 얼마나 더 나올지도 모르고. 막말로 지금은 호발귀만 혈마를 만들 수 있지만, 어느 순간에는 우리도 다른 사람을 혈마로 만들 수도 있을 거 아니야? 그렇게 되면 혈마는 더 많아질 거고.”
“생각만 해도 끔찍하네.”
“혈마가 그렇게 많아지면 한두 명 잡아서는 어림도 없다는 거지. 정말 숫자 싸움이 되는 거거든. 그럴 바에는 차라리 한두 명 있을 때, 죽이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데.”
“음! 그 말이 맞네. 내 말이 그 말이거든. 천살단주 무공은 혈마 무공과 필적해. 그만한 무공이면 혈마 없이도 충분히 천하를 오시할 만하다고.”
해자수가 미간을 찡그린 채 말했다.
천살단주와 싸우던 광경을 다시 되새기는 듯 눈빛이 암울해졌다.
“나 같으면…… 그만한 무공을 가졌다면 혈마 같은 건 차라리 죽이는 게 훨씬 깔끔할 것 같아서 말이야.”
“뭔가 달리 바라는 게 있다는 말입니까?”
“괜히 안 죽일 리는 없잖아?”
해자수가 말했다.
“영생.”
귀검이 불쑥 말했다.
“응? 영생? 무슨 말이야? 영생이라니?”
“영생. 영원불멸, 무적천하. 후후후! 저 사람들은 혈마에게서 그런 걸 봐. 자세한 건 나도 모르고.”
귀검이 중얼거리듯이 낮게 말했다.
“케에에엑!”
동굴 안에서는 홀리가 연신 비명을 내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