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九章 사활수련(死活修鍊) (3)
“휴우!”
홀리를 본 순간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홀리는 등여산이 당한 상처를 보고 스스로 상처를 냈다. 죽어도 좋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몸에 칼을 찔러 넣었다.
그 정도로 혈마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홀리 몸에 새겨진 상처를 보면 그녀가 어떤 결심을 했는지 확연히 보인다.
- 어떤 일이 있어도 혈마만은 되지 않겠다!
홀리의 각오는 알겠는데…… 불행하게도 그녀의 바람을 들어줄 수는 없을 것 같다.
혈기는 평생 몸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혈기를 지배하지도 못한다. 혈기를 제어한다거나 통제한다는 말도 하지 못한다.
다만 너무 날뛰지 못하게끔 좋게좋게 타협하면서 지내는 수밖에 없다.
“홀리, 우리는 평생 혈기가 아옹다옹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됐네? 어쩔 수 없겠지. 이게 운명이라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하지만 혈마가 되더라도 제정신만 멀쩡하면 이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안 그래?”
홀리는 대답이 없다.
죽은 듯이 늘어져 있는 모습이 무척 편해 보인다. 이제는 깨워야 하는데,
차라리 이대로 놔두고 싶다. 편하게, 세상만사 모두 잊고 편히 쉴 수 있게.
“가자. 내가 어떻게든 길을 열어줄게.”
호발귀는 홀리를 안고 일어섰다.
호발귀는 동굴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홀리의 움직임이 다른 혈마를 자극할 수 있다.
또 그녀 자신이 다른 혈마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한다.
혈마는 서로 유기적인 관계다.
혈기가 일어나면 혈기를 느낄 수 있는 모든 존재가 동요한다.
스읏!
혈기를 흘려내서 홀리의 염천혈을 문질렀다.
몸과 뇌의 신경을 차단하고 있는 칼, 생기도를 해제시킨다.
혈기를 염천혈에 모았다가 퉁기듯이 밀어낸다. 그러면 생기도가 아문혈로 빠져나간다. 순간,
꿈틀!
홀리가 벼락을 맞은 듯 바르르 떨었다.
호발귀는 홀리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면밀히 살폈다. 육체의 변화는 신경 쓰지 않는다.
몸 안에서 일어나는 작용, 혈기의 변화를 주시한다.
부우왁!
혈기가 뭉실뭉실 움직였다.
혈기의 움직임은 절대 날카롭지 않다. 수면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처럼 찰랑거리지 않는다.
손을 물속에 넣고 휘휘 휘저을 때처럼 뭉실뭉실하다.
츠으으읏!
혈기가 막혔던 자리를 순식간에 채웠다. 그리고 뇌를 즉시 가동시켰다.
파앗!
홀리가 눈을 떴다.
혈기의 움직임은 무척 빠르다.
보통 마혈이 제압되거나 미혼약에 당해서 쓰러진 사람은 정신을 차리는 데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린다.
먼저 몸이 깨어나고, 그 후에 의식이 돌아온다.
주변 상황과 자신의 모습을 인식한 후에야 비로소 움직인다.
하지만 혈기는 그렇지 않다. 혈기는 촌각도 되지 않는 매우 짧은 순간에 뇌를 각성시킨다.
츠으으읏! 츠으읏!
호발귀는 매우 빠르게 움직이는 혈기를 지켜보았다.
다행히도 몸에 이상은 없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고, 의식을 잃은 지 꽤 오래되었는데도 빠르게 회복된다.
‘나도 준비해야겠군. 곧 시작될 거야.’
츄웃!
홀리가 손을 뻗어왔다.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다. 빠르기는 날렵한 독사 같고 손끝에 맺힌 힘은 단단한 쇳덩이처럼 무겁다.
호발귀는 허리를 숙여서 손길을 피했다.
퍼억! 부우욱!
홀리의 손이 벽을 훑으며 지나갔다. 동굴 벽에서 돌가루가 우스스 떨어져 내렸다.
쇳덩이처럼 무거운 조공(爪功)이다.
혈마의 공격은 어느 것 하나 가볍지 않다.
모든 움직임이 절정 무공으로 표현 된다.
하다못해 부채질하듯 가볍게 흔드는 손짓조차도 절정 무공처럼 보인다.
홀리는 벌써 공격 중이다.
의식을 차림과 동시에 바로 공격이 이어졌다.
호발귀는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은 이미 충분히 예상하던 터이다.
또한, 지금은 홀리에게 어떤 훈련을 시킬까 하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이미 등여산을 훈련하면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정해 놓았지 않은가.
‘조견!’
조견이 몸에서 떠나는 일이 없도록 단단히 주의했다.
한순간이라도 자신이 일으킨 혈기를 놓치게 되면 아주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파앗!
호발귀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신형만 사라진 것이 아니다. 기척도 사라졌다. 진기나 혈기로 감지할 수 없는 상태다.
완전한 죽음, 기도까지 감춰버린 무(無)의 상태다.
호발귀는 이런 상태를 쉽게 만든다.
조견을 의식적으로 강하게 일으켜서 몸 밖에 둘러친다. 혈기를 몸 안에 가둔다.
단지 이것만 하면 죽은 사람처럼 보이게 할 수 있다.
호발귀는 홀리의 등 뒤로 돌아서는 동시에 구혼음소를 읊조렸다.
“탄 미심 초로차 하소 비고하나 도로도로 가니타……”
홀리에게만 적용되는 구혼음소가 나직한 음성으로 흘러나갔다.
호발귀가 읊는 구혼음소는 홀리의 혈기를 자극하지 않는다. 오히려 격려하고 부추긴다.
억누르려고 하지 않고 정반대로 힘을 돋구어준다. 그러니 경계할 필요가 없다.
츠읏!
홀리의 안색이 훨씬 편안해졌다.
혈기를 일으킨 상태이지만, 주변에 상대할 적이 없다. 생물체가 감지되지 않는다.
그러면 혈기도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다.
편안해진다거나 고요해지는 것이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될 뿐이다.
이런 상태가 외부 사람들에게는 편안한 모습으로 비친다.
“야뺀미차 퉁밴 미차 야우 통밴 헤다이……”
홀리가 완전히 구혼음소에 젖어 들 때까지 계속해서 음률을 전했다.
몸이 죽은 상태로 보이게 만들면서 소리만 살아서 흘러나가는 기이한 광경이다.
홀리는 자신의 바로 등 뒤에 호발귀가 서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했다.
혈마는 이런 면에서는 무인보다도 못하다. 무인이라면 등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본능이 위험을 느끼게 해주니까.
퍼억!
“케엑!”
홀리가 괴성을 내질렀다.
명문혈이 강하게 타격당하면서 내지른 비명이다.
호발귀가 쳐낸 타격은 가볍지도 중하지도 않다.
너무 가벼우면 혈마가 무시해 버리고, 너무 중하면 상처를 입는다.
딱 혈마가 타격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만 때린다.
타격이 있다는 사실을 인지시키는 훈련이지 않나.
어느 정도로 때려야 혈마가 경계심을 품는지는 이미 알아낸 상태다. 등여산을 훈련하면서 많은 시행착오 끝에 적정한 타격력을 알아냈다.
그런 면에서 홀리는 등여산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그래도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등여산에게 얻어낸 타격력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혈마의 혈기는 개인마다 다르다.
혈기는 우주가 품고 있는 기운이다. 그러니 근본은 다를 수 없다.
같다. 다만 종류가 약간씩 다르다. 본인이 어떤 혈기를 키웠냐에 따라서 성질이 달라진 것이다.
홀리나 해자수의 경우에는 공방으로 따지면 방어력이 강한 편이다.
혈기가 일어나면 해자수는 철벽을 둘러 세우고, 홀리는 두 발을 땅에 굳건히 묻는다.
혈기를 이용해서 자기 자신을 보호하겠다는 수신(守身) 행위다.
타인을 공격하겠다는 의도보다는 자신을 지키겠다는 마음이 더 강하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이런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저들에게는 등여산이나 홀리나 세상을 파괴하는 파괴자일 뿐이다. 홀리나 해자수가 방어에 치중하고 있다는 생각은 꿈에서도 하지 못한다.
이 차이를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은 호발귀밖에 없다.
쒜에에엑!
등을 격타당한 홀리가 호발귀의 혈기를 감지해냈다. 순간, 급하게 공격을 취해왔다.
“응?”
호발귀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홀리가 펼치는 수법은 음문촌의 검공인 혈맥참이다.
손끝이 어깨를 찍는가 싶으면 허리로 내려가 있고, 허리를 막을 요량이면 어느새 머리를 노린다.
“무공을!”
등여산에 이어서 홀리도 무공을 사용한다.
순간! 호발귀의 머릿속에 후딱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다. 아니, 경각심이 퍼뜩 일어났다.
‘그렇구나! 이거 위험해!’
홀리가 혈기를 바탕 삼아서 혈맥참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알아야 한다. 홀리가 펼치는 무공은 혈맥참이지만, 이것은 홀리가 펼치는 게 아니다.
혈기가 몸에 익은 동작을 끌어내고 있다.
혈기는 홀리의 육신을 잠식하고 있다.
기(氣)가 몸에 있는 상태를 말할 때는 ‘잠식’이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깃들어 있다’라는 말을 쓴다.
기운이 넘친다 혹은 기운이 없다는 말처럼 몸과 기운은 둘이 아닌 하나인 상태로 말한다.
당연히 몸에 있어야 할 것이니까.
‘잠식’이라는 말은 외부에서 무엇인가가 들어와서 본래의 것을 침탈했을 때 쓰는 표현이다.
혈기가 외부에서 들어온 기운인가? 아니다. 홀리의 생기가 변질한 것이다.
하지만 홀리가 제어할 수 없으니까, 또 마땅한 표현이 없으니까 잠식당했다고 말한다.
혈기는 홀리의 육신을 잠식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게끔 만들어 놓았다.
단순히 몸뚱이만 잠식하는 것이 아니다. 몸에 익은 움직임들, 수련의 결과인 몸의 움직임까지 읽어냈다.
그리고 펼치게 만든다.
홀리는 자신이 혈맥참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를 것이다.
혈마는 무공을 사용한다!
생기를 알기 전에 사용했던 진기 무공을 사용한다. 진기에 기반을 둔 무공이 아니라 혈기로 충만한 무공이다.
육신을 잠식하는 시간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몸에 붙어 있는 움직임을, 몸에 익은 초식을 더 많이 끌어낸다.
혈마가 무공을 사용한다는 것은 혈기가 그만큼 오랫동안 육신을 잠식했다는 소리다. 즉,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기회가 점점 사라진다는 소리와도 같다.
“좋지 않네. 이렇게 되면 나도 바쁘게 움직여야겠네. 시간이 없어.”
호발귀가 중얼거렸다.
천천히 방법을 강구하면서 타개책을 찾으려고 했는데 그럴만한 시간이 없다.
이런 사실을 깨닫기 전에도 시간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한시라도 빨리 등여산과 홀리를 정상적인 인간으로 만들어 놓고 싶었다. 그래서 바쁘게 서두르긴 했다.
그래도 생각할 시간 정도는 있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현실은 그만한 시간조차도 주지 않았다.
스읏!
호발귀가 사라졌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공격이 터졌다.
“케엑!”
홀리가 비명을 내질렀다.
슛!
호발귀는 다시 사라졌다.
홀리가 정신을 수습하기도 전에 신형을 감춰버린다.
구혼음소를 읊는 것과 동시에 권격(拳擊)을 내지른다. 그리고 촌각도 지체하지 않고 다시 신형을 감춘다.
“케엑!”
홀리는 잇단 공격에 비명만 내질렀다.
하지만 이미 구혼음소가 들려오고 있다.
- 하소 비고하나 도로도로 가니타……
홀리가 급히 몸을 움츠렸다.
혈마가 구혼음소를 의식한다. 정확히 말하면 구혼음소 뒤에 공격이 있다는 사실을 감지해냈다.
‘역시!’
호발귀는 손길을 늦추지 않았다.
퍼억! 퍽! 퍼어억!
때리고, 숨고, 구혼음소를 읊조리고…… 계속해서 홀리를 몰아붙였다.
홀리의 무공은 볼 필요가 없다.
홀리가 혈기를 사용해서 어떤 행동을 취하든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직 때리기만 한다.
“케에엑!”
홀리가 괴성을 내지르면서 허리를 비틀었다.
허리의 통증이 매우 심한 듯하다. 고통을 모르는 혈마가 허리까지 비트는 것을 보면.
걱정하지는 않는다. 허리에 이상이 생길 정도로 심하게 때리지는 않았다.
혈마는 도검에 상처를 입어도 혈기를 운집시켜서 매우 빠르게 치료한다.
하물며 권격에 당한 충격쯤은 숨 한 모금만 들이켜면 말끔히 해소할 수 있다.
슈웃! 퍼억!
마지막은 생기도로 마무리 지었다.
홀리가 힘을 잃고 풀썩 쓰러졌다.
“홀리, 이제 좀 쉬어.”
호발귀는 정신을 잃고 쓰러진 홀리를 꼭 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