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六章 혈마초출(血魔初出) (5)
귀무살은 재빨리 궁충에게 다가가서 도천패를 받아들었다.
“부대주님, 무사하셨군요. 다행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도천패는 어떻게 구한 건데요?”
질문이 쏟아졌다.
“하아! 무거워. 무거워서 죽겠다. 좀 받아.”
“네.”
귀무살이 대답했다.
귀무살은 이미 도천패를 받는 중이었다. 하지만 너무 무겁고, 솜처럼 축 늘어진 상태라서 받아들기가 어려웠다. 두 명이 받아드는 데는 힘에 부쳐서 쩔쩔맸다.
궁충은 도천패를 떠넘긴 후, 홀가분하다는 듯 한숨을 토해냈다.
“하아! 무거워서 죽는 줄 알았네. 훗!”
귀무살은 도천패를 질질 끌다시피 끌어서 해자수 옆에 뉘었다.
그러자 해자수가 급히 말했다.
“아니, 여기 앉히면 안 돼. 이 친구는 혈기가 돌았어. 안으로, 안으로 데리고 가.”
“아, 네.”
귀무살이 도천패를 다시 안아 들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에는 죽음의 구역이 있다. 일정한 선을 넘어가면 여지없이 죽는다. 죽이는 사람은 호발귀이지만, 호발귀조차도 자신이 살인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니 길 가다가 갑자기 누군가의 칼에 맞아서 죽는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귀무살도 혈마에 대한 정보를 상당 부분 알게 되었다.
혈마는 미리미리 알아서 피해야 한다. 알면 피할 수 있고, 모르면 당한다.
세상에는 이처럼 기이한 일도 있는 거다.
귀무살이 도천패를 동굴에 기대 앉힌 후, 밖으로 나왔다.
그동안 궁충은 귀무령에게 자신이 행한 일, 다시 말하면 경험한 일을 얘기하고 있었다.
“이백 장?”
“네.”
귀검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궁충도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묻는 사람이나 대답하는 사람이나 믿을 수 없는 말인 게 분명하다. 이것은 직접 시연을 해봐야 안다.
‘활 한 번 쏴 보지.’ 그 소리가 절로 나오게 만든다.
귀검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눈빛을 빛낸 채 이야기를 처음으로 되돌렸다.
“도천패가 끌려가고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고?”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냥 산으로 달리면 뭔가 보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귀검은 동굴을 쳐다봤다.
“혈마님이 관계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럼 네가 무슨 수로 이백 장이나 떨어져 있는 목표를 타격해. 그건 네 무공이 아니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그 활은 뇌궁일사였다.”
“네. 뇌궁일사를 전개했습니다.”
“답답해졌나? 왜 말이 안 통하지? 네가 쏜 활, 이백 년 전의 뇌궁일사였다는 거야. 궁마가 사용했던. 넌 악불사왕의 궁마가 제대로 된 거야.”
“아, 네.”
궁충은 의외로 순순히 시인했다.
“저도 제 활이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그래서 혈마님이 개입하신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만…… 동굴에 계신 혈마님이 무슨 수로…… 잠시나마 내게 실력이 붙은 건 사실입니다.”
궁충은 이백 장 밖에 있는 목표를 활로 타격했다.
주치균을 물리치고, 천살단주 앞에서 도천패를 데리고 왔다.
솔직히 그런 일은 귀검도 힘들다. 그 일을 궁충이 단신으로 해낸 것이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지금 몸 상태는 어때?”
귀검의 말에 궁충은 눈만 끔뻑거렸다.
“지금은 그게…… 도천패를 처음 집어 들 때만 하더라도 힘이 넘쳤습니다. 굉장히 가뿐했어요. 근데 어느 순간이 되자 힘이 쫙 풀리더라고요. 그때부터 도천패가 무거워지는데…… 세상에 이렇게 무거운 곰이 다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중간에 힘이 풀렸다고?”
“확실히. 처음에는 도천패를 안고도 활을 쏠 정도로 여유가 있었거든요. 실제로 주치균이나 천살단주가 달려들지 않는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해서. 누가 달려들든 즉시 화살을 쏘아야겠다고 단단히 준비하고 달렸죠.”
“그런데?”
“어휴! 어느 순간이 되자 활은 안중에도 없게 되더라고요. 도천패가 어지나 무거운지. 도천패만 끌고 오는 데도 힘에 부쳐서 끙끙거렸다니까요.”
귀검이 또 동굴을 쳐다봤다.
아무래도 혈마가 어떤 일을 했다.
사람이 말하는 초능력 중에 하나로 예지력을 들 수 있다.
세간에는 종종 예지력이 있다면서 미래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사람들이 있다. 저잣거리를 한 바퀴만 휘돌아도 앞날을 봐주겠다는 사람을 서너 명은 만날 수 있다.
앞날에 무슨 일이 벌어질 줄 어떻게 아나? 아무도 모른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마음 놓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실질적으로 자신이 말한 것과 다른 일이 벌어지더라도 변명하기가 쉽다. 그때는 자신이 맞았는데, 중간에 다른 일이 생겼다고 말한다.
사람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
한 호흡만 앞을 볼 수 있다고 해도 자신이 죽는 싸움에 검을 들고 달려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귀검은 무당이라든가 선지자, 예언자라고 떠드는 자들을 믿지 않는다. 그런 말을 믿는 자들에게 몇 마디 말을 해주고 돈을 뜯어서 살아가는 기생충이다.
그러니 궁충에게 갑자기 예지력이 생겼다고 보지 않는다.
하지만 궁충은 상처가 너무 심해서 지금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해자수에서 홀리를 맡기고 뛰어갔다.
완벽한 확신이 없다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자가 무작정 이런저런 예감이 들었다고 해서 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무작정 이상한 예감이 들어서 전혀 알지 못한 산속을 뛰어다닌다. 그러다가 도천패를 발견한다.
거리는 이백 장.
하지만 이백 장 밖으로 화살 여섯 대를 쏜다. 마차를 움직이지 못하게 말을 죽이고, 도천패를 메고 가는 자들을 죽이고, 주치균의 발목을 붙들어 놓는다.
이것은 한 편의 전설이다.
궁충이 앞으로 천 년을 산다고 해도 지금과 같은 일을 또 할 수는 없다고 본다.
“혈마께서 뭔가를 한 것 같긴 한데…… 들어가서 물어보시죠?”
“아무 기척도 없으시다.”
“어휴! 어떻게 혈마님은 진기에 전혀 잡히지 않죠? 혈마가 진기도 흘려버리나?”
궁충이 말했다.
“그렇지. 진기에 잡히지 않지.”
귀검이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모르겠는데, 호발귀가 진기에 잡히지 않는다. 진기로 기척을 읽어내도 아무런 느낌이 들지 않는다. 천시지청술을 펼쳐도 감지되지 않는다. 천이통을 펼쳐도 옷자락 쓸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눈으로 보면 분명히 눈앞에 있다. 그런데 눈을 감고 진기를 흘려보면 보이지 않는다. 마치 세상에 없는 존재, 유령이 아닌가 싶어서 소름이 돋는다.
혈마를 상대하는 방법은 이미 찾아진 상태다.
무령환살공이라 암약혼기 등을 사용하면 혈마 곁으로 바싹 다가설 수 있다.
혈마는 눈으로 보지 않고 생기로 본다.
생기만 숨기면 혈마 눈앞에 있어도 알지 못하게 되는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그러면 무령환살공이나 암약혼기의 요체는 무엇인가?
당연히 생기를 죽이는 것이다. 말이 쉬워서 그렇지 생기를 숨긴다는 말은 죽은 사람이 된다는 말과도 같다. 숨도 끊고, 체온도 죽이고…… 살아있다는 느낌을 일체 죽인다.
무공을 펼치는 당사자가 죽은 사람이 된다.
죽은 사람은 보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한다. 물론 듣지도 못한다. 누가 내 몸을 건드려도 전혀 반응하지 못한다.
무공을 펼칠 당시, 시전자는 그런 상태가 된다.
여기서 한 가닥…… 진기의 흐름을 잡는다. 무령환살공이나 암약혼기를 펼치기 전에 혈마를 눈으로 보고 그의 진기를 낚아채는데, 이 낚아챈 진기는 무공을 펼친 후에도 유지된다.
사인(死人)은 진기의 흐름을 쫓아서 다가간다.
혈마에게 접근하는 모든 종류의 무공이 이런 부류다.
물론 지옥유부공도 같은 맥락이다.
무림은 이백 년 동안 혈마 무공을 연구한 끝에 그래도 가장 타당성 있는 무공 몇 가지를 찾아냈다.
우습게도 거의 모든 사람의 생각이 한 방향으로 집중되었다.
혈마를 속이기 위해서는 나를 어떻게 죽이냐 하는 것이 관건이라는 점이다.
무림에는 귀식대법이라는 것이 있다.
추격하는 상대를 속이기 위해서 숨을 죽이고, 진기를 숨기고, 체온조차 죽인다. 그리고 땅굴 같은 곳에서 죽은 사람처럼 몇 날 며칠을 보낸다.
귀식대법은 죽은 사람에 가장 가깝게 다가가는 공부다.
하지만 엄연히 생명이 붙어 있다. 생기는 존재한다. 그래서 혈마를 속이지 못한다.
마지막 하나 생기, 이것마저 감출 수 있다면 혈마를 속일 수 있다.
거의 모든 문파에서 이 부분을 연구했다. 성취를 거둔 문파도 있고, 그렇지 않은 문파도 있다.
정공, 사공, 마공…… 각 분야에 걸쳐서 두루 연구되었다.
어느 쪽에서 어떤 무공이 튀어나와도 하등 이상하지가 않다. 마도 쪽에서 무령환살공이 나왔고, 천살단에서 암약혼기가 나왔다.
혈천방은 지옥유부공과 사령청공을 찾아냈다.
혈마를 속이는 무공은 더 있을 수 있다.
지금까지 드러난 것보다 더 뛰어나고 완벽한 무공이 나오지 않는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그런데…… 혈마가 진기에 잡히지 않는다.
눈을 뜨고 보면 분명히 보인다. 혈마를 본 상태에서 진기를 흘려보내면 존재가 확인된다. 하지만 눈만 감으면 완전히 새까매진다. 완벽하게 먹통이 된다.
이렇게 되면 무령환살공 같은 공부를 펼칠 수가 없다.
혈마의 진기 흐름이 감지되지 않으면 그동안 연구했던 모든 이론이 틀어진다.
육안으로 보고 진기를 잡는다. 이것은 가능하다. 혈마가 눈에 보이니 혈마의 진기를 낚아챌 수 있다. 하지만 무령환살공 같은 공부를 펼쳐서 내 자신을 죽이는 순간, 흐름을 놓치게 된다.
분명히 진기 흐름을 잡았는데, 무공을 펼치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린다.
이백 년 동안 연구해 왔던 모든 공부가 물거품이 되는 것이다.
지금 호발귀는 그런 상태다. 사실, 이런 상태가 된 지는 꽤 됐다. 호발귀가 소축령 정상에 있을 때도 귀검은 호발귀를 감지해 내지 못했다.
사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서 그런 거겠지.
귀검은 그렇게 생각했다.
혈마가 싸우게 되고, 정작 그를 죽여야 할 순간이 오면 지옥유부공이 통할 것으로 생각했다.
빙금 전에도 귀검은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전혀 기척을 감지하지 못했다.
이런 사실을 몰랐던 게 아니다. 궁충이 갑자기 혈마의 진기가 잡히지 않는다고 말하자, 새삼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호발귀는 분명히 무령환살공에 당했다.
무령환살공에 당했다면 암약혼기나 지옥유부공에도 당한다. 혈천방주에게도 당한다.
모두 호발귀가 무섭게 날뛰는 것은 보면서도 여유를 갖는 이유다.
마음만 먹으면 호발귀는 잡을 수 있다. 혈마 모두를 잡을 수 있다. 또 이번 싸움에서 실제로 혈마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 냈다.
인간과 혈마 사이에서 혈마 무공은 무적이다. 이때는 천살단주와 해자수의 싸움처럼 누구도 이길 수 없다. 그야말로 무적의 신위를 드러낸다.
하지만 혈마로 접어들면 바로 잡힌다.
혈마가 탄생하고 이백 년이 지난 지금, 혈마는 더는 공포의 상징이 아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턴가 동굴 안에서 어떤 기척도 흘러나오지 않고 있다. 진기로 잡는 게 문제가 아니다. 아예 사람이 존재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크크크크!’ 하고 울려대는 괴성이 없었다면 호발귀가 있다는 사실조차 의심스러웠을 것이다.
혈마가 있는지 확인하는 방법은 딱 하나, 지옥유부공을 펼쳐서 접근했을 것이다. 하면 지옥유부공의 정점인 혈마자심(血魔刺心)을 펼쳐야 한다.
지옥유부공의 끝은 혈마자심이다.
지옥유부공이 빛이 없는 검, 무광검인 것도 오직 혈마만을 노리고 만든 검이라서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혈마자심을 펼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혈마에게 접근하기 위해서는 꼭 펼쳐야 한다. 반드시 혈마를 죽여야 할 순간에만 펼친다.
하지만 지금처럼 진기가 잡히지 않는다면……
‘혈마자심이 통하지 않을 수도 있어. 그러면 혈마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귀검은 섬뜩한 예감을 받았다.
“그러면 이제 당홍만 구해오면 되는데.‘
해자수가 먼 하늘을 보면서 말했다.
“당홍을 구하지 않으면 도천패를 못 봐. 키키키! 키키키! 당홍이 나하고 친척 관계라는 거 아나?”
해자수가 문득 말했다.
모두가 놀란 표정으로 해자수를 쳐다봤다.
당홍과 해자수가 친척? 이건 또 무슨 소리지?
해자수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도천패, 쟤가 나한테 형이라고 부르더라고. 내 참. 내가 살아생전에 형 소리 들어보기는 처음이야. 키키키! 그래서 나도 도천패를 동생이라고 불렀지. 그 순간 우리는 형제가 된 거거든. 그러니 당홍은 나한테는 제수야, 제수.”
해자수가 먼 하늘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해자수의 눈에서 생기가 소멸하고 있다. 눈빛이 힘을 잃고 있다. 응급치료를 했지만 역부족이다.
죽는다. 죽어간다.
지금 해자수가 하는 소리는 그의 마지막 유언이다.
수많은 상처를 보고, 수많은 죽음을 보아온 귀무살이기에 해자수의 죽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제수를 구해와야 하는데…… 그래야 나중에 동생이 저승에 와도 원망을 안 듣는데. 하아! 이렇게 가면 안 되는데.”
해자수가 횡설수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