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六章 혈마초출(血魔初出) (4)
귀무살은 등여산을 무사히 동굴로 데려왔다.
“휴우!”
그녀를 동굴에 눕히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이 쏟아져 나왔다.
“쫓아오는 사람은 없지?”
“없는 것 같은데.”
귀무살 네 명은 즉시 바깥 동정부터 살폈다.
많은 삶이 뒤를 막아주는 바람에 등여산을 동굴로 데려오기는 했지만, 아직도 불안하다.
“없어.”
“음! 없는 것 같긴 해.”
다른 귀무살도 바깥을 살펴보면서 말했다.
하지만 안심하기는 이르다. 혈마를 데려가려는 자들은 한결같이 강자들이다. 평상시에도 하늘에 떠 있는 별처럼 숭앙받는 사람들이다. 직접 무공을 펼치는 것을 보지도 못했다.
그런 자들이 우글거린다.
“확실히 없어.”
그러자 임무를 완수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갑자기 전신에서 힘이 쭉 빠졌다.
귀무살은 털썩 주저앉았다.
서른일곱 명이 떠났다가 5명이 돌아왔다. 아직 부대주 궁충의 생사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뒤에 남은 사람치고 돌아온 사람이 없다.
궁충 역시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산을 떠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각오하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처절하게 당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 힘드네.”
한 명이 중얼거렸다.
“힘들어? 난 되게 약오르는데?”
다른 귀무살이 신경질적으로 받아쳤다.
“약올라? 뭐가?”
다른 귀무살이 동굴 벽에 등을 기대고 앉으며 물었다.
“우리 그래도 귀무살이잖아. 귀무살이라고 하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뚝 그친다는 귀신들인데…… 그런 우리가 이번에는 완전히 짓이겨졌어. 이런 식으로 짓밟히기도 어려울걸? 그런데도 약이 안 오른다면 배알이 없는 거지.”
“말조심해라. 입 함부로 나불대다 죽는 수가 있다.”
“죽일 실력이 되면 죽여보고. 밖에서나 깨졌지, 안에서도 깨질 놈으로 보이냐?”
귀무살들이 서로를 향해서 으르렁거렸다.
“짓이겨진 것 맞지. 이건 귀무살이 아니라 쥐새끼들이었어. 그런 느낌 안 들어? 어떻게 어느 한 놈도 공격을 못 하고 꽁지 빠지게 도망만 냅다…… 어휴!”
다른 귀무살이 말하면서 피식 웃었다.
귀무살이라는 이름은 그냥 얻은 게 아니다. 사망대장정을 통해서 같이 수련하던 동료 아흔아홉 명을 죽이고 살아남은 증표다. 독심(毒心)의 다른 말이다.
귀무살이 되어서 중원에 나설 때는 천하라도 얻은 기분이었다. 그 누구든 벨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이건 해도 너무하지 않나? 어떻게 검 한 번 제대로 못 휘두르고…… 세상에 강자가 이렇게 많았나? 두 명, 세 명이 합공을 취해서 가랑잎처럼 쓸려나가는 곳이었나?
“그렇게 억울해할 것 없어.”
다른 자가 말했다.
“우리가 업고 온 분, 천살단 책사. 그 책사라는 이름도 우리는 감당하기 힘들어. 이봐, 자그마치 태산파 후기지수야. 그게 감당돼? 그런데 지금은 한술 더 떠서 혈마라 이거지. 중원 절반이 피바다로 변할 때의 바로 그 혈마.”
“알지. 아니까 더 약오르는 거야. 이 세상에 우리가 어쩔 수 없는 사람이 너무 많잖아. 이럴 거면 뭐하러 사망대장정을 벌였다고. 모조리 데려다가 화살받이나 만들지.”
귀무살이 툴툴거리면서 말했다.
이번 싸움에서 귀무살이 나가떨어진 건 당연하다. 상대가 살단주, 천살단주, 혈천방주였다. 혈마를 본떠서 만든 회마, 사마였고 진짜 혈마였다.
차라리 목숨 부지한 것을 요행으로 여겨야 한다.
“이봐, 너무 당연한 거 가지고 기죽지 말고. 하하! 그래도 우리에게는 기회가 있잖아.”
“기회? 목숨 부지한 것?”
“그게 가장 크지. 죽으면 아무것도 못 하니까. 일단 산 것에 감사해야 하고…… 그리고 우리에게는 영주님이 계시잖아. 영주님의 지옥유부검은 누구에게도 다 통했어. 지금부터라도 부지런히 수련하면 십 년 후쯤에는.”
동굴 밖을 살피던 귀무살이 말했다.
귀무령, 귀검!
귀무살들은 일제히 귀검을 떠올렸다.
귀무살 말대로 귀검은 모두에게 당당했다. 천살단주와 혈천방주도 귀검에게는 검을 들지 못했다.
조금이라도 불리하면 검을 들지 못하는 강자가 귀검이다.
“그래. 영주님한테 배우는 거야. 죽을힘을 다해서 수련하면 십 년 후쯤에는 우리도 세상을 오시하는 검이 되어 있겠지. 사실, 귀문을 나선 후에는 수련을 거의 안 했잖아? 우리 탓도 커.”
“그러니까 악착같이 살아남자고. 아직 싸움이 끝난 게 아니야.”
입구를 지키던 귀무살이 말했다.
그렇다. 싸움이 아직 안 끝났다.
“그렇지! 그러면 여기 이러고 있으면 안 되잖아!”
“자! 움직이자고!”
귀무살이 다시 힘을 얻었다.
그들은 즉시 움직였다. 등여산을 동굴 안에 두고 네 명 모두 밖으로 나가서 입구 주변에 은신했다.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정면 대결은 불가능하다. 최대한 은밀히 숨어서 암습을 가해야 한다. 저들 중에 등여산을 쫓아오는 자들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엇! 저!”
숨어있던 귀무살이 경악성을 쏟아냈다. 아니, 경악성이 울리기도 전에 먼저 몸을 움직였다.
스으읏! 스읏!
그들이 재빨리 앞으로 달려나갔다.
귀검이 홀리를 등에 업고, 해자수를 옆에 낀 채 걸어오고 있다.
“영주님!”
네 명은 즉시 달려나가 귀검을 맞이했다.
귀검은 묵묵히 해자수를 그들에게 넘겨주었다.
“내가 업을게.”
한 명이 앉으면서 등을 내밀었다.
다른 두 명은 조심스럽게 해자수를 넘겨받아서 앉아있는 자의 등에 업혔다.
“살살! 살살! 야! 아파! 아파서 죽겠다!”
해자수가 엄살을 피었다.
아니, 엄살이 아니다. 해자수는 어떻게 치료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온몸이 망가졌다.
귀무살에게는 임시 처방용 금창산 밖에 없다. 이만한 상처를 치료할 약이 전혀 없다. 설혹 마을로 데려가서 의원한테 치료를 부탁한다고 해도 살아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너무 칼을 깊게, 많이 맞았다.
귀무살이 조심스럽게 해자수를 엎고 천천히 걸었다. 매 걸음마다 해자수에게 충격이 가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래도 해자수는 여전히 아프다고 고함을 질렀지만.
“아프다니까! 윽!”
귀무살은 해자수의 엄살에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할 말이 없다. 엄살을 부리는 음성이 점점 안으로 잦아든다. 생명이 떨어지는 징조다. 사실, 이런 상처를 입고 아직 살아있는 게 기적이다.
귀무살이 귀검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홀리님도 넘겨주십시오. 제가 업겠습니다.”
한데, 귀검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혈마후님이시다. 내가 모셔야 한다.”
“네.”
귀무살은 즉시 물러섰다.
“책사님은 동굴에 모셔놨습니다.”
“지키는 놈은?”
“네?”
“아무도 지키는 놈이 없다는 거냐? 지금 같은 상황에?”
“아!”
“손이 남는 놈들을 빨리 가!”
귀검이 일갈을 내질렀다.
쒜엑! 쒜에엑! 쒜에엑!
귀무살 세 명이 즉시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귀검은 귀무살이 달려가는 모습을 담담하게 지켜보았다.
동굴을 찾아올 사람은 없다.
우선 동굴을 아는 사람이 없다. 천살단과 혈천방이 광산 주위를 이 잡듯이 뒤졌지만, 동굴을 찾아내지 못했다. 소축령까지는 찾아왔지만, 정상까지 올라선 자는 없다.
정상 부근에 동굴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매우 희귀한 동굴인 것은 사실이다. 작은 곰 굴 정도는 있겠지만, 혈마를 숨길만큼 큰 동굴을 산정 부근에서 찾는 것은 매우 어렵다.
저들이 동굴을 찾으려면 귀무살이나 자신 뒤를 쫓아왔어야 한다.
귀무살 뒤는 오면서 살펴봤다. 누가 귀무살을 쫓아서 움직인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뒤도 세심히 살폈다.
미행자가 있다면 당장 걸음을 멈춰야 한다. 하지만 뒤따라오는 자는 전혀 없었다.
도천패와 당홍을 낚아채서 돌아간 만큼 소정의 목적은 이룬 것일까? 그 두 사람을 잃어버렸으니 주군에게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이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할지.
그런데도 귀무살에게 동굴을 지키라고 명령한 것은…… 가르침이다. 차후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질 경우,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방법을 가르쳐준 것이다.
경륜이라는 것은 세월만 지난다고 쌓이는 것이 아니다. 많은 일을 경험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할 때 노련미, 숙련이라고도 불리는 경륜이 쌓인다.
지금 살아남은 네 명은 이제는 이런 일에 대처할 수 있다. 앞으로 또 이런 일이 벌어지면, 자신들이 어떻게 행동을 해야 할지 거의 본능적으로 반응할 것이다.
해자수는 동굴 앞에 뉘어졌다.
그는 아직 혈마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 호발귀의 혈기에 자극을 받지 않는 게 좋을 수 있다. 일단 등여산과 홀리부터 안으로 넣고, 호발귀의 지시를 기다린다.
저벅! 저벅!
귀검은 홀리를 업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 안에는 둘이 놓여있다. 혈마의 혈권을 표시하는 선이다.
혈권 밖에 등여산이 눕혀져 있다. 손발은 여전히 금잠사로 묶인 상태다. 혼절해 있고, 안색이 피칠을 해놓은 듯 새빨갛다. 아직 홀리는 저런 증상까지는 보이지 않는데.
등여산이 훨씬 심한 혈마가 되었다.
귀검은 등여산 옆에 홀리는 눕혔다.
두 여인은 정신을 잃은 상태다. 하지만 누워있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세심히 살폈다. 혹시 몸 밑에 날카로운 돌이라도 놓여있는지 잘 살펴보았다.
“책사님과 홀리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귀검이 동글 안에 대고 말했다.
동굴 안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등여산과 홀리가 왔는데도 전혀 반응하지 않는 것을 보면 또다시 혼절한 것이 아닐지 염려된다.
호발귀는 요즘 들어서 혼절이 잦다.
귀검은 호발귀가 동굴 밖으로 나갔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궁충 이야기를 듣고는 호발귀가 뭔가를 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만, 호발귀 자신은 여전히 갇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꽉 틀어박혀 있다.
그 외, 다른 부분은 일체 생각할 수 없다.
호발귀가 저런 상태인데 책사와 홀리를 치료할 수 있을까?
“휴우!”
귀검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위와 당홍은 놓쳤습니다. 당홍은 혈천방이, 도천패는 천살단이 데려갔습니다. 제대로 모셔오지 못한 죄는 나중에 받겠습니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씀 주십시오.”
귀검이 보이지 않는 동굴 안쪽에 대고 허리를 숙였다.
동굴 안에서는 호발귀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는다.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하지만 호발귀는 분명히 있다.
혈마를 묶어놓은 철삭 두께가 어린아이 팔뚝만 하다. 그만한 철삭을 힘으로 부수고 나올 수 있는 사람은 천하에 없다. 황소나 곰도 가둬놓을 수 있다. 아마, 염라대왕도 저런 철삭에 묶이면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제발 정신을 차리셔야 합니다!’
귀검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도천패, 당홍, 해자수를 멀쩡하게 만들어 놨던 것처럼…… 등여산과 홀리도 정상으로 되돌려주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저, 저것! 저것!”
해자수가 눈을 부릅뜨고 중얼거렸다.
해자수를 치료하던 귀무살이 이상한 예감을 느끼고 즉시 뒤돌아봤다. 혹시 적이 나타났나 염려스러웠다.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귀무살들이 일절 움직이지 않는 것도 이상했다.
그가 뒤돌아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헛것을……’
귀무살이 다시 돌아서며 해자수의 안색을 살폈다.
그런데 해자수가 귀무살의 손을 치우면서 계속 중얼거렸다.
“저기…… 저기…… 가서…… 도와줘.”
해자수의 말에 힘이 없다.
그는 점점 죽어가고 있다. 지혈은 시켰지만, 더 할 게 없다. 기껏해야 혈도를 풀어주는 것밖에 없다.
귀무살이 무슨 말인가 싶어서 다시 뒤돌아봤다. 그리고 봤다! 이제는 보인다!
“엇!”
귀무살이 깜짝 놀라서 외마디 경악성을 내질렀다.
적이 아니다. 부대주 궁충이다. 그가 자신보다 거의 두 배는 더 큰 도천패를 질질 끌면서 걸어오고 있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보지 못했는데, 해자수는 봤다.
쒜엑! 쒜에엑! 쒜에엑!
귀무살들이 즉시 달려나갔다.
모두 다 달려나가가는 않았다. 두 사람을 부축하는 데는 두 명이면 된다.
다른 두 명은 즉시 긴장을 끌어올리고 주변을 경계했다.
귀검의 가르침이 귀무살에게 이런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궁충이 살아온 사실이 더없이 기쁘지만, 그보다는 기습에 대비해야 한다. 만일을 항상 염려한다.
쒜엑! 쒜에엑!
귀무살 두 명이 궁충에게 달려갔다.
때마침 귀검도 동굴 밖으로 나오면서 궁충을 쳐다봤다.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짓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