九十四章 혈마추락(血魔墜落) (4)
혈천방주는 쓰러진 당홍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언제까지 보고만 있으려고 그러나? 이 정도면 이제 직접 움직일 때가 되지 않았어?”
혈천방주가 허공에 대고 말했다.
스읏!
숲에서 주치균이 걸어나왔다.
주치균은 모든 상황을 지켜봤다. 그래서 복면인이 어느 정도 강한지 잘 안다. 하지만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먹잇감을 앞에 둔 늑대처럼 두 눈이 번들거렸다.
혈천방주가 주치균을 보며 씩 웃었다.
“많이 컸구나. 꼬맹이였는데.”
“우리가 뭐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닌데, 아는 척은 하지 말자고. 난 당신 언제 봤는지 기억도 없어.”
“넌 날 못 봤지. 난 널 봤고. 어린 놈이 검신의 진전을 이었다기에 구경 삼아 갔더니 꼬맹이더라고?”
“아는 척 하지 말자니까.”
“내가 그랬나?”
“꼬맹이라는 말은 아는 사람들이나 쓰는 말이야. 너 같은 마귀 종자가 입에 담을 말이 아니라고.”
주치균은 방주를 향해 다가섰다.
순간, 구환도를 든 복면인이 주치균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놈들 약점을 알아. 이놈들을 시마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나한테 붙이면 개죽음 당해. 그래도 붙일 건가? 셋 셀 동안 물려. 안 그러면 벤다.”
스읏!
주치균이 검을 잡았다.
“너무 광오한 거 아닌가? 아무리 비사칠초를 얻었다고 해도 그렇게 광오하면 안 돼. 그래도 정성껏 키운 시마인데. 그렇게 자신있다니 어디 한 번 구경이나 해보지.”
혈천방주가 당홍 옆에 앉았다.
당홍을 데리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싸움 구경을 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촤라라라랑!
복면인이 구환도를 들어올렸다.
혈천방주는 풀피리도 불지 않았다. 공격 명령을 내린 적도 없다. 그런데 복면인이 알아서 한다. 시마라고 불리는 것을 보면 영혼이 말살된 듯한데.
“이놈 안 된다고 했을 텐데, 참 안 믿네.”
“이겨놓고 얘기하지?”
혈천방주가 어서 싸워보라는 듯 손짓을 했다.
“너무 쉬워서 놀랄까봐 하는 말이야. 굳이 죽여달라니 죽여주기는 하는데. 후후!”
스릉!
주치균이 검을 뽑았다.
그리고 한순간에 복면인 앞으로 치달려 왔다. 특별히 빠른 것도 아니다. 신묘한 보법을 밟지도 않는다. 그저 검을 뽑고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도 달려온다.
그런데 복면인이 구환도를 든채 멀거니 서있다. 전혀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
“무령환살공!”
혈천방주가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쒜에엑!
비사칠초가 터졌다.
주치균은 복면인 코앞까지 바싹 다가선 후, 여유있게 검초를 쳐냈다.
퍼억!
복면인의 머리가 깨끗하게 잘려서 뚝 떨어졌다. 한데,
“커억! 커어어억!”
난데없이 주치균이 거센 신음을 쏟아냈다.
주치균의 입에서는 핏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마치 검에 위장이 찌찔려서 피가 역류하는 듯하다.
사발만한 핏덩이를 세 덩이나 쏟아낸 다음에야 간신히 기침을 멈췄다.
“후욱!”
주치균은 진이 빠진 듯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하하! 하하하하!”
혈천방주가 앉은 자리에게 크게 웃었다.
무령환살공은 몸을 상하게 한다. 단지 몇 번 만 사용해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폐를 손상시킨다.
주치균은 그런 점을 너무 쉽게 여겼다.
무령환살공이 폐를 손상시킨다는 점은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극격하게 나빠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어. 무령환살공을 사용할 줄 알았다니까. 혈마가 잡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제일 먼저 이거부터 생각했지. 하하하! 그 무공이 마공관에 있다는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았나? 거참 그만큼 천살단에 몸담았으면서 뭘 배운 거야?”
스읏!
혈천방주가 일어섰다.
주치균은 급히 몸을 일으키며 검을 들었다.
“이봐. 그 몸으로 나와 싸울 수 있겠어?”
“얼마든지!”
주치균은 검을 겨눴다. 하지만 그의 다리는 굳건하지 못하고 이미 후들거리고 있었다.
무령환살공이 이토록 몸을 망칠 줄은 몰랐다. 예전에는 이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는데.
무령환살공은 사용하면 할수록 몸에 강력한 타격을 가한다. 오죽하면 연달아 두 번 이상 사용하지 말 것이며, 일 년에 한 번만 사용하라고 금언(禁言)까지 적혀 있었다.
‘실수! 실수였네. 오늘은 실수가 많은 날이네.’
주치균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지금 상태로는 솔직히 혈천방주를 상대할 수 없다. 몸이 극도로 나빠져서 비사칠초가 두 배는 느려졌다.
“살려줄까?”
“건방진 소리! 내말 못 들었어? 아는 척하지 말자고!”
“그래? 그렇게 죽기가 소원이면 들어줘야지. 살려줘도 넌 재기하기 힘들어. 아! 비사칠초를 깨달았다면 재기할 수도 있겠다. 그 무공은 진기 운용법이 남다르지?”
혈천방주는 비사칠초도 잘 아는 듯이 말했다.
“선공? 후공? 원하는 대로 해.”
스읏!
혈천방주가 검을 잡았다. 그때,
“허허허! 방주. 그만 하시게.”
스스스슷!
가벼운 바람소리와 함께 천살단주가 내려섰다.
“와우! 이게 누구야? 우리 얼마 만이지?”
혈천방주가 얼굴에 활짝 웃음을 피우며 말했다.
“허허! 방주…… 어른한테 반말하는 버릇은 여전하군. 그때 만나고…… 사십 년 만인가?”
“서로 나이 차이도 그렇게 많이 나지 않는데, 노인 흉내는. 상처는? 배가 뚫리던데.”
“생마(生魔)의 무공이 여간 매서워야지. 그래도 방주와 몇 초 손속은 나눌 수 있을 것 같으니 염려놓으시게.”
“하하하! 어째 천살단은 허풍이 유행인가? 위아래 할 것 없이 모두 허풍이야. 하하하! 오늘은 그냥 물러가지. 얘, 데리고 가려는데, 불만있으면 말하고.”
혈천방주가 당홍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방주가 잡았으니.”
단주가 데려가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럼.”
슷!
혈천방주는 두 사람을 전혀 경계하지 않고 등을 돌려서 당홍을 어깨에 들춰맸다.
“나는 하나라도 확실히 챙기는 사람이라서. 우리 애들이 다른 놈들도 쫓고 있으니까, 하나라도 챙기려면 서두르시게. 천살단주. 하하하! 하하하하!”
혈천방주가 웃으면서 신형을 쏘아냈다.
“한 명을 뺏겼구나.”
천살단주가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런데 단주님, 단주님은 왜 방주를 놓아주셨는지요. 복부 상처가 심하십니까?”
주치균이 공손히 대답했다. 하지만 그 공손한 대답 속에는 가시가 박혀 있었다.
아무래도 혈천방주를 놓아준 것이 못내 불만인 듯했다.
“묻자. 혈천방주의 무공이 무엇이냐?”
“……”
주치균은 대답하지 못했다.
“묻자. 검신 구학봉이 혈천방주와 싸운다면 몇 초 승부를 벌일 수 있을 것 같으냐?”
“사부님이시면 십 초 안에……”
“십 초 안에. 말을 끝맺어야지.”
“비사칠초 아닙니까. 칠 초면 잡습니다.”
주치균이 자신있게 대답했다.
“네 사부, 검신 구학봉. 칠 초를 펼쳤다. 그리고 팔 초에서 목숨을 잃었다. 혈천방주에게.”
“네엣?”
주치균이 눈을 부릅떴다.
사부가 죽어? 아니다. 무적으로 군림한 사부가? 사부가 죽었는데, 자신에게 연락도 오지 않았다고?
“너는 적을 몰라. 그래서 경솔하다고 거다.”
주치균은 대답하지 못했다.
“너는 나도 모른다. 비사칠초를 얻었으니 천하를 얻은 것 같지만…… 아직 위에 한 단계가 더 있다. 그러니…… 아직은 겸손해라. 더욱이 나는 지금 부상을 당한 상태. 혈천방주가 헛말을 한 게 아니다. 오늘은 그냥 간다는 말, 사실이야. 내가 최고의 몸 상태라고 해도 혈천방주를 이길 수 있을지 의문이다.”
주치균은 눈을 부릅떴다.
혈천방주의 무공이 무엇이길래 그렇게 강한가!
“혈천방주와는 언젠가는 싸우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혈천방주가 무공이 무엇인지 파악해 두는 게 상식이겠지.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 하는데. 쯧!”
“죄송합니다.”
주치균이 머리를 숙였다.
“이것도 다 경험이겠지. 천살단은 천원주에게 맡기기로 했다. 천원주의 지시를 받아.”
“네.”
주치균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현재, 천살단은 천원주가 이끌고 있다. 천살단주가 외유 중이라서 임시로 맡고 있는 줄 알았다.
천살단 최고 강자는 자신이다.
천살단에서 비사칠초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있나? 없다. 그러면 최강자가 단주가 되어야 한다.
주치균은 자신이 차기 천살단주가 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천원주? 그렇게 조용하고 차분한 여자가…… 단주? 현명한 것은 이해하지만 무공 면에서는…… 천살단주로 부족하지 않을까? 부족하다.
천살단주가 말했다.
“너와 나의 인연도 여기까지다. 나는 이제 야인으로 돌아가서 혈마를 쫓을 것이야.”
“혈마는 거의 다 잡지 않았습니까?”
“허허허! 허허허허!”
단주가 웃었다. 기분나쁜, 의미모를 웃음이다.
“돌아갈 때 비천당, 검벽 다 데리고 돌아가. 내겐 이제 필요없다. 천원주 말 잘 듣고.”
천살단주가 예의 할아버지 같은 자상한 미소를 띄우며 말했다.
“하나만 여쭙니다. 천원주님이 단주님만큼 강합니까?”
“허허!”
천살단주가 실소를 흘렸다.
“네 무공은 비사칠초면 됐다. 너는 지금 비사칠초를 절반 밖에 펼치지 못해. 온전한 검초를 펼치게 될 때 너의 검은 빛이 된다. 어떤 무공도 막을 수 있고, 쳐낼 수 있는 빛. 문제는……”
툭!
천살단주가 손가락으로 주치균의 심장을 찔렀다.
“여기. 이거.”
‘심장이 뭐? 마음 문제라고?’
주치균은 단주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툭툭!
단주가 주치균의 어깨를 쳤다.
“내가 할 수 있는 말도 여기까지다. 더 말해주면 오히려 네 진전에 방해가 돼. 지금 바로 천살단으로 돌아가거라. 네게 혈마를 쫓으라고 한 것도 혈천방주를 만나게 해주려던 것, 만났으니 됐다. 정도가 지나쳤지만. 가거라. 여기 있으면 죽는다.”
주치균은 미간을 찡그렸다.
단주는 시마가 득실거린다고 말하는 것 같다. 넌 무령환살공도 펼칠 수 없는 몸이잖냐고. 한 마디로 여기 있어봤자 방해만 되니 돌아가라는 거다.
저벅! 저벅!
단주는 할 말을 다한 듯 주치균을 뒤에 두고 걸어갔다.
주치균은 멍하니 멀어져가는 천살단주를 지켜봤다.
사실, 주치균은 더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기혈이 들끓어 올라서 서 있기도 힘들었다.
“우욱! 커어억!”
그는 단주가 떠난 후, 다시 한번 거친 기침을 토해냈다.
또다시 피가 한 사발이나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묵은피가 토해졌는지, 가슴이 시원했다.
폐가 상당히 상했다.
이 정도의 손상이라면 적어도 일 년 이상은 요양하면서 운공조식을 취해야 한다.
무령환살공의 여파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이렇게 돌아갈 수는 없지.’
주치균은 품에서 약병을 꺼내 입안에 넣고 단숨에 털어 넣었다.
무령환살공의 폐해를 모를 줄 알았나? 여기에 오면 혈마와 싸우게 되고, 어쩔 수 없이 무령환살공을 펼쳐야 하는데, 그 정도도 생각하지 못했겠나.
천살단을 나오기 전에 약전에 들렸다.
이미 자신의 몸 상태를 알고, 약전주에게 부탁해서 폐의 기능을 억지로 끌어올리는 단약을 조제했다.
주치균은 바로 그 자리에 앉아서 운공조식에 몰입했다.
약전주가 만들어 준 단환은 단숨에 폐의 기능을 원상으로 회복시킬 것이다.
물론 깊은 상처는 여전히 존재한다. 상처를 이겨내면서 무리하게 운공된다. 그러니 손상된 폐를 억지로 사용한 후유증이 더욱 큰 상처가 되어서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움직일 수 있다.
‘한 시진! 한 시진이면 따라붙는다.’
혈천방주, 천원주, 천살단주!
예상치 못한 강적을 새로 알게 되었다.
단주의 무공이야 익히 알고 있던 터였지만, 생각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알았다. 혈천방주와 천원주는 적수로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강한 것 같다.
아무래도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츠으으으읏!
주치균은 적이 득실거리는 싸움터 한 복판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공조식에 몰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