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三章 불입호혈(不入虎穴) (4)
천살단주의 주문은 간단했다.
- 죽이지 마라. 쓸모가 많은 자들이야. 그 대신 끊임없이 괴롭혀라. 잠시도 쉬게 하지 말고 계속해서 공격해. 귀무살은 죽여도 좋다. 저들 다섯 명. 저들만 죽이지 말고 계속 괴롭혀. 할 수 있다면. 어느 정도나 몰아붙이는지 지켜보지.
- 네.
주치균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코웃음이 치솟아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저들을 잡아서 도대체 뭘 어쩌자는 것인가!
주치균은 불로불사라든가 아니면 천하 최강의 무공이라든가 또는 무림 제패 같은 것은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천운이 따라줘야 한다. 이루려고 하는 의지도 중요하지만,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결코 이루지 못한다.
흔히 황제는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이 맞다. 정말로 운이 따라주지 않으면 아무리 뛰어다도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다.
황제의 신하들이 황제보다 더 똑똑하다. 무공도 더 높다. 그런데도 한 사람은 사람을 부리고 다른 사람들은 부림을 받는다. 천운이 따라주었기 때문이다.
왕부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왕이 되는 법을 배운다.
일부는 처음부터 포기한다. 몇몇만 왕위를 노리는데, 그중 한 명만 최고 자리를 차지한다.
능력이 아무리 뛰어다도 뭔가 하나씩 삐끗거리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은 절대 왕이 되지 못한다. 운이 빗나가고 있으니까.
이런 점을 모르는 사람들이 불로불사, 천하 최강, 무림 제패에 연연한다.
그래도 그런 자리를 노리는 사람이라면 일단 자격 조건은 갖춰야 한다. 천하 최강이 되려면 우선적으로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가 되어야 한다.
내가 할 것은 여기까지다. 그다음은 운이다.
천하 최강 주위로는 사람이 몰려든다. 아부를 일삼는 사람이건, 시중을 드는 사람이건, 잘 봐달라고 돈을 갖다 바치는 사람이건 상관할 게 없다.
천하 최강이라고 생각되는 사람 옆에는 항상 사람이 모인다.
이렇게 사람이 모이면 그다음은 마음 먹기에 따라서 뭐든지 할 수 있다.
천살단이나 혈천방 같은 조직은 수십 개도 만든다.
이 범주에 드는 사람이 천살단주이며 혈천방주다. 또 자신도 이제는 이 범주에 들었다고 생각한다.
예전의 비사칠초로는 제왕이 될 수 없지만, 지금의 비사칠초는 천하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것이다. 일단 천하 최강이 되는 기초는 닦았다.
주치균은 이미 자신이 할 바는 다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주위 사람들이 천하 최강이라는 말을 만들어 주면 된다.
천하 최강, 무림 제패는 관심이 없어도 저절로 이루어진다. 천살단주와 혈천방주가 죽는 순간, 원하지 않아도 천하는 자신의 발 앞에 머리를 숙인다.
여기에 혈마가 무슨 소용이 있나.
혈마의 생기를 연구해서 도대체 어떤 무공을 얻어야 만족할까?
황제가 되기 위해서는 천하에 산재한 모든 학문을 섭렵하고, 천하 최강의 무공을 수련해야 하고, 만인이 흠모하는 인덕을 갖춰야 하고…… 그런가?
천하 최강, 무림 제패가 목적이라면 저들은 방향을 잘못 잡았다.
불로불사(不老不死)? 미친!
세상에 영원히 사는 사람이 어디 있나? 그런 것을 믿는 자는 한심한 족속들이다.
불로불사는 종교에나 있다.
불교에서는 죽으면 극락에 간다고 한다. 육신은 죽어도 영혼은 고스란히 남아서 다른 세상으로 간다.
물론 살아생전에 나쁜 일을 하면 지옥에 가고.
지옥에 가는 것 또한 원신(元身)은 죽지 않는다는 전제가 깔린다.
도교는 우화등선(羽化登仙)을 말한다. 깨달음을 얻으면 살아서 신선이 된다.
도교 팔선(八仙)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나 신선이 되었다.
인간의 생명을 말할 때는 두 개의 지점을 빼놓을 수 없다. 여기에서 여기까지, 탄생에서 죽음까지다. 태어나서 죽는 순간까지의 삶을 생명이라고 한다.
종교는 대부분 이 부분을 깨트린다.
탄생을 말할 때, 어느 부분부터가 탄생이냐고 묻는다. 어미 뱃속에서 태어날 때?
그러면 임신 중일 때는 내가 없는 것인가? 이런 이유로 임신한 순간부터 나이를 계산하기도 한다.
아직 눈코입이 형성되지 않은 작은 덩어리조차 사람으로 인정해준다.
그러면 그 덩어리는 어디서 나왔는가? 남자의 음낭에 있었나, 여인의 비소에 있었나.
여기서 말하는 것이 기(氣)다.
기는 우주에 충만해 있는 힘이다. 삼라만상을 이루는 근원이다. 생명의 실체다. 이것이 미증유의 힘으로 흩어져 있다가 어느 순간에 모여서 생명을 이룬다.
그러니 불교에서는 탄생도 없고 죽음도 없다고 한다.
우주에서 태어나 우주 속으로 흩어지기 때문에 영생한다. 흩어진 것 속에서 일부가 모여 생명을 이뤘고, 다시 흩어진 것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무인은 이 말을 믿는다.
극락이나 우화등선은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인간이 우주의 기운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게 믿는다.
보통 사람이 보면 무인은 인간 범주를 벗어난 사람들이다.
진기를 사용해서 익숙한 무공을 펼치는 것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듯이 쳐다본다.
진기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진기는 인체에 깃든 기다. 진기와 몸 밖의 기운을 합쳐서 거대한 힘을 끌어낸다.
진기를 양성하는 것, 운기 호흡은 외기를 끌어들여서 쌓는다.
공기를 마시지 않고는 진기를 양성하지 못한다. 음식 속에도 진기를 양성하는 기운이 스며있다.
그러니 음식 조절도 필수적이다. 어떤 무공은 특정 음식을 철저하게 기피하기도 한다.
진기를 운용하다 보면 항상 외기를 의식한다. 우주 자연에 거대한 기운이 있다는 것을 안다. 항상 느끼고, 경외하고, 감사하게 끌어들여서 사용한다.
혈마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몸속의 기운과 우주의 기운을 자유롭게 유통한다고 한다.
공기와 음식을 통해서 우주의 기운을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마음껏 쓴다는 것이다.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호발귀를 보면 확실히 비정상적인 행동을 한다. 무공이 인간 범주를 벗어난다.
자신은 생기를 모른다. 모르는 세계를 보는 것과 같다. 그러니 민초가 무인을 보듯, 자신이 혈마를 이상하게 보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렇다면 끝까지 정상적이어야지.
우주의 기운은 광명정대하다.
일부 음악한 기운에 물든 장소도 있다. 공동묘지에 가면 을씨년스러운데, 음악한 기운이 스며있어서다. 하지만 이런 기운은 세월이 지나면서 소멸된다.
무인이 진기 수련을 했다고 미치는 것을 봤나?
정상적인 수련은 결코 미치지 않는다. 혈마는 진기를 아주 극악한 방법으로 사용한 것이다. 시기에 물든 공동묘지처럼 육신을 음악하게 바꿔놓은 거다.
불로불사? 웃기는 소리!
주치균은 혈마를 살려둘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혈마는 천하 최강도 아니고, 무림 제패를 할 수도 없고, 불로불사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도 아니다.
혈마는 재앙일 뿐이다.
‘죽여야겠지. 죽이는 게 최선이야.’
하지만 딱 한 사람, 한 여자…… 등여산만은 죽이지 않는다. 오직 그녀만은.
‘넌 내 여자야. 누구에게도 주지 못해.’
스으읏! 스읏!
주치균은 신형을 쏘아냈다.
등여산이 눈앞에 있다. 빨리 만나야겠다.
“온다! 오(午) 정(正)!”
당홍이 소리쳤다.
순간, 궁충이 재빨리 화를 들어서 오정 방향으로 화살을 쏘았다.
쒜엑! 쒜에엑! 쒜에엑!
한 대를 먼저 날리고, 두 대를 연이어 쏘았다.
“셋 다 놓쳤어요!”
당홍이 말했다.
궁충은 생각할 틈도 없이 계속해서 화살 네 대를 더 쏘아냈다.
쒜엑! 쒜에엑! 쒜에엑! 타 타 타 탁!
화살이 나무에 꽂혔다. 바위를 맞고 퉁겨나갔다. 어떤 화살은 숲 깊은 곳으로 날아갔다.
“놓쳤어! 숨었어!”
당홍이 말했다.
궁충은 당황했다. 화살은 연달아 일곱 대나 쏘았는데 옷자락조차 건드리지 못했다.
“진짜 맞아?”
궁충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당홍을 보며 말했다. 오죽 급했으면 말까지 놓아버렸다.
“맞아. 오정에 있었어.”
해자수가 치달리면서 말했다.
“음!”
궁충은 침음했다.
해자수, 도천패, 당홍은 이미 오정 방향에서 사람이 쏘아져 온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궁충은 말을 듣고도 몰랐다. 오정 방향으로 화살을 겨눴지만 아무도 보지 못했다.
화살을 쏘고, 당홍이 놓쳤다고 말할 때도 마찬가지다.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반사적으로 놓친 방향을 향해서 화살 네 대를 쏘았는데, 당홍의 말이 웃긴다. 또 놓쳤다고 한다. 그렇다면 화살을 다시 쏠 때, 적은 그 자리에 있었다는 말이 된다.
‘왜 못 봤을까? 나는.’
“오정?”
궁충이 다시 물었다.
“아까는 분명히 오정이었어. 지금은 몰라.”
해자수가 말했다.
십이간지는 각기 방향을 가지고 있다. 자(子)는 북쪽이고 오는 남쪽이다. 오(午)의 범위에서 다시 세 방향으로 나눈다.
오시(午始)는 남동, 오정(午正)은 정남, 오말(午末)은 남서향이다. 이렇게 화살을 쏠 수 있는 서른여섯 방향이 정해진다.
웬만한 사람은 다 잡을 수 있다.
오정은 남쪽 정중앙이다.
궁충이 바라보는 정면이다. 그런데 아무도 보지 못했다. 달려오는 모습은 물론이고, 피하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어떤 놈인지 대단하네.”
도천패도 감탄했다.
“뒤를 내가 맡을게요. 앞을 열어요.”
당홍이 궁충 자리로 달려오며 말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궁충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이라면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당홍밖에 없다.
궁충이 당홍과 자리를 바꿔서 달려나갔다. 순간!
쒜에엑!
당홍이 땅을 박차고 솟구쳤다.
‘벌써!’
당홍이 달려나갔다는 것은 적을 발견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궁충은 여전히 아무런 기척도 감지하지 못했다.
따앙! 땅땅땅! 따앙! 땅!
격검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검과 검이 부딪치는 쇳소리는 순식간에 이십여 합이나 이어졌다. 아니, 순식간에 삼십여 합으로 이어졌다.
까앙! 깡! 까까깡! 까아앙!
검끼리 격렬하게 얽혔다.
순간, 도천패가 움찔거렸다.
“뛰어야 해!”
해자수가 말했다.
도천패도 달려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잠시 움찔거리기는 했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음!”
도천패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당홍이 삼십 합을 교환하도록 상대방을 치지 못했다.
‘천살단주와 버금가는 고수!’
퍼뜩 일어난 생각이다.
해자수가 한 시진 동안이나 싸웠지만 결국은 승부를 가르지 못했다는 천살단주.
적어도 그 정도의 고수가 나타났다고 봐야 한다.
지금은 수십 합이지만, 이 교합이 앞으로 얼마나 이어질지는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당홍은 혈마가 된다.
당홍은 아직 혈기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도천패와 함께 싸웠다. 심력은 도천패가 더 많이 쏟았지만, 움직임은 그녀가 더 컸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곧 혈기가 일어날 게 뻔하다.
이 상태대로 한 시진 혹은 두 시진을 싸우면 그때는 정말 장담하지 못한다.
당홍이 위험하다!
“거리가 얼마나 남았지?”
도천패가 급히 물었다.
“여기서는 한 시진. 거의 다 왔어!”
궁충이 대답했다.
“우린 빨리 가는 게 좋아. 호발귀에게 혈기를 제거 받고 다시 오는 게 낫다고.”
“당매가 버티겠지?”
“버티지. 왔다 갔다 두 시진인데…… 충분히 버틸 거야.”
아니다. 두 시진은 장담하지 못한다. 지금 검이 부딪치는 속도로 보면 한 시진도 위험하다.
당홍이 저 자에게 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생기 무공을 사용하면 거의 무적에 가까워진다.
어떤 자도 당적해 낼 수 있다. 해자수가 천살단주와 싸운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천살단주와 혈천방주가 합공을 취해도 지지 않을 것이다. 그때는 어려울까? 아니다. 아무리 그래도 쉽게 쓰러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해자수와 천살단주의 싸움은 해자수의 일방적인 우세였다.
천살단주는 방어에 급급했다. 천살단주가 무너지지 않은 것뿐이지 해자수가 약했던 것은 아니다. 마지막 순간에는 단주를 쓰러트릴 수 있겠다고까지 생각했었다.
그 정도로 압도적으로 공격했다.
천살 단주는 끝끝내 쓰러지지 않았다.
악착같이 버텼다. 그 점이 놀라운 것이다.
그 싸움은 해자수의 승리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결국은 단주를 쓰러뜨리지 못했으니 승리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당홍도 그와 같은 싸움을 할 것이다.
쒜엑! 쒜에엑! 쒜에엑!
그들은 동굴을 향해서 신형을 쏘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