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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마전인-412화 (412/500)

第九十三章 불입호혈(不入虎穴) (3)

잠깐씩…… 깜빡깜빡! 그리고 일다경, 반 시진, 한 시진!

정신을 잃는 시간이 점점 늘어난다.

누구에게 얻어맞은 것도 아니고 상처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아무런 일도 없는데 정신이 뚝뚝 떨어진다. 그동안은, 정신을 잃었던 동안에는 완전히 혈마가 된다.

‘누구 죽은 사람……’

정신이 들면 제일 먼저 동굴 입구부터 살펴보게 된다.

혈마로 파묻혀 있는 동안에, 누군가가 혈권에 들어왔다면 여지없이 죽는다.

이 부분은 자신이 전혀 통제할 수 없다.

사권에서는 선택할 수 있는데, 혈권으로 무엇이 들어서면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뭔가가 후다닥 벌어지는 느낌이 들고…… 한 생명이 죽는다.

지금은 거의 뱀이나 쥐, 박쥐 정도만 죽이고 있다.

그런데 이 혈권도 점점 넓어진다는 느낌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권이었던 동굴 입구가 이제는 혈권으로 감지된다.

아직 입구까지 넓혀지지는 않았지만 거의 근처에까지 다가섰다.

누구든 동굴 안으로 들어오기만 하면 죽는다는 거다.

이번에도 죽은 사람은 없다.

동굴 입구는 청소해놓은 듯 깨끗하다. 피가 튀거나 뼈가 흩어져 있지 않다.

“으…… 으! 어……!”

호발귀는 침음을 흘렸다.

자신의 상태를 귀검에게 알려줘야 한다. 이제는 동굴 안으로 들어서는 것조차 위험해졌다고.

그런데 알릴 수가 없다. 말을 할 수가 없다.

입은 열려있다. 성대도 여전히 제 기능을 발휘한다. 그런데 말이 너 오지 않는다.

자신의 상태를 어떤 식으로도 알려야겠는데…… 기가 막히게도 말을 잃어버렸다.

생각나는 어휘가 없다.

“어…… 으아! 어……!”

가장 원초적인 말, 갓난아기가 옹알이하는 수준 밖에 성대를 울리지 못한다.

이런 상황이라서 혈권이 넓어졌다는 말도 하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귀검은 동굴 안으로 들어서지 않았다. 바깥에서 귀무살의 동정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다. 천만다행이다. 무심코 들어왔다면 당장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안돼! 이래선 안 돼! 정신 차려야지!’

정신을 단단히 붙잡고 생각을 이어갔다.

지금쯤 세 사람은 홀리와 등여산을 만났을까? 두 여인을 데리고 돌아오는 중일까? 돌아오기도 결코 쉽지 않은데. 천살단과 혈천방이 길을 막았었을 텐데.

아니다. 그들은 돌아온다.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미끼가 바로 혈마다.

자신을 죽이지 않으면 두 발 뻗고 잠을 자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세상에 혈마가 존재하는 것을 알면 당장 이용하지 못해서 안달 내는 사람도 있다.

혈마후가 되려는 여인도 있을까? 자신에게는 구혼음소가 통하지 않으니 또 다른 음문촌 여인이 있다고 해도 혈마후는 결코 이룰 수 없을 것이……

아닌가? 도천패, 해자수가 혈마가 될 수 있나? 그러면 두 사람을?

혈마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마인이지만, 또 가장 유혹적인 보물이기도 하다.

이백 년 동안이나 혈마를 포기하지 않은 천살단과 혈천방이라면 반드시 자신을 찾아온다. 죽이기 위해서, 또는 노예로 부리기 위해서 이곳으로 온다.

그런데 변수는 등여산이다.

등여산이 이미 혈마가 되었다. 강호 무인들이 상대할 수 없는 무공으로 사람을 해친다. 혈마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도 ‘미쳤고, 대단히 무공이 강하다’라는 점은 안다.

혈천방과 천살단이라면 당장 혈마부터 떠올린다.

이 경우가 문제다. 이럴 때, 욕심을 부리지 않고 등여산만 잡는 경우가 생긴다.

무령환살공을 사용하면…… 잡힌다.

이것은 자신이 경험해봐서 안다. 주치균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검이 들어온 다음에도 의식하지 못했다. 혈마는 자신이 다친 줄도 모른다. 완전히 쓰러진 후에야 알게 된다.

둘째, 조금 더 욕심을 부릴 수도 있다.

등여산을 비롯해서 홀리와 그를 구하러 간 세 명을 모두 잡는 경우다.

이런 일은 등여산이 혈마가 되었기 때문에 생각할 수 있다.

세상에 혈마는 호발귀 한 명뿐인 줄 알았는데, 또 한 명이 생겼다. 거기에다가 홀리와 해자수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무공을 구사한다.

이런 걸 보고도 ‘아! 정말 무공을 열심히 수련했구나’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누구라도 당장 ‘호발귀 곁에 있더니 혈마가 되었구나’ 하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알게 되면 결코 등여산만 잡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개인이라면 몰라도 천살단과 혈천방이라면 모두 다 잡고자 할 것이다.

하지만 홀리를 비롯해서 네 명의 무공이 절대 만만치 않다.

전력을 기울여도 잡을 수 없다. 오히려 저쪽이 낭패할 게 뻔하다. 네 명의 무공은 너무 강하다.

여기서 또 변수, 홀리가 문제다.

홀리는 혈기를 안은 채 출발했다. 그것도 매우 위험한 상태로. 싸우는 도중에 혈마가 될 수 있다.

이런 일까지 벌어지면 그야말로 낭패다. 정상적인 생기 사용에서부터 혈마가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홀리와 등여산이 직접 알려준 셈이다.

그러면 이들은 끊임없이 공격당한다.

절대로 한두 명만 잡지 않는다. 모두 다 잡으려고 할 것이다. 혈마가 많으면 연구할 것도 많을 테니까.

다섯 명은 자신을 향해서 올 터인데…… 오는 내내 공격당한다. 점점 혈마가 되어간다. 동굴에 오기 전에 혈마가 되면 무령환살공이 터질 것이고, 모두 잡힌다.

동굴에 올 때까지 제정신을 유지하면…… 자신에게 죽는다.

호발귀는 일행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을 생각해봤다.

“음!”

생각할수록 답답하다. 어떻게든 일행이 오기 전에 혈기를 추슬러야 한다.

‘이 혈기…… 어떻게 하지?’

호발귀는 고민을 거듭했다.

‘응?’

정신이 들었다.

긴 잠을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퍼뜩 정신이 회복되었다. 또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생각을 잘 이어가던 중이었는데, 정신을 잃었나 보다.

생기가 일어난다. 생기를 사용하면 오염이 되고, 오염된 생기는 혈기가 되고, 혈기는 몸 안에 고착된다. 딱 달라붙어서 강력한 마약처럼 정신을 현혹한다.

이백 년 전 혈마도 여기서 막혔다.

온갖 고민을 다 해봤겠지만 결국은 풀지 못했다. 혈마에게 시간이 더 주어졌다면 풀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호발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처럼 혈기는 절대로 여유 시간을 주지 않는다. 계속 육체와 정신을 좀먹는다.

깜빡깜빡 정신을 잃는 시간이 깊어진다.

이러다가 하루나 이틀로 늘어날 것이고, 한 달이 될 것이고, 일 년이 될 것이다.

지금은 그나마 티끌만 한 생기라도 남아 있다. 그러니 맑은 정신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소진되고 나면 영원히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여기서 자진을 생각하게 된다. 어떻게 죽나?

‘가만! 정말 어떻게 죽지?’

혈마는 어떻게 죽었을까? 자진했다고 하는데, 어떻게 죽었지?

호발귀는 혈마가 죽은 부분을 생각했다.

자신도 죽음을 생각하지만 죽는 방법이 없다.

자진을 시도해도 혈기가 보호해 버린다. 육신을 보호하고 정신을 혼란에 빠트린다.

자신은 아무리 생각해도 죽는 방법을 모르겠다.

그렇다고 누군가가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구혼음소까지 이겨낸 지금은 한결 더하다. 누가 자신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사람 중에는 없다.

혈마는 어떻게 자진을 했지?

굶어 죽었나? 굶어 죽지는 않는다. 혈권을 계속 늘어난다. 목숨이 경각에 달리면 혈권은 더 확장된다. 사권까지 넓힌다. 그리고 동물을 끌어들인다.

손발이 묶여 있다고? 걱정하지 마라. 쥐든 뱀이든 생으로 뜯어먹는다. 결코, 굶어서 죽는 일은 없다.

그러면 자폭(自爆)?

‘그래! 자폭!’

호발귀는 자폭에 생각이 미쳤다.

강호에 진기를 응축시켜서 폭발시키는 무공이 있다. 그러면 뱃속에 화약을 넣고 터뜨린 것과 같은 효과가 일어난다. 경맥이 터져 나가면서 강력한 폭발이 일어난다.

살점과 뼛조각이 갈가리 찢어져서 사방에 비산한다.

일단, 시전자는 즉사한다.

부수적인 효과도 있다. 자폭 무공을 시전하면 살점과 뼛조각이 암기가 되어서 쏘아진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조각난 살과 뼈가 꿰뚫는다.

진기 폭발로 쏘아진 뼈는 몸이 관통당할 정도로 강력하다.

그래서 마인들이 종종 자폭 무공을 동귀어진(同歸於盡) 수법으로 쓰곤 한다. 물론 진기를 응축시키는데 상당한 공력이 필요해서 어지간한 사람은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혈마무공 중에는 자폭 무공이 없다. 원충노인의 팔십일수에도 자폭 무공이 없다.

호발귀는 이런 무공을 배운 적이 없다.

하지만 역천금령공을 이용하면 시도는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단전에 진기를 응축시킨 후에 팡! 터트리는 것인데, 아주 어려울 것 같지는 않다.

‘역시 방법은 그것밖에 없어.’

등여산을 데려오기 위해 홀리가 떠났다. 그들을 데려오라고 세 사람을 보냈다.

그들을 보낼 때도 혈기를 뽑아낼 방법은 없었다. 일단 일을 벌인 후에 방법을 생각해보려고 했는데, 아무 생각도 일어나지 않는다.

끝났다.

지금 상태에서 동굴 안으로 혈기가 밀려 들어오면 당장 혈권이 작동된다. 동굴 안으로 들어선 혈마와 싸운다. 누가 먼저 싸울지도 모르겠다. 좌우지간 누군가와는 싸운다.

다섯 명 중 누구…… 혹은 다섯 명 모두 혈기가 일어난다. 당장 혈마가 된다.

혈마와 혈마의 싸움이 시작된다. 모두 이곳에서 죽는다면 괜찮지만, 그들 중 한 명이라도 무림으로 빠져나가면…… 무령환살공이 있으니 강호가 피바다로 변하는 것은 면하려나?

차라리 먼저 폭살을 해서 귀검에게 자신의 위기를 알려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언어조차 잃어버린 몸, 자신의 현 상황을 말할 도리가 없으니.

그러면 귀검은 돌아온 다섯 명을 동굴 안에 밀어 넣을 것이고, 동굴 입구를 붕괴시킨다.

혈마는 이곳에서 다 죽는다.

스읏! 스스스슷!

호발귀는 역천금령공을 일으켰다.

단전에 진기를 모았다. 늘 해오던 일이라서 어렵지 않다. 경맥에 흘려보내지는 않는다. 단전에 붙잡아 놓기만 한다. 이 일은 혈기에게 시킨다.

‘움직이지 마.’

혈기가 역천금령공을 잡았다.

혈기가 잡은 것인지, 의념(意念)이 강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역천금령공이 움직이지 않으니 되었다.

파아아앗!

역천금령공을 일으키자 이령귀화도 피어났다.

두 진공이 물레방아가 되어서 휘돈다. 하지만 역천금령공이 강성한 반면에 이령귀화는 먼지처럼 미미하다. 물레방아가 도는데, 온통 역천금령공만 보인다.

호발귀는 개의치 않았다.

다른 때 같으면 어떻게든 이령귀화를 살리려고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파아아앗!

역천금령공이 더욱 거세게 휘돌았다.

호발귀는 진공을 경맥 속으로 흘려 넣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뛰쳐나가려고 발버둥 치는 진공을 꼭 붙잡고 늘어졌다. 단전에 진공이 쌓이면서 돌덩이처럼 단단해졌다.

생기, 혈기를 사용하면 모든 무공이 단순해진다.

‘이제 이것만 터트리면……’

호발귀는 여러 사람을 떠올렸다.

등여산과 홀리는 당연히 생각난다.

두 부인…… 분에 넘치는 여인들…… 이미 혈마가 되었고, 또 혈마가 되어가는 중인데…… 이렇게 남겨놓고 떠나는 것이 너무 무책임하지 않나.

도천패와 당홍도 생각난다.

이제 막 혼인을 해서 알콩달콩 깨가 쏟아져도 모자랄 판인데, 혈마가 된다. 지금은 혈기를 빼낸 상태지만, 다시 동굴에 왔을 때는 혈기가 일어났을 것이다.

“하아!”

호발귀는 한숨을 쏟아냈다.

해자수는 희생이 컸다. 귀검도 귀무살을 상당히 잃을 것이다. 너무 희생이 크다.

이 모든 사람이 혈마 한 명, 자신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그래도 방법이 없는 것을 어쩌나. 악착같이 버틸 수는 있을 것 같은데, 그러면 결과가 더 안 좋아진다. 가슴이 찢어져도 지금 결단을 내려야 한다.

‘모두 미안!’

파앗!

호발귀는 역천금령공을 터트렸다.

그런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역천금령공이, 응축된 진기가 터지지 않았다. 전신 경맥으로 확 쏟아냈는데, 물밀 듯이 밀려 나가서 거칠게 경맥을 찢어야 하는데.

‘왜?’

호발귀는 역천금령공이 왜 터지지 않았는지, 왜 단전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지 궁금했다. 방금까지만 해도 진공은 쏟아져 나가지 못해서 안달 났었다.

‘하아!’

호발귀는 한숨을 토해냈다.

이유는 금방 찾아냈다.

혈기가 단전을 꾹 눌러서 밀착시키고 있다. 혈기가 단전 폭발을 꾹 누르고 있다.

진공이 혈맥으로 일시에 쏟아져 나가는 것을 방해한다. 경맥이 버틸 수 있을 정도만 흘려보내고 있다. 아무리 거세게 진기를 쳐내도 정상적인 운공 밖에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순간 호발귀는 이령귀화에 주목했다.

이령귀화 역시 미미하지만 일어날 만큼 일어났다. 응축도 되어 있다. 역천금령공을 응축시킬 때 이령귀화도 같은 작용을 했다. 두 진기는 같이 움직인다.

하지만 이령귀화는 척택혈에 모여 있다. 진공을 터트려 봤자 오른팔만 날아간다. 오른팔이 비산하면서 쳐낸 뼛조각은 혈기가 차단할 게 뻔하다.

휘르르르릉!

당장 혈기가 전신을 휘감았다.

호발귀는 갑자기 어둠이 밀려오는 것을 봤다.

파앗!

눈동자에 혈광이 감돌았다. 새빨간 혈광이.

“크크크큿! 크크!”

입에서는 괴소도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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