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九十章 초월인한(超越人限) (1)
태흥산은 동네에 있는 작은 산이 아니다. 대단히 큰 산이다. 태흥산맥이라고 불린다.
태흥산 정상은 가파른 암벽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인간의 발길을 거부하는 칼날 같은 바위봉우리 때문에 천검봉(千劍峰)이라는 이름도 붙었다.
나무는 없고 거친 풀과 자갈만 가득한 산이다. 산 정상만 그렇다. 팔 부 능선만 내려가도 숲이 울창해진다.
멀리서 보면 저런 정상에는 오르려는 자가 아무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정작 태흥산 정상에 올라서면 무릉도원이 펼쳐진다. 안에 작은 분지가 있고, 맑은 호수도 있다. 거친 잡초이기는 하지만 풀들이 무성해서 녹색 물결이 넘친다.
호수는 담수로 식용할 수 있다.
옛말에 물 있는 곳에는 사람이 있다고 했다. 아무도 오르지 않는 태흥산 정상에도 민가 세 채가 있다.
겨울에는 사람이 살지 않고 여름 한 철에만 기거하는 임시 주택이다. 풀이 무성해서 양 떼를 몰고 와 여름 한 철을 보낸 후에는 하산한다.
“크크크! 크크크크!”
등여산은 생기를 찾아냈다.
태흥산 정상 민가에서 맑게 빛나는 생기 덩어리를 찾았다. 푸른 빛이 너무 많아서 흥분이 샘솟듯 일어났다.
이곳이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곳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계절에는 사람들이 올라와 있다. 아직 여름은 아니지만, 날이 일찍 풀려서 조금 빨리 올라왔다.
그것이 해가 되었나? 혈마 눈에 띄어서 참살당하나?
아니다.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사람은 이미 경고를 받고 산 밑으로 피신한 후이다.
하지만 그들은 키우던 양까지 데려갈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혈마가 너무 빨리 들이닥쳤다.
등여산은 산 정상에 널려 있는 양 떼를 발견해냈다.
“크크크! 크크큿!”
그녀가 괴소를 지르며 달려들었다.
쒜엑! 쒜에엑!
거침없이 살초가 터져 나왔다.
태산파의 무공은 아니다. 양 떼를 죽이는데 굳이 무공까지 사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나? 무작정 휘두르는 검초인데, 아주 유효적절하게 양 떼를 쳤다.
끼아악! 깨애애액!
양들이 비명을 토해내며 쓰러졌다.
양 떼는 갑자기 들이닥친 흉수를 피해서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서 도주했다.
등여산은 도망가는 양 떼를 쫓아서 쾌속하게 신법을 전개했다.
쒜엑! 쒜에엑! 쒜엑! 쒜에엑!
검풍이 태흥산 정상을 흔들었다. 세차게 몰아치는 바람이 피 냄새를 안고 흘렀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무엇을 죽이는지 알지 못한다. 양인지, 사람인지. 지금은 양이지만 사람이라고 해도 마찬가지, 이런 식으로 죽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같은 혈마인데…… 등여산과 호발귀는 살인 방법이 다르다.
호발귀는 등여산처럼 거칠게 쫓아가지 않았다. 아예 양들이 도망도 가지 못했다. 마치 최면에 걸린 듯 호발귀를 향해 숨죽이고 슬슬슬슬 기어왔다.
일단 공포로 짓눌러 버리고, 그 공포 속으로 끌어들인다.
반면에 등여산은 양들을 쫓아가면서 죽인다. 양들이 등여산의 무서움을 알고 최대한 빨리 도주한다. 맹수가 습격해 왔을 때와 똑같은 반응이다.
등여산의 혈기는 호발귀만큼 강하지 못하다.
그녀가 거침없이 검을 휘두르는 가운데 일부 양들이 산 아래로 도주했다.
등여산은 도주하는 양들을 쫓아가지 않았다.
이미 혈권 밖으로 벗어났다. 그렇다. 등여산도 혈권이 있다. 호발귀의 혈권은 눈을 떴을 때는 시야가 닿는 곳이다. 등여산의 혈권은 그것보다는 작다.
눈길이 닿는 모든 곳이 혈권이 되지 않는다. 그녀의 혈권은 일정한 범위가 있다.
양들이 시야에 닿지만, 혈권을 넘어섰다. 산 아래로 달려가는 양들이 보이지만 혈기가 일어나지 않는다. 쫓아가서 죽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크크큿! 크크크크!”
등여산은 괴소를 산 정상에 있는 담소에 몸을 담갔다.
투명하도록 시린 물이 그녀의 몸에 묻은 핏물을 씻어냈다. 붉은 핏물을 빨아냈다.
“크크큿!”
그녀는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서 물속에 몸을 담갔다.
팔팔 끓어오르던 흥분이 가셨다. 혈기가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왔다. 하지만 등여산은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녀는 여전히 혈마 상태였다.
“키키킥! 크크큿!”
등여산은 연신 괴소를 흘리면서 물장난을 쳤다.
맑은 물이 좋아!
혈마의 어딘가에 여전히 남아있는 그녀의 본성이 맑은 물을 보고 웃음 지었다.
스읏! 슷! 스으읏!
한 사람이 천천히 산길을 따라 정상으로 올라섰다.
그는 정상에 서서 분지 한가운데에 있는 맑은 호수를 쳐다봤다.
“음!”
그의 입에서 침음이 흘러나왔다.
등여산이 담수에 몸을 담그고 물장난을 치고 있다. 마치 철부지처럼 티 없이 깔깔거리며 물장난을 친다.
“혈마가…… 너였구나.”
노인, 천살단주는 혀를 끌끌 찼다.
책사가 혈마로 변해서 날뛴다는 소리는 이미 전해 들었다. 눈으로 직접 보고 전한 사실이니 잘못 보고된 게 아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직접 눈으로 볼 때까지는…… 혈마가 등여산이 아니었으면 하고 바랐다.
천살단주는 혈마로 변한 등여산을 내려다봤다.
천살단은 혈마에 대한 견해가 확실하다. 죽이던가, 생포한다. 그 외에 다른 대처는 없다.
‘할 수 없지.’
천살단주는 등여산을 향해 걸어갔다.
등여산이 혈마인데 괜찮나? 이런 식으로 전신을 노출하고 걸어도 되나? 천살단주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저벅! 저벅! 툭! 때구루루!
발끝에 채인 돌멩이가 산비탈을 굴러내러 갔다.
천살단주는 기척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전신을 환히 드러낸 체 혈마를 향해 걸었다.
“크크크크…… 킥!”
혈마의 괴소가 일순간 날카롭게 변했다. 그리고 획! 고개를 늘려 천살단주를 쳐다봤다.
등여산의 눈길이 살광으로 번들거렸다.
혈마가 천살단주를 찾아냈다.
“음!”
천살단주는 가벼운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제야 운기를 해서 진기를 일으켰다.
치이이잇!
단주가 진기를 일으키자, 살기를 띠며 물에서 일어나던 혈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혈마는 천살단주가 보이지 않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혈마가 파악하는 것은 생기다. 세상 만물은 기운을 가진다. 살아있는 생기일 수도 있고, 바위나 흙처럼 무기(無氣)를 띄기도 한다. 혈마는 이런 기운을 읽는다.
혈마는 생기를 읽지 못했는지 다시 담수에 몸을 담갔다.
‘역시 통하는군.’
천살단주는 가벼운 미소를 머금었다.
인간은 무령환살공을 창안해 냈다.
인간이 창안한 무공 중에서는 생기를 죽이고 사기를 띄우는 최적의 공부일 것이다.
혈마이총은 무령환살공을 발전시켜서 암약혼기(暗躍魂氣)를 찾아냈다.
암약혼기는 천살단주의 본문 무공인 유음검문의 무공과도 상통한다. 맥을 같이 하는 공부라서 한결 받아들이기가 쉬웠다. 또한, 무령환살공처럼 인체를 손상시키지도 않는다.
죽은 자처럼 기척을 숨길 수 있는 공부!
세상에는 밝음과 어둠이 있다. 하지만 근본은 어둠이다. 암(暗)이 어둠에 우선한다.
밤이 본체이고, 낮이 가체다. 밤은 아무것도 없이 혼자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낮은 태양이 있어야만 존재한다. 태양이 사라지면 당장 밤이 된다.
어둠의 본래 성질이 암약혼기다.
암약혼기는 은신술의 결정체다. 이 세상에서 암약혼기보다 더 신비롭고, 은밀하고, 어둠과 완전히 동화되는 공부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암약혼기보다 더 나은 은신술은 탄생할 수도 없고, 찾을 필요도 없다.
인간이 어둠으로 들어간다. 어둠에 완전히 파묻혀서 인간이 지닌 모든 기운을 감춘다.
이제 인간은 암약혼기로 충분하다.
혈마이총이 찾아낸 공부 중에 암약혼기는 단연 으뜸 중 하나다.
혈마를 상대할 수 있는 공부이면서 신과 버금가는 무공이라고 단언한다.
스으읏!
천살단주는 암약혼기를 펼친 채 등여산에게 걸어갔다.
“그렇게 혈마하고 어울리지 말라고 했는데, 말을 안 듣더니 기어이 이 모양 이 꼴이 되고 말았구나. 쯧! 이런 모습으로 내 앞에 서지 말았어야지. 그렇게 총명하고 예쁘던 아이가.”
천살단주는 혀를 찼다.
등여산은 혈마로 변했지만, 겉모습까지 바뀐 것은 아니다.
광기로 번뜩이는 눈,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괴소만 아니라면 그녀를 혈마로 볼 사람은 없다.
스읏!
천살단주는 사냥추를 꺼냈다.
사냥추는 촌민들이 사용하는 사냥 도구다. 줄 양 끝에 돌을 매단 형태다. 사냥추는 보통 줄 세 개에 돌 세 개를 매다는데, 두 개는 무겁고 한 개는 가볍다.
줄을 잡고 빙빙 돌리다가 다리를 향해 던지면 순간적으로 휘리릭 다리가 감긴다.
사슴 등을 사냥할 때 쓰며, 살상용은 아니고 포획용 도구다.
“물을 좋아하는 것은 여전하구나. 하지만 인제 그만 나와야지? 그만큼 씻었으면 됐다.”
스읏!
천살단주가 진기를 풀었다.
순간, 혈마가 언제 담수를 즐겼냐는 듯 단박에 허공을 팡! 솟구치더니 단숨에 천살단주를 덮쳐왔다.
쒜에엑!
혈마의 신형이 눈 깜짝할 사이에 단주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하지만 그 순간 천살단주는 암약혼기를 다시 끌어올렸다. 신형을 어둠 속에 감췄다.
혈마의 시선에서 천살단주가 사라졌다.
혈마는 천살단주가 갑자기 사라져버리자 혼란을 느낀 듯 슬며시 땅 위로 내려섰다. 그때,
휘리리릭!
천살단주의 손에 들린 사냥추가 등여산을 향해 날아갔다.
등여산은 위기를 느낀 듯 급히 허공으로 솟구쳤다. 하지만 사냥추는 눈이라도 달린 듯 두 발을 쫓아갔다. 그리고 단숨에 양 발목을 휘감았다.
쒜에엑! 쿵!
등여산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졌다.
스으읏!
천살단주는 등여산을 향해 걸었다.
그는 여전히 암약혼기를 풀지 않았다. 손에는 어느새 비수가 들려 있었지만, 어떤 살기도 일어나지 않았다.
“넌 아무래도 호발귀와는 다른 모양이구나. 혈기가…… 약해. 아직 호발귀만큼 사악해지지 않았어. 후후! 천살단을 위해서 네 몸 좀 쓰자꾸나.”
푸욱!
천살단주는 비수로 기의 바다, 단중혈(丹中穴)을 찔렀다.
“끄으으으!”
등여산이 무너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툭 떨궜다.
천살단주는 품에서 금잠사로 짠 밧줄을 꺼냈다. 그리고 짐승 묶듯이 등여산의 두 손을 등 뒤로 돌려서 묶었다.
천살단주는 혈마 연구를 포기했다.
호발귀를 보면 혈마를 연구할 생각이 전혀 나지 않는다. 이번에도 혈마가 호발귀였다면 당장 죽였다. 결코, 금잠사 밧줄로 사지를 결박하지는 않는다.
호발귀는 구제 불능이다. 어떻게 해보려고 해도 도저히 감당되지 않는다.
완벽한 혈마다.
하지만 등여산은 아직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다.
본인 스스로 살심을 억누르기 위해 태은산 정상에 올라와 있는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지금은 양 떼를 죽여서 혈기는 풀어낸 상태다. 그래서 약간이라도 유를 가지고 담수를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는 직접 봐서 안다.
등여산이 고통받을 때, 단주는 묵묵히 지켜보고 있었다.
고통을 이겨내느라고 몸부림치는 모습!
등여산이 어떻게 해서 혈기에 버티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단지 강인한 의지로 버틴다고만 생각했다.
혈마와 구혼음소!
혈마에게 구혼음소는 자신을 죽이는 방법이다.
혈마군총은 그렇게 단정 지었다. 구혼음소는 혈마를 죽이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니 혈마 자신이 구혼음소를 읊지 않는다. 일단 구혼음소를 읊으면 중간에 멈추지 못한다.
이 외에 다른 방법은 벌어지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실험에서는.
그러니 등여산이 구혼음소를 읊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하물며 혈마 자신이 구혼음소를 읊고, 그 구혼음소가 중간에 멈춰진다는 생각을 하기에는 더욱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호발귀는 충격이다. 구혼음소를 들어도 죽지 않다니. 구혼음소를 이겨내다니.
호발귀는 대단한 연구 과제다
그 외의 혈마는 구혼음소를 읊으면 모두 죽는다
천살단주가 등여산을 죽이지 않고 생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통제장치가 있는 혈마는 두렵지가 않다. 구혼음소가 통하고 암약혼기가 통하는 혈마가 무엇이 두렵나?
등여산은 덫에 발목이 체인 사슴일 뿐이다.
아직도 이빨이 있어서 물려고 덤벼들긴 한다. 머리로 들이받으려고도 한다. 하지만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서서 작대기로 한 대 때리기만 해도 픽 쓰러지고 마는 연약한 존재다
천살단주는 금잠사 밧줄로 등여산의 두 다리도 묶었다.
혈마는 이렇게 손쉽게 잡힐 수 있는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