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九章 임시방편(臨時方便) (1)
귀검은 망설였다.
‘이 일을…… 아무래도 말하는 게 낫겠지?’
호발귀는 누구보다도 혈기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냉정하게 판단할 것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역시 망설여진다.
호발귀가 가장 사랑하던 두 여자, 등여산과 홀리에 관한 문제다.
도천패는 친형제나 다름없고, 당홍도 도천패의 부인이라는 점을 떠나서 독의와 얽힌 사연이 있다.
호발귀가 이들을 이대로 내버려 둘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내버려 두면 이들은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무슨 수단이라고 강구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무리하게 수단을 일으키면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
그러면 일을 다 정리한 후에 말해줄까?
등여산, 홀리, 도천패, 당홍, 해자수…… 모두 죽고 난 후에 그들이 혈마가 되어서 어쩔 수 없이 죽였다고 말할까?
모르긴 해도 아마 반쯤 미칠 것이다.
자신이 일으킨 생기격타 때문에 주변 사람이 혈마가 되어서 죽었다고 하면 살고 싶은 생각이 사라질 것이다.
그 뒤에 일어날 후폭풍도 역시 만만치 않다.
호발귀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어쩔 수 없다. 그건 감수할 수가 있다. 하지만 혈마가 되어서 미쳐 날뛴다면 세상은 당장 지옥으로 변한다.
호발귀에게는 구혼음소도 통하지 않는다.
귀검에게 전해진 구혼음소는 아직 사용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혈천방주가 사용한 적이 있다. 혈천방주가 알고 있는 구혼음소와 자신이 알고 있는 구혼음소는 같다. 그러니 방주의 구혼음소가 통하지 않았다면 자신 것도 통하지 않는다.
혈천방주는 혈천방 방주의 권한으로 혈의검 소휘의 진전을 이어받았다.
엄밀히 말하면 혈천방주가 실세고 자신은 비세다.
혈의검의 유지는 양쪽을 통해서 전수되었다.
혈천방주는 진짜 구혼음소를 호발귀에게 사용한 것이다. 하지만 호발귀는 견뎌냈다. 적어도 이백 년 전 혈마가 후인들에게 말해준 방식으로 혈마를 제거하지 못한다.
어떻게 해야 하나? 말해나 하나, 침묵해야 하나.
난감했다.
“귀검입니다.”
“네.”
“진전은 좀 있습니까?”
“전혀. 답답하네요.”
호발귀도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매일 사권 근처에 있는 홀리를 보고 있으니 혈기가 얼마나 번져 나오는지 여실히 느낄 것이다.
현실은 호발귀가 생각한 것보다 더 급하다. 시간이 전혀 없다.
이미 책사가 혈마가 됐다. 홀리는 책사를 죽이러 떠났다. 이보다 급할 수는 없다.
“무리해서라도…… 해보는 방법이 없습니까?”
귀검이 차분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군요. 무슨 일입니까?”
호발귀가 착 가라 하는지 음성으로 물었다.
호발귀는 이렇게 눈치 빠른 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생기에 몰입하면서부터 주변 변화를 매우 민감하게 읽어낸다. 지혜가 극도로 발달하고 있는 것 같다.
당연하다. 생기는 뇌에도 영향을 미친다. 무공에만 국한한 것이 아니다. 매일 맑고 신선한 기분만 느낀다고 해도 상당히 좋은 생각을 끌어낼 것 같다.
“책사가 혈마가 된 것 같습니다.”
귀검은 망설이던 말을 했다. 사달이 날 것이라면 지금 당장 나라는 생각에서 말했다.
화산이 폭발하려면 한꺼번에 터지는 게 낫다. 찔끔찔끔 계속 터지면 힘들기만 하다.
“……”
호발귀가 말이 없다. 상당히 놀랐을 것이다.
“책사가 지금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죽이고 있습니다.”
귀검은 호발귀의 대응을 예의주시했다.
호발귀는 이 말에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 어떤 말을 할 것인가? 움직임은 없나?
“기어이……”
“……!”
귀검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호발귀의 음성은 어떻게 보면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차분했다. 상당히 많은 것을 염려했는데.
“그래도 조금 시간이 있었으면 했는데……”
호발귀가 이런 일을 예상한 듯 답답한 심정을 드러냈다.
귀검은 너무도 차분하고 조용한 호발귀 음성에서 오히려 심한 불안감을 느꼈다.
이 기분 나쁜 침착함은 뭔가?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르려고 이러나? 뭔가는 할 텐데. 자기 여자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만 있지는 않을 텐데.
“홀리가 책사에게 갔습니다.”
“그래요.”
‘아무래도 기분 나빠.’
“아마도 구혼음소를 읊을 겁니다. 힘들더라도 막을 수 있을 때 막아야 한다면서. 혹시 주군께 방법이 있다면, 모든 걸 총동원해서 돕겠습니다.”
귀검이 진심으로 말했다.
그런데 호발귀에 대답은 여전히 무심하고 차디찼다.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네. 그럼……?”
“지금 내가 나가면 오히려 사태만 더 악화시켜요. 후후! 혈마에도 종류가 있죠. 죽일 수 있는 혈마와 죽이지 못하는 혈마. 아마 제가 후자일 겁니다.”
“네.”
“휴우! 내가 안 나가는 게 좋을 겁니다.”
호발귀가 하늘이 무너지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책사는 어디 있습니까? 어디서 그렇게 살인을 저지른답니까?”
“최종적으로 들은 소식으로는 논평(菕坪)입니다. 논평에서 사십구 인을 죽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그래요.”
“홀리가 이쪽으로 유인할 수 있으면 데려오겠다고 했습니다. 전에 주공을 유인한 적이 있으니, 같은 방식으로 유인하겠다고. 하지만 사실은 구혼음소가 통하지 않을 것을 염려해서 제 앞으로 데려올 모양입니다.”
“네.”
역시 대답이 너무 차다.
혹시 이것이 혈마의 심성인가? 이미 남녀 간의 사랑은 잊어버린 것인가? 마성에 짓눌려서 여인을 버렸나?
귀검은 혈의검의 유진을 이었지만, 혈마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사실, 그가 호발귀를 주군으로 모시고 충성하지만, 그것은 호발귀가 혈마로 변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언제든 혈마로 변하면 구혼음소를 읊는다.
전에는 그것이 혈마를 죽이는 확실한 방법이었지만, 지금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으니 검으로 죽인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혹시 아나? 최선을 다한다면.
너무도 무심하고 차디찬 혈마의 대답.
정말 불안했다.
혈기가 호발귀의 심성까지 바꿔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호발귀는 바위에 앉았다.
고개를 떨고 땅을 쳐다봤다. 멀리 쳐다볼 수조차 없다. 겨우 발아래만 쳐다본다.
두 손은 축 늘어뜨렸다.
일어설 기력이 없다. 애써서 움직이고 싶지도 않다.
홀리는 등여산을 데리고 오지 못한다
세 사람이 자신을 유인했다. 맞다. 그때는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다. 그때는 세 사람의 생기가 막 태동할 때였다. 오 할 이상이 빨갛게 물든 상태였지만, 아직도 하얀 광목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완전한 혈마가 아니었다. 생기 백 개 모두가 빨갛지 않았다. 하얀 광목이 남아있어서 ‘살인은 안 된다’라는 의식이 툭툭 튀어나왔다.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혈마를 유인할 수가 있었다.
지금은 완전히 다른 상황이다.
등여산은 완전히 빨간 광목으로 뒤덮였다. 생기는 없고 혈기만 남았다. 호발귀라는 원조 혈마보다도 더 빨간색, 더 진한 혈기로 물들었다.
홀리도 넷 중 셋은 물들었다.
두 여인이 그런 상태이니…… 홀리가 등여산을 만나면 단박에 혈기가 일어난다.
남은 하얀 광목이 한순간에 혈기로 물든다.
혈마 둘이 만난다.
혈마는 다른 혈마를 푸른 빛으로 본다.
혈마가 죽으면 생기가 탁 터져서 세상 속으로 퍼져 나가는데, 그때의 빛이 푸른 빛이다. 우주 속으로 흘러들 때는 본연의 푸른 빛을 띤다.
오염되지 않은 푸른 빛, 생기.
혈마가 보는 다른 혈마의 생기는 바로 이것이다. 오직 푸른 빛만 눈에 들어온다.
오염된 생기이지만, 혈마 눈에는 여전히 푸른 빛으로 일렁거린다.
혈광이 아니라 자신이 꺼트려야 할 청광인 것이다.
청광멸이라는 명령은 사멸이라는 명령으로 바뀔 것이고, 여지없이 상대를 죽인다.
등여산과 홀리, 둘 중 한 명은 죽는다.
아마도 홀리가 죽을 가능성이 크다. 이미 등여산은 혈기에 완전히 물들었다. 살인을 밥 먹듯이 한다는 것은 이미 혈기가 골수까지 스며들었다는 뜻이다.
아직 인성이 남아있는 혈마, 홀리가 감당할 수 없는 혈기다
두 사람이 부딪히면 홀리는 단숨에 무너질 것이다.
홀리가 쓸 수 있는 유일한 무기, 구혼음소는 쓰지 못한다.
구혼음소를 읊기 전에 이미 혈기가 준동해서 혈마를 덮쳐갈 것이 분명하다.
‘후후후! 후후!’
호발귀는 웃고 또 웃었다.
멀쩡한 정신을 가진 상태에서 혈마의 능력을 발휘하면 세상에 못 할 일이 없을 것 같았는데……
뭐 하나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앉은 자리에서 꼼짝할 수가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법은 딱 하나뿐이다.
자신이 혈마가 되는 걸 감수하면서 혈기를 뽑아내는 것뿐이다.
혈기를 뽑아내면 뭐하나? 또 사용하면 그만인데. 그러니 이번 생기격타는 완전히 통로를 막아버리는 방식이어야 한다. 가능 여부는 해봐야 아는 것이고.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이 부분, 생기의 통로를 완전히 막아버리는 데까지는 시간이 약간 더 있다.
홀리, 도천패, 당홍, 해자수까지는 문제없다.
그들의 혈기는 뽑아본 적이 있으니까, 또 해본다. 자신의 혈기가 그들에게 주입되면 어쩌나? 어차피 혈마가 되는 것…… 지금보다 나빠질 것도 없다.
등여산의 혈기는 뽑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부분도 시간이 조금 있다. 일단, 등여산을 자신이 있는 곳까지 데려와야 하는데…… 딱 그만큼 시간이 있다.
“후후!”
호발귀는 웃었다.
밀실에 있으나, 세상 밖으로 나오나 여전히 마찬가지다.
홀리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음성을 들은 게 고작인데, 그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한다.
도천패, 당홍은 얼굴도 보지 못했다.
이게 사는 것인가? 이건 산다고 할 수 없다. 죽지 못해서 버티는 것이지.
“귀검.”
“네.
“철석을 준비해 주세요.”
“또 개를 시험하시려고?”
“은밀한 동굴을 찾아주시고. 저 갱도는 안 됩니다. 균열이 많아요. 기왕이면 암반에 쌓인 동굴을 찾아주시고…… 동굴 안에 철석을 단단히 박아주세요.”
“뭘 하시려는지?”
“날 묶어야겠어요.”
“네에?”
“이제 끝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일. 다섯 사람을 한 자리에 모아야 합니다.”
귀검은 미간을 살며시 찡그렸다.
호발귀가 말하는 다섯 사람이 누군지 짐작된다. 한데 그들은 무슨 수로 한자리에 모으나. 가당치도 않다. 한 사람, 해자수는 불러올 수 있을 것 같다.
호발귀가 말했다.
“가능한 빨리해주세요. 내가 도망갈 수 없어야 합니다. 완벽한 혈마가 되었을 때도 도망갈 수 없는…… 하하! 천신도 가둘 수 있다면 좋을 텐데요?”
“해보겠습니다.”
귀검이 침중하게 대답했다.
호발귀는 다섯 명을 한자리에 모을 자신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을 어떻게 모을지 전혀 말하지 않고 있다.
일단, 자신을 묶고 나면 말을 해줄 것이다.
“참! 철삭은 네 개가 아니라 일곱 개를 준비하세요.”
“일곱 개요? 어디 어디 묶으시려고?”
“아마도 혈마라면 사지를 묶는 정도는 안 될 거예요. 팔다리를 묶어봤자 사지를 뜯어내고 도주할 수 있으니까. 혈마는 그러고도 남을 놈입니다.”
호발귀가 혈마를 마치 남이라도 된 듯이 말했다.
“사지에 하나씩 네 개. 목에 한 개. 몸통에 두 개. 이 정도는 되어야 도주하지 못할 것 같은데. 더 좋은 의견이 있으시면 말해주세요. 상의 없이 그냥 준비해 주셔도 됩니다.”
“그렇게까지!”
“하하하! 상대가 혈마에요.”
“혈마가 되실 생각이십니까?”
“다섯 명을 건드립니다. 그 정도면 혈마가 되지 않겠어요? 더 욕심을 부리면 도둑놈이죠. 저도 양심은 있어요. 하하하!”
‘주군, 혈마가 될 생각이다! 생기로…… 생기격타를!’
귀검은 호발귀의 뜻을 이해했다.
평소 같으면 만류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가, 주변 사람 모두가 죽는 길로 들어섰다.
지금은 무어이라도 해야 할 때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해보겠습니다.”
귀검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