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七章 인식혈권(認識血圈) (3)
호발귀는 이령귀화를 최대한 넓혔다.
이령귀화는 사권 너머로 뻗어 나가지 못한다. 혈기가 닿는 범위가 생기가 닿는 범위다. 혈기가 탐색하지 못하는 부분은 생기도 탐색하지 못한다.
혈기와 생기는 탐색 범위가 같다.
이령귀화로 생물체를 쫓아내면서 갱도를 빠져나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을 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생기가 말해준다.
- 여기로 가세요.
- 여기가 다른 곳보다 살 수 있는 가능성이 큽니다.
생기가 말해준 곳은 갱도가 균열된 곳이다.
폭발로 인해서 갱도에 균열이 일어났다. 그 균열을 타고 빗물이 스며들고, 눈 녹은 물이 흘러들었다. 또 그동안 혈기가 끌어들인 많은 동물도 길을 뚫어놨다.
족제비가 밀실까지 들어오면서 길을 뚫고 왔다. 뱀도 길을 뚫었다.
그놈들은 한 방향에서만 온 게 아니다. 갱도 사방에서 동물들이 모여들었다.
그놈들이 오면서 각기 길을 뚫었는데, 그 길이 탈출로가 되었다.
물론 그 길 자체만으로는 쓰지 못한다. 겨우 손목 하나 들어갈 정도의 작은 길에 불과하다. 또 그 길도 곧 붕괴되어서 막힌 길이 많다. 다만 한번 뚫렸던 길이기 때문에 흙이 무르다.
생기는 그런 길들 중에서 탈출에 가장 쉬운 길을 찾아낸다.
흔히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직감이라는 것이다. 영감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스읏!
영감이 작동한다.
호발귀는 생기가 알려준 균열 틈으로 이령귀화를 밀어 넣었다.
안에 생명체가 있는지 살핀다. 없으면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면 퉁겨낸다.
갱도에서 움직이자 혈권에 걸려드는 생명체도 종종 생겼다.
혈권에 걸려들면 호발귀는 인정사정 보지 않고 구뢰마권을 쳐냈다.
구르르릉! 꽈앙!
생명체가 구뢰마권에 맞아서 박살이 났다.
구뢰마권에 맞아 죽는 것과 혈기에 죽는 것은 죽인다는 의미에서는 똑같다. 하지만 생기격타로 죽이는 것이 싫다. 혈기의 움직임을 아예 막아버릴 생각이다.
구뢰마권을 쳐내면 역천금령공을 터트려서 균형을 맞춰야 한다.
구르르릉! 꽈앙! 꽈앙!
구뢰마권과 역천금령공이 각기 약간의 시간 차이를 두고 터졌다. 하지만 듣는 사람은 이 소리가 연이어 들린다. 바깥에서는 일제히 일어난 소리처럼 들릴 것이다.
당연히 땅이 울린다. 진동이 일어나고 수많은 동물이 놀라서 도망간다.
이런 일이 지표면에 가까워지면서 더욱 자주 일어났다. 특정하게 일정한 시간을 두고 친 것은 아니다. 혈권으로 기어들어 오는 동물이 많아져서 그렇다.
사권으로 감지한 동물은 이령귀화로 툭툭 쳐냈다.
놈들은 깜짝 놀라서 부리나케 도주했다. 위험을 감지하는 순간 본능적으로 도주한다.
사권에서는 구뢰마권을 터트릴 이유가 없다.
문제가 있다. 사권에 있는 동물을 이령귀화로 감지하고 쳐내기는 한다. 하지만 사권의 범위가 너무 넓어서 생기를 모두 다 막아낼 수 없다.
현재, 호발귀는 이령귀화를 폭넓게 펼치지 않고 있다. 갱도를 뚫고 있어서 오직 갱도 쪽에만 집중해서 이령귀화를 펼친다.
그 사이에 뒤, 혹은 옆에서 쥐나 뱀들이 끼어든다. 무심히 혈권으로 들어선다.
이것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생기가 감지되면 무조건 구뢰마권을 쳐낸다. 가차 없이 죽인다.
동물을 이유 없이 잔인하게 죽는 것이 못마땅하지만, 말했다시피 한순간이라도 혈기가 전신을 지배한다는 게 싫다
혈기를 전혀 쓰지 못하는 상태로 만든다.
그래서 같은 죽음일지라도 자신이 직접 친다.
호발귀가 한발 앞서서 구뢰마권을 터트리면, 혈기는 잠자코 지켜본다. 혈기는 생기가 나서는 것을 용인한다.
아니, 원칙적으로 생기를 앞세운다. 생기가 밖으로 나갔다가 오염되어서 돌아오면, 혈기에 속하게 된다.
호발귀가 무공으로 생명체를 쳐내지만 한순간이라도 실수하면 혈기가 된다.
혈기 입장에서는 나쁘지 않은 기다림이다.
이것은 생각할 줄 아는 사람 입장에서 말한 것이고…… 혈기의 목적은 푸른 빛을 꺼뜨리는 것이지 살생이 아니다.
이것은 분명히 다르다. 푸른 빛을 꺼뜨린 결과가 살생인 것이다. 살생이 목적은 아니다. 그러니 생기가 푸른 빛을 꺼뜨린다고 하면 혈기는 굳이 나설 이유가 없다.
청광멸(靑光滅)을 생멸(生滅), 사멸(死滅)로 받아들인 것은 인간이다.
실제로 청각멸은 생멸이다. 사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이게 어떻게 보면 언어의 유희 같은데, 혈기가 의도하는 바와 인간이 받아들이는 면은 엄연히 다르다. 결과로 죽음이 일어날 뿐이다.
만약 청광멸, 푸른 빛을 꺼트렸는데 여전히 살아있으면 어떻게 되나? 당연히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혈기는 생명을 끊지 않는다. 청광멸이면 족하다.
스읏!
이령귀화를 흘려서 사권을 파악했다. 아무것도 없다. 뚫고 나가도 된다.
호발귀는 갱목을 다듬어서 만든 나무 삽으로 갱도를 파 들어갔다.
어디를 어떻게 파야 할지는 생기가 말해준다. 이령귀화가 지시해준다. 그러니 그는 본능대로 삽질만 하면 된다.
쓱쓱! 퍼퍽! 퍼어억!
드디어 나무 삽이 땅을 뚫고 올라섰다. 텅 빈 허공을 찔렀다.
파아아앗!
작은 구멍을 통해서 별빛이 쏟아져 내려왔다.
별이 밝다. 이게 몇 달 만에 보는 빛인가! 바깥은 어두운 밤인데도 대낮처럼 환하다. 눈이 실릴 정도로 밝다. 세상이 이렇게 밝았나? 밤이 이렇게 밝았었나?
호발귀는 작은 구멍을 통해서 들어오는 신선한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켰다.
물론 이 순간에도 이령귀화는 계속 펼쳤다.
사권 안에 사람이 있는지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없다.
그가 갱도에서 나오는 시간을 모두가 축복해 주는 듯하다.
완전히 갱도를 벗어난 건 아니지만, 호발귀는 최대한 바깥 공기를 즐겼다.
세상이 이렇게 좋은 거였구나!
손목이 들어갈 정도의 작은 구멍은 아주 쉽게 넓힐 수 있다. 나무 삽으로 몇 번만 투닥거리면 금방 몸을 빼낼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호발귀는 밖으로 나가기 전에 다시 한번 생기와 혈기를 점검했다.
혈기와 역천금령공을 같이 일어나도록 묶고, 생기와 이령귀화를 같이 묶는다. 원래는 진기 무공이지만 생기와 더불어서 일어나도록 변형시킨다.
한편으로는 이령귀화와 역천금령공을 동시에 휘돌린다.
두 무공이 물레방아가 되어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휘돈다. 이 작업은 생기와 혈기를 끊임없이 일으키는 작업에 속한다.
다만 혈기는 잠들어 있고, 생기는 생생하게 활동을 한다.
호발귀가 눈을 뜨고 있을 때도, 잠들어 있을 때도 생기가 항시 운영된다.
어느 한순간이라도 이 작업이 멈추면 당장 혈마로 변한다. 그러니 매우 중요한 순환이다.
세상에서 혈마가 된다는 것은 영원히 호발귀로 돌아올 수 없다는 뜻이다.
바깥세상에는 생기가 엄청나게 많다. 사람과 가축이 모여 있을 것이다.
그들 틈으로 혈기가 뛰어들면 걷잡지 못한다.
혈기가 혈기를 불러일으키고 또 혈기로 불러일으키고…… 꺼트릴 생기를 찾아서 끊임없이 움직인다. 이것을 어떻게 감당하나. 생기가 돌아올 틈이 없다.
누군가 자신을 억제해 줄 때까지 살생은 계속된다.
그러니 생기와 혈기의 순환, 이령귀화와 역천금령공의 순환은 한시도 멈춰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명심할 것, 잠들어 있을 때는 사권을 탐색하지 못한다. 생명체가 들어서는 것을 막지 못한다. 그러니 잠자리는 반드시 생기가 스며들 수 없는 곳을 택해야 한다.
한 마디로 세상 밖으로 나가더라도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는 없다.
밖으로 나가서 제일 먼저 찾아야 할 사람이 등여산, 홀리, 해자수다. 그들의 생기를 살펴봐야 한다. 하지만 아내와 해자수를 만나도 손 한 번 잡지 못한다.
상황이 이러니 그 세 사람을 만나도, 생기가 문제가 생겼어도 몸에 깃든 혈기를 뽑아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혈기를 뽑아내려면 생기격타를 해야 한다. 생기로 생기를 쳐야 한다. 그러면 오염된 혈기를 뽑아낼 수 있지만, 자신의 생기는 즉시 오염된다.
이제 마지막 한 조각 광목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것마저 오염되면……
생기격타가 아닌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데, 방법을 못 찾겠다.
일단 나가보자!
‘일이 잘못돼서 혈마가 된다면 방법이 없는데…… 이령귀화, 널 믿는다!’
참 웃기는 일이다.
무공의 최고봉을 이룬 무인들은 그래도 생기를 얻겠다고 발버둥 치고 있다.
생기는 인간들이 창안하고 발전시킨 무공들을 장난감처럼 짓부순다. 그런데 정작 생기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다시 인간들이 창안한 무공에 도움을 받는다.
혈마무공은 혈마가 혈기 제어에 도움이 되는 공부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이 무공들이 생기를 건드리기도 하지만 혈기를 제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혈마가 이토록 위험한 무공을 왜 남겨 놓았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호발귀는 나무 삽을 들었다.
퍽! 퍼억!
마지막 구멍을 뚫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간다!
호발귀는 작은 구멍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하지만 그때부터 저절로 긴장이 밀려들었다.
일단 이령귀화부터 주시했다. 바싹 긴장한 상태로 생기를 이끌었다.
츠츳! 츠츠츠츳!
사권을 계속 살피면서 움직였다. 온 신경을 써서 생기를 찾았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긴장감이 몰려왔다.
중원에서 살아가는 모든 시간을 이런 식으로 긴장할 수는 없다. 어느 순간에는 본인 스스로 무뎌져서 물레방아의 순환을 십분 믿는 시기가 올 것이다.
그때가 위험하다. 그때도 긴장을 완전히 놓으면 안 된다. 실낱같은 긴장이라도 항상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츠츳! 츠츠츳!
이령귀화를 유지하며 조심스럽게 구멍 밖으로 상반신을 내밀었다. 순간,
“웃!”
호발귀는 깜짝 놀랐다. 그래서 즉시 갱도 안으로 몸을 다시 들이밀었다. 너무 당황해서 지금 당장 몸을 빼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너무 놀랐다.
방금 이령귀화가 짚은 생기는 어마어마하게 컸다.
기본적으로 동물이 가진 생기는 같다. 쥐가 가진 생기나 인간이 같은 생기나 강도는 똑같다. 쥐가 가진 생기와 곰이 가진 생기가 다를 리 없다. 똑같다.
하지만 부피는 다르다. 쥐는 작고 곰은 크다. 덩치에 비례해서 생기의 크기도 달라진다. 쥐는 작은 덩어리고, 곰은 집채만큼 큰 덩어리다.
방금 호발귀가 찾아낸 생기는 쥐보다 스무 배, 서른 배는 컸다.
인간이다.
밀실 안에서는 이처럼 큰 생기를 만져보지 못했다. 처음으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생기를 만났다.
문제는 생기의 반응이다. 청광이 너무 커서 갑자기 훅 빨려 나가는 느낌이었다.
뭐라고 할까? 혈기까지 일어나는 느낌이라고 할까?
죽여!
당장 살인 명령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강력한 살심이 불쑥 치솟았다.
혈권이 아니면 혈기가 일어난 적이 없었다. 사권에서 생기를 더듬었을 뿐이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혈기가 따라 올라온 느낌이었다.
“후욱! 후우욱!”
호발귀는 숨을 크게 쉬면서 마음을 가다듬었다.
인간의 생기!
적응해야 한다. 사권에서 인간의 생기를 만난 후에도 밀어낼 수 있어야 한다. 차분하게.
스읏!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이령귀화를 유지하면서 생기를 탐색했다. 상반신을 들어 올렸다.
파앗!
사권에서 커다란 생기 덩어리가 찾아졌다. 역시 엄청나게 컸다.
이번에는 생기를 온전히 느꼈다 이 생기가 인간인 이상 언제까지고 도망 다닐 수는 없다.
텅!
생기에 실린 이령귀화를 푸른 빛에게 던졌다.
순간 푸른 빛이 깜짝 놀라서 움직였다. 화들짝 일어서는 듯했다. 하지만 생기는 짐승처럼 곧바로 도주하지 않았다. 벌떡 일어선 상태에서 머뭇거린다.
그렇구나! 인간은 도망가지 않는구나. 어쩌면 반대로 거슬러 올 수도 있겠는데?
인간은 동물처럼 위험에 예민하지 못하다 예민한 사람도 있겠지만 다소 둔감한 편이다. 어쩌면 위험을 예감했어도 버티고 있을지 모른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행동한다.
‘음!’
호발귀는 난감해졌다.
상황이 이렇다면 이령귀화를 좀 더 강하게 쳐내면 어떨까? 생기격타가 안 되도록 충분히 주의하면서 오직 이령귀화로만 타격을 가하는 것으로……
스으읏! 타앙!
진기를 조금 더 강하게 실어서 이령귀화를 재차 던졌다.
이번에는 생기가 훌쩍 뒤로 물러섰다. 그는 깜짝 놀라서 다른 생기까지 데리고 물러섰다.
옆에 다른 생기가 있다는 것은 호발귀도 알지 못했다.
사권 밖에 있었기 때문이다. 두 청광은 그야말로 한 걸음 혹은 두 걸음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 명은 발견했고, 다른 한 명은 발견하지 못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만 확인한다.
어두운 밤이라서 혈권과 사권의 거리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겠다.
밝은 대낮에 다시 한번 파악해 보고, 그런 다음에 움직일 생각이다.
‘오늘은 아무래도 불안해.’
스읏!
호발귀는 다시 갱도 안으로 들어갔다.
급하지 않다. 세상으로 나가는 것은 서둘지 않아도 된다. 오늘 저녁은 갱도 안 밀실에서 편히 지낼 생각이다. 혈권 안에 생명체가 들어와도 쥐나 뱀일 뿐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