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七章 인식혈권(認識血圈) (2)
맹렬히 몰아치던 눈보라가 한결 순해졌다. 바람은 여전히 차갑다. 하지만 살갗을 에일 정도는 아니다. 이 정도면 충분히 견딜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도 밤이 되면 여전히 몸이 얼어붙는다.
낮에 따뜻한 게 어딘가. 가끔은 더워서 겉옷을 벗을 때도 있으니 봄이 다가오고 있는 게다.
꽝!
또 울림이 일어났다.
전에는 그저 귓전을 앵앵 울리는 모깃소리처럼 작은 소리였는데, 요즘은 천둥소리처럼 커졌다. 거기에 땅을 울리는 빈도가 잦아졌다. 거의 반 시진에 한 번씩은 울린다.
‘또? 더 가까워졌어.’
귀검은 미간을 찡그렸다.
“진원지는 갱도가 맞습니다.”
“어디쯤이냐?”
혈마가 갱도에 묻힌 것은 확실한데, 어디에 묻혔는지는 모른다. 한창 싸우는 중에 화약이 터졌으니까.
“그것까지는…… 소리가 너무 울립니다.”
“알았다.”
귀검은 눈살을 좁혔다. 상황이 너무 염려스러워서 찌푸려진 미간이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이곳에는 땅굴 전문가들이 득실거린다. 탄광이지 않나. 광부들처럼 땅에 대해서 많이 아는 사람도 없다.
그들 모두가 땅이 울리는 소리에 벌벌 떨고 있다.
진원지를 파악하려고 해도 좀처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은 여기서, 내일은 저기서 울린다. 어떤 때는 땅 전체에 넓게 퍼져 울린다.
광부들도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가서 주시해라.”
“넷!”
귀무살이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꽈앙!!
또다시 땅이 울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반 시진이라는 간격을 유지했는데, 오늘은 그 시간조차도 당겨진 것 같다.
쒜엑!
홀리가 신형을 날려서 다가왔다.
“들었죠?”
홀리가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겨우내 인상을 찡그리고 살았는데, 갱도에서 울림이 일어난 이후부터 부쩍 밝아졌다.
“갱도가 무너진 지 사 개월. 땅속에서 사 개월. 먹을 게 없을 텐데…… 어떤 모습일지 두렵군.”
귀검이 우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요. 호발귀가 누군지 알잖아요. 호호! 호발귀라면……”
“그 헛된 희망!”
귀검이 홀리의 말을 자르며 버럭 일갈을 내질렀다. 하지만 이내 감정을 추스르며 차분히 말했다.
“그 헛된 희망…… 인제 그만 좀 내려놓지. 누구라도 땅속에서 사개 월을 보냈다면 그는 이미 인간의 모습이 아니야. 더욱이 호발귀는 혈마 상태에서 묻혔어. 그만 포기해.”
홀리는 귀검의 말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귀검이 혈마를 주공으로 모셨다는 사실을 알았다. 귀무살 전체가 혈마를 주공으로 모신다.
귀검은 혈의검 소휘의 뜻을 받들고 있다. 다시 말해서 혈마에게 혈의검이 제일 충신, 제일 수하였듯이 호발귀에게는 귀검이 제일 충신, 제일 수하다.
귀검은 혈의검을 대신한다.
호발귀가 멀쩡할 때, 귀검은 충성을 바친다. 호발귀가 혈마가 되었을 때, 귀검은 목숨을 바쳐서라도 혈마를 죽인다. 귀무살을 총동원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인다. 혈마와 싸우는 게 아니다. 죽이는 것이다.
귀검은 누구보다도 이 일을 충실히 할 사람이다.
그런 점을 알기 때문에 홀리는 귀검에게 나쁜 감정을 품지 않았다. 오히려 귀검이 어떤 말을 해도 즐겁기만 했다.
“호발귀를 너무 모르시네. 호발귀는 어떤 난관도 이겨낼 사람이라니까. 지금까지 죽을 뻔한 고비가 몇 번인지 알기나 해요? 호호호! 틀림없이 멀쩡할 거예요.”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귀검이 갱도를 쳐다봤다.
“이것 좀 먹어봐요.”
홀리가 대나무 바구니를 내밀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원소절(原宵節: 음력 정월 대보름)이 한참 지났더라고요. 산에 있다 보니까 세월지 가는지 오는지도 모르고. 그냥 지나치기 섭섭해서 경단 좀 만들었어요. 원소절은 지났지만…… 국물이 따뜻할 때 먹어요.”
“경단도 만들 줄 아나?”
“그럼요. 경단 못 만드는 사람도 있어요?”
“음문촌은 원소절을 지내지 않는 것으로 아는데?”
“제 남편이 호발귀잖아요. 중원 사람. 그러니 저도 중원 문화나 풍습에 따라야죠?”
“후후!”
귀검이 찌푸려진 안색을 풀고 웃었다.
음문촌 여인들이 얼마나 사나운지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 홀리의 모습을 보고 입이 쩍 벌어질 수밖에 없다. 중원 여인이라면 일상이겠지만, 음문촌에서는 손가락질당하기 딱 좋다. 너무 나약하고 형편없는 계집이라고.
쿵!
지축이 울렸다.
“울림이 꽤 자주 일어나네요. 호호! 아무래도 나올 때가 다 된 거 같아요. 그렇죠?”
“도천패와 당홍은?”
순간, 홀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곧 우리한테서 벗어날 것 같아요.”
“내버려 둘 건가?”
“벗어나기 전에 구혼음소를 쓰려고요.”
“왜? 지금 쓰지 않고? 지금도 충분히 혈기가 충천한 상태인데.”
“이런 일이 없었으면 진작 썼죠.”
홀리가 갱도를 쳐다봤다.
“호발귀가 나오고 있잖아요. 그래서 최대한 지켜보기로 했어요. 우리한테 벗어나기 전까지는 참아도 될 것 같아서.”
“그러다가 구혼음소가 안 통하면?”
“그건 자신 없는데…… 저는 통할 거라고 믿어요. 틀림없이 통할 거에요.”
“통할 것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서…… 사용하면 돌이킬 수 없으니까. 사용하면 도천패는 분명히 죽을 거예요. 언니는 여자라서 통할지 모르겠는데…… 통하면 다행이지만 안 죽으면…… 남편을 잃은 혈마. 그 뒤가 어쩔지는 짐작되잖아요?”
“그래서?”
“이래저래 겁나서 못 쓰는 거죠.”
홀리가 환하게 웃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 것 같으냐?”
“글쎄요? 아직은 멀쩡해요. 쌍학을 수련할 때는 혈마가 되는데, 아직은 그래도 멀쩡하게 밥 먹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귀무살이 멀쩡하잖아요.”
홀리의 안색은 곧 어두워졌다.
억지로 웃음을 짜내고 있지만, 진심에서 우러나지 않는 거짓 웃음은 오래 남지 않는다.
귀검은 혈마를 죽일 수 있다.
혈의검의 진전을 이었다면 귀검도 구혼음소를 알고 있다. 혈천방주가 아는 구혼음소, 죽음의 구혼음소를 읊을 수 있다. 거기에 귀무살을 이용한 또 다른 방법이 있다고 했다.
두 번째 방법은 귀검 자신도 확신하지 못한다.
구혼음소가 통하지 않을 때, 아무것도 할 것이 없을 때, 손 놓고 지켜보느니 무엇이라도 해보자 하는 심정에서 펼치는 ‘조악한 공격’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말이 귀검 입에서 나왔다.
웬만큼 자신 있지 않고는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홀리가 말했다.
“두 사람이 아직 귀무살을 치고 있지 않으니까, 지금까지는 살인 충동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거잖아요. 혈기가 충천하면 귀무살은 남아나지 않을 거예요.”
“그때 구혼음소를 쓸 건가?”
“그래야죠. 귀무살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이제는 늦었다는 거니까. 발작하는 건 막아야죠. 그때는 정말 어떻게 할 수 없잖아요. 언니라고 해도.”
홀리가 우울하게 말했다.
홀리는 도천패와 당홍의 상황을 귀검에게 말해주었다.
두 사람이 생기를 쓰기 시작한 이상, 혈기로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혈기가 일어나면 주변 사람들을 공격한다.
귀무살을 두 사람에게서 멀리 떼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살인 충동을 참는 것과 살인할 사람이 없어서 충동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다르다고 봤다.
홀리는 두 사람이 움직일 필요가 없게끔 신경을 썼다.
두 사람에게 필요한 식량을 홀리가 직접 가져다주었다. 두 사람에게는 사냥을 물론이고, 주변을 산책하는 것조차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좋게, 비위 상하지 않게 내용을 다듬어서 말했다.
쌍학을 만족할 정도로 수련한 후에도 혈기를 느끼지 못한다면 진심으로 사과하겠다고. 다만, 그때까지만 자신의 뜻을 따라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도천패와 당홍도 그 정도 부탁은 들어주었다.
두 사람은 아직 혈마가 아니다. 생기에 다소 난폭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홀리를 아낀다.
그런데 상황이 급변했다.
언제부터인가 홀리는 두 사람에게 갈 때 생기를 일으켰다. 두 사람에게 나도 너희 못지않은 강자라는 의식을 심어주어야만 할 정도로 혈기가 강해졌다.
또 언제부터인가는 직접 식량을 전달하지 못했다.
식량을 일정한 장소에 놓고 가는 방식으로 전달 방법을 바꿨다. 혈기를 심하게 느껴서다. 그들의 혈기를 쫓아서 홀리의 생기마저도 들끓었다.
도천패와 당홍은 당연히 기분 나빠 했다.
사람을 죄인 취급한다. 우리가 벌레냐. 이따위로 하면 차라리 떠나겠다.
그럴 즈음, 땅이 울렸다.
두 사람도 호발귀가 나올 것 같은 분위기 속에서는 떠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기분 나쁘지만, 홀리 방식을 쫓아서 식량을 전달받았고, 거주지를 떠나지 않았다.
귀무살은 도천패와 당홍이 곧 혈마로 변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러면 불문곡직 자신들을 공격할 것이다. 말도 안 되는 무공으로 쳐죽일 것이다.
그래서 갱도 속 혈마 못지않게 두 사람도 경계한다.
일단 두 사람이 살겁을 저지르기 시작하면 귀무살은 일절 저항하지 않고 사방으로 흩어진다. 괜히 멍청하게 서 있다가 혈마의 밥이 될 수는 없다.
일단 사방으로 흩어져서 삶을 도모한다.
“내가 한 실수를 반복하지 마라.”
귀검이 차갑게 말했다.
“최대한 신경 쓰고 있어요.”
홀리도 차분하게 대답했다.
귀검은 구혼음소를 사용할 기회가 몇 번 있었다. 호발귀가 혈마인 것을 알아봤다.
아니, 혈마는 아니다. 혈마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몸부림친다.
구혼음소는 그때도 통한다. 그 당시에, 호발귀와 부딪쳤을 때, 혈의검의 구혼음소를 읊었다면 혈마는 죽었다. 그러니 귀검에게는 적어도 서너 번쯤은 호발귀를 죽일 기회가 있었던 셈이다.
귀검의 첫 번째 실수는 구혼음소가 언제까지고 통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완전한 혈마가 된 후에도 구혼음소가 통한다. 혈마를 죽일 수 있다.
이런 믿음은 깨졌다. 귀검이 직접 구혼음소를 읊은 것은 아니지만, 등여산이 그리고 홀리가 읊어봤다고 한다. 똑같은 구혼음소인데, 통하지 않았다.
혈마가 갱도를 뚫고 나온다면 막막해진다. 구혼음소가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매우 크니까.
지금 귀검은 구혼음소는 통할 때 쓰라고 경고한다.
홀리가 그들에게 사용하지 않으면, 귀검이 직접 나서서 사용할 것이다. 혈마를 세상 속으로 보낼 수는 없으니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혈마가 더 위험하니까.
두 번째 귀검의 실수는 혈마를 잘못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는 호발귀가 혈마 상태를 겪은 후에 다시 호발귀로 돌아올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게 아니면 혈마는 왜 혈마록을 남겼단 말인가!
자신은 그토록 죽으려고 발버둥 쳤으면서 후인에게 자신과 똑같은 상태를 물려줄 수 있는 것인가!
귀검은 호발귀를 믿었다기보다는 혈마를 믿었다.
그래서 홀리가 막무가내로 호발귀를 믿으면 화가 난다.
홀리의 무지에 화가 나기도 하고, 자신의 잘못된 희망에 대해서도 화가 난다.
그런 믿음 때문에 호발귀를 끝까지 지켜봤다. 구혼음소를 쓰자는 충동이 불끈 일어나도 꾹 눌러 참았다.
지금은 마음껏 터트려도 혈마를 죽일 수 없는 처지가 되었지만.
도천패와 당홍에게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는다. 그들이 혈기를 쓰면 당장 죽인다. 홀리가 죽이지 않으면 귀검이 죽인다. 귀무살을 한 명만 죽여도 뛰어 내려간다.
“너는 어떻게 하려고? 괜찮아?”
귀검이 홀리를 보면서 말했다.
“나도 이대로 계속 생기를 쓰면 안 될 것 같긴 한데 방법이 없으니까. 그래도 난 귀검이 있으니까 조금 안심이 되긴 해요. 구혼음소가 여자에게도 통할지 모르겠는데.”
“책사를 찾으라니까.”
귀검이 말했다.
구혼음소를 알고 있는 사람이 한 사람 더 있다.
등여산! 그녀는 혈의검의 구혼음소가 아니라 음문촌, 혈마후의 구혼음소를 알고 있다. 홀리를 죽이지 않고, 혈마후의 노예로 만들 수도 있다고 본다.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일단은 써보는 게 좋지 않겠나.
귀검은 홀리가 말해줬기 때문에, 그녀가 생기를 쓴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등여산을 찾으라고 조언했다.
옛날 같으면 이런 일은 아주 쉽게 할 수 있었다.
혈천방이 가진 정보력을 이용하면 등여산의 행방쯤은 눈감고도 찾아낸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다. 귀검은 혈천방의 정보력을 이용하지 못한다
천살단의 정보는 더더욱 이용하지 못한다. 아무런 연줄도 없다.
“책사를 찾아. 너까지 죽이기는 싫다.”
“알았어요. 경단 먹어요. 벌써 많이 식었어요.”
홀리가 쓰게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