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七章 인식혈권(認識血圈) (1)
‘생기가 존재를 드러냈으니까……’
혈기가 일어났을 때도 정신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장족의 발전을 한 셈이다.
생기, 일이라는 존재가 그만큼 커졌다.
푸른 빛이 번뜩일 때도 정신을 잃지 않고 지켜본다. 혈기가 죽이는 현상을 지켜본다.
즉, 죽이는 혈기와 지켜보는 생기가 구분이 생겼다는 뜻이다.
혈기가 일어나면 혈마가 되고, 혈마가 잠들면 호발귀가 되는 몸이 아니다. 혈기가 일어나도 지켜볼 수 있고, 호발귀로 존재하는 와중에도 혈기를 느끼는 몸이 되었다.
그렇다고 혈기를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아직은 혈기에 손도 대지 못한다.
혈기와 생기가 감지하는 일정 범위 속에서 푸른 빛이 넘실거리면 당장 혈기가 일어난다.
그리고 푸른 빛을 꺼트린다. 이령귀화를 떠올리고 있어도 말릴 수 없는 현상이다.
다만 이때도 푸른 빛이 일어나는 소멸하는 과정은 지켜본다.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찍찍! 찌익! 찍!
푸른 빛이 일어났다.
쥐가 무심코 혈기 범위 안으로 들어섰다.
생기격타를 당한 쥐들이 밀실로 오면서 굴을 많이 파놨다. 그 속으로 어떤 놈이 무심히 기어들어 왔다.
파앗!
당장 혈기가 일어났다.
호발귀가 혈기가 일어나고 잠드는 것을 알지 못한다. 몸으로 느낄 사이도 없이 단숨에 뇌를 장악해버린다.
빡 정신을 잃어버렸다가 다시 정신을 차리면 끝난다. 그 사이에 혈마가 다녀갔다.
정신을 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하나 남은 생기마저 혈마가 되면 영원히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그런데 이제는 느낀다.
파파팟!
혈기와 연동한 역천금령공이 일어났다. 역천금령공과 이어진 이령귀화도 동시에 일어났다.
이런 과정을 통해야만 정신을 잃지 않는다.
모든 것은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호발귀는 일어나는 과정을 느끼지 못한다. 모든 일이 끝난 후, 혈기가 이미 전신을 장악한 후에야 알게 된다.
스읏! 퍼억!
이령귀화 계열의 무공, 구뢰마권이 즉시 터졌다.
구뢰마권이 터지지 않으면 무공이 일어나지 않는다. 역천금령공 계열의 무공은 임의로 펼치지 않는 한, 터지지 않는다.
혈기가 쥐를 잡아서 산채로 찢어버린다. 진기로 이루어진 무공이 아니라 혈기가 잡아 죽인다.
혈기, 생기의 범위 안으로 푸른 빛이 몰려들면 살생을 막을 방법이 없다.
‘그래! 그거야!’
호발귀는 혈기의 생존 방식에 주목했다.
밀실에 음식이 떨어진 지 오래되었다. 그런데도 아직 살아있다. 굶지도 않았다. 시쳇말로 잘 먹고 잘산다. 혐오스러운 음식일지언정 배를 곪지는 않는다.
쥐, 뱀, 두더지, 족제비……
그놈들은 밀실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밀실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혈기가 먹이를 찾아 나선 끝에 발견한 것이다.
호발귀는 이 두 범위에 이름을 붙였다.
혈기가 즉각 반응하는 범위를 혈권(血圈)이라고 이름 붙였다. 혈권 안에서는 혈기가 왕이다. 생기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혈권에 들어선 생명체는 무조건 죽는다.
여기서 호발귀는 혈기와 타협을 했다.
혈기 방식으로 죽이는 것이 아니라 생기 방식, 무공으로 죽인다.
죽이지 않을 수는 없다. 생기가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즉시 혈기가 튀어 나간다.
아니, 말이 잘못되었다. 타협이라는 말은 오만이다. 감히 혈기와 타협을? 혈기는 타협하지 않는다.
죽이는 대상을 가로챈다. 혈기가 죽이기 전에 미리 먼저 나서서 죽인다. 이 말이 맞다.
이 차이점은 잔인하게 죽이느냐, 비교적 깨끗하게 죽이느냐 하는 것밖에 없다.
생존에 위협이 가해졌을 때, 혈기는 먹을 것을 찾아 나선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눈이 시야를 넓혀서 보이지 않는 구석까지 뒤진다. 생기를 찾는다.
이 범위…… 혈기가 스스로 찾아 나서는 범위, 혈권 밖에서부터 혈기가 탐색할 수 없는 경계까지의 범위에는 사권(死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언제든 혈기가 마음만 먹으면 죽일 수 있는 거리다. 다만 사권 살상은 혈기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느꼈을 때만 일어난다. 생존에 위협이 가해지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혈권과 사권에 생명체가 없으면 혈마는 영원히 잠들 수 있다.
호발귀가 주목한 것은 이 부분이다.
어쩌면 사람을 죽이지 않을 수도 있다. 혈마를 떨쳐내지는 못하지만, 같이 공존하면서도 사람을 죽이지 않고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낸 것인지도 모른다.
츠으읏!
이령귀화를 최대한 넓게 펼쳐냈다. 같이 일어난 역천금령공은 최대한 단전에 응축시켰다.
이령귀화와 역천금령공은 혈권 안을 단숨에 장악했다.
역천금령공을 단전에 응축시키자, 혈권 안에는 이령귀화만 넘실거렸다.
츠으으읏! 촤라라락!
호발귀는 이령귀화를 조금 더 넓혔다.
혈권을 넘어서 사권까지 뻗어냈다.
혈기가 한 일이라면 생기도 할 수 있다.
물론 생기격타가 이루어지면 생기는 단박에 오염된다. 혈기가 된다. 남은 생기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모르지만, 완벽히 혈기로 물들면…… 그때는 혈마다.
생기로 생기를 찾고자 한다.
혈권 속에서 찾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혈기가 찾으면 무조건 죽는다.
혈기가 잠자는 곳을 생기가 먼저 더듬는다.
생기가 푸른 빛을 발견했을 때, 그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역시 푸른 빛을 꺼트리라는 명령일까? 아니면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것일까?
이번 탐색은 매우 중요하다.
만약,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면 단지 생기를 사용하는 것만으로 오염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 된다. 생기가 밖으로 흘러나갔다가 오염될 물질과 접촉한 것이다.
스읏!
이령귀화가 푸른 빛을 잡아냈다.
이놈은 어떤 동물인가? 푸른 빛이 동그랗게 말려 있다.
이령귀화가, 생기가 생기를 찾아냈다.
호발귀는 소리의 울림을 예민하게 살폈다. 마음에서 어떤 소리가 울리나. 뇌는 어떤 명령을 받아들이려고 하나. 푸른 빛을 꺼트리라는 명령인가.
조용하다. 아무 명령도 흘리지 않는다.
‘일단 혈기에 앞서서 이놈들을 찾아내는 데는 성공했고…… 그러면.’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생명체를 찾았다고 좋아할 게 아니다. 이놈들은 혈기도 찾을 수 있다. 어쩌면 생기가 이미 찾았으니 혈기도 눈을 뜰지 모른다. 생기와 혈기는 한 몸이니까.
호발귀는 생기에 힘을 실었다. 이령귀화의 기운을 담았다. 그리고 기운이 돌돌 말린 쥐를 후려쳤다.
츠으으읏! 타악!
생기 타격! 생기격타와는 전혀 다른 생기 타격이 이루어졌다. 진기로 생기를 쳤다.
순간 푸른 빛이 깜짝 놀라서 후다닥 도망쳤다.
“됐어!”
호발귀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 질렀다.
이령귀화에 타격당한 쥐는 생기격타를 당한 것과는 전혀 다르다. 생기가 친 것이 아니라 진기가 쳤다.
생기는 오염되지 않는다. 터져나간 이령귀화는 다시 거둬지지 않는다. 터진 후에는 소멸해 버린다. 다시 몸 안으로 흘러드는 생기와는 다르다.
생기를 타격당한 쥐는 당장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생존 본능을 타격당했으니 당연하다. 깜짝 놀란다.
정신이 번쩍 든다. 뭔가 위험한 것이 다가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본능적으로 타격당한 부위와는 반대 방향으로 도주한다.
이것이 이령귀화가 한 일이다.
생기격타를 당하면 정작 타격당한 본인은 거의 알지 못한다.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면서 생기가 위축되기도 하고, 함양되기도 한다.
생기격타와 이령귀화 타격은 완전히 다르다.
“으음!”
호발귀는 역천금령공이 치솟는 것을 감지했다.
단전 속에 응축시켜 놓았지만, 이령귀화가 풀려나가지 역천금령공이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왔다.
호발귀는 즉시 무정삼절 제일식 멸천겁을 수공(手功)으로 펼쳤다.
꽝! 꽈아앙!
밀실 석벽이 좌장을 얻어맞고 움푹 파였다.
“이제 됐어!”
호발귀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몸 안으로 돌아온 생기는 전혀 오염되지 않았다.
단순히 바깥으로 흘러나가는 것만으로는 오염되지 않는다. 무엇인가 건드렸을 때, 다른 생물체의 생기와 직접 접촉했을 때 오염이 일어나는 것 같다.
혈권에 이어서 사권에 있는 생기도 밀어낼 수 있게 되었다.
이령귀화를 상시 운용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최소한 사람을 죽이지 않고 움직이는 방법은 찾아낸 것 같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이령귀화의 상시 운용이다.
하루 십이시진 끊임없는 집기(集氣).
단전도 아닌 척택혈에서 발기(發氣).
이것을 버틸 수 있는지 알아내야 한다.
혈마무공을 처음 접했을 때, 이령귀화와 역천금령공이 마치 물레방아 같다는 생각을 했다.
역천금령공은 양의 결정체다. 이령귀화는 음을 대표한다. 음양이 강력한 형태로 존재한다. 하나는 임맥, 하나는 독맥을 차지하고 끊임없이 진기를 휘돌린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진공이다.
혈기가 몸을 지배하는 순간부터 혈마무공은 굳이 펼치지 않아도 되는 잡공으로 전락했다.
실제로 혈마무공은 혈마가 창안한 무공이 아니다. 다른 마인들이 사용한 무공을 모아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이 묘하게 아귀가 맞아떨어진 것일 뿐.
역천금령공은 살천광마의 무공이다. 마영심도는 마도 호은초의 무공이고, 귀화미요공은 귀령문의 무공이다.
혈마무공 여덟 개, 표지에 기재된 투골지까지 아홉 개 모두가 타인의 무공이다. 혈마가 창안한 무공은 단 한 개도 없다. 이 중 혈기에 대항할 만한 무공도 없다.
솔직히 말하면 주치균이 수련한 무령환살공이 혈마무공보다 훨씬 강력하다.
이러니 혈마무공은 잊어버릴 수밖에 없다.
호발귀는 이령귀화의 효험을 본 순간부터 혈마무공을 다시 끄집어냈다.
혈마무공은 그가 잠들었을 때도 계속 운영된다
혈마무공은 물레방아다. 이령귀화와 역천금령공이 서로 꼬리를 물면서 돌고 돈다.
역천금령공이 낙하한다. 그 낙하하는 힘에 이끌려서 이령귀화가 위로 상승한다. 위로 솟구친 이령귀화는 원을 그리며 낙하하고, 그 힘에 반등한 역천금령공이 위로 솟구친다.
이 둘은 서로를 견인한다. 돌고 도는 힘이 자동으로 서로를 돌려준다.
호발귀가 숙면에 들어갔을 때도 두 공부는 서로를 견인하면서 계속 몸속을 휘젓는다.
호발귀가 할 일은 잠들기 전까지 공부를 유지하는 것이다.
눈을 뜨고 있을 때는 주의만 기울이면 된다. 두 공부가 탄력 있게 움직이도록 보살펴준다.
십이시진 운공하는 것은 가능하다. 척택혈에 뿌리는 둔 이령귀화가 잘 따라온다.
이 두 공부는 잘 운용되다가도 생기만 나타나면 충돌해 버린다.
꽈직! 꽈자자작!
역천금령공이 급하게 일어나면서 물레방아를 깨버린다. 당장 이령귀화를 밀어내면서 바깥을 뛰쳐나간다.
그 충격은 호발귀를 깨우기에 충분하다.
호발귀가 눈을 뜬다.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이령귀화와 역천금령공을 제어한다.
여기서부터 새로운 출발이다.
물론 그사이에 생기는 제거된다.
혈기가 단숨에 생기를 제압하고 생명체를 타격한다. 혈권 안에 들어온 생명체는 눈을 뜨고 있을 때나 잠자고 있을 때나 죽는 운명에 처해진다.
잠들어 있을 때, 생기가 나타나면 의식할 사이도 없이 제거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혈기에 의해서 잔인하게 죽는 것이다.
그러니 잠자리를 잘 정해야 한다. 사람이 다가올 수 없는 곳에서 잠을 청해야 한다.
일단 누가 되었든 사권 안에 들여놓으면 안 된다.
특히 혈권 안에 들어서면 등여산이나 홀리라고 해도 죽일 수밖에 없다.
눈을 뜨고 있을 때는 그래도 조금 낫다. 사권 안에 누군가가 들어서면 자신이 물러나도 되고, 상대를 밀어내도 된다. 이 부분은 혈기도 간여하지 않는다.
극심한 기아(饑餓)나 갈증처럼 목숨에 위협을 받는 상황이 아니면 혈기는 사권을 넘보지 않는다.
문제는 또 있다.
사권에 있는 자를 밀어낼 때, 사용된 이령귀화만큼 역천금령공을 흘려주어야 한다.
말이 흘려내는 것이지, 땅을 힘껏 격타하는 것과 같다. 이령귀화를 멀리까지 뿜어낼 때는 그만큼 많은 진력이 소모된다. 전력으로 상대를 후려친 것과 같은 힘이다.
역천금령공으로 땅을 치는 소리가 상대를 오히려 유인할 수도 있다.
거기까지 생각하면 답이 없다.
“됐어. 이제 나가자.”
호발귀는 휘휘 밀실을 둘러보았다.
등여산, 홀리, 해자수 때문에 나가기는 하는데…… 잘하는 일인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