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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마전인-380화 (380/500)

第八十六章 개벽도로(開闢道路) (5)

구십구 대 일로 싸워서 이길 수는 없다. 그런 방법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직 찾지 못했다. 일대일로 싸워서 평수를 이루는 관계에서 구십구 대 일이란 싸움은 말도 안 된다.

구십구 대 일로 싸워서 대등해질 방법도 없다.

온갖 방법을 강구해 봤지만, 워낙 차이가 크게 벌어져서 수평적인 관계를 유지할 방법이 없었다.

싸움이 시작되면 한순간에 승부가 났다.

일(一)이라는 존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구십구가 전신을 지배했다.

일은 여전히 수태음폐경 속에 존재하고 있지만, 구십구가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존재조차 드러내지 못했다.

아예 흔적도 없이 소멸해 버린 느낌이다. 하지만 구십구가 잠자고 나면 어김없이 드러나긴 한다. 그리고 그제야 아직도 소멸하지 않았구나 하고 느낀다.

그러면 싸우지 말아야 한다.

호발귀는 구십구와 일이 싸우지 않은 방법을 모색했다.

싸움이 벌어지면 어김없이 지니까, 그러면 싸우지 말아야 할 게 아닌가.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혈기와 생기는 싸우는 게 아니었다.

생기가 싸워서 밀려나는 것이 아니라 혈기가 일어나면 생기 스스로 존재를 감추는 것이었다.

혈기 더하기 생기는 호발귀다.

혈기와 생기를 따로 구분해서 생각한 것부터가 잘못이다.

혈기도 호발귀고, 생기도 호발귀다. 혈기가 일어난다고 해도 호발귀가 변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 생기가 거부할 리 있나. 아무 저항 없이 자리를 비켜준다. 아니, 혈기 속에서 생기도 춤춘다. 너무 존재가 미약해서 드러나지 않을 뿐.

현재 상황이 이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혈기와 생기가 각기 다른 존재라는 것을 확실히 인식시켜야 한다.

살인에 미친 혈마와 사람을 죽이지 않으려는 호발귀가 같은 인간일 수는 없다.

이 둘을 분명히 인식시켜야 한다.

어떻게? 파신금령술!

호발귀는 일월혈에 손가락을 댔다. 그리고 투골지를 일으켰다.

혈기가 일어나면 생기를 죽이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혈기를 죽이려고 했지만, 이제는 방법을 바꾼다.

오히려 생기를 죽이는 쪽이 훨씬 가능성이 크다.

생기를 죽이면 혈기도 죽는다.

생기를 죽이면 어떻게 되나? 진짜로 죽는다. 호발귀가 자진을 하는 것과 똑같다. 아니, 지금 자진을 하려는 것이다.

호발귀가 목숨을 끊으면 그게 자살이다.

일월혈에 투골지를 붙이고, 언제든지 진기가 튕겨 나갈 수 있도록 준비했다.

푸른 빛이 번쩍이는 순간…… 아니다!

푸른 빛이 보이면 그때는 이미 늦는다. 생기가 스러지고 혈마가 나타난 후이다.

그러니 푸른 빛이 어른거린다 싶으면 즉시 투골지를 튕겨낸다.

호발귀는 정신이 멀쩡할 때 자살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혈기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린 것은 혈기를 누를 수 있다고 생각해서다.

그리고 어차피 빠져나가지 못할 밀실에 갇힌 이상 급할 것도 없었다.

푸른 빛! 생기!

슈웃! 퍼어억!

투골지가 일월혈을 타격했다.

진기는 제대로 터져나갔다. 하지만 결과는 모른다. 투골지를 던진 순간, 호발귀는 사라지고 혈마가 나타났다.

“으윽!”

호발귀는 격한 신음을 쏟아냈다.

혈마가 잠잠해지고……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일월혈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진기는 제대로 터졌는데, 일월혈을 정확하게 가격하지 못했다.

일월혈에 손가락을 붙이고 있었는데도 지력이 옆으로 미끄러졌다. 혈마가 건드렸다.

하지만 투골지는 여전히 강력했다.

옆구리 늑골 뼈가 부러졌다. 장기에도 손상을 입었는지 열이 팔팔 끓는다.

“크윽! 이거…… 고생깨나 하겠네. 생으로 뼈를 부러트렸으니.”

호발귀는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자살을 멈출 생각은 없다. 앞으로도 오른손은 일월혈에 붙이고 살 생각이다. 그러다가 푸른 빛이 일렁거린다 싶으면 어김없이 진기를 퉁겨낸다.

물론 그러다가 혈기가 일어나지 않으면…… 푸른 빛을 잘못 본 거였다면 일월혈이 뚫린다.

자살이다.

어쩔 수 있나. 그것도 괜찮다. 이렇게 혈마로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

호발귀는 일월혈을 타격한 것 때문에 고생깨나 했다. 하지만 효과는 있었다.

구십구가 협상장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푸른 빛이 어른거리는 순간, 구십구는 슬쩍 일을 달랜다. 투골지를 전개하지 못하도록 사전 조치를 취한다.

무턱대고 생기를 누르고 들어설 때와는 다른 현상이다.

분명히 투골지를 해체하려는 시도가 있다.

혈기는 손에 모인 진기부터 풀어내려고 한다. 정확하게 일월혈을 타격하면 혈기도 존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안다.

분명히 신체를 점령하기 전에 한 가지 과정이 덧붙었다.

호발귀는 이런 상태를 혈기가 일의 존재를 의식하기 시작한 것으로 판단했다.

그렇다면 일을 살리면 어떨까?

일의 존재가 구십구의 존재만큼 강성해지도록 크게 존재감을 키우는 것이다.

일의 존재를 키우는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다.

살고자 하는 거다. 일의 본성은 살고자 하는 생기다. 그러니 생기를 더 크게 키운다.

여기에는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무작정 삶에 대한 의지가 강력하게 굳히면 구십구의 존재까지 함께 강성해진다. 일의 존재가 커지는 만큼 구십구의 존재도 더불어서 커진다.

일의 존재만 분별해서 키워야 한다.

그런데 막상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이미 이런 방식으로 생기를 혈기로부터 구분해내서 키우고 있지 않은가.

투골지!

혈마무공 겉표지에 은밀히 새겨진 투골지.

투골지를 이용해서 자살하려고 했고, 그러자 혈기는 당장 투골지를 의식했다.

투골지는 그만큼 자살에 용이하다.

혈마무공은 상황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일반인에게 과도(果刀)를 쥐여주면 과일 깎는 데만 이용한다. 하지만 전사에게 쥐어지면 당장 사람에게 던진다. 사람을 살상하는 무기로 활용한다.

똑같은 물체를 줬지만, 사람에 따라서, 혹은 상황에 따라서 이것이 되기도 하고 저것이 되기도 한다.

지금 호발귀에게 투골지는 자살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다.

투골지를 일으키는 순간, 생기와 혈기가 구분된다. 투골지가 존재하는 순간에는 생기가 활동한다. 혈기가 일어난 후부터 투골지는 사라진다.

투골지를 알게 되자 혈마무공도 재해석되었다.

혈마무공은 이령귀화와 역천금령공이 주축을 이룬다. 두 공부가 양쪽에 서서 쌍두사 형태로 움직인다. 하나의 몸에 전혀 성질이 다른 두 공부가 존재한다.

호발귀는 혈기와 상응하는 역천금령공을 단전에 넣었다. 그리고 성질이 다른 이령귀화는 수태음폐경에 위치시켰다. 정확히 말하면 척택혈(尺澤穴)로 몰아넣었다.

척택혈에 진기가 운집할 수 있나? 없다. 척택혈을 진기가 운집하는 혈이 아니라 지나는 혈이다.

진기의 통로일 뿐이지, 단전처럼 기가 모이는 곳이 아니다.

호발귀는 택(澤)이라는 글자에 주목했다.

수태음폐경 팔꿈치 안쪽을 척택혈이라고 부르는 것은 수태음맥기(手太陰脈氣)가 이곳에 모이는 것이 마치 물이 모이는 곳[澤] 같고, 이 혈의 위치가 척측(尺側)에 있다고 해서 척택혈이라고 명명했다.

팔굽 안쪽, 가로로 금이 간 정중앙.

진기는 척택혈에 고이지 않는다. 하지만 생기로 이끈 진기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생기는 몸 구석구석에 두루 퍼져 있다. 발가락에 모인 생기와 심장에 모인 생기가 다르지 않다. 똑같다. 생기는 몸 전체, 살과 근육과 뼈대와 물과 피가 있는 곳이면 모두 존재한다.

‘해보자. 해봐서 손해나는 것은 없어.’

어차피 밀실 안이다. 혈마가 되어서 미쳐 날뛰어도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츠으윽!

호발귀는 운공을 시작했다.

눈을 뜨고 있을 때, 호발귀로 존재할 때는 양공을 일으켰다.

단전에서는 역천금령공이, 척택혈에서는 이령귀화가 꿈틀거렸다.

역천금령공과 이령귀화를 동시에 일으켰다.

처음에는 잘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단전이 아닌 곳에서 이령귀화를 일으킨다는 게 쉽지 않았다. 온갖 노력을 기울여도 척택혈 단독으로 이령귀화를 일으킨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두 공부가 같이 일어났다.

역천금령공이 일어난 후에는 이령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역천금령공 없이 이령귀화 단독으로 일어서지도 못한다. 하지만 두 공부가 함께 일어서는 것은 가능했다.

어느 하나를 죽이지 않고 같이 일어선다.

단전에서 일어난 역천금령공이 왼손으로 운집되었다. 척택혈에서 일어난 이령귀화는 오른손에 운집된다. 그리고 두 무공 계열의 공부들이 터져나간다.

쒜엑! 쒜에엑!

왼손에서는 마영심도가, 오른손에서는 혈천도법이 피어났다.

이런 양의심공은 혈마무공을 수련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펼쳐냈었다. 당시에는 독맥에 이령귀화를 담았고, 임맥으로 역천금령공을 쏟아냈다.

쌍두사가 임독맥으로 갈라지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도 가능했다. 잘못된 것이 아니라 훌륭하게 조합되었다. 그러니 아무런 이상함도 느끼지 않고 ‘아! 이런 뜻에서 쌍두사 무공을 만들어냈구나’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은 전혀 다른 의미에서 두 무공을 함께 펼쳤다.

스윽!

오른손이 혈천도법 혈타조두를 그려냈다. 왼손 마영심도는 찌르는 칼인 혈타조두에 맞춰서 손목만 빙글 돌려서 원형 칼을 그려내는 마영난분(魔影亂盆)을 펼쳤다.

양의심공은 호발귀가 만들어가는 공부다. 양팔에 담긴 각기 다른 공부가 서로 방해받지 않고 상승 작용을 할 수 있도록 알맞은 조합이 필요했다.

예전 같으면 양의심공은 선택사항이었다. 펼쳐도 그만, 펼치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지금은 필수가 되었다.

혈기에 맞춰서 생기도 여전히 존재감을 드러내야 한다. 그러니 척택혈에 운집된 이령귀화는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왼팔이 쭉 뻗어서 찔러가고, 오른팔이 빙글 돌면서 쫓아간다.

위에서 내리치는 칼과 아래에서 올려치는 칼은 조합을 이룰 수 있다. 위에서 내리찍는 칼과 가로로 갈라치는 칼도 조합이 된다. 두 칼이 동시에 떨어져 내려도 된다.

호발귀는 이러한 조합들을 찾아 나갔다.

무공을 새롭게 연성하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혈기를 죽이는 방법이다. 아니, 혈기와 공존하는…… 사실대로 말하면 혈기에게 나도 좀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생기의 발악이다.

쒜엑! 쒜에엑!

밀실 안에서 칼바람 소리가 일어났다.

파앗!

생기, 푸른 빛이 떠올랐다.

순간, 오른손에서 이령귀화가 번뜩 빛났다.

혹시나 했던 생각이 맞았다. 이령귀화는 척택혈에 운집되었다. 아직도 단독으로는 일어서지 못하지만, 다른 혈처럼 산산이 조각나서 흩어지지도 않는다.

이령귀화는 생기에 붙어서 척택혈을 집으로 삼았다.

혈기는 이령귀화를 개의치 않았다. 늘 존재해 왔던 것이기 때문에 내버려 두었다. 이령귀화도 몸의 일부다. 생기와 혈기가 공존하듯이 혈기와 이령귀화도 공존한다.

무엇보다도 수태음폐경은 봉맥되어 있어서 유일하게 혈기가 침범하지 못한다.

츠으읏!

혈기가 뻗어 나가서 푸른 빛을 쳤다.

호발귀가 수련한 생기격타가 유감없이 전개되었다. 혈기가 쭉 뻗어 나갔고, 푸른 빛이 강력하게 두들겨 맞았다. 아니, 사실은 강력할 필요도 없다. 그저 건드리기만 해도 된다.

쭈륵! 쭈르르륵!

생기격타를 당한 쥐가 어둠을 뚫고 밀실 안으로 들어섰다.

여기까지…… 호발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혈기가 하는 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것도 이령귀화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의식할 수 있다.

쥐가 밀실에 들어선 순간, 이령귀화가 구뢰마권을 터트렸다.

우르릉! 꽈앙!

작은 쥐는 구뢰마권을 두들겨 맞고 석벽에 날아가 떨어졌다.

혈기는 이령귀화가 터트린 구뢰마권을 막지 않는다. 어차피 살상 무공이다. 혈기로 깃든 무공이 죽이나 생기가 담긴 무공이 죽이나 매한가지다.

이 순간, 구뢰마권에는 생기가 담겨 있지 않다. 순수하게 호발귀 본인의 진기로 쳐낸 것이다. 전혀 생기는 사용하지 않고 일반 무인의 무공으로 공격한 것이다.

살상을 일으켰지만 생기는 혈기로 물들지 않는다.

쥐가 죽으면 혈기는 가라앉는다. 주변에 생기가 없기 때문에 눈빛을 번뜩일 필요가 없다. 더욱이 이령귀화가 활짝 피어나 있기 때문에 군말 없이 소멸한다.

호발귀는 맑은 정신으로 돌아왔다.

쥐를 날로 먹을 필요가 없다.

피를 흘리고 죽은 쥐를 물이 흐르는 벽으로 가져갔다.

칼로 내장을 드러내고 껍질을 벗기고 단검에 꽂아서 구웠다.

쥐를 잡아 오기까지는 혈기가 한 일이지만 쥐를 요리하고 구운 것은 생기가 한 일이다.

혈기와 생기가 협상한 결과다.

생기가 번뜩일 때, 호발귀는 정신을 잃지 않고 생기를 지켜볼 수 있게 되었다.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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