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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마전인-375화 (375/500)

第八十五章 만연개래(蔓延開來) (5)

구 할 구 푼 대 일 푼의 싸움이다. 아흔아홉 명 대 한 명의 싸움이다.

싸움에 참여한 백 명은 능력이 똑같다.

일 대 일로 싸우면 절대로 승부가 나지 않는다. 어느 쪽도 우세하지 못하다. 똑같다. 티끌만큼도 먼지 한 올만큼도 우세하지 못하다. 완벽하게 똑같다.

한쪽에는 아흔아홉 명, 다른 한쪽에는 한 명.

이런 싸움이 벌어진다면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바로 승부가 결정된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아흔아홉 명이 한 명을 죽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죽이는 것은 논외다. 아예 없애버린다면 아주 쉽겠지만, 없애는 것은 선택지에 들어 있지 않다. 오직 굴복시키는 것만 가능한 싸움이다.

승부가 어떻게 되든 백 명은 온전히 존재해야 한다. 한 명이 빠지면 백 명 모두 죽는…… 백 명이 있어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완전체라서다.

백 명 중 한 명만 떨어져 나가도 완전체가 아니다.

아흔아홉 명이 할 수 있는 것은 한 명을 회유하고, 협박하고, 무력을 써서 자기편으로 만들어야 한다. 한데, 자기편으로 만드는 방법이 어렵지도 않다.

빨간색 물감을 쏟아부어서 빨갛게 물들이기만 하면 된다.

남은 한 명은 빨간색으로 물들지 않으려고 쏟아지는 물감을 피해 다닌다. 물감이 닿기만 하면 바로 물들어 버린다. 그게 이 싸움의 규칙이라서 직격당하지 않으려고 늘 도주한다.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면 비를 맞지 않을 곳으로 몸을 숨겨야 한다.

소낙비는 순식간에 내리친다. 햇볕이 쨍쨍 쬐던 하늘에서 갑자기 빗방울이 퍼붓는다. 그러면 아무리 빨리 움직여도 한두 방울은 맞게 된다.

이렇게 되면 빨갛게 물드는 것이다.

이것도 규칙이다.

그 한두 방울조차도 맞지 않도록 피해 다녀야 한다. 비가 쏟아질 것 같으면 당장 안전한 곳으로 숨어 들어가야 한다.

온전한 생기, 하얀 광목은 사력을 다해서 자신을 지킨다.

규칙이 매우 불공평하지 않은가? 맞다. 백 명 중 한 명만 빨갛게 물들어도 순식간에 백 명 모두 물든다.

한 명에게 비를 내릴 능력, 물감을 쏟아붓는 능력이 주어진다면 다른 아흔아홉 명은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물든다.

원래가 불공평한 싸움이었다.

그런데 온전한 생기가 유리할 때도 있다.

호발귀가 처해 있는 지금 상황이 그렇다. 다행히도 지금 상황은 하얀 쪽에 유리하다.

아흔아홉 명이 움직이지 않는다. 빨간 물감을 쏟아부으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아흔아홉은 움직일 만한 이유가 없다.

한 명이 움직일 만한 이유는 있다.

살아야 한다! 생존!

한 명의 움직임이 아흔아홉 명의 움직임보다 활기차다.

전쟁터에 나선 군인처럼 상대를 죽여야 사는 그런 생존 본능이 아니다.

그냥 사는 것…… 피곤하면 잠을 자고, 잠에서 깨면 움직여서 근육에 기운을 불어넣고,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는 일상생활을 영유하는 것 자체가 생존 본능이다.

하얀 광목이 하는 일이다.

오염되지 않은, 멀쩡한 생기는 하루를 준비한다.

아흔아홉의 혈기는 오직 생기를 꺼뜨리는 데만 관심이 있다. 한데 밀살 안에는 꺼뜨릴 만한 생기가 없다. 그러니 움직일 이유가 없는 것이다.

호발귀는 바위 밑에 고인 웅덩이에서 물을 마셨다.

음식은 떨어진 지 오래다. 벌써 며칠째 입에 들어가는 것은 물밖에 없다.

이제 슬슬 하얀 광목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려고 한다. 살아야 한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먹을 걸 찾아야 한다.

하얀 광목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빈대 한 마리라도 나타나면 즉시 저것이라도 먹어야 산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빈대가 나타나면, 살아있는 생물이 나타나면 당장 아흔아홉 명의 혈기가 나타난다.

하얀 광목을 밀어내고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살아있는 생물이 나타나는 순간, 하얀 광목이 설 자리는 없어진다. 다시 불공평한 싸움이 시작된다.

그 즉시 호발귀는 혈기에 지배당한다.

호발귀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이곳은 밀실이다. 빠져나갈 곳이 없다. 사방이 막혔다. 빈대 한 마리가 죽는 순간, 혈기는 다시 잠잠해질 것이다. 다시 하얀 광목이 나타날 것이다.

바깥 세상에서라면 당장 하얀 광목이 물들었지만, 이곳만의 특수성 때문에 아흔아홉과 일이 서로 공존하다.

다행히 공기는 들어오고 있다. 그곳을 통해서 바깥으로 나갈 수 없을까?

공기 들어오는 틈은 너무 좁다. 틈을 비집고 나갈 수 없다.

잘못 파헤치기라도 하면 굴이 무너져서 그나마 공기 들어오는 통로도 막힐 수 있다.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아니면 물이 흘러들어오는 통로는 건드리면 안 된다.

호발귀는 한참 동안 물을 마신 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먹을 게 없나? 없다. 육포도 떨어지고, 쌀도 동났다. 바닥에 떨어진 쌀 한 톨까지 주워 먹었다.

구석구석 헤쳐보지 않은 데가 없다. 혹시 개미 한 마리라도 나올까 싶어서 샅샅이 뒤져봤다.

먹을 게 없다.

배가 워낙 고프니까 슬슬 쓰려왔다. 그러다가 통증이 일어났다.

“으!”

호발귀는 아랫배를 움켜잡고 신음을 토해냈다.

그는 배고파서 앓아 누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배고픈 고통이 칼에 맞는 고통만큼이나 크다는 사실도 이번에야 알게 되었다.

너무 허기져서 손가락 하나 움직일 기력이 없다.

원하는 대로 굶어 죽을 수 있게 되었다. 혈마가 세상에 나가면 안 되는데, 소원대로 되었다.

‘이거면 된 거야.’

호발귀는 만족했다.

세 사람이 걱정된다.

생기를 사용하면 혈마가 될 텐데, 생기를 사용하면 안 되는데.

그들이 자신처럼 하얀 광목을 남겨둘 수 있을지 모르겠다. 멀쩡한 생기를 남겨두면 올바른 정신을 갖게 된다. 혈마가 되느니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방법을 찾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한순간에 빨간 물, 혈기로 물들 것이고 혈마가 되어서 날뛸 것이다.

그런 점을 알면서도 손을 쓸 수가 없다. 자신이 나가면 하얀 광목이 나가는 게 아니다. 혈마가 나가는 것이다. 세상에 저주가 내리게 된다.

‘이대로 죽는 거야. 똑똑한 여자들이니까, 약은 사람이니까…… 잘 해내겠지.’

호발귀는 등여산, 홀리, 해자수를 생각하면서 눈을 감았다.

그때, 머릿속에서 텅! 울림이 일어났다.

“누구 마음대로 죽으려고! 할 수 있는 건 해봐야지! 니가 죽고 싶다고 죽을 수 있을 것 같아!”

악마의 속삭임이 울렸다.

“뭘 어쩌라고?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할 수 있는 게 왜 없어!”

“그런데 당신 누구야? 혹시 장진 스님?”

“스님은 개뿔! 염불 좀 외운다고 스님이더냐! 자! 봐! 지금부터 어떻게 사는지. 내가 보여줄 테니까!”

“아니. 보고 싶지 않은데.”

“크크크! 누구 마음대로! 봐!”

“아! 제발! 당신이 장신 스님이면, 내 친구라면 날 살려줘.”

“지금 살려주려고 이러잖아!”

“날 죽이는 게 살려주는 거야. 내가 죽을 수 있게 도와줘.”

“키키키키키! 그건 네 생각이고, 나는 살아야겠다 이 말이지. 키킥! 누구 마음대로 죽으려 그래. 살 수가 있는데. 잘 보라고 내가 어떻게 사는지.”

“안돼! 제발!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제발 멈춰!”

호발귀는 장진 스님을 멈추려고 했다.

장진 스님은 백 명이다. 완전체다. 생기 편도 아니고 혈기 편도 아니다. 백 명이라는 자식을 모두 가슴에 품은 어미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

그러니까 어떤 때는 한 명 편에 서서 올바른 말을 한다. 어떤 때는 아흔아홉 명 편에 서서 살생을 주문한다.

양쪽 입장을 같이 말할 때도 있다.

장진 스님은 호발귀 자신이다.

지금 장진 스님은 혈마 편이다. 무리해서라도 살려고 한다.

“무슨 일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마음대로 할 수 없을 거야.”

호발귀는 이를 아물었다.

장진 스님이 하는 일을 막아야 한다.

그때, 텅! 의식이 떨어졌다.

눈앞에 푸른 빛들이 보였다.

“안 돼!”

호발귀는 목청껏 소리쳤다.

호발귀는 생기격타를 할 수 있다. 생기를 쓴다는 것은 자신의 몸속에 있는 생기만 건드리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생기도 건드릴 수가 있다.

불행하게도 자신은 그런 연습을 해왔다.

혈천방으로 찾아가면서 일행의 생기를 격타했다. 그 당시에는 등여산이나 홀리 해자수, 도천패, 당홍…… 이들의 진기를 북돋아 준다고 생각했다.

근데 그것이 사실은 타인의 생계를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짓누를 수 있고, 어떻게 하면 북돋을 수 있는지 자신 스스로 수련을 한 꼴이 되고 말았다.

혈마가 생기를 찾아냈다.

땅속에는 많은 생기가 숨어 있다. 특히 지금은 겨울이다. 모든 동물이 땅속으로 들어와 있다. 일부는 동면하고 있고, 일부는 땅속에서 숨겨둔 먹이를 먹으며 겨울을 보내고 있다.

혈마가 그들의 위치를 파악해냈다. 그리고 그놈들의 생기를 격타했다.

생기격타를 당한 동물은 강력한 힘에 끌려왔다.

쥐는 땅을 팔 줄 아는 재주를 가졌다. 뱀은 조그만 빈틈도 헤집고 나올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렇게 쥐와 뱀이 모여들었다.

츠읏! 팟!

혈마는 그놈들의 생기를 꺼뜨렸다. 혈기가 작은 동체에 담긴 푸른 빛을 세상 밖으로 날려 보냈다.

“아!”

호발귀는 탄식했다.

자신의 손에 핏물이 잔뜩 묻어있다. 입에서는 가는 털과 함께 비릿한 냄새가 풍겼다.

쥐를 생으로 뜯어 먹었다.

“으윽! 우욱!”

호발귀는 구토를 했다. 쥐를 생으로 뜯어 먹었다는 게 너무 역겨워서 토악질했다.

하지만 이미 뱃속에 들어간 쥐는 소화되고 없었다.

혈마는 그를 완전히 살려놓은 후에야 다시 잦아들었다.

의식이 가늠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생기가 있으면 혈기가 즉시 작용한다. 그렇지 않을 때는 혈기가 잠든다.

움직일 이유가 없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평상시의 생기, 혈기 작용이다.

하지만 온전한 생기가 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때, 육신이 극한 상태에 도달하게 되면 혈기가 다시 일어난다. 의식의 범주를 벗어난 곳까지 탐색한다. 그리고 생기격타를 한다.

이 생기격타는 호발귀가 터득한 것이다. 그러니 누구를 원망하지도 못한다.

육신이 극한 상태를 넘어선 후에도 혈기는 작동하지 않아야 한다. 할 게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이 생기격타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저절로 작동했다.

혈기가 탐색한 범위는 생기격타를 할 수 있는 곳으로 한정될 것이다.

생기격타 당한 동물들이 모이고, 삶을 영위하길 수 있겠다 싶으면 혈기는 다시 원래의 범위로 수정된다. 주위에 생기가 없으니 조용해진다.

다시 온전한 생기가 일어난다

이놈들은 살아있다.

혈기와 생기, 그리고 자신.

이 세 가지가 모두 하나이면서 분리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보통 사람들은 혈기와 생기를 느끼지 못한다. 느끼지 못하니 구분하는 것은 어림도 없다. 처음부터 이런 것이 있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한다.

호발귀는 이들이 분리된 모습까지 보게 되었다.

아주 깊이…… 혈천방에서 혈마가 되어 날뛸 때보다도 훨씬 깊이 이놈들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이다.

“살고 싶다는 거지? 그럼 살아. 내가 어쩌겠냐. 네 놈이 살고 싶다는데.”

호발귀는 저항을 포기했다.

이렇게까지 혈기가 살고자 하면 저항할 방법이 없다. 또 한 가지, 혈기가 일어날 때 정신이 뚝 떨어진다는 것, 혈기에 지배를 당해서 완전히 다른 인격체로 변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만은 확실하다.

전혀 다른 인간이 되었을 때, 호발귀는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의식하지 못한다.

갱도에 갇히기 전에는 느낌이라도 약간 받았다.

사람을 죽이고 있구나, 생기를 쫓아가고 있구나, 뭘 이렇게 바쁘게 움직이지?

그런 느낌들이 선연히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느낌조차도 들지 않는다. 마지막 한 조각 광목조차도 위태롭다는 거다.

이제 곧 수태음폐경이 무너질 것이며, 마지막 광목도 물들 것이다.

마음이 조급하지는 않다.

마지막 조각이 물들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주위에 생기가 없을 때는 호발귀로 돌아와서 생각하고 움직일 수 있지만, 그것마저도 못한다는 차이만 있다.

생기가 없어도 혈마만 존재하는 것이다.

어떤 미친 자가 킥킥거리면서 밀실을 돌아다닐 것이다. 그리고 어떤 짓을 할지 아무도 모른다. 설혹 바위에 머리를 짓찧어도 자신은 알지 못한다.

동굴에서 나갈 수 있는 길은 점점 멀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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