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五章 만연개래(蔓延開來) (1)
“잠시 좀 쉬려고 왔어요.”
등여산이 피곤한 기색으로 말했다.
몸이 피곤한 것이 아니다. 마음이 지친 것이다. 세상사를 내려놓고 푹 쉬고 싶다.
“잘 왔네. 기왕 쉴 거면 조용한 데가 좋겠지. 여기보다 암자(庵子)는 어떤가?”
정암사(淨巖寺) 주지 광운대사(光雲大師)는 등여산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천살단은 신년이 되면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시연(始宴)을 연다.
무려 보름 동안 지속하는 천살단 시연에는 중원 각지에서 각 분야의 다양한 사람들이 초빙된다. 일 년에 한 번이라도 얼굴이나 보자는 의미로 잔치를 베푸는 것이다.
광운대사는 천살단 시연에 반드시 초빙되는 고승이다.
등여산과도 몇 번 만난 적이 있고, 광운대사의 강론에 참석한 적도 있다.
등여산이 천살단 책사에서 물러났고, 호발귀와 인연을 맺은 사실은 웬만한 사람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광운대사는 반갑게 대해주었다.
“제가 있을 곳이 있나요?”
“운지암(雲知庵)이 조용할 거야. 지금 암주(庵主) 혼자 있는데, 천일 묵언 수행 중이지. 땔감도 직접 구해와야 하고, 밥도 혼자 먹어야 하는데, 괜찮나?”
“그럼요. 딱 좋아요.”
“아미타불! 천살단에는 비밀로 해야겠지?”
“이미 알고 있을 텐데요, 뭐. 저 감시 대상이잖아요. 괜히 감싸주시다가 눈총만 사요. 하지만 될 수 있으면 비밀로 하는 게 좋을 거예요. 제가 적도 많거든요.”
“휴우! 그러지. 자네가 온 것은 나만 알고 있음세. 운지암에 있으면 세상과 인연이 끊어질 게야. 아미타불.”
광운대사가 두 손 모아 합장했다.
광운대사가 말한 것처럼 운지암에는 암주 한 명만 기거한다.
암주는 묵언 수행 중이라서 얼굴을 마주쳐도 합장만 하는 것이 고작이다.
운지암은 수도암(修道庵)이다.
기거하는 사람들이 함께 숙식하는 형태가 아니고 별개로 독립된 생활을 한다.
등여산에게는 딱 좋은 휴식처다.
‘좋아. 편해.’
당분간 암자에서 지내며 몸도 마음도 추스를 생각이다.
강호 무림의 은원은 깨끗이 잊고, 사람들 눈을 피해서 홀로 살아간다. 아무도 만나지 않고 그 어떤 일도 하지 않고 조용히 숨만 쉬다가 여생을 마치려고 한다.
물론 살아가는 이상 사람을 만나야 하고 어떤 일인가는 해야 한다.
그녀가 말하는 사람이란 무림인을 말한다. 그녀가 하지 않겠다는 일은 무림에 관계된 일이다.
천살단, 혈천방…… 모두 다 잊는다.
호발귀도 잊는다. 한수에서 그를 따라가지 않았을 때, 이미 잊기로 작심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누구와도 만나지 않는다.
천살단주가 그녀에게 준 압박은 매우 컸다.
이렇게 해서라도 호발귀의 안위만 보존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이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다. 머리 깎고 비구니가 되라고 해도 할 수 있다.
“정말 여기는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푹 쉴 수 있겠네.”
등여산이 중얼거렸다.
운지암은 수도암이라도 찾는 사람이 없다. 신도도 선승을 생각해서 일부로 찾지 않는다.
암자로 올라가는 입구에도 등산을 금하는 새끼줄이 쳐있다.
하루 종일 혼자다.
암주가 있다지만 기거하는 곳조차 다르다. 암주는 불당이 있는 절에서 기거하고, 등여산은 한쪽 구석에 지어놓은 작은 움막에서 생활한다.
떠돌이 선승들이 운지암을 찾아서 가끔 기거한다고 한다.
암주는 등여산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등여산도 암주를 고려할 필요가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무신경하다. 첫 만남에서 합장을 했지만, 그럴 필요도 없다.
이것이 운지암의 규칙이다.
다른 사람에게 일절 신경 쓰지 말고 자기 공부에만 열심히 정진하자는 취지다.
등여산은 산에 가서 나무를 해왔다.
일단 아궁이에 불을 지펴서 집안에 훈기가 돌게 만들었다. 한동안 비워놨던 집이라 온갖 벌레가 득실거린다.
방에 거미줄을 치우고, 바닥을 닦고…… 온종일 바쁘게 움직였다.
잠시도 쉬지 않고 몸을 놀리다 보니 답답했던 마음이 조금 풀렸다. 세상에 대한 고민이 말끔히 가셨다. 이래서 고민이 있으면 산으로 들어오는 건가?
등여산은 저녁에도 쌀 한 줌만 집어서 밥을 지었다.
자신이 먹을 밥만 지으면 되니, 사실 한 줌도 남는다. 반 줌만 지으면 된다.
반찬도 없이 간장 한 종지에 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그래도 마음은 편했다.
열흘쯤 지나자, 산속 생활이 적응되었다.
암주의 일과는 정해져 있다. 인시(寅時: 4시)에 일어나서 예불을 드린다. 그리고 묘시말(卯時末 : 7시)까지 참선한다. 아침을 지어 먹은 후에는 마당을 쓸고 불경을 읽는다.
혼자 살고 있으니 누가 지켜보는 사람도 없는데, 일과를 엄격하게 지킨다.
등여산도 암주를 쫓아서 인시에 일어났다.
눈을 뜨면 세상이 깜깜하다. 아직 날이 밝지 않았다.
등여산은 예불 대신 산행을 택했다. 어두운 산길을 더듬어서 정상까지 올라간다.
운지암에서 정상은 매우 가깝다. 겨우 반 시진 정도면 탁 트인 정상에 올라설 수 있다.
산에 올라가는 동안 스님이 두들기는 목탁 소리를 듣는다. 산 아래, 정암사에서도 뎅뎅! 범종을 울린다.
깊은 밤, 사람들이 깨어나고 있다.
산정에 올라선 후에는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생기를 가다듬는다.
눈을 조용히 감고 감정 변화에 신경을 집중시킨다. 불쾌한 기분이 일어날 리 없다. 공기는 맑고, 시야는 탁 트인 곳이다. 귀에 들리는 모든 소리가 아름답다.
마음이 극도로 상쾌해졌다.
그때쯤 동녘에서 해가 떠오른다.
산정에서 아침 해를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수줍은 듯 붉게 떠오르는 해를 보면서 오늘 하루도 무척 고요하고 적막하겠구나. 평화롭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잠시 해를 지켜보다가, 거처로 돌아와서 아침을 지어 먹는다.
아침을 먹은 후에는 생기 수련을 지속한다.
생기를 일으켜서 상쾌한 기분 속으로 침잠해 들어간다. 생기가 몸 안에서 휘도는 것을 느꼈다.
공중 부양하는 기분? 몸이 붕 떠오른다. 마음이 새털처럼 가벼워진다. 마치 현실에서는 결코 만날 수 없는 꿈의 나라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생기를 일으키면 아주 상쾌해진다.
처음 진기를 알았을 때…… 운공조식을 마치고 나면 전신에서 활력이 넘쳐났다. 진기를 뻗어내서 권각을 사용하면 철판도 단숨에 부술 것 같았다.
천하가 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진기를 모르던 사람이 진기를 알게 되면 누구나 그런 기분에 사로잡힌다.
사실을 별것 아니었는데도, 당시에는 얼마나 기분 좋았던지.
생기를 알게 된 지금이 꼭 그때와 같다.
생기는 결코 기대감을 배신하지 않는다. ‘기분 좋을 거야’하고 들어가면 기분이 좋아진다. 상쾌한 기분이 전신에 회오리쳐서 생기 속에서 빠져나오기 싫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 상태 그대로 영원히 있었으면 좋겠다.
정녕 눈을 뜨고 세상 밖으로 나오기가 싫다. 하지만 하루를 살아가야 하지 않나.
뜨기 싫은 눈을 억지로 뜬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해가 지고 있다. 거의 하루 종일 생기 속에 침잠해 있었던 것이다.
이른 저녁을 지어 먹고는 책을 읽는다.
또 생기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는다. 저녁에도 생기 수련을 하면 잠을 이루지 못할 것 같다. 정신이 너무 맑아져서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이것저것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다시 읽었다.
절에 들어온 김에 불경도 많이 읽었다. 절에서 가장 흔한 게 불경 같지만, 의외로 불경을 구하기가 힘들다. 스님들이 자기 공부를 하기 때문에 남는 불경이 없다.
그나마 암주가 몇 권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빌려다가 읽었다.
그러다 보면 잠잘 시간이 된다.
잠잘 시간이 딱히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다. 그냥 이제 잠을 청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 잠자리에 든다.
그녀의 하루 일과는 지극히 단조롭고 무사했다.
그녀의 단조로운 일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정암사 스님 중 한 분이 많은 곡물을 시주한 신도에게 쓸데없는 말을 했다.
“요 위에 운지암이라고 있는데…… 거기 천하절색의 미인이 있어요. 뭘 하는 여자인지는 모르겠는데, 하루종일 참선만 하는 걸 보면 출가할 생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정암사를 찾은 신도는 만석지기 대부호다.
남아도는 것이 돈이라서 이리저리 흥청망청 뿌리고 다닌다. 정암사에 시주하는 것도 ‘나 이런 사람이야’하는 과시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존경이라는 것을 받고 싶은 것이다.
만석지기는 휘하의 호위 무인들을 거느리고 다니면서 위세를 떤다. 특히 그는 여색을 밝힌다. 인근 주변 마을에 반반한 여자가 있다는 소문이 들리면 반드시 손에 넣고 만다.
가장 쉬운 방법은 돈으로 사는 것이다.
대부분 찢어지게 가난해서 충분한 돈을 주면 쉽게 빼앗아 올 수 있다.
여인을 내주는 집도 여인이 무슨 짓을 당할지 안다. 그런데도 판다. 가난한 집에서 피죽 한 그릇 못 먹고 사느니 만석지기 집에서 그래도 쌀밥이나마 실컷 먹으라는 거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여자는 힘으로 굴복시킨다.
그의 주변에 있는 호위 무인들은 여자를 빼앗는 훌륭한 도구다. 그런 쪽의 일을 한두 번 해본 게 아니라서 척하면 착! 무엇을 해야 하지 단박에 안다.
그의 음탐을 채우기 위한 수족들이다.
“그렇게 절세가인입니까?”
“아휴! 불가에 몸담은 사람이 이런 말을 하기는 그렇지만…… 그렇게 예쁜 시주는 처음 봤죠. 하하!”
암주 한 명 있는 암자에 절세가인이 거주하고 있다.
만석지기 탕아에게는 그냥 칠 수 없는 일이었다.
퍼억! 퍽!
“컥!”
사람을 두들겨 패는 소리와 짧은 비명이 동시에 들렸다.
등여산은 미간을 찡그리면 읽고 있던 불경을 덮었다.
다다닥! 탁탁!
많은 사람이 움직이고 있다. 부산하게 움직이는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운지암이 갑자기 바빠졌다.
사람을 때리는 소리는 뚝 그쳤다.
운지암 암주는 느닷없이 들이닥친 자들에게 몇 대 얻어맞고 혼절해 버렸다.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암주가 누군가에게 원한이라도 샀나?
그때, 방문이 왈칵 열리며 건장한 사내가 얼굴을 쓱 들이밀었다.
사내는 방문을 열자마자 안에 있는 등여산을 봤다. 그리고 얼굴을 활짝 밝혔다.
두 눈은 음심으로 번들거렸다.
그는 등여산에게 일언반구 양해도 구하지 않고 다짜고짜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이런 미인이 이런 데서 뭐하고 계시나? 영 안 어울리는데 계시네.”
“……”
등여산은 말없이 사내를 봤다.
“눈이 되게 맑네? 하! 이거 미치겠네. 세상에 이런 여자가 어디 있다가 이제야 나타난 거야? 이봐! 나 당신 충분히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데 내 첩 해라. 아니! 아니야! 첩이 뭐야. 다른 것들 다 팽개치고 너만 귀여워해 줄게. 나랑 살자.‘
사내가 호기롭게 말했다.
등여산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일단 사내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고, 지금 같은 경우에는 눈을 감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순간, 그녀는 생기 속으로 들어갔다.
이 사내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찾아왔는지 짐작이 간다. 방문 밖에서 음탕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사내들이 어떤 종류의 인간들인지도 안다.
옛날 같았으면 이런 무뢰배들은 단숨에 몽둥이찜질을 했을 것이다.
솔직히 이 정도의 사내들은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튕겨낼 수가 있다. 굳이 손발을 놀릴 필요도 없다. 등여산이라고 이름만 밝혀도 사색이 되어서 조아릴 것이다. 밖에 있는 호위 무인이라는 작자들도 마찬가지고.
등여산은 말 한마디 섞지 않고 생기 속으로 들어갔다.
생기 수련을 한 덕분인지, 마음이 편해졌다. 굉장히 편안해졌고, 포근해졌다. 세상 모든 사람을, 음심을 품은 이 자들까지도 다 용서할 수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눈앞에 푸른빛이 일렁거린다. 이 사내의 음심이다.
이 푸른빛만 끄면 음심이 꺼진다.
스으읏!
그녀는 손길을 뻗었다. 그리고 사내의 몸에서 푸른 기운을 탁탁 털어냈다.
사내가 즉시 조용해졌다.
다른 사내들이 후다닥 달려들었다. 토끼를 노리는 늑대처럼 와르르 달려들어서 물어뜯으려고 한다.
그들 역시 푸른 기운으로 가득 덮여 있다.
’저것만 털어내 주면 조용한데 왜들……‘
생기는 놀라운 위력을 발휘한다. 그녀도 생기가 음심을 이토록 깨끗하게 털어낼 줄 줄은 전혀 몰랐다. 세상에 사악한 인간이 얼마나 많은데…… 그들에게 생기를 쓰면 아주 간단히 정화시킬 수 있지 않겠나.
스스스스! 스슷!
등여산은 기꺼이 몸을 움직였다.
이처럼 편하고 보람찬 적선이 어디 있나.
다다다닥! 다닥!
푸른 기운을 말끔하게 털어주었다. 그러자 사내들이 이내 조용해졌다.
푸른 기운만 털어주면 일시에 침묵한다. 아주 조용해진다.
굉장히 놀라운 효과다. 자신한테 이런 힘이 있었구나. 사람을 교화시키는 힘, 착하게 만드는 일, 음심이 번들거리던 자가 모든 걸 버리고 참회하다니.
이렇게 좋은 거였으면 더 열심히 수련할걸.
등여산은 조용히 앉았다.
여전히 그녀는 생기 속에 머물렀다.
이왕 생기 속에 들어온 것, 조금 더 있을 생각이다.
눈앞에 있는 자들도 이미 조용히 회개하고 있다. 이들에게 시간을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음심을 털어낸 이상, 더는 위험하거나 불쾌하지도 않다.
‘좋아! 정말 좋아!’
그녀는 만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