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四章 혈기본령(血氣本靈) (5)
생기는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 기운으로 삶을 지속시킨다. 살아있는 동물은 모두 생기를 지닌다.
생기는 공기와 더불어서 밀려 들어와 몸 안에 축적된다. 그러다가 생이 끝날 시점에서 빠져나간다. 원래 왔던 세상으로 다시 나가는 것이다.
생기가 거의 빠져나가면 숨이 끊어진다.
후우!
목숨 떨어지는 큰 숨을 내쉴 때, 몸 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 한 방울의 생기가 툭 터져 나간다.
혈마는 이런 생기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그러니 똑같은 인간이면서도 생기에 대한 반응이 백 배, 천 배는 뛰어나다. 강한 생기와 약한 생기를 즉각적으로 찾아낸다.
갱도가 무너질 때 혈마는 생기의 흐름을 쫓아서 움직였다.
어디가 가장 안전할까?
혈마라고 해서 폭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폭발 속에 있으면 당연히 영향을 받는다. 작은 폭발에는 다칠 것이고, 큰 폭발이라면 죽게 된다.
화약이 갱도 전체를 무너트렸다면 천하에 혈마라고 해도 살아날 방도가 없다. 흙더미에 생매장될 것이고, 더는 숨을 쉴 수 없을 때 죽을 것이다.
혈마는 무너지는 갱도에서 가장 안전한 곳, 생기가 넘치는 곳을 찾았다.
화약 네 덩어리는 갱도 네 곳을 무너뜨렸다.
그중 뒤쪽에 있던 화약 두 개는 수직 갱도를 붕괴시켰다.
화약 자체는 갱도 중간 부분에서 터졌지만, 바닥이 비스듬히 갈라져 있어서 뒤쪽이 무너지는 효과를 가져왔다. 중간이 타격을 받으면 뒤가 쪼개지는 지형이었다.
갱구에서 터진 화약 두 개는 앞을 틀어막았다.
기가 막히게도 두 화약 사이가 가장 안전했다. 호발귀가 서 있던 곳이 폭발의 영향을 제일 적게 받았다.
호발귀는 움직이지 않았다.
제 자리에 멈춰선 채, 갱도가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보통 사람은 무너지는 갱도 안에서 가만히 서 있을 수 없다. 어떻게든 움직인다. 돌덩이, 흙더미가 쏟아지고 있는데, 어떻게 가만히 서 있겠나.
혈마는 확신이 있으니 서 있을 수 있었다.
움직이는 것보다 서 있는 것이 안전하다!
물론 혈마의 판단은 현재 상태에서 가장 안전한 곳을 의미한다. 그러니 갱도가 무너진다면 결국은 함몰된다. 그때는 또 더 안전한 생기를 찾겠지만, 끝내는 찾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한데, 놀랍게도 혈마가 서 있던 곳은 무너지지 않았다.
수직 갱도까지 무너진 것을 생각하면 안쪽 갱도가 무너지지 않은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갱목이 워낙 튼튼했다.
화약 네 덩이가 갱도 전체를 무너트리기에는 버거웠다. 갱도 자체가 위험이 많은 곳이기 때문에 탄광에 쓰는 갱목은 바위처럼 단단한 것만 사용했다.
호발귀는 밖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지극히 위험한 상황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호발귀는 갱도에 서 있었던 것도 아니다.
호발귀는 갱도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여유 있게 걸었다.
갱도에는 그가 서 있던 곳보다 더 안전한 곳이 딱 한 군데 있었다. 그리고 더 강한 생기를 찾은 혈마가 그곳으로 걸어가는 것은 당연했다.
귀검이 마련해준 밀실이다.
밀실은 사면이 석벽으로 되어 있어서 갱도 폭파에도 무너지지 않았다. 흔들림이 극심하게 일어났지만, 조금도 파손되지 않았다. 천정에서 작은 돌 부스러기가 흘러내린 게 고작이었다.
혈마가 찾아낸 가장 안전한 장소다.
밀실 안에는 암벽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있다. 귀검이 음식도 충분히 준비해놨다. 물이 흐르는 곳에는 공기도 스며든다. 숨을 쉴 수 있다.
“크크크! 크크크!”
혈마는 괴소를 흘리며 석벽 밑에 쭈그리고 앉았다.
밀실 한에서 할 일이 없었다. 사람이 없으니 죽일 것도 없었고, 살심이 들끓을 일도 없었다.
“기…… 적이군!”
호발귀는 오랜만에 맑은 정신으로 컴컴한 동공을 쳐다봤다.
머릿속에서 죽이라는 울림이 사라졌다. 눈을 뜬 후, 이토록 상쾌해 보기는 처음이다.
주변에 생기가 없다.
살아있는 사람이 없다. 쥐나 고양이 같은 동물도 없다. 생기를 느낄만한 생명체가 없다.
완전히 생기가 뚝 끊긴 곳에 갇혔다.
그러자 혈마가 스르륵 사라지고 수태음폐경 속에 숨겨둔 자아가 튀어나왔다.
생기가 없는 곳에서는 혈마도 할 일을 잃어버린다. 만약 주변에 생명체가 하나라도 있었다면 제정신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혈마 속에 갇혀서 죽이라는 명령을 듣고 있을 것이다.
생명체가 완전히 끊어지자 혈마도 잦아들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푸른 빛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꺼트릴 빛도 없었다.
원래 혈마는 이런 상태에서도 육신과 정신을 지배한다.
혈마는 어떤 상태에서도 이미 지배하기 시작한 육신을 포기하지 않는다. 폐기할지언정 물러서지 않는다.
그런데 호발귀에게는 수태음폐경이 남아 있었다.
물방울 한 방울에 비견될 정도로 미미한 존재이지만 혈마와는 다른 이질적인 정신이 존재했다.
혈마가 가라앉자 수태음폐경 속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호발귀다. 맑은 정신…… 혈마가 되기 이전의 호발귀가 모습을 되찾았다.
“혈마, 정말 무섭구나.”
호발귀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혈기, 혈기, 혈기!’
호발귀는 혈마에 대해서 완전히 알았다.
혈마는 혈기가 신체를 지배할 때 부르는 명칭이다.
사실 혈마는 없다. 혈마라고 부르는 것은 정신 이상자가 되어 버린 호발귀의 다른 이름이다.
생기는 원래 활기차고, 밝고, 싱싱하다. 삶을 이끌어 가는 원동력이다. 하지만 생기가 오염되면 몸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
그중에 가장 해악을 많이 끼치는 부분이 머리, 뇌다.
결국은 나쁜 기운에 동화되어서 정신이상, 미친놈이 되어버린 게 혈마다.
보통 인간들은 오염되지 않은 생기만 지닌다.
혈마는 오염된 생기와 오염되지 않은 생기 두 종류를 지닌다.
오염이 심하지 않을 때는 멀쩡한 생기가 신체를 지배한다. 그러다가 오염도가 높아지면 점점 정신이상 빈도가 높아진다.
혈기가 몸과 정신을 지배한다. 생기는 더욱 많이 쓰게 되고, 그때부터는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정신이 망가진다.
혈기와 생기는 눈으로 식별하지 못한다. 하지만 뇌에 충격이 가해지고, 정신이상이 되는 것은 현실이다. 실제로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니 정신 이상자, 미친놈, 혈마가 다 같은 말이다.
세상이 말하는 미친놈은 혈기를 사용하지 못하지만, 혈마는 혈기를 사용하니 더 무섭다.
오염된 생기가 멀쩡한 생기보다 압도적으로 강해지면 몸과 정신을 지배한다.
혈마!
이때가 되면 결코 멀쩡할 때로 돌아가지 못한다.
하얀 광목에 붉은 염색을 하면 두 번 다시 하얀색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더욱이 생기는 물감 색을 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욱 진해지기만 한다.
자신이 이런 상태다.
다만 수태음폐경이라는 곳에 염색되지 않은 하얀 광목이 한 조각 남아 있을 뿐이다.
수태음폐경에 자아라는 게 숨어 있는 게 아니다. 오염되지 않은 생기, 하얀 광목일 뿐이다. 붉게 염색된 광목과 대치하면서 물들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
호발귀는 붉은 광목도 자신이고, 하얀 광목도 자신이기 때문에 수태음폐경에 남겨진 것이 호발귀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다. 생기 대 생기의 대결이다.
염색된 생기가 지배적이고, 원래 생기는 숨도 못 쉬는 형국이다.
오염된 생기가 뇌에서 잠시 휴식을 취할 때, 원래 생기가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 한쪽이 잠들었기 때문에 간신히 모습을 드러낸 것일 뿐, 싸워서 이긴 것은 아니다.
주위에 죽여야 할 생기가 나타나면 붉은 광목은 즉시 일어난다. 원래 생기, 하얀 광목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티도 나지 않는다.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염색된 광목을 다시 하얀 광목으로 되돌릴 수 있는 길이 있나?
장난삼아 말하면…… 있다. 염색된 붉은 색을 완전히 탈색해 버리면 된다.
오염된 생기에서 오염을 풀어내면 된다.
문제는 자신은 광목이라는 천조차 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천이 붉은색인지, 하얀색인지도 알지 못한다. 붉은색이 어느 정도나 차지했는지 알 길이 없다.
자신의 생기는 전혀 보지 못한다.
어느 정도나 오염되었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풀어내나.
다른 사람의 생기는 본다.
푸른 빛, 붉은빛, 누런빛…… 죽어가는 생기는 회색이다.
생기를 볼 뿐만 아니라 얼마나 강한지, 힘을 잃어가는 생기인지, 오염되지는 않았는지……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생기를 사용하면 즉시 오염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평생 한두 번 정도 사용하는 것은 전혀 문제없지만, 자신처럼 진기 대신으로 사용하면 반드시 탈이 난다.
지금 자신은 붉은 광목, 혈기가 잠들어 있다.
이 혈기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방법은 딱 하나 있다. 생기를 곁에 두지 않으면 된다.
다시 말해서 이 밀실에서 나가지 않으면 된다.
여기서 굶어 죽으면? 딱 좋다.
이백 년 전 혈마는 어떻게 자진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자신은 편하게 죽을 수 있는 완벽한 장소를 찾아냈다.
그러고 보니 궁금한 게 있다. 자신은 수태음폐경을 봉맥해서 온전한 생기를 남겼다. 이백 년 전 혈마는 어떤 방법으로 하얀 광목을 보존시켰을까.
그가 자진한 걸 보면 온전한 생기가 남아 있었다.
오염되지 않은 생기가 단 한 방울도 남아 있지 않다면 결코 자진하지 못한다.
혈기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자진은 하지 않는다
아니다. 이곳에서 굶어 죽을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안다.
생명에 위험이 느껴졌을 때, 목숨이 경각에 달릴 때 혈기가 발악할 것이다.
어떤 인간이든 살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생존 본능이다.
생존 본능이라는 말은 ‘살고자 하는 생기의 의지’를 인간 세계의 언어로 바꾼 것이다.
혈기는 오염되지 않은 생기보다도 생존 본능이 훨씬 강하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거의 백 배 이상 강하다고 보면 될 것 같다.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곳에서도 살려고 발버둥 친다. 어떻게든 수단을 부리려고 한다.
이곳에서 굶어 죽고자 했을 때 혈기가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는 알지 못한다. 완전히 갱도 안에 갇혔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게 없지만, 혈기는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혈기가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면 온전한 생기가 머릿속을 지배할 때 온몸을 철삭으로 묶어두면 된다. 혈기가 아무리 난동을 부려도 몸이 움직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
호발귀는 자신이 죽을 수 있는 완벽한 방법을 찾아냈다.
아니다. 혈기에 대해서 알아버렸으니 더욱더 이곳에 있을 수 없다. 기필코 나가야 한다.
자신 외에 생기가 오염된 사람이 또 있다.
홀리와 해자수는 확실하고, 보지는 않았지만, 등여산도 생기를 사용할 것 같다.
이 세 사람은 이미 오염이 시작되었다.
현재 오염의 강도는 낮지만,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를수록 오염의 강도는 심해질 것이다.
그들 역시 혈마가 된다.
그들도 자신처럼 언젠가는 혈마가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미 때가 늦는다.
자신이 지금 그 무엇도 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녀들, 그리고 해자수도 혈마에게 끌려갈 수밖에 없다.
밖에 나가서 그들의 오염된 생기를 깨끗이 씻어줘야 한다.
세 사람은 이제 막 오염이 시작되었다. 아직 염색까지는 이르지 못했고, 붉은빛에 노출된 정도다.
혈기는 지금밖에 씻어줄 기회가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염된 생기를 봤을 때 살짝 걷어내는 것이 아니라 말끔히 씻어내는 것인데.
아니, 사실은 그래도 소용이 없다.
홀리와 해자수는 이미 생기 사용법을 알아냈다. 자신이 오염된 생기를 걷어내더라도 그들은 생기를 또 사용한다.
생기가 뿜어내는 유혹은 어떤 마약보다도 강하다.
무인치고 강함을 추구하지 않는 무인이 있나? 생기를 사용하면 당장 천하제일인으로 등극할 수 있다.
철천지원수가 생길 수도 있다. 내 무공으로는 감당하지 못하는 초절정 고수로. 하지만 생기를 쓰면 누구든 꺾는다.
그런 유혹을 모두 떨쳐내야 한다.
생기를 사용하지 않으려면 이를 악물어야 한다.
어쨌든 이곳에서 나가 그들을 만나야 하는데…… 그 전에 한 가지 문제부터 풀어야 한다.
지금은 주변에 생기가 없으니 혈기가 일어나지 않는다. 만약 밖에 나가서 토끼 한 마리, 쥐 한 마리만 봐도 당장 혈기가 일어날 것이다. 그것을 어떻게 막아내느냐 하는 문제다.
이 문제가 풀어지지 않는다면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한다.
나가봤자 자신은 혈마가 되어서 날뛸 것이고 등여산과 홀리, 해자수는 새까맣게 잊어버릴 것이다.
나가는 의미가 전혀 없다.
“음!”
호발귀는 침음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