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四章 혈기본령(血氣本靈) (4)
수직 갱도에서 옆으로 뚫린 갱도는 상당히 넓었다. 길도 잘 닦여 있었다. 암로 곳곳에 갱목이 설치되어, 있는데 아직도 생나무 냄새가 진하게 풍겨 나왔다.
“이거 너무 멀쩡한데? 아무래도 기분이 쎄해.”
해자수가 말했다.
“나도 그 생각 중이었는데. 은밀한 통로치고는 너무 번듯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도천패가 말했다.
“이거 막장으로 가는 길은 아니겠지?”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마쇼. 그렇게 말해서 다른 사람들 불안하게 하면 기분 좋소?”
“나도 불안하니까 그런 거지! 누군 좋은 말 할 줄 모르는 줄 알아! 내 참!”
“어차피 다른 출구도 없었으니까.”
도천패가 해자수와 나란히 걸으며 말했다.
“너무 급하게 들어왔나? 어차피 막다른 골목이었으니까 급할 것도 없었는데.”
“시간이 없었잖아.”
해자수가 말하면서 뒤를 힐끔 쳐다봤다.
도천패와 해자수가 말을 주고받는데도 홀리는 일절 대화에 끼지 않았다.
홀리는 입을 꾹 다물고 앞만 보고 걸었다.
“괜찮을 거야. 난 세상을 살아오면서 호발귀처럼 운 좋은 사람 못 봤어.”
당홍이 홀리 옆에서 함께 걸으며 말했다.
“운이요?”
“동생, 생각해봐. 이 세상에 사람이 얼마나 많아. 그중에서 혈마록을 손에 쥘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돼? 거의 없잖아. 또 손에 쥐면 뭐해? 해독하지 못하는데.”
“그렇긴 하죠.”
“혈마록이 어디서 나왔어? 혈천방에서 나왔잖아. 그럼 혈천방주를 비롯해서 몇 명은 이미 봤다는 말이잖아. 그러면 뭐하냐고. 혈마 무공을 얻지 못했는데. 그런데 호발귀는 그 혈마록을 보자마자 외워버렸단 말이야. 이게 보통 일이야? 호발귀 절대 안 죽어. 정말 운 좋은 사람이라니까.”
당홍이 홀리를 다독였다.
“그렇게 보면 그러네요. 운 하나는 정말 좋아요.”
“그러니 호발귀 걱정은 하지 말고 일단 밖에 나가 보자고. 혹시 또 알아? 옛날처럼 혈마로 변해서 날뛰다가도 갑자기 호발귀로 확 돌아와 있을지.”
“그러면 얼마나 좋아요.”
“틀림없이 그럴 거야. 걱정하지 마.”
당홍이 홀리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
앞서 걷던 해자수와 도천패도 두 여인의 대화를 들었다.
호발귀에 대한 말은 입에 꺼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뱃속에 묵혀 놓을 수도 없다.
호발귀는 자신이 두 번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미 혈마가 되어서 날뛰는 모습까지 봤다. 자신들까지 죽이려고 덤벼들었다.
호발귀에 대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답답하다.
꽈앙! 꽝! 꽈아앙! 꽈앙!
갑자기 거센 폭발음이 들렸다. 동시에 갱도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거세게 흔들렸다.
우르르르릉!
하늘이 무너지고 있다. 흙더미가 우수수 쏟아진다. 구멍 난 하늘에서 바위며, 나무며, 온갖 것이 쏟아져 내린다. 갱도가 완전히 무너지고 있다.
“헉! 뭐야!”
“지진?”
“폭발이야! 무너진다! 조심해!”
네 사람은 황급히 갱도 바닥에 엎드렸다.
마치 천지가 뒤바뀌는 듯한 굉음이 울리고 있다. 네 사람의 머리 위에서도 흙먼지가 수북이 떨어진다.
마구 흔들리는 땅 울림이 어디까지 영향을 미칠지 도무지 모르겠다.
“제길! 여기서 파묻히나?”
해자수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입을 열어서 말하는 것조차 손해다.
흙먼지가 너무 거세게 피어나서 눈조차 뜰 수가 없다. 갱도 바닥에 몸을 납작 엎드리고 있지만, 그래봤자 굴이 무너지면 살아날 가능성이 없다.
그들은 너무 깊은 땅속에 있다.
굴이 무너지면 완전히 생매장당하는 거다. 달리 방도가 없다. 빠져나갈 길도 없다.
“아이고! 이렇게 죽긴 싫은데.”
우르르릉! 꽈앙! 꽈앙!
폭발음은 네 번에 그쳤지만, 갱도가 무너지는 소리는 끊이지 않고 계속 일어났다. 특히, 뒤쪽에서 높이를 알 수 없는 수직 갱도가 무너지고 있어서 소리가 더 컸다.
땅 울림은 반 시진 동안 지속하고서야 멈췄다.
까마득하게 높았던 수직 갱도가 완전히 무너졌다. 깊게 파인 웅덩이가 메꿔졌다. 웅덩이를 메꾼 흙더미가 그들의 등 뒤까지 밀고 들어왔다.
조금만 뒤에 있었다면 밀려드는 흙더미 속에 파묻힐 뻔했다.
“어휴! 꼭 죽는 줄 알았네.”
당홍이 먼지를 툭툭 털면서 일어섰다.
“굴이 왜 무너져? 뭐가 터진 것 같았는데, 화약 맞지?”
도천패가 당홍을 쳐다보며 물었다.
“나도 화약 터지는 소리로 들었어.”
당홍이 고개를 끄덕여다.
“화약이라면…… 밖에 있던 놈들은 살단이잖아. 살단이 화약을 써?”
도천패의 말에 모두 할 말을 잃어버렸다.
살단 무인이 화약을 사용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사용했다. 그들이 화약까지 쓸 정도였다면 싸움 양상이 어땠는지 익히 짐작된다.
살단이 사력을 다했다는 거다.
“내가 낭견대 개들을 독침으로 죽였거든. 개들이 몸에 화약을 두르고 달려드는 거야.”
당홍이 말했다.
“그럼 살단이 쓴 화약이?”
“그걸 거야. 개들 몸에 있던 것.”
“정말 화약인가? 아 참! 그러면 호발귀가……”
해자수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뒷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호발귀가 혈마로 변해서 살던 부인들을 거칠게 압박한 것이다. 그러니 살단 무인들이 견디다 못해서 화약까지 쓴 것이다.
오죽하면 화약까지 썼을까.
굴 안에서 생각만 하고 있자니, 답답해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도대체 밖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나.
“빨리 나가봐야겠어요.”
홀리가 일어섰다.
“저기 빛이 보인다! 빛!”
해자수가 묵직한 침묵을 단숨에 깨워버렸다.
“빛?”
“저기 봐! 빚이잖아! 빚! 저거 빚 맞지?”
“야! 나왔네! 이거 출구 맞네.”
해자수와 도천패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해자수가 가리킨 곳에 정말 빛이 있었다. 횃불이 밝히는 빛이 아니라 밝고 강렬한 태양 빛이었다.
네 사람은 빛 근처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한수 근처에서 한 번 봤던 사람…… 도움을 받았던 사람이다.
“당신이 어떻게?”
도천패가 궁충을 보며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출구가 이곳뿐이라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궁층이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그럼, 여기가 정말로 귀무살이 만든……”
“저희 안가 맞습니다. 오직 귀무살만의 안가라고 해야 하나? 혈천방은 모르는 곳이죠.”
“쳇! 그럼 뭐해. 천살단에게 발각되었는데.”
해자수가 핀잔을 늘어놨다.
“그런데 무슨 일로?”
도천패가 물었다.
“지금부터 제가 모시겠습니다.”
“굳이 모실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서로 갈 길 가면 되잖나? 도움을 받은 건 고마운데, 우리가 그렇게 살가운 사이도 아니고. 해결해야 할 문제도 있고.”
도천패가 다소 딱딱하게 말했다.
확실히 귀무살과 인연이 이어지는 것은 달갑지 않다. 아무래도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다.
귀무살은 혈천방 휘하다. 그 점을 한시도 잊으면 안 된다. 혈천방과 호발귀는 천성적으로 맞지 않는다.
처음부터 적이었다. 더욱이 귀무살 중에는 아직도 호발귀가 죽여야 할 사람이 있다.
강하에 들이닥쳐서 동패와 왕소를 죽인 자 중 두 명이 살아있다. 더욱이 그들은 부대주까지 되었다. 호발귀는 그들의 목숨을 반드시 요구할 것이다.
친구들을 피부를 생으로 벗긴 악마들이니 반드시 죽일 것이다.
더욱이 사부는 아직도 행방불명이다. 혈천방까지 뛰어 들어갔는데도 찾지 못했다.
귀무살과는 해결해야 할 일이 많다.
궁충은 차디찬 음성에도 굽힌 허리를 펴지 않았다.
“우선 나가시기 전에 들으셔야 할 말이 있습니다.”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지만……”
“호발귀 이야기입니다. 호발귀가 혈마로 변에서 살단 무인을 척살했습니다.”
궁충의 입에서 호발귀에 대한 말이 나왔다.
귀무살을 밀어내던 도천패도 입을 꾹 다물었다. 호발귀에 대한 말만은 누구에게든 들어야 한다.
꿀꺽!
홀리가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고 빠르게 말했다.
“말해주세요. 바깥 상황, 어때요?”
호발귀가 혈마가 된 것, 살단 무인들과 충돌한 것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짐작 정도 한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궁충은 자신들이 수직 갱도로 떨어진 후에 벌어진 일을 말해주고 있다.
호발귀에 대한 소식이 궁금하다. 뭐가 어떻게 됐나?
“호발귀는 갱도 밖으로 나오면서 십이철창진을 분쇄했습니다. 그들을 모두 죽였는데……”
궁충은 처음부터 끝까지 상세히 말해주었다.
호발귀가 살단 무인을 어떤 식으로 도륙했는지, 살단이 어떻게 대응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눈으로 본 듯이 하나하나 설명해 나가기 시작했다.
호발귀가 갱도에 묻혔다.
이것도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다.
어떤 식으로든 살단은 호발귀를 갱도로 유인했을 것이다. 그리고 화약으로……
사실, 이런 방법이 아니면 미쳐서 날뛰는 악마를 제지할 방법이 없다.
갱도는 완전히 무너졌다. 어느 정도 심하게 무너졌는지는 직접 경험해봐서 안다.
호발귀가 이 속에 갇혔다면…… 살기는 틀렸다.
사람들은 홀리부터 쳐다봤다.
한데 이런 상황에서도 홀리는 의외로 침착했다.
“왜들 그렇게 쳐다봐요?”
“아씨, 괜찮아요?”
해자수가 너무 침착한 홀리를 보며 불안한 듯 물었다.
“풋! 괜찮지. 내가 뭐 어때서?”
홀리는 웃기까지 했다.
“호발귀가 늘 말해왔잖아. 혈마가 되면 죽여달라고. 또 얼마 전에는 다시는 호발귀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고. 난 이런 생각까지 들어. 어쩌면 호발귀 스스로 이 갱도 속으로 들어온 게 아닌가 하고. 묻힐 것을 알면서.”
“에이, 아씨도. 혈마가 무슨 정신이 있어서.”
해자수가 무심코 말을 하다가 입을 뚝 다물었다.
도천패가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당홍도 눈을 가늘게 뜨고 쏘아봤다.
해자수는 급히 말을 바꿨다.
“하긴 호발귀라면 그럴 수도 있지. 혈마를 정말 싫어했잖아. 정말 스스로 뛰어든 건가?”
“이미 늦었어요. 아저씨는 이미 동생한테 찍혔어.”
당홍이 놀리듯이 말했다.
“일단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궁충이 정중하게 말했다.
“아니, 말은 잘 들었는데. 그렇다고 우릴 모실 것까지는 없다니까. 솔직히 말하면 귀무살과 더 인연을 맺기 싫어서 그래. 이런 점 이해하고.”
도천패가 궁충의 호의를 거절했다. 그때,
“왜 호의를 베풀죠?”
당홍이 궁충을 보며 물었다.
궁충은 여전히 최대한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 부분은 귀무령께서 직접 말씀드릴 겁니다.”
“귀검은 어디 있는데요?”
“갱구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혈마가 살아나올 수도 있어서.”
“지켜봐서 뭐하게요? 혈마를 잡기라도 하게요?”
“혈마가 되었든 호발귀가 되었든 나오기만 하면 귀무령께서 길을 인도하실 겁니다.”
궁충이 말이 이상했다.
길을 인도한다? 뭔가 방법이 있다는 말로도 들리고…… 어떤 식으로 알아들어야 할지 모를 말이었다.
“우선 밖에 나가서 씻으시고, 상처도 치료하셔야 하고…… 귀무령님을 만나보시면 모든 의문이 풀리실 겁니다.”
궁충이 차분하게 말했다.
“가요.”
홀리가 일어섰다.
“귀무살하고 인연을 맺는 거는 나도 반대인데.”
해자수가 중얼거렸다.
홀리가 말했다.
“호발귀가 이 갱도에 묻힌 건 사실이고, 호발귀 자신이 두 번 다시 호발귀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했으니 혈마가 되어 있을 것이고, 귀검도 혈마와 살단의 싸움을 보고 분석했다니 틀림없을 것이고. 그러면 이미 상황은 다 정리된 거잖아. 호발귀는 혈마가 됐어. 다시 호발귀로 돌아오지 못해.”
홀리의 음성이 무척 침착했다.
“내 남자, 호발귀는 죽었어. 귀검은 적이지만 냉철한 사람이니까 그가 본 게 확실할 거야. 가. 가서 이야기를 들어봐야지. 무슨 말을 할지.”
홀리가 일어섰다.
홀리의 침착함은 절망감에서 일어난다. 절망이 극한에 이르면 이토록 침착해진다.
지금 홀리는 폭발 직전이다. 감정이 폭발시킬 곳이 없어서 꾹 눌러 참는 것이다. 여기서 누가 잘못 건들기만 해도 곧바로 폭발해 버릴 것이다.
모두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귀검이 무슨 소리를 하나 들어보지 뭐. 어려운 것도 아니고.”
해자수가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