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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마전인-366화 (366/500)

第八十四章 혈기본령(血氣本靈) (1)

죽여! 죽여! 죽여! 죽여!

혈마가 죽이라고 명령한다.

눈앞에 죽일 사람들이 늘어져 있다. 사람이 너무 많다. 이들을 모두 죽여야 한다.

“크크크! 크크크큿!”

호발귀는 괴소를 흘렸다.

죽일 사람이 너무 많은 데 대해서 만족한다.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죽이는 쾌감을 맛볼 수 있다.

얼마나 좋은가. 이것은 우주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호발귀의 머릿속은 온통 혈마의 지시로 가득 찼다.

혈천방에서 혈천방도를 죽일 때는 상대가 몇 명이 있는지 알지 못했다.

자아는 완전히 소멸하고 없었다. 혈마가 육신을 지배하면서 살인이 자행되었다.

혈마가 푸른 빛, 생기를 꺼트렸다.

호발귀는 혈마가 죽인 사람을 알지 못한다. 혈마든 호발귀든 같은 사람이 죽였는데 어떻게 모를 수 있냐고 할 수도 있다.

‘미친놈, 헛소리 작작 해’하고 다그칠 수도 있다.

그렇다. 미친놈이다.

호발귀는 혈마가 사람을 죽이는 순간조차도 인지하지 못한다.

누군가를 죽였다는 사실은 혈마를 벗어난 후에야 안다. 혈마로 있는 동안은 전혀 모른다. 그것도 혈마가 되었으니 사람을 죽였겠지 하는 정도만 인지한다.

정확하게 사람을 죽인 사실을 소문이나 다른 사람이 해준 말을 듣고서야 안다. 자신이 저지른 살인 현장을 보고도 자신이 한 일이라고 믿지 않는다.

정말로 미친 상태인데, 누구를, 얼마나, 어떤 식으로 죽였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모든 것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은 눈앞에 사람이 있다는 게 느껴진다.

혈마가 이들을 죽이라고 지시한다. 그리고 육신이 검을 들었다. 이들을 죽이기 위해서 쫓아간다.

이런 사실들이 느껴진다.

한 가닥 경맥, 수태음폐경이 만들어낸 조화다.

수태음폐경은 팔을 움직이는 경맥이다. 뇌로 직결되는 경맥이 아니다. 어떤 사고 작용과도 연관이 없다. 생각이나 의식이 머물 공간도 없다.

그런데도 호발귀는 자신을 인지했다.

인지? 그렇다. 단순히 인지하는 선에서 그친다. 자신을 느끼는 선에서 그친다.

호발귀는 혈마를 저지하지 못한다.

눈앞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떠한 경고도 해주지 못한다. 마음속에서라도 ‘도망쳐!’라는 말 한마디를 하지 못한다. 오직 죽이라는 말만 머릿속을 가득 맴돈다.

머릿속에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을 때, 또 다른 사실을 떠올리기는 굉장히 어렵다.

구운 닭을 보면서. 저 닭이 먹고 싶어서 미치겠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오향장육을 떠올릴 수는 없다.

이것이 인간의 머리다.

한 가지 사실에 고정되면 그 사실만 생각하게 되어 있다.

만약 다른 생각을 떠올린다면 구운 닭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밀려간 것이다.

한 생각이 지나간 자리에 다른 생각이 들어선다.

혈마 같은 경우에는 오지 죽이라는 말만 한다. 몸 전체가 붉은빛, 혈기로 뒤덮여 있다. 다른 생각은 일절 할 수가 없다. 죽여! 죽여! 미친 듯이 죽이라는 말만 한다.

예전과 다른 점이 있기는 하다.

호발귀는 눈앞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의식했다. 혈마가 저들을 죽이기 위해서 움직인다는 것도 안다. 단순히 아는 선에서 그치지만, 이것이 어디인가. 예전에는 이런 ‘안다’ 혹은 ‘느낀다’라는 의식조차 없었는데.

쒜에엑!

그는 죽여야 할 자들을 향해 덮쳐갔다.

더는 혈마의 명령을 거역할 수가 없었다.

쒜엑! 쒜에엑! 쒜에엑!

바람 소리가 허공을 가른다.

“아아악!”

“커억!”

“저, 저 미친놈!”

온갖 비명, 악다구니가 폐광을 울렸다.

살단 무인들이 썩은 짚단처럼 베어줬다.

이거는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다. 호랑이에게 덤벼드는 강아지? 아니다. 강아지도 안 된다.

강아지는 그래도 물기라도 한다. 아예 저항할 능력이 전혀 없는 갓 태어난 갓난아기 정도라고 하면 딱 맞을 것 같다.

쒜에엑!

“커어억!”

바람 소리가 울리면 어김없이 비명도 터져 나왔다.

살단 무인들은 죽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 쳤다. 맞다. 살단 무인들은 적을 죽이기 위해서 공격한 것이 아니다. 살기 위해서 발버둥 친 것이다.

도망가기 위해서 혹은 혈마가 공격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어떻게든 혈마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평생 수련한 온갖 무공을 다 쏟아냈다.

꽈아앙! 꽈앙!

화약도 터졌다.

살단은 화약을 사용하지 않는다. 칼만 써도 누군가를 베는 데는 충분했다. 살단은 황야를 떠도는 늑대라는 인상이지, 화약이나 암기를 쓰는 살인집단의 인상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낭견대가 흘린 화약을 찾아냈다. 그리고 혈마에게 사용했다.

혈마는 화약을 귀신처럼 피했다.

마치 위험한 곳이 어딘지 느낌으로 아는 듯했다. 화약 근처에는 절대 가지 않았다.

그리고 어김없이 사람을 죽였다.

“아!”

호발귀를 보는 사람은 탄성밖에 흘리지 못했다.

어떤 말도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딱 한 마디, ‘아!’라고 탄성을 토해내면 끝이다. 도저히 뒷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쒜에엑! 퍼억!

혈마가 탕마삼검(蕩魔三劍)을 제치고 은구(恩俱)의 북부에 검을 들이밀었다.

은구는 그 즉시 고꾸라졌다. 배가 반이나 갈렸다. 내장이 아주 크게 썰렸다. 복부를 움켜잡고 무릎을 꿇은 은구는 곧 머리를 땅에 박았다. 그리고 모로 쓰러졌다.

은구가 수련한 탕마검법은 빠르기로 유명하다. 살단 무인 내에서 누가 빠른지 거론할 때는 늘 빠지지 않고 거론된다. 그리고 정말 빠르다.

하지만 그런 탕마검법도 혈마 앞에서는 굼벵이처럼 느려 보였다.

사홍광(射鴻光)은 대부를 사용한다. 원래, 나무꾼이었던 자라서 큰 도끼를 잘 다룬다. 웬만한 나무는 서너 번 만에 찍어 넘기기로 유명하다.

휘이이이이!

대부가 혈마를 향해 날아갔다. 혈마를 찍는다.

혈마가 검을 들어서 마주쳐 왔다.

사홍광의 대부 앞에 혈마의 검은 매우 빈약해 보였다. 단번에 검을 짓뭉개고 혈마의 머리를 내리찍을 것 같았다.

꽝!

검과 대부가 부딪쳤다.

그런데 검이 대부를 갈라버렸다. 도낏자루를 가른 게 아니다. 혈마의 검이 대부의 날이 정확하게 갈라냈다.

대부를 가르면서 쭉 뻗은 검 끝에 사홍광의 머리가 걸렸다.

빠악!

괴음과 함께 사홍광의 머리는 절반이 없어졌다.

코 위가 완전히 사라졌다. 붉은 핏물이 확 솟구쳤고, 머리를 잃은 사홍광은 맥없이 쓰러졌다.

혈마는 피로 범벅이다.

혈인(血人)!

그 피는 살단 무인들이 흘린 것이다. 수십 명이 혈마의 몸에 피를 쏟아냈다.

“크크크! 크크크크크!”

혈마가 붉은 눈을 번뜩이며 살단 무인에게 다가섰다.

“괴물…… 괴물…… 새끼……”

주치균이 혈마를 보면서 중얼거렸다.

주치균은 들것에 누워 있었다.

혈마에게 당한 상처가 너무 깊다. 몸을 반이나 갈라냈다.

옆에서 응급조치를 취하고 있지만, 상처가 너무 피해서 지혈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다.

치료해도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주치균은 이런 상황에서도 의식을 잃지 않았다. 간신히 정신 한 올을 붙잡고 싸움을 지켜봤다.

주치균의 말에 대꾸하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같은 생각이다. 혈마를 보고 괴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저게 괴물이 아니면 누가 괴물인가.

“후퇴하자.”

주치균이 말했다.

“후퇴! 후퇴하라!”

장향동이 당장 명령을 받아서 소리를 내질렀다.

지금 상황에서 싸움을 더 끌어가기는 어렵다. 누가 봐도 무리다. 싸움 자체가 무의미하다.

“후퇴! 후퇴!”

퇴각 명령을 받은 무인들이 서로 크게 소리 질렀다.

혹여 다른 사람이 명령을 못 듣고 계속 싸울까 봐 도와주려고 소리친 것이다.

아니다. 이건 자신에게 내지른 소리다. 이제는 퇴각해도 된다는 안도감에서 장향동의 명령을 되뇌었다.

지금 즉시 후퇴하지 않으면 혈마에게 죽을 것이라는 공포감이 밀려온다. 그러니 즉시 후퇴 명령을 받아야 한다.

타타탁! 타탁!

살단 무인들이 빠르게 물러섰다.

“크크크! 크크크큿!”

쒜엑! 쒜에엑!

“아아아악!”

후퇴하는 와중에도 비명은 계속 터졌다.

혈마는 후퇴하는 무인조차 내버려 두지 않았다. 혈마는 사람을 죽이고 있지 않다.

몸통 안에 가둬진 생기, 푸른 빛을 꺼내서 우주로 돌려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아직 몸통 안에 든 푸른 빛이 많다.

푸른 빛이 이리저리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으니 빨리 쫓아가서 풀어놓아야 한다.

“크크크! 크크크크크!”

혈마가 무인들을 쫓아가며 검을 휘둘렀다.

날다람쥐처럼 빠른 신법을 지닌 도창(陶漲)도 혈마에게 등을 얻어맞고 풀썩 쓰러졌다.

신법이 빨리서 다른 무인보다 더 빨리 달아날 수 있었는데, 그게 오히려 혈마의 눈에 띈 모양이다. 혈마에게 단숨에 따라잡혔고, 검을 맞았다.

“제가 남겠습니다.”

연소부가 말했다.

누군가는 혈마를 막아줘야 한다.

“후퇴! 후퇴!”

장향동은 연소부를 만류하지 못했다. 계속해서 수하들에게 후퇴하라는 명령만 내렸다.

살단 무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도주했다. 혈마는 여전히 쫓아왔다. 그러니 가급적 멀리 도망가야 살 가능성이 크다.

그야말로 오합지졸이 따로 없다.

살단 무인들은 도망가기 위해서 전력을 다했다. 평생 배운 신법을 전부 동원했다.

아마 지금처럼 사력을 다해서 무공을 펼친 적은 없을 것이다.

“가자!”

주치균이 말했다.

연소부가 혈마 앞을 막겠다고 말했지만, 그 말에 어떤 명령도 내릴 수 없었다.

그는 마지막 명령을 한 후, 정신을 잃었다.

털썩!

주치균의 고개가 옆으로 떨어졌다.

“단주님!”

장향동이 주치균을 불렀다.

주치균의 상처가 너무 심해서 죽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사실, 주치균이 갱도에서 물러 나왔을 때, 너무 심한 상처를 보고 곧 죽을 것으로 생각했었다.

혈마의 검은 정확하게 푸른 빛을 꺼뜨린다.

그나마 주치균이 즉사하지 않고 목숨을 부지한 것은 혈마의 몸속에 남아있던 한 가닥 자아, 혈마의 명령을 쫓으면 안 된다는 저항이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숨이 붙어계십니다.”

상처를 치료하던 무인이 말했다.

지금의 혈마는 그 저항조차도 힘을 쓰지 못한다. 이리저리 살단 무인을 쫓아다니면서 참살하기 바쁘다.

“먼저 후퇴해라.”

장향동이 말했다.

“그럼 저희가 먼저!”

들것을 잡은 무인들이 쾌속하게 신형을 쏘아냈다.

쒜엑! 쒜에엑!

장향동은 들것을 든 무인이 빠져나가는 것을 보면서 뒤돌아섰다. 아직은 그가 빠져나갈 단계가 아니다. 후퇴하는 무인들을 최대한 챙겨야 한다.

“산음(山陰)으로 가라! 산음! 산음으로 가!”

장향동이 목청을 돋워 소리쳤다.

설마 혈마가 ‘산음’이라는 말까지 알아들을까. 아니겠지. 그곳까지 쫓아오지는 않겠지.

산음은 광산 초입에 있는 마을이다.

일단 산을 내려가 산음으로 모이라는 지시다.

이것이 장향동이 수하들에게 내릴 수 있는 최고이자 최후의 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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