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三章 암로(暗路) (5)
“크크큭! 크크크큿!”
혈마의 괴소가 터졌다.
십이철창진은 혈마를 아랑곳하지 않고 갱도 안으로 들어섰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이 누구와 싸우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홀리? 도천패? 당홍?
십이철창진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자들과 싸우는 중이었다. 상대가 혈마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괴소가 들리기는 했지만, 약간 미친 인간의 음성일 뿐이다.
그들은 타격에 자신이 있기도 했다.
옷 안에 보의(保衣)를 입고 있어서 웬만한 병기는 흠집조차 내지 못한다.
차분히, 한 걸음씩 앞으로 전진하다 보면 수직으로 뚫린 갱도가 나온다.
상대가 누구든, 몇 명이나 되었든 개의치 않고 수직 갱도까지만 밀고 가면 된다.
그들은 갱도 안에서 벌어진 싸움도 신경 쓰지 않았다.
오직 할 일만 했다. 창을 내지르는 일…… 누군가가 나타나서 앞을 가로막으면 도부수가 처리하고, 장애물이 치워지면 또 한 걸음씩 나아가고. 그런데,
까앙! 깡!
혈마가 장창을 후려쳤다.
무정삼결 제일식 멸천겁이다.
장창의 창대가 단숨에 잘려나갔다.
도천패도 이렇게 잘라내지 못했는데, 마치 수수깡이라도 된 듯이 가볍게 잘려나갔다.
“훗!”
저들이 비로소 깜짝 놀랐다. 하지만 반응도 빨랐다. 즉시 상단 창이 쏘아져 왔다.
쉬잇! 파라라라락!
혈마가 허공으로 솟구치며 다시 검을 쳐냈다.
호발귀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신법 마형귀적이다. 귀신의 움직임처럼 그림자만 남는다.
차앙! 까아앙! 까앙!
이번에도 창대가 우수수 잘려나갔다.
혈천도법 중 상대방은 세 조각으로 갈라버린다는 혈천삼분이다.
“웃!”
상단 창을 내지른 창수도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것이 시작이다. 일방적인 도살이 시작되었다. 전면에 늘어섰던 여섯 명이 순식간에 피떡이 되어 쓰러졌다.
도천패가 말했던 대로 이건 도살이다. 싸움이 아니다. 싸움이란 서로 공방이 이어져야 하는데, 너무 일방적이다. 검을 쳐내는 족족 사람이 쓰러진다.
슈숫!
진이 갈라지면서 도부수 세 명이 나섰다.
그들이 각기 다른 도초를 펼쳐냈다.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거의 굼벵이처럼 느렸다.
혈마의 검이 금강도법을 갈라버렸다.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강도가 반으로 쪼개졌다. 굳건하기로는 대력금강에 버금간다는 금강도법인데.
그와 동시에 도부수의 몸도 오른팔 겨드랑이부터 왼쪽 목 위까지 일직선으로 혈선이 그어졌다.
혈마는 순식간에 영사십도와 천뢰금도도 갈라버렸다.
아예 상대가 안 된다. 어떻게 공격해오는지도 모르겠다. 검이 몸을 훑고 지나간 후에야 비로소 공격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지한다. 그전에는 자신에게 위험이 닥친 줄도 모른다.
창수 열두 명과 도부수 세 명이 죽는 데 걸린 시간은 눈 깜빡할 사이였다.
“크크큿! 크큿!”
혈마가 뒤돌아섰다.
그의 눈길은 수직 갱도를 향해서 기어가고 있는 네 사람에게 집중되었다. 그리고 눈길이 돌아가자마자 곧바로 네 명을 죽이기 위해서 달려들었다.
“호발귀가!”
“온닷!”
모두 화들짝 놀라서 서로 소리쳤다.
갱도에 괴소가 울릴 때부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혹여 혈마가 되지 않으면 굳이 수직 갱도로 내려갈 필요가 없었다. 그러니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보자는 마음이었다.
홀리도 혈마가 십이철창진을 눈 깜짝할 순간에 없애버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기는 건 당연해. 하지만 시간이 걸릴 거야. 십이철창진도 만만치 않거든.’
그녀의 생각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빨리!”
홀리가 해자수를 재촉했다.
홀리와 당홍은 이미 수직 갱도 앞에 서 있었다. 한데 도천패가 너무 힘들게 걸어왔다.
“가…… 고 있다고요! 끄응!”
해자수가 사력을 다해서 도천패를 이끌며 말했다.
크크크크! 크크큿!
혈마의 괴소가 등 뒤에서 들렸다.
아니! 보인다! 혈마가 나타났다!
“빨리!”
홀리는 가까이 다가온 해자수와 도천패를 낚아채서 갱도 안으로 확 밀어버렸다. 그리고 자신과 당홍도 거의 구르다시피 수직 갱도 안으로 굴러떨어졌다.
휘이이이익!
그들의 등 뒤로 혈마의 검이 스치고 지나갔다.
간발의 차이다. 정말 아슬아슬하게 혈마 손에서 벗어났다.
“아!”
입에서 탄식이 절로 흘러나왔다.
수직 갱도는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동혈이다.
한참을 떨어졌는데, 계속 떨어지고 있다. 떨어지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쉐에에엑!
귓가로 세찬 바람이 흘러갔다.
벽호공을 시전해서 차분히 내려섰어야 하는데…… 이런 식으로 갱도 바닥에 떨어지면 뼈조차 추리지 못한다.
완전히 산산이 조각나고 만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 일보 직전이다.
‘틀렸어.’
어떻게 발버둥 칠 수조차 없다.
차라리 혈마에게 검을 맞는 것이 생존 가능성이 컸으려나? 검에 맞고도 사는 사람이 있으니까. 이런 식으로 갱도에 떨어지면 요행조차 바라지 못하는데.
쒜엑! 쒜에엑!
네 사람은 끝없이 수직 갱도 밑으로 떨어졌다.
철…… 컥!
몸이 무엇엔가에 걸렸다.
딱딱한 바닥이 몸을 후려쳤다.
‘드디어 바닥에 떨어졌나?’
언뜻 이제 끝났다는 생각이 들 때, 몸이 다시 위로 붕 치솟아 올라갔다.
“훗!”
떨어지는 것도, 솟구치는 것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그저 죽지 않고 살기만 바란다.
철컹! 철컹!
밑바닥에서 무엇인가 딱딱한 것이 몸을 때렸다. 아니, 떠받쳐서 위로 퉁겨 올렸다.
몸이 다시 위로 쳐올리고, 떨어졌다.
몇 번을 반복했다.
충격이 두세 번 있고 난 후에는 다소 안심이 되었다. 밑에 그물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몸이 마차에 깔린 듯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목숨은 건졌다.
그들은 움직임이 멈춘 후에야 몸을 추슬렀다.
“아! 살았네.”
해자수가 먼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네 명 중 그만 몸이 멀쩡하다. 다른 사람들은 비수에 찔리고, 검에 베였다. 거기에 천 길 나락으로 떨어진 충격까지 더해져서 눈조차 뜨기 힘들었다.
“이거 그물이 아닌데? 삭망(索網)이야, 삭망.”
동아줄로 만든 그물이다. 떨어지는 사람을 받기 위해서 만든 그물이 아니라 물건을 받으려고 만든 것이다. 위에서 물건을 던지면 이곳으로 떨어진다.
폐광이 된 지 오래되었는데, 아직도 삭망이 삭지 않았다니 천우신조다.
“으음!”
홀리도 신음을 흘리며 일어섰다.
해자수 말처럼 수직 갱도 밑바닥에 넓은 그물이 펼쳐져 있다. 그물의 굵기는 어린아이 손목만 하다. 굉장히 굵은 그물이다. 그물이라기보다는 밧줄을 엮어서 만들었다.
물건을 받기 위해 만든 삭망이 맞다.
위에서는 삭망이 보이지 않는다. 까마득한 절벽 밑에 있고, 어둠에 휘감겨 있어서 이런 게 있는 줄 알 턱이 없다. 시력이 아무리 좋아도, 횃불이 던져도 보이지 않는다.
“이거 만든 지 얼마 안 됐어. 새것이야.”
당홍도 일어났다. 그녀는 무의식중에 삭망을 만졌고, 단숨에 삭망 냄새를 맡았다.
새 동아줄에는 새것 냄새가 난다.
다른 사람들은 새것 냄새를 흘려버렸지만, 당홍은 냄새 맡는 습관이 있어서 단숨에 알아챘다.
“새것이요?”
“응. 새것이야. 설치한 지 얼마 되지 않았어.”
“그럼?”
말할 것도 없다. 귀무살 작품이다.
“하! 우릴 이쪽으로 몰아넣은 이유가 있었네. 귀검 그 작자…… 어휴! 이런 데 넣기 전에 언질이라도 좀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그럼 뼈 빠지게 싸우지도 않았을 거 아니야.”
해자수가 기쁜 마음 반, 원망 반의 마음으로 말했다.
이런 걸 진작 알았으면 싸우지 않고 내려올 수 있었다. 호발귀도 혈마로 변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 아니다. 설혹 이런 게 있다는 것을 알았어도 쉽게 몸을 던지지는 못했다. 일단 누군가가 벽호공으로 기어 내려와서 확인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또 쉽나? 정말로 천 길 이상 떨어진 것 같은데, 그 높은 곳을 기어 내려올 수 있나?
“아씨, 괜찮아요.”
해자수가 홀리를 보며 말했다.
“괜찮아. 형부는?”
“워낙 장사라서 이 정도로는 끄떡없을 것 같은데. 모르죠. 밝은 데 나가서 살펴봐야죠. 그런데 이제 정말 어떡하죠? 여긴 막다른 곳 같은데.”
“여기가 귀무살이 만든 곳이라면 밖으로 나가는 길도 있을 거야. 찾아봐야지.”
“아이고. 좀 쉬었다가……”
해자수가 삭망 위에 도로 누우려고 했다.
한데 홀리가 묵묵히 일어나서 삭망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밖으로 나가는 출구는 찾는 것이다.
“아씨, 좀 쉬었다가 하자니까요!”
“쉬어. 난 괜찮아.”
홀리는 개의치 않고 계속 출구를 찾았다.
당홍이 도천패의 상처를 살피다가 고개를 돌려서 홀리를 보며 말했다.
“호발귀 때문에 그러지? 혈마로 변해서 날뛰고 있으니까.”
“……”
홀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 또 말이 그렇게 되나?”
해자수도 몸을 일으켰다.
너무 높은 데서 떨어진 충격 때문에 혈마 걱정을 잠시 접어두고 있었다.
“그런데 아씨, 밖에 나가도 뾰족한 수가 없잖아요. 그놈이 혈마로 변했으면 어떡하려고 그러슈?”
“우리에겐 방법이 있잖아.”
홀리가 태연하게 말했다.
“방법? 무슨 방법? 아!”
해자수도 생각난 듯 탄성을 토해냈다.
옛날처럼 호발귀를 유인하면 된다. 생기를 가득 끌어내서 호발귀가 쫓아오도록 만들면 된다.
“그런데 호발귀가 생기를 쓰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
홀리는 침묵했다.
호발귀가 분명히 경고했다. 생기를 쓰면 혈마가 된다고. 호발귀도 혈마가 되기 전에 혈마 무공을 사용했다. 그때부터 생기를 쓰기 시작한 것 같다.
호발귀 말대로라면 모두 그런 과정을 겪어가고 있다.
호발귀처럼 혈마가 된다.
끔찍한 일이다.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지 않나. 그러면 호발귀가 혈마가 되어서 세상 밖으로 나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어야 하나? 그럴 수도 없다.
“휴우!”
해자수가 탄식했다.
진퇴양난이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지 못한다. 정말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자자! 다른 생각은 일단 접고 출구부터 찾아. 일단 나가기는 해야 할 거 아냐. 호발귀 문제는 나가서 보고 난 후에 결정해도 늦지 않으니까.”
당홍이 삭망 가장자리로 가서 벽을 더듬기 시작했다.
슈웃!
벽을 더듬던 손이 저항 없이 안으로 쑥 들어갔다.
“웃!”
해자수는 상반신이 훅! 딸려가는 바람에 깜짝 놀라서 경악성을 토해냈다.
무심코 손을 뻗었다가 쓰러질 뻔했다.
“여기 비였는데?”
해자수가 말했다.
해자수가 부를 필요도 없이, 그의 한 마디에 모두 모여들었다.
탁탁!
홀리가 재빨리 부싯돌을 꺼내 불똥을 튀겼다.
작은 불똥 속에서 깊은 동혈이 보였다. 얼마나 깊은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출구인지, 다른 갱구로 향하는 입구인지 분간이 안 된다.
광부들이 수직 갱도를 팠을 때는 이곳을 통해서 다른 갱구로 가기 위해서다.
탄을 따라서 파내려오다가 옆으로 빠진 길인지도 모른다.
“깊은데? 다른 데 찾아볼까요?”
해자수는 홀리의 눈치를 살폈다.
홀리는 호발귀 걱정 때문에 안색을 풀지 못하고 있다. 말조차 잊을 정도다.
“일단 가자. 공기가 나쁘지 않아.”
당홍이 홀리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