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三章 암로(暗路) (4)
“아씨, 아씨! 안 돼! 안 돼! 안 돼! 그거 안 돼!”
해자수가 급하게 말했다.
홀리에게 생기를 끌어내지 말라는 말이다. 하기는…… 호발귀가 이미 갱도로 나왔으니, 제일차 타격 목표가 되기 싫으면 생기 같은 것은 쓰지 말아야 한다.
홀리는 그런 점을 알고도 일부러 끌어낸 것이다. 그런데,
“아아악!”
갑자기 주치균이 처절한 비명을 토해냈다.
느닷없이 터진 사내의 비명이 주치균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의 비명 같다.
“아악! 아아악!”
비명이 고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그냥 겉으로 ‘악!’하고 한 마디 내뱉고 마는 고통이 아니었다. 뱃속에서부터 저려 울리는 신음이었다.
‘혈마! 혈마야!’
홀리는 당장 혈마의 혈기를 감지했다.
호발귀가 주치균을 공격했다. 검으로 쳤다.
호발귀는 검을 사용해서 혈천도법을 펼쳤다. 검으로 도법을 전개했다. 만근 바위도 단숨에 잘라낸다는 혈겁도가 매서운 바람 소리와 함께 터졌다.
주치균은 일격에 나가떨어졌다.
아랫배에서부터 등 위까지 쭉 썰렸다.
쒜에엑!
주치균이 피를 뿌리면서 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타타탁! 타타탁!
홀리는 급박한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얼마나 급히 움직였는지 신형을 숨길 생각도 하지 못했다.
주치균! 주치균이 도주한다.
홀리는 반가운 마음과 공포감을 함께 느꼈다.
저벅! 저벅!
혈마가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
혈마의 발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그가 걸어오고 있다는 사실은 여실히 느껴졌다.
그녀는 볼 것도 없이 생기를 풀었다.
생기를 끌어 올리고 있으면 호발귀의 타격 목표가 된다. 어쩌면 지금도 타격 목표인지 모른다.
“그래. 잘했어.”
호발귀의 음성이다. 호발귀가 말을 한다. 그녀를 알아보고, 다정한 음성으로 속삭인다.
“말하지 말고, 생기 끌어 올리지 말고.”
예전, 다정다감했던 호발귀의 음성이 그대로 들려왔다.
호발귀는 변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을 두고 누가 혈마라고 말했나. 그가 변했다고 생각한 것은 자신들이다.
“날 알아봐?”
홀리가 반가운 마음에 급히 말했다.
“말하지 말고.”
호발귀는 재차 말하지 말라는 말을 했다.
스읏!
일월혈에 꽂힌 비수가 뽑혔다.
“주치균을 죽이지 못했다. 또 오겠지만, 이번 싸움에는 끼지 못할 거야. 상당히 중상이거든.”
촤아아앗!
일월혈을 통해서 상쾌한 기운이 밀려들었다.
말도 못 하게 아팠는데, 그 아픔이 일시에 가셨다. 아픔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아픔이 가신다는 것이 이토록 좋은 건지 몰랐다. 아프지만 않아도 살 것 같다.
“난 괜찮아. 호발귀, 정신이 돌아온 거야?”
홀리는 말하지 말라는 경고를 잊어버리고 또 말을 했다. 어떻게 말하지 않을 수 있나.
“아니, 혈마가 되어가는 중이야.”
호발귀의 음성은 차분했다.
“어떤 상태인데?”
“생기를 쓰지 마. 생기를 쓰면 혈마가 돼. 너와 해자수의 몸에서 혈기를 봤어. 절대 생기를 쓰지 마.”
“알았어! 알았어! 안 쓸게!”
“지금 이대로 갱도 안쪽으로 들어가. 그 안에 몸을 숨겨. 난 곧 혈마로 변할 건데. 그렇게 되면 다 죽어. 내가 널 죽이게 하지 마. 이건 부탁이야.”
“호발귀! 손! 손이라도 잡아보면 안 돼?”
“우습지만…… 내 여자…… 손도 못 잡네. 네 손을 잡는 순간, 네 몸을 만지는 순간, 그 즉시 혈마로 변할 거야. 지금 이렇게 하는 것이 내 최선이야.”
홀리는 호발귀가 움직이는 걸 느꼈다.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가 다른 곳으로 움직인다.
그녀는 즉시 같이 움직였다.
스읏!
호발귀가 당홍의 몸에서 비수를 뽑아냈다. 그리고 일월혈에 생기가 감돌았다.
츠으으읏!
아주 깊은 상처였는데, 고통이 가신다. 상처가 아물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당장 아프지는 않다.
호발귀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호발귀는 비수를 뽑기 위해 손잡이를 잡은 것 외에는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 일월혈 치료도 직접 손댄 게 아니다.
호발귀는 혈기로 당홍에 생기를 조종했다.
호발귀의 치료는 진기 치료가 아니다. 생기 치료다. 진기보다 강력한 힘을 상처에 몰아넣는다.
당연히 상처는 굉장히 빨리 아문다. 어떠한 영역보다도 뛰어난 게 생기다.
그가 한 일은 당홍의 몸에 든 생기를 조절해서 상처 부위에 집중시키는 것이다.
생기로 자가 치료를 하게 만든다.
병균을 몰아내고 끊어진 근맥을 잇는다.
호발귀가 치료하지 않아도 생기는 즉시 자기 할 일을 한다. 상처를 회복시키는 일을 한다.
살기 위해서는 아픈 곳이 없어야 한다. 그러니 치료한다. 아픈 곳에 눌리면, 병균에 지면 생기가 떠난다. 죽음이 찾아온다.
아무리 위중한 상처라도 세월이 지나면 낫는다. 약을 바르지 않아도,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상처는 치료가 된다. 자연이 베푸는 치유력이다.
이것이 생기다. 생기가 한 일이다.
호발귀는 생기를 더 집중시킨다. 많은 생기가 상처에 모여서 가장 강한 작용을 하게 이끈다.
호발귀가 하는 것은 이것뿐이다.
생각해보면 아주 조그만 일인데, 이런 일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생기를 움직일 수 있는 사람, 이 세상에 딱 한 명…… 혈마만 할 수 있다.
효과는 설명이 필요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영약조차도 생기 한 번 쓰는 것만 못하다.
당홍은 당장 일어섰다.
“누님, 고마웠습니다.”
호발귀가 말했다.
“왜 이래! 유언처럼!”
“유언이 아니면 좋겠는데.”
호발귀는 마음의 정리를 끝낸 듯 음성이 매우 담담했다.
“혈마가 되어가는 중이라고?”
“지금 거의 반쯤. 경맥 하나 남았는데, 이것마저 터지면 혈마로 변합니다. 그때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거예요. 후후!”
“괜찮아. 우리가 고칠게. 꼭 낫게 해줄게. 이러지 마. 이런 말을 하면 슬플 사람이 많아.”
“날 죽이는 방법이 없는지 찾아봤는데, 없네요.”
“야!”
당홍이 빽 소리 질렀다.
“혈마후에게 부탁할 게 없어요. 아무것도. 날 죽일 방법이…… 전혀 없어요.”
호발귀가 움직였다.
이번엔 도천패다. 도촌패의 일월혈과 등 뒤 지심혈에 박힌 비수를 뽑아냈다.
츠으으읏!
도천패의 생기가 두 혈로 모여들었다.
“보위. 꼴이 말이 아니네?”
“남 말 하지 말고. 문주, 얼굴이라도 봤으면 좋겠는데.”
“보위. 책임지고 수직 갱도 안으로 들어가. 줄은 없지만, 벽호공으로 내려갈 수 있을 거야. 최대한 내려가. 혈마를 피할 수 있겠다고 생각될 때까지 계속.”
“혈마가 안 되는 방법은 없는 거냐?”
도천패가 물었다.
“나도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데. 사실, 이 순간도 나는 혈마야. 말을 하면 할수록, 숨결을 접하면 접할수록 죽이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쳐. 보위를 죽이고 싶어서 미치겠어. 인간 같지 않은 말이지만 이게 지금의 나야. 정말 억지로 참아.”
“호발귀!”
홀리가 울먹이며 말했다.
“홀리, 날 그렇게 그렇게 좋아해 줘서 정말 고마워.”
“무슨 소리야! 이딴 소리 하지 마! 듣기 싫어!”
“자! 그만 내려가. 나는 곧 혈마가 돼. 그때는 늦어. 알잖아. 천추의 한이 되게 하지 마.”
호발귀가 차분하게 말했다.
홀리는 호발귀가 언제 혈마가 될지 그 시기를 안다.
십이철창진이 계속해서 전진해오고 있다. 주치균이 피를 흘리면서 갱도 밖으로 뛰쳐나갔는데도, 저들은 물러서지 않고 여전히 안으로 들어온다.
조금 힘들게 상대했다고, 자신들이 무적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다.
혈마가 호발귀가 저들을 치는 순간, 바로 혈마로 변한다.
저들을 죽인 혈마는 곧바로 다음 목표로 향한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생기, 바로 자신들이다.
“호발귀!”
홀리의 음성이 덜덜 떨렸다.
그녀는 호발귀를 껴안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사람과 접촉하면 혈마가 더 빨리 되는 거 같다.
가까이 있으면서도, 다 알고 있으면서도, 말을 못 하고 떨어져 있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지금 가!”
호발귀가 일어섰다.
“해자수!”
“알았어요. 알았어.”
해자수가 급히 달려와서 도천패를 부둥켜안았다.
지금 누가 누구를 부축해주고 할 정신이 없다. 홀리도, 당홍도 일월혈에 비수를 맞았다.
호발귀가 치료해 주었지만, 상처가 워낙 깊다. 호발귀의 치료는 응급조처일 뿐, 여전히 치료를 필요로 한다.
도천패의 상황은 더 나쁘다.
마지막 연액혈에 한 대만 더 맞았으면 무공이 전폐 될 뻔했다. 그만큼 타격이 컸다.
도천패는 지금 두 다리에 힘이 풀려서 일어설 수도 없을 것이다.
해자수가 도천패를 부축한다는 것도 무리다. 도천패는 해자수보다도 몸무게가 거의 세 배는 더 나간다.
도천패가 자의로 움직이지 않는 한, 결코 그를 끌고 가지 못한다.
그러니 해자수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넣어서 부축하는 것뿐이다.
츠으읏!
해자수가 진기를 일으켰다. 도천패를 움켜잡았다.
“일어나!”
“끄응!”
도천패가 힘주어 일어섰다. 하지만 거의 질질 끌리다시피 하면서 갱도 안쪽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언니, 가요!”
홀리가 말했다.
지금 여기서 물러서자고 말할 사람은 홀리밖에 없다. 누가 호발귀를 버리고 가자고 할 것인가. 그녀가 먼저 말해야 다른 사람들이 움직이기 편하다.
“하아!”
당홍이 탄식했다.
안타깝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너 괜찮아?”
“괜찮지 않지. 언니, 어떻게 괜찮아.”
홀리의 음성에 울음이 섞여 나왔다. 울지는 않았다. 여전히 꿋꿋했다. 하지만 눈물이 깃들어 있다. 축축한 물기…… 홀리는 가슴으로 울고 있다.
“미안! 가자!”
당홍이 손을 내밀어 홀리를 잡았다.
먼저 가자고 한 건 홀리다. 하지만 지금은 당홍이 그녀의 손을 잡아주어야 한다. 정작 가장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사람은 홀리일 것이다.
‘잘 가.’
호발귀는 갱도 벽에 등을 붙인 채 멀어져 가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일부러 냉정하게 일행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하지만 살단 무인들을 급하게 치지는 않는다.
그도 자신을 안다. 저들을 치는 순간, 그 즉시 혈마로 변할 것이라는 사실은 안다.
살생은 혈기를 끌어올리고, 끌어 올려진 혈기는 더욱 심한 살생을 일으킨다.
차라리 저들이 자신을 죽여줬으면 좋겠다.
마음 같아서는 저들이 내지르는 창 앞에 몸을 내놓고 싶다. 하지만 몸이 그렇게 반응하지 않는다.
몸이 다른 반응을 한다. 일단 창 앞에 서면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손발이 튀어 나간다.
검이 휘둘러진다. 어떤 초식을 펼쳐야겠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몸부터 움직인다. 어떤 때는 마영심도가 되고, 어떤 때는 혈천도법이 튀어나간다.
그 순간을 최대한 늦추려는 것이다. 홀리가 수직 갱도에 다다를 때까지 버텨야 한다.
십이철창진을 무너뜨리고 나면 혈마는 두 군데로 갈 수가 있다.
갱도로 나갈 수 있다. 그쪽에 살단 무인들이 있다. 갱도 안쪽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쪽에도 생기를 가진 사람이 네 명 있다. 어느 쪽으로 갈 것인가?
이 선택을 호발귀 자신이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나.
혈마가 되면 이런 선택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생기를 친다.
그것이 홀리가 될까 봐 두렵다.
그래서 그녀가 멀리 떨어지도록 기다리고 있다.
차착! 쒜엑! 차착!
창을 내지르는 소리가 아주 가깝게 다가왔다.
이제 곧 살겁이 이루어진다.
‘어서 빨리…… 조금이라도 멀어져야 해. 홀리. 후후! 홀리.’
호발귀는 홀리를 떠올렸다.
한 번이라도 안아볼 것을 그랬나? 이렇게 헤어지는 게 마지막을 줄 알았다면 한 번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