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一章 암수(暗手) (5)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고 속담이 있다.
비보전이 딱 그 짝이다. 고생이란 고생은 비보전이 다했는데, 혈마를 찾아내기까지 했는데, 십이비자까지 죽었는데…… 그런데도 결정적인 장면에서는 뒤로 물러서야만 했다.
이런 일이 결코 좋을 수는 없다.
물론 비보전에는 혈마를 상대할 수 있는 무인이 없다. 비보전은 싸우는 조직이 아니다. 폐광을 찾아내고 천살단 무인을 인도해주는 데까지가 비보전이 해야 할 몫이다.
그 이후는 천살단에 맡긴다.
할 바를 다했는데, 성공적으로 마쳤는데도 기분이 아주 더럽다.
결정적인 장면을 남에게 준다는 것은 능력 여하를 떠나서 속이 쓰리다.
“변수는?”
비보전주가 차분하게 물었다.
“변수가 뭐 있을 리가 있습니까? 여기는 뭐 사방을 둘러봐도 빠져나갈 데가 있어야죠.”
일비자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일비자 역시 지금 상황이 영 못마땅한 것이다.
“네 내선은 이쪽 지형을 잘 아는 것 같던데. 뭐 충고나 조언 같은 것 없었나?”
“글쎄요. 그날 이후로 감쪽같이 숨어서.”
내선은 가끔 종적을 감추기도 한다.
혈천방 내에 내선을 두면 그런 경우가 더 잦다. 비밀을 말해준 후에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서 잠적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내선이 사라졌다는 말은 새삼스럽지 않다. 아마도 십육비자들이 하는 말 중에 가장 흔한 말일 것이다.
“만나봐.”
“굳이 무리해서 만날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이미 우리 손도 떠났는데.”
“네게 명령이라는 말을 몇 번이나 더 쓸 수 있을지 모르겠다. 명령이다. 만나봐.”
“쯧! 전주님도 참. 여길 보세요. 외통수 아닙니까? 사방이 막혔는데 뭘 그리 걱정하세요. 이럴 때는 허리띠 풀어놓고 편히 구경할 수 있는 뱃심도 있어야죠.”
“그런 건 네가 전주가 되었을 때나 하고.”
“알겠습니다. 만나보고 오죠.”
일비자가 일어섰다.
‘바보 같은 사람.’
일비자는 화가 치밀었다.
비보전주가 너무 답답해서 화가 난다. 너무 우직해서……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하라는 것 때문에 화가 난다.
비보전주를 이십 년 넘게 모셨지만 어떨 때 보면 정말 답답하다.
성격이 너무 신중해서일까? 튼튼한 돌다리도 반드시 두들겨 본 후에야 건넌다.
그런 후과는 오로지 비자들이 감당해야 한다.
그런 사례는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가만히 있어도 될 것을 위험부담을 무릅쓰면서 내선을 만나러 가야 하지 않나. 그러다가 내선 신분이 발각되면, 그는 쥐도 새도 모르게 제거될 것이다.
전주의 신중한 성격 때문에 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
현재 십육비자 중에 일곱 명이 죽었다. 남은 비자는 아홉 명밖에 되지 않는다. 죽은 일곱 명 중 하지 않아도 될 업무에 휩쓸렸다가 죽은 비자가 절반은 될 것이다.
‘이미 전권이 살단주 주치균에게 넘어갔는데 뭘 더 알아보겠다고. 후우!’
일비자는 속상해서 한숨을 토해냈다. 하지만 명령은 명령이다. 전주가 명령을 내렸으니 따라야 한다. 아무리 속상하고 화가 나도 할 일은 한다.
화라는 것도 할 바를 하고 나서 토해야 한다.
비보전주는 암울한 눈으로 폐광을 쳐다봤다.
‘이상해.’
그가 일비자에게 탄광을 조사해보라고 말한 데는 이유가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궁금한 점이 풀리지 않는다. 진한 의문이 남아있다고 해야 하나?
궁금한 점, 장소다. 폐광!
이 폐광은 귀검이 선택했다.
귀무령 귀검이 이 폐광에 혈마를 숨길 때는 특별한 이유가 있지 않겠나. 단지 하양양이라는 자를 믿어서인가? 아니면 폐광이 은밀하다는 점을 믿었나?
비보전주는 귀무살을 안다.
귀무살과 대척점에서 몇십 년을 싸워온 만큼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귀무살의 신조는 ‘믿지 말라’는 것이다.
세상을 믿지 않는다. 사람을 믿지 않는다. 부모·형제도 믿지 않는다. 순수한 뜻으로 베푼 호의도 믿지 않는다. 같은 동료조차도 믿을 수 없다.
실제로 귀무살은 동료 아흔아홉 명을 죽인 끝에 살아난 인간말종이다.
어떤 것도 믿지 않는다!
이것이 귀무살의 본성이다.
귀무살이 보기에 이곳은 안전한 장소가 절대 아니다. 이곳이 세상에 알려졌다고 생각해보자. 외통, 도주할 데가 없는 최악의 장소로 돌변한다.
귀무살이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았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니 귀검이 혈마를 이곳에 감췄을 때는 특별한 무엇인가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찾아야 한다.
물론 일비자가 투덜거리는 데도 이유가 있다.
이곳 탄광 광부들은 이구동성으로 폐광에 출구가 없다고 말했다.
안쪽으로 들어가면 수직 갱도가 있는데, 수직 갱도는 깊이만 이백 장이다. 설혹 그곳으로 내려간다고 해도 출구가 없다. 꽉 막힌 굴이다.
수십 명이 같은 말을 했다.
그러니 폐광 안에 있는 사람들은 완전히 갇혔다.
현실을 보면 출구 없는 외통수인데, 귀검을 생각하면 뭔가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제발 여기서 끝내자. 혈마, 그놈 좀 잡아.”
비보전주가 중얼거렸다.
살단주 주치균에게 마지막 장면을 빼앗긴 것은 억울하지만 혈마와의 추격전을 여기서 끝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번 일이 자신의 마지막 작업이 될 수도 있어서 더욱 그런 생각이 일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살단주 주치균이 혈마를 잡았으면 좋겠다.
컹컹컹! 컹컹!
폐광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물러서면 안 되죠. 이건 우리가 해야 됩니다. 기껏 밥 지어놓고 남 줄 일 있어요?”
“저놈들이 누군지 알고 하는 말이냐?”
“알죠. 하지만 해볼 만하지 않아요? 더욱이 저기는 폐광 아닙니까? 여차하면 개장국 맛을 보여주면 되니까. 킥킥!”
“으음!”
안도는 침음했다.
그는 해자수가 단신으로 제이 낭견대와 탕호를 무너트린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 일은 혈마가 한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만약, 그런 사실을 알았다면 고민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저쪽에는 해자수보다 뛰어난 홀리가 있다.
그런 면에서 안도의 상황 인식은 정확하지 않았다. 독의가 당홍의 할머니인 것도 몰랐고, 도천패는 대도를 사용하는 힘센 놈 정도로만 알았다.
그들 네 명이 한 일을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다. 대충은 들었다. 하지만 자신들 역시 마공을 수련한 몸이니 그들 정도의 무위를 떨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차하면 개장국이라……”
“킥킥! 개 몇 마리 팔팔 끓여 주죠, 뭐. 저긴 폐광 아닙니까. 사방이 꽉 막힌 곳이에요. 개장국을 먹이면 살아날 방도가 없는 곳이라니까요. 이걸 저런 애송이 놈에게 뺏겨요?”
“말조심해!”
“앗! 실수!”
수하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사실, 혈마는 낭견대가 찾은 게 아니다. 비보전에서 탄광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서 부랴부랴 찾아왔다. 늑대개를 데리고 있으니 수색에 참여하는 것이 당연하다.
낭견대가 아니라 어떤 조직이라도 늑대개 같은 수색견을 기르고 있다면 혈마를 찾을 수 있었다.
혈마를 찾은 공로가 거의 없다.
결과적으로 혈마를 찾기는 했지만, 그 정도로는 낭견대의 신위를 보여주었다고 할 수 없다. 막말로 완전히 개털 취급을 받아도 할 말이 없다.
한데…… 막상 혈마를 찾고 보니 상황이 아주 재밌다.
놈들이 막다른 외통수에 걸려 있다. 물러서지도 못하고 나오지도 못하는 곳에서 목을 길게 늘어 빼고 처분만 기다리는…… 한심한 모습이다.
개 짖는 소리를 들었으면 당장 피했어야지.
하기는…… 그래도 잡히는 것은 마찬가지다. 늑대개가 빠르게 포위했을 것이다.
어쨌든 이번 일은 잘 처리하면 독자적인 세력으로 설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단 휘하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불마촌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불마촌은 호음각주 휘하에 있다.
이런 위치도 벗어날 수 있다. 어쩌면 호음각주와 동등한 위치에서 낭견대의 입지를 굳힐 수도 있을 것 같다.
‘폐광! 폐광이란 말이지.’
폐광이 안도에게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낭견대는 비장의 수를 가지고 있다. 아랫놈들은 ‘개장국’이라고 부르는 짓인데, 밀폐된 곳에서 쓰면 효과가 아주 좋다.
허경이나 탕호는 사방이 탁 트인 개활지에서 싸웠다. 개장국을 쓸 만한 틈이 없었다.
“지도를 가져와 봐.”
안도는 부리지 않아도 될 욕심을 부리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는 손을 떼어도 무방하다. 저들을 잡는 것은 살단 몫으로 넘어갔다.
이제 와서 다시 싸움에 개입하려면 살단주에게 가서 청을 올려야 할 판이다.
“확실히 잡을 수 있다니까요.”
수하가 말하면서 지도를 쫙 펼쳤다.
“음!”
안도는 지도를 유심히 봤다.
지도는 광산에서 제공받았다. 이미 폐쇄된 폐광이지만, 폐광 안의 모습이 몇 장의 종이에 담겨 있다. 만일을 대비해서 광산이 가지고 있던 것이다.
“이거 꽤 깊은데? 안쪽으로 들어가면 개장국을 쓰기가 어렵겠어. 우리가 뭔가를 보여주려면 놈들의 시신이 필요해. 단지 죽이는 것만으로는 안 돼.”
“장국을 안에서부터 먹이면 되죠. 여기, 여기, 여기. 이 세 곳에 장국 한 그릇씩 갖다 놓으면…… 킥킥! 이건 광부 놈들이 말해준 거라서 틀림없어요.”
폐광은 무척 길다. 하지만 지도에 표시된 대로 안쪽에서부터 세 곳을 막으면 그나마 본격적으로 개장국을 먹일 수 있는 공간으로 줄어든다.
“볼 것도 없어요. 이건 확실한 거예요.”
“임마! 조용히 좀 해봐. 헷갈리잖아.”
안도는 고민했다.
원래 남의 싸움에는 끼어드는 것이 아니다. 괜히 실만 많고 득은 거의 얻지 못할 경우가 생긴다. 하지만 혈마를 잡아낸다면…… 말이 달라질 것이다.
불마촌 무인들의 약점은 마공을 수련했다는 거다.
천살단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여차하면 버려질 존재라는 거다. 어쩌면 천살단의 공격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한시도 잊지 않는다.
눈에 띌 만한 공로가 필요하다.
‘폐광, 사방이 꽉 막힌 곳에 갇혀 있다면 이미 잡은 것이나 다름없어. 개장국……’
무공으로 싸우는 싸움이 아니다. 그래서 잡을 수 있는 것이다.
또 무공으로 싸우면 어떤가? 무공으로 싸워도 폐광처럼 좁은 곳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들리는 정보에 의하면 혈마는 인사불성 상태다. 그러니 혈마는 열외로 하고. 그래도 홀리와 해자수, 당홍, 도천패가 남아있다. 그들의 무공은 상당하다.
하지만 이쪽 무공도 만만치 않다.
특히 폐광처럼 사방이 꽉 막힌 곳이라면 절대로 양보할 수 없다.
“좋다. 하자! 준비해!”
안도가 폐광 지도를 확 접으면서 말했다.
“낭견대가 하겠다고?”
“그래야죠.”
안도가 자신 있게 말했다.
“웬만하면 뒤로 빠지지? 지금까지만 해도 충분해. 낭견대 몫은 충분히 했어.”
“막다른 길 아닙니까. 저희가 마무리 짓겠습니다. 저놈들을 잡는 데 소 잡는 칼을 써서야 되겠습니까?”
안도가 고집을 부렸다.
“소 잡는 칼? 우리가 백정이냐?”
부단주 연소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봤다.
안도는 연소부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너 정도는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는 오만함이 배어 나왔다. 그의 눈길은 오직 주치균에게만 향했다.
“풋! 저것들이 안에 갇혔다고 해도 쉽게 볼 자들이 아니야. 저놈들 중 만만한 놈은 하나도 없어.”
주치균이 웃으면서 말했다.
“저희 낭견대도 만만치 않죠. 저도 대주 소리를 듣는 놈인데, 형제들 복수는 해야죠.”
안도는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살단이 막무가내로 ‘너희 빠져!’하고 말했다면 할 말이 없다. 얌전히 뒤로 물러서야 한다. 하지만 주치균은 의견을 물어왔다. ‘네가 하겠다고?’하고.
이런 상황이라면 물러설 수 없다.
“훗! 고집 세군.”
주치균이 웃었다.
“저희가 하겠습니다.”
“정 그렇게 원한다면 할 수 없지. 형제들의 복수를 하겠다는 데 할 말이 있나. 해봐.”
주치균이 손을 들었다.
낭견대에게 가서 싸우라는 손짓이다.
“후후! 그럼 저희가.”
안도는 누런 이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