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章 회복(回復) (4)
“호발귀! 정신 들어? 내 말 들려? 안 들려? 나 알지?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홀리가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말했다.
호발귀가 눈을 뜨고 깨어나자 두서없이 이것저것을 캐물었다.
호발귀가 깨어난 것은 더없이 반갑다. 너무 기뻐서 팔짝팔짝 뛰고 싶다. 하지만 호발귀는 말을 잃었다. 표정 변화도 없다. 나무나 돌처럼 무표정하게 쳐다본다.
“어떻게 된 거예요?”
홀리가 당홍에게 물었다.
“글쎄? 몸은 이상이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하네.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았나 봐.”
당홍이 호발귀의 몸 상태를 살펴보며 말했다.
호발귀 상태에 대해서만큼은 당홍도 의술을 모르는 일반인이나 마찬가지다. 어디서 어떤 부분에 이상이 생겼는지 도무지 파악할 길이 없다.
당홍은 진맥 자체를 할 수 없었다.
호발귀의 맥은 바위처럼 딱딱하게 굳어서 그녀의 진기가 투입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니 진기를 밀어 넣어서 경맥을 살펴본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했다.
그러면 맥박이라도 살펴볼 수 있어야 하지 않나.
호발귀는 전혀 틈을 주지 않았다. 맥박 역시 딱딱하게 경화되어서 어떠한 반응도 일으키지 않았다.
상황이 이러니 무엇을 알 수 있을까.
호발귀는 눈만 뜨고 있을 뿐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그의 몸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알아내야 하는데 알아낼 방법이 전혀 없다.
“이거 말도 못 하는 거야?”
해자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못하고 있잖아. 말을 잊어버린 것 같지는 않고. 내가 뒤통수라도 한 대 세게 쳐볼까?”
도천패가 답답한 마음에 불쑥 말했다.
당홍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냐는 듯 눈을 흘겼다.
“그냥 답답하니까 하는 말이지. 흔히 머리에 충격을 받아서 기억을 잃은 사람은 다시 충격을 받으면 제대로 돌아오는 수도 있다고 하잖아.”
“지금 기억을 잃은 게 아니잖아.”
당홍이 여전히 눈을 사납게 흘기며 말했다.
“난 이쪽 부분은 무식해서…… 좌우지간 가 잘못돼서 이러는 거 같은데, 이럴 때 한 대 세게 쳐버리면 다시 제정신이 들어올 수도 있지 않을까?”
도천패는 정말로 한 대 쳐보고 싶은 모양이다.
“내가 너무 얼토당토않은 말을 했나?”
“맞아. 엉뚱해.”
당홍이 피식 웃었다.
모두가 도천패의 마음을 알고 있어서 그가 엉뚱한 말을 해도 핀잔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모두 도천패와 같은 심정이다.
호발귀를 제정신으로 돌릴 수만 있다면, 말이라도 하게 만들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지 할 것이다.
지금까지만 해도 그랬다. 모두 최악의 수를 망설이지 않고 사용해왔다.
홀리는 구혼음소를 읊조렸다.
진결을 잘못 읊었다가는 호발귀가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주문을 외웠다.
그것도 제일 첫 번째 단계, 죽음의 주문을 외웠다.
그 정도의 충격은 가해야 호발귀가 제정신으로 돌아올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홍도 독을 투여했다.
멀쩡한 사람 몸에 독을 투입한다는 게 말이 되나? 말이 안 된다. 하물며 정신을 잃어서 아무 저항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독을 투여하면 어떻게 되겠나?
솜에 물을 뿌리는 것처럼 독도 제대로 먹힐 것이다.
정말로 죽기 십상이다.
그런 일까지 한데는 호발귀가 어떻게든 제정신으로 돌아왔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이 섞여 있다.
“그래도 눈을 뜬 게 어디야. 이제 몸만 움직이면 좋겠는데, 움직일 수 있나?”
도천패가 말했다.
호발귀는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을 뿐,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 움직여줘야 하는구나. 너무 오랫동안 누워 있었어. 잠깐만! 내가 해볼게요.”
홀리가 호발귀에 겨드랑이에 손을 집어넣으라고 했다.
팔을 부축해서 일으켜 세우려는 것이다.
한데 호발귀가 틈을 내주지 않았다. 겨드랑이를 바짝 밀착시켜서 홀리가 팔을 넣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 나야? 어쩌면 좋아. 날 몰라보네.”
홀리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호발귀를 쳐다봤다.
“내가 해볼까요?”
해자수가 홀리를 제치고 나섰다.
하지만 호발귀는 해자수에게도 팔을 내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성난 눈으로 쳐다봤다.
“그거 되게 고집 있네.”
해자수가 혀를 끌끌 차며 물러섰다.
“아직 움직이기 싫은가 봐. 놔두면 움직일 거야. 근육은 전혀 손상 없거든.”
당홍이 다시 한번 호발귀를 살피면서 말했다.
그래도 홀리는 포기할 수 없는지, 호발귀에게 바싹 다가서면서 말했다.
“한마디만 해 봐. 나 알아봐? 내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어? 알아보면 고개를 끄덕여봐.”
홀리가 얼굴을 바짝 들이밀며 말했다.
호발귀는 아무 반응이 없다. 도대체 홀리를 알아본다는 건지 알아보지 못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아예 모르는 것 같지도 않고, 아는 표정이라고 할 수도 없다.
호발귀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오늘은 눈을 뜬 거로 만족하자고. 뭐 첫술에 배부르겠어?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잖아. 이제 눈을 떴으니까, 천천히 기억도 돌아오고 얼굴도 알아보고 그러겠지 뭐. 자자! 오늘은 기쁜 마음으로 그냥 즐기자고.”
“여기 뭐 즐길 게 있어야 즐기죠.”
당홍이 웃으면서 해자수의 말을 받았다.
“즐길 게 왜 없나? 먹는 것도 즐기는 거지. 내가 어디 밖에 나가서 꿩 한 마리 잡아 올까? 이거 잔치라도 하려면 고기가 있어야 할 것 아냐.”
해자수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무거운 분위기를 떨쳐내려고 일부러 흰소리를 하는 것이다.
“밖에 나가면 안 된다고 했지만 한번 나가보자고. 갑시다! 꿩 한 마리 갖고 누구 배를 채워. 적어도 멧돼지는 잡아야 고기 한 점씩이라도 먹지.”
도천패가 가슴을 탕탕 치며 말했다.
* * *
호발귀는 눈을 떴다.
일면, 의식을 회복한 듯이 보였다. 정상적으로 몸을 일으켰고, 벽에 기대어 앉았다.
계속 혼절한 상태를 유지하면 몸이 건드려진다.
당홍은 계속 독을 투여할 것이다. 홀리는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구혼음소를 읊조릴 것이다.
이 모든 게 혈마의 성질을 자극한다.
생기를, 푸른 빛을 꺼트리라는 혈마의 음성을 더욱 강하게 이끌어 준다.
이런 현상은 홀리와 당홍에게만 해당하는 게 아니다. 혈마는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오직 푸른 빛만 꺼트리려고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기를 말살시키고자 한다.
호발귀는 네 사람을 죽이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해자수나 도천패도 살해 대상이다. 그들이 곁에 가까이 붙어서면, 몸에 손을 대면, 가까이에서 말을 건네오면…… 죽이고 싶다는 살심이 불쑥 일어난다.
이런 현상은 굉장한 고역이다.
그래서 눈을 뜨기로 했다. 의식을 회복해서 더는 몸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혈마의 성질을 자극하는 모든 행동이 멈춰져야 한다.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죽여! 죽여! 죽여!
머릿속에서 계속 혈마가 살명을 외쳐댄다.
생기를 풀어헤치라고 한다.
혈마의 말을 쫓아서 생기를 풀어헤치면 사람이 죽는다. 생기는 무조건 보존되어야 한다.
그래야 산다. 어떤 식으로든 생기를 손대는 것은 좋지 않다.
생기격타? 혈기에 대해서 몰랐을 때 행했던 무식하고 위험한 방법이다.
사람은 자신에게 맞는 생기가 있다.
활기찬 사람이 있고, 조용한 사람이 있다. 모두 자신에게 맞는 생기를 맞춘다. 형체가 없는 생기를 받아들여서 자신의 거푸집에 넣고 형태를 만든다.
그렇게 만들어야만 생기가 몸 안에서 활기차게 움직인다.
생기격타를 하면 강제로 생기를 키우게 된다. 홀리나 해자수에게 나타난 것과 같이 비정상적인 힘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결국은 혈기로 변한다.
여기에 혈마의 비밀이 있다.
혈마 무공을 통해서 비정상적으로 생기를 육성했기 때문에 생기가 변한 것이다.
죽여! 죽여! 죽여!
혈기가 한시도 끊임없이 계속해서 머리를 자극한다.
머릿속을 울린 소리는 심장을 격타한다. 피를 들끓게 만든다. 살심이 요동친다.
호발귀는 입을 열어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홀리를 왜 못 알아보겠나. 알아본다. 너무 반가워서 꼭 껴안아 주고 싶다.
하지만 홀리와 말을 섞으면 그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이 더 강하게 일어난다. 그녀가 풍기는 향긋한 향이 오히려 살심을 자극하는 혈향으로 변해서 맡아진다.
자신을 부축하기 위해서 홀리가 손을 뻗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팔에 닿았다.
그 순간, 강렬한 살기를 느꼈다.
자신의 몸에 닿은 것은 홀리의 손이 아니다.
홀리가 뿜어내는 생기다. 살아있는 감촉, 활력, 생동감…… 이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훅 밀려들었다.
그러지 않아도 생기를 꺼뜨리고 싶어서 안달 난 몸인데 직접 부딪치기까지 하니 더 죽겠다.
금방이라도 살초를 뻗어내는 게 아닌가 싶어서 머리끝이 쭈뼛 곤두선다.
그래서 그녀의 손길을 뿌리쳤다.
말도 일부러 섞지 않았다.
자신의 사정을 말하면 이해해 줄 것이다. 혈마가 어떤 것인지 아니 오히려 조심해 줄 것이다.
하지만 설명을 할 수가 없다. 입을 열기만 하면 괴성이 터져나갈 것 같다.
크크크! 크크크큿!
마음속에서는 혈마가 계속 울부짖고 있다.
입을 열면 그 소리가 튀어 나간다. 그리고 심성도 변한다. 자아가 사라지고 혈마가 육신을 지배한다.
호발귀는 진심으로 입을 열지 못했다.
겨우 말 한마디 정도 하는 게 뭐가 어때서?
아니다. ‘겨우’라고 말할 수 없다. 혈마는 눈에 보이지 않는 틈도 파고 들어간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방심하면 바로 그 순간에 자아를 끝장낼 것이다.
자아와 혈기를 분리해 놓았던 강은 이미 사라졌다.
혈기가 강을 넘어서 육신을 점거했다. 인간다운 마음보다는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강하다.
솔직히 말하면 네 사람을 죽이고 싶어서 숨조차 쉴 수 없다.
그래서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차라리 모른 척하는 게 낫다.
차라리 이들을 떠나면 더 편안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그러면 죽여야 한다는 위협에서는 벗어날 수 있지 않은가. 마음은 편해지지 않겠나.
아니다. 호발귀는 이를 악물고 버티기로 작심했다.
이들 곁을 떠나도 생기는 눈에 들어온다. 세상천지가 푸른빛으로 일렁거린다. 온 세상에 생기가 가득 차 있다. 생기가 없는 것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짐승도 살아있고, 푸른 초목에도 생기가 가득 품고 있다. 동물의 생기를 죽이다가 끝내는 물의 생기까지 뿌리 뽑아야 할지도 모른다.
혈마의 지시를 따르자면 이 세상 전체를 암흑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게 맞나? 그럴 수도 없지만, 설혹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다.
이들 곁을 떠나면 마음은 편해지겠지만, 자신은 결국 혈마의 명령을 추종할 것 같다.
푸른빛을 꺼뜨려라! 그러면 꺼뜨릴 것 같다.
죽이라는 살명을 듣고도 꿋꿋하게 버티는 것보다는 그 명령을 쫓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하고 좋다. 쾌감이 일어난다.
세상 사람들의 말을 빌리자면 자신은 이미 살인에 중독이 되었다. 마약에 중독된 사람처럼 하루라도 살인을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그래서 이들 곁에 있으려는 것이다.
이들 곁을 떠나면 눈에 띄는 모든 사람을 죽이게 될 것 같아서.
한 명 두 명 죽이다 보면 어느덧 살인에 익숙해지고, 혈마가 되어 있을 것이다.
세상을 피로 물들이면서 거침없이 돌아다닌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사실 이런 생각도 혈마가 되면 싹 사라진다. 살인이 쾌락으로 다가올 것이다.
기껏 묶어놓은 수태음폐경이 힘을 발휘하고 있을 때까지는 이들 곁에 있는 게 좋다.
그래야 살인 충동을 조금이라도 견뎌낼 수 있다.
이들을 죽이면 안 되니, 자신 스스로 바싹 긴장한다. 항시 살명을 경계한다.
해자수를 죽이겠다는 생각이 들 때, 도천패에게 손이 저절로 뻗어질 때…… 그런 때가 오면 그때는 정말로 떠나야 한다. 이들을 내 손으로 죽일 수는 없다.
‘그전까지는 날 도와줘.’
이들 곁에서 살심을 억누르며 사는 것이 절대 쉽지 않겠지만, 지금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
“휴우!”
호발귀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