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章 회복(回復) (2)
“아미타불!”
오랜만에…… 불호가 들렸다.
호발귀는 눈도 뜨지 않았다.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폭풍우에 휩쓸린 강을 쳐다봤다.
강은 강인데, 꼭 대야에 담긴 물 같다. 언제라도 힘센 장정이 확 뒤집어 버리면 끝장날 것처럼 위태로워 보인다.
아니면 강물 전체가 수증기로 변해서 날아가거나.
“할 일 없으면 바둑이나 한판 두자.”
장진 스님이 바둑판을 놓았다.
- 산 파라 가새 처마 이공산 차무……
구혼음소가 화살처럼 날아와 꽂혔다.
“이건 구혼음소 아냐? 쯧! 꽤 아프겠는데? 어째? 내가 막아주지도 못하고.”
호발귀는 대꾸 없이 좌하귀에 흑돌을 놓았다.
장진 스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우상귀에 돌을 놓았다.
“그냥 반야심경을 읊으면 안 됩니까?”
“그게 되겠니?”
장진 스님이 되물어왔다.
“혈마가 시켜서 온 겁니까? 되지도 않는 저항, 그만하라고?”
“내가 누구 심부름할 사람으로 보이냐? 넌 가끔 싸가지 없게 말하는 게 밥맛이야.”
“밥맛이 어때서요? 혈색 좋으신 걸 보니 밥맛이 없을 것 같지는 않은데.”
“그 좋은 밥맛을 싹 가시게 한단 소리다. 네 싸가지가.”
“그렇습니까?”
탁!
호발귀가 바둑돌을 놓았다.
사실, 호발귀는 대화나 바둑에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다.
구혼음소가 전신을 난자하고 있다. 영혼을 빼앗아 가려고 차곡차곡 신경을 끊어놓는다. 강물은 터져나가지 직전이고, 혈기는 끝없이 충천한다.
“정 원하면 조금 읊어주고. 시작해 볼까? 관자재보살 행심 반야바라밀다시……”
장진 스님이 반야심경을 외우기 시작했다.
장진 스님은 지인도 됐다가 적도 되는 존재다. 어떤 때는 혈마의 입장에서 말하고 행동한다.
혈마에게 유리한 행동을 억지로 강요하기도 한다.
어떤 때는 호발귀의 입장에서 말해준다. 혈마에게서 벗어나는 방법을 조언해준다. 특히, 혈마무공을 사용할 때, 혈기에 물들지 않는 방법을 말해준다.
장진 스님은 그럴 수밖에 없다.
장진 스님은 혈마이자 호발귀다. 양쪽 모두 다 장진 스님이다. 강 건너에 있는 혈마나, 바둑을 같이 두고 있는 호발귀나 모두 한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혈마 입장도 되고 호발귀 입장도 된다.
장진 스님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가장 강한 음성을 토해낸다.
혈기가 다수를 차지하면 장진스님의 입에서는 혈마록이 흘러나온다.
혈기보다 호발귀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면 지금처럼 반야심경이 읊어진다.
스님이 반야심경을 읊는다는 것은 적어도 지금은 혈마보다 자신의 의지가 더 강하다는 뜻이다.
‘음!’
호발귀는 반야심경의 흐름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구혼음소가 반야심경으로, 그리고 다시 자신만의 음성으로 변환해서 흘러들어오면…… 그런데,
‘아!’
호발귀는 탄식했다.
반야심경이 구혼음소를 막지 못한다. 반야심경은 당홍의 진기 유진을 북돋는다. 구혼음소는 반야심경을 뚫고 들어와서 정확하게 호발귀의 심장을 격타한다.
반야심경을 읊는다고 해서 자신 편이 아니었다. 스님은 혈마 편에서 움직이고 있다.
꽈아아아아!
강물이 요동친다. 강바닥에서부터 극심한 격랑이 휘몰아친다.
“그만! 그만! 스님! 그만!”
호발귀는 장진 스님을 매섭게 노려봤다.
딱!
장진 스님이 바둑돌을 놓았다. 하지만 입에서는 반야심경이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아뇩다라삼막삼보리……”
마음의 소리가 한계에 도달했다.
드디어 둑이 터지려고 한다 이 둑이 터지면 강물은 날아가 버릴 것이다. 호발귀와 혈마가 한 몸이 될 것이고, 다시 혈마가 되어서 미친 짓이 생기를 죽이고 다닐 것이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지금도 머릿속에서는 혈마의 음성이 빙빙 맴돈다.
호발귀는 혈기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합치되는 순간, 자각은 소멸할 것으로 생각했다.
아니, 확실한 사실이다. 그러니 마음도 그렇게 일어난다.
호발귀로 돌아올 자신이 없다.
강물은 무너져서는 안 된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오늘까지만, 아니 한 시진만 더……
악착같이 강물을 잡고 늘어졌다. 계속 물을 뿜어냈다. 저 강이 언제 말라버릴지 알지 못한다.
소원대로 오늘 하루만이라도 버텼으면 좋겠다. 아니면 반 시진이라도.
호발귀는 장진스님을 쫓아내고 싶었다. 하지만 장진스님은 계속 바둑을 둔다.
“시대신주, 시무상주……”
반야심경이 읊어질수록 강물이 거칠게 철썩거린다. 마치 바다의 용왕이 강으로 거슬러 올라와서 헤집고 다니는 것 같다.
‘조금만…… 조금만 더!’
호발귀는 사력을 다해서 버텼다
‘파신금령술!’
혈마가 혈기와 호발귀로 나뉜 것은 파신금령술 때문이다. 파신금령술이 그와 혈마를 분리시켰다. 혼절 상태로 몰아넣은 타격이 잠시 틈을 벌려주었다.
호발귀는 그 강을 계속 붙잡고 있지만 이제 곧 무너진다.
그렇다면…… 파신금령술을 다시 펼치면 되지 않나? 가능할 것 같다. 극심한 충격을 받고 혼절 상태에 빠지면 일시 혈기가 침습하지 못한다.
‘진기봉맥(眞氣封脈)!’
자신 스스로 일부 혈을 막아버린다. 그렇게 해서 경맥까지 막을 수 있다면 더욱 좋다. 혈도와 경맥 자체를 혼절한 것이나 진배없는 상태로 만든다.
경맥 자체를 봉맥하는 것이 제일 좋지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혈 몇 개라도 막아버리면 어떨까 싶다.
물론 그런다고 해도 혈마가 잠식해 오는 것을 막지는 못하겠지만.
혈마에게 져도 좋다. 자각 일부가 여전히 살아있으면 된다. 우선 살아남고, 차후에 조처한다.
혈마가 하는 짓거리를 빤히 들여다볼 것이다. 하지만 언제든 틈이 생기는 다시 튀어나올 수 있다.
혈기를 막고, 호발귀로 돌아갈 기회가 생긴다.
“스님. 나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뭘 하려고? 내가 뭐 할 수 있는 일이 있나?”
“혈마록 중 궁금한 부분이 있어서.”
“무공? 지금 네 상태에서는 무공 같은 게 필요 없을 텐데?”
반야심경이 멈췄다. 일단 강물이 출렁이는 부분은 조금 지연시켰다. 여전히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지만, 그래도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행위만은 멈췄다.
말을 걸면 입을 열어서 말하게 되면, 독경이 멈춰진다.
“정말 궁금한 부분이 있는데.”
“뭔데? 물어봐.”
“혈마가 왜 혈마록을 남겼을까요? 그 여덟 가지 무공을 쓰면 혈마로 접어들기 때문에?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아서 말이죠. 혈마 자신은 그토록 혈마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했으면서 왜 혈마가 되는 길을 남겼을까? 혈마록이 남겨진 진짜 이유는 뭡니까? 정말 혈마가 남긴 것 맞아요?”
“아미타불!”
장진 스님이 불호를 외웠다. 하지만 눈길은 여전히 바둑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답해줄 것 같지 않다.
“아무래도 혈마 무공을 다시 한번 점검해봐야겠어요. 정말로 혈마가 남겼는지 의문이 생겨서.”
호발귀가 강 건너를 바라봤다.
탁!
장진 스님이 바둑돌을 놓았다.
“그럼 나는 잠시.”
호발귀는 바둑을 두지 않고 팔짱을 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무공 참오에 들어가는 모습이 역력하다.
호발귀는 장진 스님마저도 속였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자신이 하는 일을 자신에게도 숨겨라.
장진스님이 혈마하고 영이 통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니 장진 스님마저도 속이고 깊은 생각 속에 침잠해 들어간다. 인위적으로 파신금령술을 일으킬 수 있는지 고민한다.
파신금령술은 배와 등, 견갑골로 갈라진다. 찌르는 범위가 상당히 넓다. 또 깊다.
호발귀는 파신금령술처럼 깊게 자해할 수 없다.
‘경맥 하나만……’
호발귀는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을 떠올렸다.
어깨에 근접한 중부혈(中府穴), 운문혈(雲門穴)을 막는다. 팔꿉 안쪽 척택혈(尺澤穴)도 친다. 그러면 팔이 마비된다. 마지막으로 손목 부근 맥기가 모이는 연못인 태연혈(太淵穴)을 막는다.
네 혈만 막아도 수태음폐경이 마비된다.
‘진기봉맥이 가능해!’
혈마가 뚫지 못할 정도로 단단히 막아야 한다. 그러자면 혈마 무공으로 막으면 안 된다.
다행스럽게도 그에게는 필십일수가 있다.
삼마돌각수로 깊게 파고 들어간다. 파신금령술에 당한 것처럼 혈을 사용할 수 없어야 한다.
한쪽 팔만 못 쓰게 만들어서, 그 속에 자각을 숨긴다. 호발귀 자신이 마비된 팔에 남는다. 나머지 육신은 혈마가 차지할지라도 여전히 팽팽히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찾았어! 이걸로 가자!’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다. 일단 해본다.
구르르르릉!
강물이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드디어!’
때가 됐다. 혈마로 변신하는 것은 막지 못한다. 혈기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네 놈 뜻대로는 안 돼!’
탁! 탁! 따악! 딱!
호발귀는 즉시 생각했던 대로 삼마돌각수를 일으켰다. 그리고 혈도 네 곳을 진심으로 타격했다.
왼손을 들어서 오른손을 쳤다.
그는 오른손잡이다. 오른손으로 무공을 펼친다. 그러니 오른손을 못 쓰게 만드는 것이 혈마를 막는데 더 나을 것이다.
같은 힘으로 더 강한 장애물을 만든다.
파신금령술처럼 아주 깊숙이!
혈은 가볍게 찌르지만, 경기(勁氣)는 안으로 깊숙이 파고든다. 혈만 무너트리는 것이 아니라 근골까지 잘라낸다. 신경까지 확실하게 끊어버린다.
두 가지 면에서 불안하다.
심령 속에서 행한 삼마돌각수가 현실에서 통할 것이냐는 점이다.
엄밀히 말하면 지금, 이 순간은 상상에 불과하다.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행하는 수법……
몽중행(夢中行)이다. 재미있는 꿈놀이에 불과하다.
이게 통할까?
두 번째 고민도 있다. 이게 통한다면, 오른손은 쓰지 못하게 된다. 영구히 불구로 남는다.
파신금령술의 효과를 일으키려면 중부혈과 운문혈에 새로운 강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뚫릴 때를 대비해서 척택혈을 무너트린 것이며, 척택혈마저 뚫릴 것을 염려해서 태연혈도 친다.
삼중으로 혈기를 막을 강을 만든다.
퍼억! 퍽! 퍽퍽!
경혈 네 곳이 터져 나왔다.
“후후! 잔수, 잔수, 잔수.”
장진 스님이 웃었다.
“스님도 보기 싫은데, 바둑은 나중에 두죠? 둘 수 있다면.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하려나?”
“아미타불!”
장진 스님이 호발귀를 향해 합장했다.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정중한 합장이다. 마지막 만남이라는 무언의 암시인가?
스으읏!
장진 스님이 사라졌다.
호발귀는 장진 스님에게 신경을 쓰지 못했다. 강물이 허공으로 붕 떠오른다. 그리고 산산이 흩어진다. 혈기를 막아놓은 강이 완벽하게 사라지고 있다.
파아아앗!
강물 너머에 있던 혈기가 물밀 듯이 밀려왔다.
‘싫은데……’
호발귀는 혈기와 하나가 되어가는 것은 느꼈다. 혈기가 전신으로 스며들었다.
이 순간, 호발귀는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강물이 만들어서 의식을 단절시켰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의식을 잃기 전에도 일어났다.
혈기를 누르고 호발귀로써 세상을 살아갈 때, 사실은 완전한 호발귀가 아니었다. 혈마가 저 깊은 곳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을 뿐이다.
자신은 혈마로 지내면서 살인을 저질렀다. 상당히 많은 사람을 죽였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죽였는지, 기억이 전혀 없다. 완전히 백지상태다.
완벽하게 혈기에게 지배됐었나? 정말 그럴까?
최소한 살인을 저질렀다는 기억은 있다. 완벽하게 지배당한 것이 아니다. 자신 역시 몸속 깊은 곳에서 혈마가 하는 행위를 지켜보고 있었다.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완벽한 사실이다.
지금까지 혈마와 자신은 공존하고 있었다.
이제 다시 강물이 사라지고 혈마와 자신이 합체가 된다. 그리고 자신의 자아가 혈기에 떠밀려서 소멸할 것이다. 이번에는 정말로 완벽한 자아 소멸이 이루어진다.
곧 그런 일이 벌어진다.
호발귀는 진기봉맥에 모든 것을 맡겼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호발귀는 물밀 듯이 밀려오는 혈기에 전신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