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八十章 회복(回復) (1)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혈마가 달콤한 주문을 외운다. 끊임없이 귓가에 대고 살인 명령을 내린다.
악마가 심령으로 죽음의 주문을 외운다.
항거하지 못할 명령이다. 일단 소리가 들리면 어떻게든 그 소리를 따라가게 되어 있다.
죽여라!
죽이라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사실 혈마는 죽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죽여라!’라는 말은 호발귀가 혈마의 말을 인간의 말로 변형시켜서 들은 말이다.
정확한 악마의 속삭임은 ‘꺼트려라!’이다.
꺼트려라! 꺼트려라! 꺼트려라!
인간은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 생기를 보지 못하는 인간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한다.
혈마의 눈으로 생기를 볼 줄 아는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푸른 빛을 꺼트려라.
이 말을 인간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변형시키면 ‘생기를 소멸시켜라’라는 말이 된다.
주변에는 많은 생기가 번뜩인다.
아주 강한 푸른 빛도 있고 혼탁한 푸른 빛도 있다. 활기차게 일어나는 푸른 빛이 있는가 하면 서서히 꺼져가는 푸른 빛이 있다. 거의 꺼져서 한두 가닥 잔흔만 깜빡이는 생기도 있다.
하지만 대체로 생기가 활활 타오른다.
사실 세상은 생기 천지다. 사기는 많지 않다.
사기는 순간적이라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에만 잠깐 일어났다가 소멸한다.
반면에 생기는 지속적이다.
숨이 붙어 있는 한, 계속 불빛을 피운다.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생기투성이다.
그 많은 것들을 꺼뜨려야 한다. 악마가 꺼트리라고 속삭인다. 그러니 미치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로 머리가 혼란스럽다.
꺼트려라! 죽여라!
‘꺼트려라’라는 말을 쫓으면 죽이는 행위로 이어진다.
혈마의 말을 쫓아서 상당히 많은 푸른빛을 꺼뜨렸다. 푸른빛이 꺼지는 순간 호발귀는 생명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또 하나의 생명이 내 손에 쓰러졌다.
그런 자각이 퍼뜩! 일어났다.
악마가 내뱉는 심령의 소리와 뱃속 깊은 곳에서 치솟은 자각이 부딪쳤다.
웃기게도 파신금령술은 악마의 소리를 단절시켰다.
천만다행이라고 할까? 파신금령술이 터지는 순간, 악마와 자신 사이에 커다란 강이 흐르기 시작했다.
강은 사라져야 한다. 그래야 움직인다. 강 건너에 있는 악마와 강 이쪽 편에 있는 몸이 합쳐져야만 육신이 살아서 움직인다.
커다란 강이 가로막혀 있으면, 혈기와 자각이 합쳐지지 않으면 몸도 움직이지 못한다.
강은 의식 회복을 저해하는 요소다.
그러니 혈기든 자각이든 강을 없애기 위해서 분투한다.
강이 있다는 것은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 죽음이다, 강을 없애면 혈기와 자각이 합쳐져서 움직일 수 있게 된다. 생존이다. 비로소 의식을 회복하고 움직이게 된다.
몸은 생존을 향해서 움직인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기는 육신을 보존하기 위해 분투한다. 상처는 낫게 하고, 피는 멈추게 한다. 그리고 멀쩡한 몸이 되어서 움직일 수 있도록 돕는다.
생기가 이런 일을 하지 못할 때, 인간은 죽는다.
호발귀의 경우, 생기는 강을 말려버리려고 노력한다.
자연적인 본능이다. 살고자 하는 욕구다.
호발귀는 혈기와 자각, 생기와 자각을 가로막은 장애물이 강으로 보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강이 아닐 수도 없다.
어떤 정신적인 흐름일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지금 호발귀에게는 강으로 보였다.
츠으으읏!
강이 마르기 시작한다. 출렁거리는 물이 증기가 되어서 허공으로 흩어진다.
강 건너에 있는 혈기, 악마가 서둘러서 강을 건너려고 한다. 어서 빨리 합체하자고 유혹한다. 싫든 좋든 그래야 너도 살고 나도 산다고 말한다.
악마는 엄밀히 말하면 자신의 생기다.
기운이 붉게 물들어서 혈기로 보이지만, 타인의 눈에는 푸른 빛으로 일렁거릴 것이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처럼 생기를 볼 줄 안다면 말이다.
혈기는 분명히 자신의 기운이다.
그러니 삶을 계속 지속하려면 혈기와 합치는 것이 많다. 합치지 않으면 결코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다.
나쁜 놈이 되든, 좋은 놈이 되든 움직이려면 합쳐야 한다.
호발귀는 그런 점을 거부했다.
너랑 합치지 않아!
강 건너에 있는 악마는 강물을 말리려고 노력하지만, 호발귀는 끊임없이 새로운 강물을 쏟아부었다.
깨어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이대로 영원히 악마와 단절된 채 깨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스읏!
침이 경혈을 파고들었다.
쿠웅! 쾅! 쾅쾅쾅! 콰아아앙!
경혈을 파고든 침에서 엄청난 진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이건!’
당홍의 진기는 미약하다. 인체에 영향을 끼칠 정도가 아니다. 그저 경맥을 탐색하는 정도다.
하지만 호발귀에게는 엄청난 타격을 안겼다.
진기가 유진(留陣)한다.
군병이 진을 치고 머무는 것처럼, 당홍의 진기가 각 경혈을 차곡차곡 점령해 들어간다.
혈기는 당홍의 진기를 꽉 붙들었다.
당홍의 진기는 합치하기를 거부하는 자각에게 타격을 안긴다. 그러니 더욱 강하게 붙든다.
당홍은 잠시 탐색만 하고 진기를 거두지만, 그 사이에 혈기는 진기를 꽉 붙잡아 두고 있다. 그리고 강물을 두들겨 팬다.
꽈앙! 꽝! 꽝!
강바닥이 흔들린다.
악마와 자신 사이를 갈라놓은 강물이 마구 용틀임을 한다. 살살 말라버리는 정도가 아니라 거칠게 튀어 나가서 주변을 어지럽힌다. 당장 천지가 바뀔 기세다.
강이 사라지고 땅이 드러난다.
‘안 돼!’
호발귀는 당홍의 진기를 튕겨냈다.
혈기가 당홍의 진기를 붙잡아 둘 수 있다면 자각도 같은 일을 할 수 있다. 잡아당길 수도 있고, 반대로 튕겨낼 수 있다. 의식 깊은 곳에서는 혈기와 자각이나 같은 힘으로 작용한다.
타앙! 탕탕! 탕!
당홍의 진기를 있는 힘껏 밀어냈다.
자신도 독섬칠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당홍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안다. 하지만 단순한 진기 탐색이 혈기에 의해서 진기 유진으로 변형된다.
그리고 이 진기 유진은 혈기에 힘을 보태준다. 강물을 더욱 빠른 속도로 마르게 한다.
이 상태로 혈기와 합쳐지면 자각은 사라진다. 혈기와 합친 상태에서도 계속 자각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이 없다. 혈기에 완전히 파묻혀서 영영 의식 없는 인간으로 지낼 것 같다는 불길함이 일어난다.
악마를 떼어 놓아야 한다.
악마에게 휩쓸리면 방법이 없다.
꺼트려라!
악마는 계속해서 불길을 꺼뜨리라는 소리만 한다.
누가 죽이라고 했나! 푸른 빛만 꺼트려라!
악마는 곧 죽어도 죽이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러니 누군가를 죽였다면 자신 잘못이다.
언제 죽이라고 했나? 그거 꺼트리라고 했다.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은 너야!
살아있는 불길을 꺼트리면 어떻게 되나? 불이 꺼진다. 생기를 꺼트리면 멸기(滅氣)가 된다. 죽을 수밖에 없다. 도대체 죽이지 않고 생기를 꺼트리는 방법이 있나?
그런데 악마는 말한다.
- 내가 불길을 꺼뜨리라고 했지 언제 죽이라고 했냐? 꺼뜨리는 것과 죽이는 것은 다르다.
- 미친 소리! 그게 어떻게 달라! 똑같지.
- 너 바보냐? 꺼트리라는 말이 어떻게 죽이라는 말이 돼? 어떻게 그것을 같은 말로 받아들여?
한심한 말장난이 시작된다.
악마는 그런 식으로 죽음의 명령을 피해간다. 그리고 계속 유혹하고 명령질을 한다.
꺼트려라! 꺼뜨려! 꺼트려!
웃기는 것은 악마는 회피만 한다는 것이다. 죽이는 것에 대해서 일절 상관하지 않는다.
계속 푸른 빛을 꺼트리라고 충동질만 한다. 그리고 명령을 끝낸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호발귀다. 그러나 악마는 아무런 죄책감도 없다. 생명을 끊었다는 자괴심도 없다.
혈기는 이래서 위험하다.
세상 사람들은 살인마, 혈마라고 부르는데 본인 스스로는 아무런 느낌도 없다.
푸른 빛을 꺼트렸을 뿐이다. 뭐가 잘못인가!
그 말을 죽이라는 말로 받아들인 것은 몸뚱이다.
호발귀는 악마의 더러운 주둥이 놀림에 대항해서 ‘좋아! 그럼 너와 떨어지겠어. 서로 분리되면 되잖아!’하고 나선 것이다.
강을 만들어서 생기와 자신을 분리한다.
생기가 떨어져 나가 있으니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생기 단독으로 움직일 수도 없다.
이런 상태가 계속 고착되어 있었는데……
당홍의 진기가 스며든 것이다. 그리고 혈기는 재빨리 외부에서 밀려들어 온 진기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안 돼! 하지 마!’
호발귀는 당홍이 진기를 밀어 넣는 족족 거세게 튕겨냈다.
“피틴 투 키루 하 기루차……”
구혼음소가 들려왔다.
홀리가 답답한 마음에 아무 효과가 없는 줄 알면서도 구혼음소를 읊조리고 있다.
왜 이 소리가 안 들리나 싶었다.
예전 같으면 구혼음소를 말하지 않을 것이다. 호발귀를 죽인다거나 노예로 만들 생각이 없으니 죽음의 주문을 읊을 리도 없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구혼음소는 반야심경으로 변질되어서 혈기를 짓눌러 앉힌다.
당연히 구혼음소가 들릴 것으로 생각했다.
혈마가 되어도 좋으니 제발 깨어나기만 하라는 심정에서 읊조리고 있는 것 같다. 한데,
‘우욱!’
호발귀는 죽음의 주문을 듣자 머리를 감싸 쥐었다.
홀리의 구혼음소 비수가 되어서 찔러온다. 전신이 난자당하는 듯 매우 아프다.
혈기와 한 몸이 되어 있을 때는 악마가 구혼음소를 막아주었다. 한 겹 방어막이 둘러쳐져 있어서 담담하게 들을 수 있었다. 장진 스님까지 생각하면 두 겹 방어막인가?
그런데 혈기를 한쪽으로 떼어 놓자, 당장 구혼음소가 칼날이 되어서 전신을 쑤셔왔다.
이백 년 전, 혈마는 바른 판단을 했다.
구혼음소는 혈마를 죽이는 칼이다.
여기서 지금까지 잘못 안 것이 있다. 구혼음소가 혈기를 죽인다고 생각했는데, 결코 혈기를 죽이는 칼이 아니다.
혈기는 죽이지 못한다. 진신(眞身), 자각이 깃든 몸…… 지금의 호발귀를 죽이는 칼이다.
‘그래. 내가 죽는 거야.’
호발귀는 퍼뜩 구혼음소의 실체를 깨달았다.
이백 년 전, 혈마는 지금의 자신과 같은 상태를 경험했던 것 같다. 혈기와 분리된 상태에서 냉정하게 두 몸을 본 것이다. 혈기 그리고 자각.
혈기는 죽이지 못한다. 하지만 자각은 죽일 수 있다.
강 이쪽 편을 죽이면 저쪽 편도 따라서 죽는다. 직접 혈기를 죽이지는 못하지만, 결과적으로 같이 죽게 된다. 혈기와 자각은 합치되었을 때만 움직인다.
이쯤에서 혈마는 외부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길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길로 진기를 끌어들였다. 음공(音功), 진기에 실린 칼로 자각을 해치운다. 조용히 죽는다.
구혼음소는 외부에서 들려오는 음공(音功)이다.
혈마가 원했던 대로 구혼음소가 정확하게 육신을 타격한다. 구결을 들을 때마다 점점 의식이 떨어진다. 혈기와 합치된 상태도 아니기 때문에 장진 스님도 나타나지 않는다.
‘잘했어. 홀리. 이제 나만 죽으면……’
호발귀는 간절히 죽음을 원했다.
그런데, 매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지금 홀리는 삼 단계 구혼음소를 읊조리고 있다.
음문촌에서 구혼음소를 변형시킨 것인데…… 정확하게 숨통을 끊지 않는다.
차곡차곡…… 천천히…… 손발을 묶는다.
진신을 죽이는 대신에 강물을 건드리지 못하게끔 오히려 호발귀를 묶는다.
일 단계 구혼음소를 혈마가 일러주었다면 이 단계, 삼 단계 구혼음소는 정확하게 혈마의 뜻에 반대한다. 혈마를 죽이지 않고 혈기의 노예로 만드는 진결이다.
혈마는 혈마후와 혈의검에게 자신을 죽이는 구혼음소만 일러주었다. 이 단계, 삼 단계의 구혼음소가 존재할 수 없는…… 오직 죽음만 존재하는 진결이다.
삼 단계 구혼음소는 호발귀를 혈마로 만드는 작업이다.
혈마의 뜻이 아니다. 혈마가 원하는 진결이 아니다.
홀리의 구혼음소가 귀를 통해서 들려온다. 고막을 뚫고 들어와서 머리에 전달된다. 강 건너에 있는 혈기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자각만 건드린다.
‘웃!’
호발귀는 퍼뜩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지금 구혼음소가 들어오는 길은 오직 의식을 둘로 쪼개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혈마 외에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죽는 것 대신에 혈마에게 침식당하는 쪽을 택했다.
혈마와는 정반대 생각이다.
그렇다면…… 혈마 이외에 누군가가 또 이런 상태를 경험한 것이 아닐까?
“취저 처 타마 뭘롱 닌비라 가마러”
‘이거는 그만하고…… 죽음의 진결을 읊어줘. 홀리.’
호발귀는 간절히 원했다. 이대로 생명이 끊어지기를.
이제는 중간 영역에서 머물 수 없다. 당홍이 남겨놓은 진기 유진은 강물을 헤집어 놓고 있다.
거기에 구혼음소가 들려와서 혈기에 대항하고 있는 자각을 어지럽힌다.
혈기는 극성으로 치닫는데, 자신은 점점 나락으로 떨어진다.
이제 곧 혈기와 합쳐질 것이다. 그리고 다시 혈마가 되어서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를 죽일 것이다.
손발 묶인 자각, 말라가는 강물, 금방이라도 뒤덮일 듯 극성을 부리는 혈기…… 최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