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十九章 자경(紫經) (5)
츠읏!
침을 빼냈다. 그리고 다음 혈을 찔렀다.
백회혈 바로 밑에 있는 혈은 전정혈(前頂穴)이다.
독맥이 흐르는 순서를 역으로 거슬러가면 후정혈(後頂穴)을 짚을 수도 있다.
상관없다.
자경침구법에서는 어떤 혈을 먼저 탐색하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경침구법은 호발귀의 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지 그를 치료하려는 목적이 아니다.
전정혈을 먼저 살피든 후정혈을 살피든…… 결국은 전신 모든 혈을 건드려야 한다. 침을 찔러넣고 자경에 흐르는 진기 상태만 살피는 거다.
자침을 하지만 모든 침법이 진맥에 집중된다.
쓰으읏!
침이 전정혈을 파고들었다.
침을 놓는 깊이는 일 푼이다. 그야말로 침이 살짝 건드린다 싶을 정도로만 찌른다. 하지만 진기는 삼 푼을 더 내려간다.
그곳에 오직 자경을 인정한 자만이 살필 수 있는 흐름이 있다. 아주 강한 물줄기가 감지된다.
‘음!’
당홍은 침음을 흘렸다.
전정혈에서는 진기가 감지되었다.
이상하지 않은가? 어떻게 백회혈을 거치지 않고 전정혈에서만 진기가 감지될까?
전정혈에서 감지되는 진기도 뚜렷하지 않다.
자경은 금맥(金脈)에 비유할 수 있다. 금광에서 금을 캐낼 때처럼 맥을 잘 찾으면 화려한 모습이 보인다.
물론 금맥이 드러나도록 겉껍질을 벗겨내는 것은 본인 몫이다.
호발귀의 전정혈은 확실히 금맥이다. 하지만 여느 무인들처럼 잘 발달되어 있지는 않다.
금맥이 확연히 노출되지 않았다. 지금 막 캐내기 시작한 금맥처럼 지저분한 흙들, 돌무더기 속에서 아주 미세한 노란빛이 살짝 보이는 정도다.
이 정도 발달 상황이라면 이제 갓 내공을 운기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내공 수련에 입문한 지 일 년, 혹은 이 년? 길어도 이 년은 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확실히 말이 안 된다.
호발귀가 무공 수련을 한 것이 몇 년인데, 이제 처음 시작했다고 말하나.
그렇다면 호발귀는 전정혈도 사용하지 않는다.
백회혈에 이어서 전정혈까지…… 독맥을 사용한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상하네. 어떤 무공이든 독맥은 사용하는데. 도대체 혈마 무공이 어떤 것이기에. 아냐. 혈마 무공은 그렇다 쳐도…… 팔십일수는 일반적인 정공이야. 독맥을 사용해. 그런데 왜 호발귀만 독맥을 쓰지 않은 거지?’
당홍은 고개를 가윳거렸다.
당홍은 두 시진에 걸쳐서 혈 사십 군데를 점검했다.
침을 통해서 진기를 밀어 넣고 자경을 살핀다. 자경이 드러난 정도를 세심하게 기록한다.
“휴우!”
그녀는 침을 거두면서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자경침구법은 진력 소모가 극심하다. 그래서 전신 혈도를 모두 살피지 않고 주요 혈만 살핀다. 진기의 근원인 단전에서부터 살펴나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단전을 살피고, 단전 주변을 살핀다. 진기가 가장 크게 뻗어 나간 혈을 골라낸 다음, 다시 주변 혈을 뒤진다. 그러면 진기가 흐르는 길을 찾아낼 수 있다.
이것이 원래의 자경침구법이다.
혈마 무공의 진기 흐름을 찾아낼 생각이었다면 그녀도 그런 방법을 취했을 것이다.
지금처럼 전신 혈도를 모두 뒤지면 진기 소모가 극심해서 자칫 탈진에 이를 수 있다.
‘조금 쉬었다가……’
그녀는 침을 거뒀다.
오전 내내 혈도 사십여 군데를 뒤졌지만, 진기의 흐름도를 찾아내지 못했다.
백회혈을 중심으로 목 윗부분을 모두 살폈다.
결과는 허무하다. 전혀 소득이 없다. 진기가 흘렀던 자국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미안한데, 혈 좀 살펴봐도 돼?”
당홍이 도천패에게 말했다.
“뭐? 그게 뭐가 미안해? 어디를 보고 싶은데?”
“머리.”
도천패가 즉시 머리를 내밀었다.
“자침한다?”
“아프지 않게 찔러.”
“훗!”
당홍이 피식 웃으면서 도천패의 전정혈에 침을 찔렀다.
호발귀와 마찬가지로 깊이는 일 푼이다. 그리고 진침으로 삼 푼을 더 내려갔다.
꽈아아아아!
전정혈에서 굳강한 용맥(龍脈)이 감지되었다.
‘이게 맞아.’
도천패의 전정혈은 여느 무인과 다르지 않다. 아주 강하게 독맥을 사용한다. 진기를 일으키지 않은 상태인데도, 전정혈에는 바위를 무너트릴 만한 물살이 흐른다.
“대력도강은 독맥을 쓰지?”
“당연하지.”
“팔십일수는 어때? 독맥을 안 쓰나?”
“하하! 독맥을 안 쓰는 무공도 있나? 임독맥은 진기의 뼈대잖아. 중심 없이 뭘 어떻게 해?”
“그렇지?”
“왜 그래? 뭐가 이상한 거야?”
도천패의 의아한 눈길로 당홍을 쳐다봤다.
“아니. 호발귀의 경혈이 좀 이상해서 비교해 본 거야. 같은 투심문 무공을 사용하잖아.”
대력도강은 투심문 무공이 아니다. 대도문 무공이다. 투심문이 훔쳐 온 타 문파의 절기다. 하지만 도천패는 팔십일수도 안다.
호발귀가 일러주어서 꾸준히 수련하고 있다.
대력도강과 팔십일수, 혈마 무공과 팔십일수.
호발귀와 도천패 사이에는 팔십일수 무공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두 사람의 무공이 혈마 무공과 대력도강으로 갈릴지라도 팔십일수를 연마한 뿌리는 남아있어야 한다.
“뭐가 이상한데?”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아직은 확신할 수가 없어서.”
“문주놈…… 이상한 곳이 어디 한두 군데인가? 혈마 무공을 외운 것도 이상하고. 너무 서둘지 마. 여기 좀 오래 있어야지 될 거 같으니까 천천히 해.”
“서둘지 않아. 천천히 하고 있어.”
“피곤해 보이는데?”
“피곤해. 그래서 좀 쉬려고.”
“쉬려고가 아니라 지금 쉬라니까.”
도천패가 당홍을 번쩍 들어서 자신의 허벅지 위에 올려놨다. 그리고 꼭 껴안았다.
“놔. 사람들이 보잖아.”
“보면 어때? 우리가 부부인 건 모두가 다 아는데. 편안하지? 여기서 푹 쉬어.”
“알았어.”
당홍은 더 사양하지 않고 도천패의 품에서 눈을 감았다.
두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매우 흔하다. 일행과 떨어져 있는 동안에는 계속 이렇게 지내왔다. 홀리를 만난 후부터는 다소 자제하고 있지만…… 역시 도천패의 품이 편하다.
그녀는 푹 잠이 들었다.
당홍은 나흘에 걸쳐서 호발귀를 살폈다.
‘전혀 이상 없어!’
그녀의 판단은 그렇다.
파신금령술은 호발귀를 제압하지 못했다. 혈을 크게 상하긴 했지만, 호발귀는 어느새 그 혈들을 복원시켰다.
인간에게는 혈도 복원 능력이 있다. 명문혈(命門穴)을 칼로 찔렀다고 해서 명문혈이 망가지는 게 아니다.
칼자국이 생기고, 근육이 찢어지고, 뼈가 상할지언정 명문혈은 다시 복원된다.
진기를 사용하는 무인은 복원력이 훨씬 빠르다. 일반인보다도 두 배는 빠를 것이다.
호발귀는 말할 것도 없다. 정말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빠르다. 아마도 혈기가 일으킨 복원력일 텐데…… 혈맥의 복원은 상처 회복과도 직결된다.
호발귀는 이미 모든 혈을 다 복원시켰다.
아직 외상이 아물지 않았지만, 말 그대로 살을 베어낸 상처일 뿐이다. 진기를 일으키거나 생기 혹은 혈기를 사용하는 데 전혀 지장이 없다.
특이한 점은 또 있다.
호발귀의 전신 혈에서 진기가 감지되지 않는다
금맥이 땅속에 묻혀있는 것처럼 진기가 자경 깊숙이 숨어버렸다.
아마도 혈마 무공이 자경침구법을 감지하고 자신을 은폐해 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렇다면 혈기는 무서운 요물이다. 혈기 스스로 방어기제를 작동시킬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호발귀가 의식을 잃은 것과 상관없이 혈기는 여전히 움직인다.
물론 이것은 그녀만의 생각이다. 확실하지가 않다. 딱 하나, 분명한 것은 있다.
‘치료를 못 하겠어. 불가능해.’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외상은 치료할 수 있다. 실제로 주치균에게 찔린 상처는 매우 빠르게 낫고 있다.
초기 치료도 좋았고, 내부적으로 경혈 회복도 매우 뛰어났다. 경맥에서 진기의 흐름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거센 진기가 미친 듯이 휘몰아쳤을 것이라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여기에서도 혈기가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그러면 호발귀는 벌써 깨어났어야 한다. 모든 게 다 좋다. 이상이 전혀 없다.
한데 일어나지 않고 있다. 여전히 눈을 꼭 감은 채 죽은 듯이 누워있다.
그녀는 호발귀의 혼절 상태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건 못 일어나는 게 아니라 안 깨어나는 걸 거야. 휴우!’
당홍은 홀리에게 갔다.
“우리 산책 좀 할까?”
홀리는 당홍의 표정에서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산책하기 싫은데.”
“그렇지?”
“그래도 해야겠죠? 밖으로 나가면 곤란할 테니까 갱구 안쪽으로 산책해요. 어둡지만 길이 평평해서 걸을 만해요. 조용해서 얘기하기도 좋고요.”
홀리가 일어섰다.
“이런 말 하면 어떤 기분일지 모르겠는데 먼저 호발귀 상태부터 말해줄게. 호발귀 이상 없어.”
“그래요?”
홀리가 반색하면서 얼굴을 활짝 폈다.
“그런데 깨어나지 못하고 있잖아.”
“설마 언니도 왜 그런지 파악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아니, 알 것 같아.”
“아!”
홀리의 표정이 정말 밝아졌다.
“너무 좋아하지 마. 호발귀, 못 깨어나는 게 아니라 안 깨어나는 것 같아.”
“그게 무슨……?”
“호발귀 안에 혈기가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어. 그런데 이 혈기…… 내 추측인데, 매우 영악해. 진맥하려고 진기를 넣어봤는데, 거침없이 따돌렸어.”
“진기가 들어가긴 해요? 저도 해봤는데 안 들어가던데?”
“호발귀가 일부러 혈기를 움직이는 것 같진 않고, 혈기에게 방어 본능이 있는 거 같아. 말도 안 되지? 정기든 마기든 인간의 의지가 없이는 움직이지 못하는 법이니까.”
“혈기가 살아있는 생물이라는 건가요?”
홀리는 음양마고를 떠올렸다.
구혼음소를 대신해서 혈마의 음욕을 극성으로 끌어올리는 마물이 엄연히 존재한다.
물론 음고는 실체가 있는 벌레다. 벌레가 몸으로 들어가서 인간을 통제한다. 음기를 강하게 일으켜서, 정상적인 자각을 할 수 없게끔 만든다.
음고는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벌레가 또 없으리란 법은 없다. 벌레는 아니더라도, 어떤 기운 같은 것…… 생기, 혈기가 음고를 대신할 수도 있다고 본다.
홀리는 당홍이 말하기 전부터 이런 부분을 깊이 생각해 왔다.
음문촌 사람으로서 귀색무를 쓸 줄 알고, 구혼음소를 알며, 귀색혼령대법을 펼칠 수 있으므로 의지와 상관없는 정신 작용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홍이 즉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렇게까지 말할 수는 없는데…… 어쨌든 혈기 이거 아주 사악해. 호발귀가 이걸 알고 일부러 깨어나지 않는 게 아닐까 싶어. 깨어나면 다시 혈마 상태가 되니까.”
“호발귀를 깨울 방법이 없다는 거죠?”
“그래.”
“옛날처럼 혈기를 잠재우면 안 될까요? 제가 생기를 쓸 줄 아니까 생기격타를 해볼까 했는데.”
“그러다가 혈기를 깨우면?”
“그래서 생각만 하고 있어요. 생기격타를 하려니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일단 호발귀에게 맡겨보자.”
“네? 정신 잃은 사람에게요?”
“이것도 아직은 확실하지 않은데, 호발귀 말이야. 어쩌면 혈마가 되었을 때 벌인 일들, 모두 기억하고 있을지 모르겠어. 몸은 혈마가 되어서 날뛰지만, 미친 정신 깊숙이에는 올바른 정신이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야. 혈마를 깨우기 싫어서 본인 스스로 잠들어 있는 게 아닌가.”
“풋! 말도 안 돼요. 언니는 혈마가 되었을 때, 저 사람 모습을 보지 않아서 그래요.”
홀리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은 어두운 갱구를 걸었다.
호발귀, 어쩌면 깨어나는 게 매우 늦어질지도 모르겠다.
“휴우!”
어둠 속에서 홀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은 외상 치료에 주력하고 혼절 문제는 차분히 해결하자.”
“그래요, 언니. 언니가 있어서 정말 든든해.”
“이거 왜 이래? 음문촌 홀리가. 너 곰 사냥을 그렇게 잘한다면서? 나중에 한 번 보여줘.”
“그래요. 호호호!”
홀리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