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十九章 자경(紫經) (4)
“진기하고는 전혀 무관한 것 같아요. 사실, 이것도 정확하지는 않아요. 생기에 대해서 아는 게 없어서.”
홀리가 말했다.
도천패와 당홍은 매우 놀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홀리가 하는 말을 들었다.
세 사람, 등여산과 홀리 그리고 해자수가 생기를 사용한다.
그 후, 세 사람의 무공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해자수가 귀무령하고 대적할 정도라면 말 다한 거 아닌가. 비록 패하기는 했지만, 마주 섰다는 게 어딘가.
“그러니까 이게 저절로 떠올라. 뭘 배운다거나 한 것도 아니고, 호발귀에게 자극을 받으니까 팍! 하고 생기더라고. 그 후부터는 아예 진기를 쓰지 않게 돼.”
해자수가 이어서 말했다.
생기를 사용할 줄 안다. 호발귀의 생기보다는 훨씬 미약하다. 생기가 아니라 진기가 발전한 것 같다는 느낌이다.
살인 욕구라거나 정신 이탈 증상도 나타나지 않는다. 형옥에서 호발귀에게 격타를 당한 후에 생기 씨앗이 심어진 것 같다.
홀리는 자신들에게 벌어진 일을 사실 그대로 다 말했다.
“그랬구나. 어쩐지 해자수님 무공이 굉장히 강해졌다고 생각했거든. 어떻게 이렇게 강해질 수 있나. 기연이라도 만났나? 어떤 기연이기에 사람을 이렇게 바꿔놓지? 하고.”
“이게 기연은 기연이지. 기연이 아니라고 말할 순 없고. 나 같은 놈이 일약 고수가 되었으니까.”
해자수가 말했다.
“호발귀는 의식 회복은 둘째치고 일단 상처부터 나아야 하잖아. 시간이 꽤 걸릴 거야.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하루 이틀 사이에 일어날 것 같지는 않으니까.”
홀리가 호발귀를 쳐다보며 힘없이 말했다. 하지만 곧 처연함을 떨쳐내고 힘을 내서 말했다.
“호발귀가 도울 수 있으면 우리도 도울 수 있어. 언니, 도와줄 테니까 생기 한번 일으켜봐요.”
“그래. 자넨 내가 도와줄게.”
해자수가 도천패를 쳐다보며 말했다.
도천패는 잠시 호발귀를 쳐다봤다. 하지만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곧바로 말했다.
“아니. 나는 안 하는 게 좋습니다.”
“뭐? 안 한다고? 왜? 어째서?”
해자수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이 생기는 진기하고 다르다니까. 수련이고 뭐고 필요 없어. 거기다가 쓰면 쓸수록 늘어요. 내가 위험을 감지할 필요도 없어. 위험이 닥치면 지가 알아서 철벽을 착착 세운다니까. 위험이 저절로 느껴져. 얼마나 편한데.”
“그래 보입니다.”
“그런데 왜 안 한다는 거야?”
도천패가 옅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칼을 잡았다.
“저는 이거로.”
“하! 참! 사람 답답하네. 이거 무공에 견줄 게 아니라니까. 철벽이 세워지면 쓰러트려야 하잖아? 어떤 초식을 쓸까? 어떻게 공격할까? 이건 그런 것도 필요 없어. 철벽이 세워진 곳이 위험한 곳이잖아? 그러면 나는 철벽만 치면 되는 거야. 그런데 그 치는 방법도 생기가 딱 가르쳐 준다니까. 내가 어떻게 할 필요도 없어. 초식도 필요 없고, 그냥 검을 뻗으면 철벽이 착착 베어져. 이걸 안 한다고? 내가 시범을 보여줄까?”
해자수는 생기를 배우지 않겠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입에 침을 튀겨가며 생기를 설명했다.
도천패가 다시 고개를 돌려서 호발귀를 쳐다봤다. 그리고 묵직하게 말했다.
“생기를 가장 잘 사용하는 사람은 호발귀잖습니까?”
“그거야 그렇지.”
“그런데 문주놈을 보세요. 지금 어떻게 되어 있는지.”
“그거야 주치균이란 놈이 무령환살공을 써서 그렇지. 그게 아니면 저럴 리 있나. 혈마를 잡겠다고 아예 작심하고 수련한 놈인데, 어떻게 못 하지.”
“무령환살공. 생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진기를 사용하는 사람은 속일 수 없잖습니까.”
“그것 때문에 안 배운다는 거야? 이걸? 아이구야! 그렇게 안 봤는데 좀생이네. 이거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근다는 말하고 똑같잖아. 무령환살공 때문에 이걸 안 배워?”
“문주놈에게 무령환살공이 닥치면…… 진기로 막아줄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무공으로 감당하지 못하는 놈은 문주놈이 막아줄 테니 걱정할 것도 없고요. 저는 생기, 안 배우렵니다. 이게 좋아요.”
도천패가 대도를 꽉 움켜잡았다.
도천패 말에 해자수는 입만 쩍 벌린 채 말을 잃었다.
무령환살공을 막아주기 위해서 생기를 배우지 않는다? 어쩌면 천하제일인이 될 수 있는 길인데도, 오직 호발귀를 위해서 모든 것을 포기한다?
“참 이거 뭐라고 할 수도 없고……”
해자수도 이 부분은 생각하지 못했다.
생기를 사용하면 무공이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지금 당장 초절정 고수가 될 수 있다.
도천패처럼 힘이 천하 역사인 사람에게 생기가 보태지면 어떤 위력이 뿜어져 나올지 궁금하기까지 하다.
그런데 배우지 않겠단다. 그리고 그 이유가 호발귀를 지키기 위해서라니.
‘이건 강요할 수도 없어.’
도천패가 쐐기를 박았다.
“난 이 칼이면 충분하니까. 그리고 나보다 강한 놈이 있으면 제수씨와 당신이 막아주면 되잖아.”
“제수씨?”
“야! 아씨는 제수씨고, 난 왜 당신이야! 지금까지 기껏 말 잘 올려놓고 뒤통수 까냐!”
홀리는 제수라는 말에 당황했고, 해자수는 당신이라는 말에 발끈했다.
“그럼 나도 안 배울래.”
당홍도 고개를 저었다.
“왜요? 언니는 배우는 게 좋지 않을까? 언니는 쌍학을 펼쳐야 하니까 뭐 굳이 진기를 일으킬 필요도 없고. 언니가 생기를 배워서 같이 움직이면 훨씬 더 강할 것 같은데.”
홀리의 말에 당홍이 고개를 저었다.
“그 생기라는 거…… 말 들어보니까 각기 느낌이 다른 것 같아. 책사 다르고, 너 다르고, 해자수님 다르고. 내가 생기라는 것을 깨우치면 나도 다르겠지?”
“그렇겠죠. 하지만 느낌만 다른 거니까.”
“느낌이 어떻게 다를지는 해보지 않았으니 모르는 거고. 그래서 안 하려고.”
당홍이 도천패를 보며 웃었다.
“지금 나는 우리 가가와 함께 쌍학을 완성하는 중이야. 쌍학이 거의 절정에 이르러서, 이제 우리를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을 거로 생각해. 우리, 여기까지 수련했어. 한데 생기를 배우면 어쩐지 쌍학이 무너질 것 같아.”
“……”
홀리도 할 말을 잃었다.
해자수가 도천패 말에 말문이 막혔듯이 홀리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가치로 따지면 쌍학보다는 생기가 훨씬 높을 것 같다. 그런데 쌍학을 위해서 생기를 버린다?
단순한 판단이 아니다. 도천패를 지키기 위해서 절정 무공을 버린다는 말이 된다.
당홍이 말했다.
“차라리 생기를 안 배우고 쌍학을 지킬래. 초절정 고수가 되지 못하더라도 이 사람 등에 업혀서 이렇게 우리만의 연수합공을 펼치는 게 즐거워. 난 이걸 지킬래.”
“언니!”
홀리가 당홍을 쳐다봤다.
“그리고 나 무시하지 마. 나는 독을 사용하잖아. 생기도 독 앞에서는 어떻게 못 해. 내가 독섬칠공을 자유자재로 사용하게 되면 혈마도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아! 그건 안 되겠다. 호발귀도 독섬칠공을 배웠으니까. 호호호!”
당홍이 활짝 웃었다.
“그래도 호발귀가 정신 차리면 한 번 해봐야겠어. 잡을 수 있을지 없을지.”
“호호호!”
홀리가 웃기 시작했다.
이 두 사람도 참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이다.
도천패는 문주놈이라고 욕하면서도 호발귀를 지키려고 하고, 당홍은 일절 한눈팔지 않고 도천패와 함께 싸우기를 원한다. 자신이 가진 무공 속에서 활개를 펼치려고 한다.
세상에 생기를 터득할 수 있는데도 터득하지 않고 진기만 사용하겠다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아마도 이 사람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않을까 싶다.
그것이 유쾌하다. 그래서 웃었다.
당홍은 호발귀의 상태를 살폈다.
호발귀를 보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진맥이다. 그 후,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귀무살을 쫓아서 탄광으로 오는 동안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상처를 살폈다.
호발귀가 어떤 상태인지는 이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호발귀가 깨어나지 않는 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녀의 의술 상식으로는 벌써 깨어났어야 한다.
그래서 이번에는 작심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밀하게 뒤져나갈 생각이다.
‘이건 하기 싫었는데…… 이해해줘.’
당홍은 침합을 열고 머리카락보다도 가늘어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세침을 꺼내 들었다.
인간의 경혈은 모두 몇 개나 될까? 황제내경(黃帝內經)에는 백육십 개가 기재되어 있다. 하지만 황제내경 소문에는 삼백육십오 개 혈로 적혀있기도 한다.
명당경(明堂經), 갑을경(甲乙經), 천금방(千金方) 등에서는 삼백사십구 개, 동인수혈침구도경(銅人輸穴鍼灸圖經)에는 삼백오십사 개…… 경서마다 각기 다르다.
할머니, 독의는 단혈(單穴)이 오십이 개, 쌍혈(縯穴)이 삼백구 개로 총혈(總穴) 삼백육십일 개라고 말했다.
당홍은 삼백육십일 개 혈을 뒤져나갈 심산이다.
스읏!
세침을 정수리 백회혈(百會穴)에 꽂았다.
백회혈에는 이 푼 깊이로 자침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술 상식이다.
당홍도 이 푼 깊이로 찔렀다.
몸에 이상이 생길 수 있는 위험은 철저하게 피한다. 조금이라도 이상하다 싶으면 즉시 손을 뺀다.
‘여기서 칠 푼 더!’
츠읏!
진기를 세침 속으로 흘려 넣었다.
침은 이 푼 깊이로 찌르지만, 진기는 칠 푼을 더 내려가서 구 푼 깊이로 틀어박힌다. 그러면 백회혈에 흐르는 자경(慈經)을 찾을 수 있다.
자경이라는 말은 독의가 만든 것으로 일반 의원들은 속혈(續穴)이라고 한다.
속혈을 아는 의원도 몇 명 되지 않고, 알아도 위험해서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다.
간혹 돌팔이 의원들이 혈맥이라든가 장기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깊은 장기 속에 파묻혀 있는 혈이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것이 속혈이라고.
속혈은 형체가 없다.
살이나 피, 뼈처럼 만져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침으로 자극할 수도 없다.
독의는 자경을 혈도의 정맥(精脈)으로 간주한다. 진기가 흐르는 진짜 경맥이라는 뜻이다.
자경에는 미증유의 기운이 흐른다.
무인은 이 기운을 이용해서 운기를 한다. 이 기운들을 조합해서 자신만의 무공을 일으킨다.
형체는 없지만, 진기로 강화할 수 있는 특이한 성질을 지닌다.
독의의 의술은 자경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자경을 살펴보면 그 사람의 진기 운행도를 알 수 있다. 단전에서 일어난 진기가 어느 경맥을 따라서 어떻게 흐르는가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악의를 품으면 신공을 가로챌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상대방만 알고 있는 내공 구결을 진맥을 핑계 삼아서 가로챌 수 있다.
원래 이 자경침구법(慈經鍼灸法)은 좋은 목적으로 창안한 것이 아니다. 타인의 공부를 훔쳐낼 목적으로 창안해 낸 마의(魔醫)라고 할 수 있다.
자경침구법은 죽은 인간에게도 펼칠 수 있다.
생기는 사람이 죽으면 바로 끊긴다. 하지만 진기는 사후에도 일정 시간 동안은 계속 남아있다.
체온이 완전히 식어버릴 때까지는 몸속에서 유지된다.
죽은 사람의 자경을 살펴서 진기 운행도를 뽑아내면…… 내공 구결을 훔치는 것과 똑같다.
당홍은 그런 마의를 호발귀에게 펼친다.
물론 흘리나, 해자수, 도천패에게 굳이 이런 사실을 설명할 필요는 없다. 그들은 그녀가 호발귀를 치료하는 줄로만 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안다. 아픈 사람을 살펴보면 당연히 치료하는 줄 알지 누가 내공 구결을 뽑아낸다고 생각할까.
그래서 자경침구법은 마음 놓고 펼칠 수 있다.
물론 그녀는 호발귀의 무공을 가로챌 생각이 전혀 없다.
생기도 거절했는데, 호발귀가 어떤 무공을 사용하는지 알아서 뭐에 쓸까.
자경침구법을 시전하면 호발귀가 왜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지, 파신금령술이 어디까지 영향을 미치는지, 다친 혈은 어느 정도나 회복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런 목적으로 자경침구법을 시전한다.
제일혈(第一穴) 백회혈, 자침 깊이 이 푼. 진침 깊이 칠 푼. 자경 깊이까지 구 푼.
‘음!’
당홍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호발귀의 백회혈이 이상하다. 구 푼 깊이로 내려가서 자경을 살펴봤는데…… 혈이 순진무구하다. 지금까지 어떠한 진기에도 노출되지 않는 미답혈(未踏穴)이다.
이럴 수도 있나?
세상에 어떤 무공이 백회혈을 사용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렇게 깨끗할 수도 있나?
그녀가 깨끗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진기가 닿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호발귀는 이 혈을 이용하지 않는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거를 수 없는 경맥이 임독양맥(任督兩脈)이다. 어떤 무공도 임맥과 독맥은 거를 수 없다. 그중에서 백회혈은 독맥의 중요 혈이다.
어떻게 백회혈을 사용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당홍은 제일혈에서부터 난관에 부딪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