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十九章 자경(紫經) (3)
“뭐야? 탄광이야?”
해자수가 못마땅한 듯 중얼거렸다.
아직 탄광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시꺼먼 탄가루가 사방에 묻어 있다. 길에도, 나무에도, 바위에도…… 산 전체에 탄가루가 묻어 있는 것 같다.
“여기가 목적지야, 아니면 지나가는 길이야?”
“……”
앞장선 귀무살은 대답하지 않고 사방을 예의 주시했다.
“없어. 없어. 없다고!”
해자수가 말했다.
귀무살은 뒤따르는 자들을 염려한다. 가던 길을 멈추고 사방을 살펴보는 게 아예 버릇인 것 같다.
귀무살을 대신해서 해자수가 말했다.
누가 뒤따라오는지 살피는 것은 귀무살보다는 해자수가 훨씬 나을 것이다.
일단 위험이 일어나지 않으면 철벽이 느껴지지 않는다.
미행 여부를 신속하게 파악하는 데는 어떤 감각이나 무공보다도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귀무살은 해자수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끝까지 자신의 눈과 감각으로 확인한 후에야 발길을 옮겼다. 자신이 확인한 것이 아니면 믿지 않는다.
멀리 탄광이 보인다. 하지만 귀무살은 편한 길을 버리고 산길로 접어들었다.
“탄광으로 가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당홍이 말했다.
“사람이 말하면 뭔 대꾸가 있어야지. 이건 넌 말해라, 난 가겠다는 투니.”
산길을 타고 삼십여 장쯤 들어갔을 때, 귀무살이 걸음을 멈추고 다시 주위를 살폈다.
추격자는 없다. 주의를 깊게 기울여봐도 위험은 감지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습관이 되어서 말해주지도 않았다. 말해봤자 들은 척도 하지 않을 테니까.
따라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귀무살이 일행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는 여기까지만 모시겠습니다. 여기서 잠시 기다려 주시면 안내하는 사람이 올 겁니다.”
귀무살이 포권지례를 취했다.
“우릴 어디로 데려가는 건데요?”
당홍이 물었다.
“저도 모릅니다. 여기까지 안내하면 제 임무는 끝납니다. 더 알아서 좋을 것도 없고요.”
귀무살이 차분히 말했다.
“뭐야? 우릴 어디로 데려가는지도 모른다는 거야? 이거 귀무령 지시 맞아?”
해자수가 투덜거렸다.
“저희 귀무살이 한 가지 믿는 말이 있다면 ‘세상에 비밀은 없다’라는 겁니다. 비밀을 지키고 싶으면 비밀을 만들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니 저는 여기까지.”
“알았어요. 수고 많았어요.”
당홍이 모두를 대신해서 인사했다.
세상에…… 살다 보니 귀무살에게 고맙다고 말할 때도 있구나. 이래서 세상일이란 살아보지 않고는 모른다고 말한 건가? 뭐가 어떻게 될지 몰라서?
“곧 다시 만날 겁니다.”
귀무살은 인사를 한 후, 미련 없이 떠나갔다.
“저놈들 지독하네. 여기까지 와서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가네. 저놈 말이 맞긴 맞는데. 그러나저러나 언제까지 여기서 탄가루를 마시면서 있어야 하는 거야?”
해자수가 중얼거렸다.
누군가 오리라는 것은 안다. 특별히 급한 일도 없으니 진득하게 기다리면 된다. 하지만 반 시진이 지나도록 사람 코빼기도 보이지 않자, 절로 마음이 급해졌다.
“어디 동굴이라도 찾아볼까?”
홀리가 말했다.
“기다리는 김에 조금만 더 기다려봐요. 저런 놈들이 약속 하나는 칼같이 지키거든. 누군가 곧 올 겁니다.”
해자수가 홀리의 마음을 안다는 듯 자신 있게 말했다.
“오는 건 알겠는데……”
홀리가 호발귀를 쳐다봤다.
호발귀는 도천패에게 들려서 죽은 듯이 누워있다.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는데, 좀처럼 깨어나지 않는다.
반 시진이 더 흘러서 한 시진 쯤 지났을 때, 수풀을 헤치면서 허름한 옷을 입은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는 주독(酒毒)이 올라서 코가 시뻘겋다.
지금도 술을 마신 것 같다. 아직 해가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입에서 술 냄새가 풀풀 풍겼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맞네. 따라오슈.”
사내는 사람 숫자를 헤아렸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라는 말도 하지 않고 앞장서서 걸었다.
술을 많이 마신 것 같은데 걸음걸이는 멀쩡했다.
“사람이 말이야. 이것도 인연인데 인사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무인은 아닌 것 같고……”
해자수가 사내 옆에 나란히 서서 걸으며 말했다.
“볼일 없수.”
“응? 볼일이 없긴 왜 없어. 이렇게 만나서 같이 걷고 있잖아. 하다못해 누구라고 말이라도 해줘야지. 그래야 따라가는 우리도 안심할 것 아닌가.”
“따라오지 않아도 좋고.”
“응?”
“마음대로 하슈.”
사내는 해자수가 귀찮다는 듯 인상을 팍 찡그리면서 빠르게 걸었다.
옛날에는 많은 사람이 오갔을 것 같은 너른 길이 나왔다.
실제로 산길인데도 우마차가 다닐 정도로 넓다. 그리고 땅이 단단하게 다져져 있다. 하지만 지금은 잊힌 길인 듯 길게 자란 풀들이 길을 덮어가는 중이다.
“저기! 저기 보이슈?”
사내가 멀리 떨어져 있는 동굴을 가리켰다.
“보여요.”
당홍이 말했다.
“저 안에 먹을 것하고, 뭐 환자가 있다고 해서 상처 치료에 필요한 약 몇 개 넣어놨소.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고. 저 안에 틀어박혀서 아오지 마슈.”
“이봐! 저기 갱구 아냐?”
해자수가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옛날에는 갱구였는데 탄이 나오지 않아서 생명이 끝났소. 원래 저렇게 방치된 갱구가 위험한 법이니까 깊게 들어가지는 말고. 그리고 웬만하면 바깥출입도 삼가슈. 혹여 사람들 눈에 띄어서 좋은 거 하나도 없으니까.”
“여기 누가 또 알아요?”
당홍이 물었다.
“내가 죽으면 아무도 모를 거요.”
“귀무령도 모르나요?”
“귀신도 모른다니까. 그럼 내 할 일은 끝났으니까 난 이만.”
술 취한 사내가 볼일이 끝났다는 듯 냉정하게 뒤돌아서 오던 길을 걸어 내려갔다.
“귀무살만 냉정한 줄 알았더니 이놈도 냉정하네.”
해자수가 말했다.
“저 사람도 맡은 일이 여기까지니까 더 이상은 모르는 게 낫겠다 싶었던 거죠. 저 사람 말대로 어떤 연락이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은데요?”
당홍이 멀어져 가는 사내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 먹을 거나 충분히 남겨놨으면 좋겠는데. 저놈 하는 꼴을 보면 먹을거리도 신통치 않을 것 같아서. 그러나저러나 물은 어디서 해결하나?”
해자수가 걱정스러운 듯 산을 둘러봤다.
물론 산에는 개울이 있다. 맑은 개울물이 흘러서 먹어도 좋을 것 같다. 하지만 갱구에서 흘러내린 물은 독소가 섞여 있어서 함부로 마시면 안 된다.
“갱구 근처에는 짐승도 없어요. 물도 없고, 짐승도 없고. 나올 일이 없기는 한데.”
“아휴! 나올 일이 없기는. 먹을 게 떨어지면 사냥이라도 해야지 별수 있나. 아 참 이상한 데로 데리고 와서는 사람 걱정시키네. 좀 좋은 데로 모시지.”
해자수는 연신 투덜거렸다.
술 취한 사내는 의외로 꼼꼼했다. 겉으로는 투박한 척했지만, 갱구 안으로 들어가 보니 상세히 길 안내를 해놨다.
“이리로 가라는 것 같은데?”
당홍이 땅에 그려진 화살표를 발로 지우며 말했다.
폐광 안으로 들어서자 갈림길이 나왔다. 그리고 금방 그려놓은 것처럼 보이는 화살표가 보였다. 분명히 그들에게 길을 안내하는 지시선이다.
“아니지. 이건 그렇게 보는 게 아니라 한번 비틀어서 봐야 해. 갱구 안으로 들어가라는 아니라 옆으로 가라는 소리지.”
“옆이요? 옆에 길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찾아봐야지. 길이 어디 있는지. 쯧! 이런 길이면 자세히 말해주고 가야 할 것 아냐!”
해자수가 투덜거리면서 갱구를 살폈다.
“내가 봐도 오른쪽으로 가라는 것 같은데? 괜히 엉뚱한 곳을 뒤지는 거 아냐?”
홀리가 말했다.
“아씨도 참! 내가 언제 허튼소리 합둬?”
“허튼소리 많이 하잖아.”
“하! 정말 섭섭하네. 아까 그놈 우리 쪽 사람이란 말이지. 이런 쪽에 능한 놈이라는 거 딱 보면 몰라요? 그러면 누가 봐도 빤한 수는 안 쓴다는 거지. 킥킥!”
“그놈의 우리 쪽 사람.”
홀리가 핀잔하듯 말했다.
“킥킥킥! 찾았다! 아씨, 방금 한 말 취소하지 않으면 나 여기 주저앉아 버릴 거요!”
“정말 찾았어? 취소.”
“킥킥킥! 아씨는 너무 말을 막 한단 말이지. 그래도 아씨니까 봐준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어림도 없지.”
해자수가 연신 키득거리면서 갱구 벽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마치 뱀 껍질 벗겨지듯 갱구 벽면이 스르륵 꺼풀을 벗었다. 그리고 시커먼 암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쪽이 얼마나 깊은지 겉으로 봐서는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이런 곳이면 이쯤에 횃불을 준비해뒀을 텐데…… 크큿! 그렇지! 여기 있네.”
해자수가 어두컴컴한 동굴 안쪽에서 횃불을 찾아냈다.
“이런 거 만드는데 무슨 일정한 규칙이라도 있는 거야? 은인문하고 귀무살하고는 방법이 전혀 다를 텐데?”
“방법은 다르지만, 꼭 필요한 요소라는 게 있어요. 아! 이런 건 말해줘도 몰라. 오직 경험! 아씨는 나 같은 사람이 옆에 있는 게 복이라니까.”
탁탁!
해자수가 부싯돌을 켜서 불을 밝혔다.
갱구에는 사방에 탄가루가 묻어 있지만, 깊은 암굴 속은 먼지 한 올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게 닦여져 있었다.
탄을 캐는 갱구가 아니다. 이번 일에 대비해서 특별히 굴을 뚫은 흔적이 역력히 보였다. 아직도 막 흙을 파냈을 때 풍기는 진한 흙냄새가 맡아진다.
“묘하네. 이렇게 뚫어 놓으니까 빛이 새나가지 않네.”
해자수가 갱구에 나가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파악했다.
빛은 새어 나오지 않는다.
암굴은 깊지 않다. 하지만 요(凹) 자 형태로 뚫려 있어서 안쪽에서 밝힌 불빛이 갱구로 흘러나가지 않는다.
“그럼 그 사람도 술사(術士)인가?”
“아마도 그렇지 싶은데요? 어느 문파 놈인지 되게 꼼꼼해. 이 냄새 맡았어요?”
해자수가 코를 킁킁거렸다.
“그러잖아도 아까부터 묘한 냄새가 나서. 이게 무슨 냄새지?”
홀리가 되물었다.
“계피, 목초액, 편백정유에 백반과 화향목을 섞어놨어. 지네, 거미, 노래기, 쥐, 개미…… 해충들이 싫어하는 것들이야. 정말 꼼꼼하게 처리했어.”
당홍이 해자수 대신 말했다.
“백반에…… 화향목이요? 화향목을 어디서 구했을까? 그건 굉장히 귀한데.”
해자수가 놀란 듯 당홍을 쳐다보며 말했다.
암굴 벽으로 물이 흐른다. 벽 밑에 암석을 동그랗게 파놓아서 빨리 알았다.
거기에 물이 고여있다.
“이 물 먹어도 되나?”
도천패가 작은 물웅덩이를 쳐다보며 말했다.
“마시라고 만들어 놓은 것 같은데. 마셔도 될 거야. 배탈만 나지 않으면 견뎌야지.”
해자수도 물웅덩이를 보면서 말했다.
“내가 맛볼게.”
당홍이 호로병에 물을 떠서 한 모금 마셔보았다.
“그거 그냥 마시면……”
도천패가 만류하려고 했지만, 이미 당홍이 몇 모금을 마신 후였다.
“아! 물맛 좋은데? 달아.”
당홍이 호로병을 도천패에게 건넸다.
도천패가 호로병을 받아서 꿀컥꿀컥 섬겼다. 당홍 말대로 물맛이 아주 시원하고 달다.
“여기 이런 데가 있었네. 아주 좋아. 여기 일부러 만들어 놓은 곳 맞지? 아! 여기가 그 말로만 듣던 혈천방 밀처(密處)구나. 비밀 거점, 맞지?”
당홍이 비로소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이 혈천방 비밀 거점이라면 모든 게 충분히 이해가 된다.
암굴 안에는 밀실답게 나무로 만든 선반도 있다. 그 위에 생활에 필요한 식기라든가 쌀 그리고 말린 고기까지 있다. 한쪽 구석에는 불을 땔 수 있게 장작까지 쌓아놨다.
생활하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다.
“당분간 푹 쉬어도 될 것 같은데? 아이고! 피곤하다! 오늘은 만사 제쳐놓고 푹 쉬어야겠다.”
해자수가 발을 쭉 뻗고 누웠다.
꽈앙! 꽈아아아앙!
멀리서 폭발음이 들렸다.
화약으로 굴을 뚫은 모양이다. 강한 폭발음과 함께 지진이라도 만난 듯 암굴이 크게 흔들렸다.
그들은 비로소 탄광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