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十九章 자경(紫經) (2)
‘천라지망. 무자까지.’
비보전주는 이번 추적에 모든 것을 걸었다.
‘어쩌시려고.’
일비자는 비보전주가 염려스러웠다.
이렇게까지 일을 크게 벌이면 뒷감당이 안 된다. 반드시 성과를 내야만 한다.
이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압박이 심했나?
단주님도 어지간하시지. 호발귀를 쫓는 게 이 정도로 중했다면, 그를 장악하고 있을 때 조금 더 집중할 것이지. 사마를 너무 믿어서 이 탈이 생긴 거 아닌가.
일비자는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쳐다봤다.
휘이이잉!
바람을 타고 검은 매가 하늘을 난다.
일비자의 참응은 색깔이 까맣다. 그래서 흑응이라고 부른다.
일비자는 흑응의 날갯짓에서 풍향과 세기를 읽었다. 흑응과 오래 붙어 있다 보니 하늘에서 일어나는 바람을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인간이 느끼는 바람과 흑응이 느끼는 바람은 다르다. 인간이 서 있는 곳에서는 바람이 느껴지지 않아도 높은 허공에서는 매서운 바람이 불 때가 있다.
매가 하늘을 날다가 우뚝 멈췄다.
흑응이 좁은 반경을 그리면서 맴을 돌고 있는 것인데, 얼핏 보면 멈춰 선 것처럼 비친다.
‘찾아냈군.’
흑응이 무인을 발견해냈다.
“칠, 팔. 둘이 가봐.”
일비자가 명령했다.
그러자 숲에 은신해 있던 스무 명 중 두 명이 재빨리 움직여서 앞으로 쏘아나갔다.
이번에 호발귀 추격에 직접 나선 것은 전격적으로 자신이 나설 때가 되었다고 판단해서다.
스무 명의 수하를 시험해 보고 싶어서였다.
십육비자 중 여섯 명이 죽었다. 남은 비자는 열 명인데,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중요한 시기에 적절한 장소에 있어야 하는데, 늘 한발 뒤진다.
비보전주의 감각이 예전보다 많이 떨어졌다.
그래서 이번 일, 호발귀를 추적하는 일은 자신이 직접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는 스무 명의 수하가 있다.
자신이 직접 양성한 수하다. 천살단은 알지 못하는 그만의 조직이지만, 불법은 아니다.
천살단 무인들은 능력이 닿는다면 사조직을 거느릴 수 있다.
일비자는 진작부터 수하를 거뒀다.
그는 차기 비보전주로 내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만큼 그는 항시 비보전주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했다.
다른 십육비자하고는 생각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다.
이번에 호발귀를 찾아 나서면서 혼자 힘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다. 자신 혼자서 감당할 수 있는 일이라면 십이비자가 놓쳤을 리 없다. 그래서 수하를 데려왔다.
스슷! 스스스슷!
개개인의 무공이 결코 일비자에게 뒤지지 않는 수하 둘이 재빨리 움직였다.
그들은 참응이 멈춰선 곳으로 가서 앞을 살펴보았다.
천라지망은 천라지망대로 움직이고, 무자는 무자대로 움직인다. 일비자는 이 포위망에 가담할 생각이 없다.
솔직히 일비자 같은 사람이 무공도 모르는 민초와 어울려서 수색이나 한다는 것은 상당한 인력 낭비다.
그는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스슷! 스스스슷!
무인 두 명은 숲을 헤쳐나가다가 우뚝 걸음을 멈춰 세웠다.
‘살기!’
앞쪽에서 매서운 살기가 흘러나왔다. 살기가 너무 날카로워서 금방이라도 살이 베일 것 같다.
‘귀무살 새끼들!’
무인들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서로를 쳐다봤다.
귀무살은 하나같이 살귀다. ‘귀무살’이라는 이름을 얻기 위해서 동료 아흔아홉 명을 죽이고 살아남은 놈들이다.
지독하기로는 귀무살을 능가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 놈들이니 살기라고 예사로울 리 없다.
무인들은 일비자가 전수한 무공을 정통으로 수련했다. 그래서 웬만한 무인쯤은 눈 아래 둘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귀무살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
십육비자조차도 귀무살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는데……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니다.
‘이놈도 움직이지 않지?’
‘고정이야.’
두 사람은 눈빛으로 생각을 나눴다.
귀무살은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각기 머무는 장소가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다. 어떤 놈은 누워서 잠만 자고, 어떤 놈은 오두막에서 나무도 팬다.
머문 자리에 오래 있을 것처럼 아예 밭까지 가꾸는 자도 있다.
귀무살의 ‘고정’은 너무 완벽해서, 어떻게 보면 아예 검을 버리고 양민으로 돌아가선 듯한 착각마저 든다.
지금 두 사람이 쳐다보는 허벅지까지 잠기는 물속에 들어가서 검초를 수련하고 있다.
물속에서는 신법을 전개하기가 쉽지 않다. 당연히 검초는 절반 이하로 무뎌진다. 몸이 제대로 움직여주지 않으니 팔을 적극적으로 사용해서 검초를 전개한다.
제법 깊게 수련한 사람은 물살을 이겨내고 검초를 전개한다. 귀무살은 한술 더 뜬다. 두 사람이 쳐다보고 있는 귀무살은 물살의 흐름을 오히려 이용하고 있다.
스으으으읏!
두 발이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물살을 탄다.
검초가 전혀 걸리지 않고 매끄럽게 흘러나왔다.
“마귀 놈들이 검초만큼은 날카롭다니까.”
‘칠’이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하지만 눈은 차갑게 식어서 사방을 예리하게 쏘아보았다.
귀무살을 살핀다.
놈이 머무는 곳은 갓 지은 오두막이다. 주변에서 나무를 베어 집을 지었다.
‘어설픈 솜씨가 아니야. 한두 번 지어 본 게 아닌데?’
저 정도 오두막이라면 대략 두어 달 정도는 비바람을 맞지 않고 지낼 수 있을 것 같다.
“없어.”
‘팔’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귀무살은 혼자다. 주변에 홀리나 해자수가 없다. 호발귀는 환자라고 들었는데, 환자가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오두막에 붙어 있는 사람은 귀무살뿐이다.
‘가지.’
‘그래.’
스으으읏!
칠과 팔은 뒤로 물러났다.
일비자는 칠과 팔이 돌아온 후에야 품에서 지도를 꺼내 살펴봤다.
확실히 맞다. 이곳에 점 하나가 찍혀있다. 귀무살이 터를 잡고 눌러앉았다.
그가 꺼내든 지도에는 무수한 점이 찍혀있다.
현재 귀무살이 머무는 장소를 적어 놓은 곳인데…… 그들은 모조리 재점검한다.
이곳에는 귀무살만 있고 다른 자는 없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 이런 수색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해서 뭘 어쩌자고. 아니, 수색할 가치가 있다. 이렇게 하나씩 점검해 나가다 보면 반드시 찾아진다.
지도에 점찍힌 귀무살을 일부러 찾아온 것이 아니다. 흑응을 따라서 무인을 찾다 보니 귀무살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지도를 펼쳐서 귀무살 위치를 확인했다.
아직은 지도에 찍힌 귀무살을 놓치지 않았다.
“휘이이이익!”
일비자는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하늘에 떠 있던 흑응이 유유히 날갯짓을 날아갔다.
* * *
“엇!”
“아……”
무심히 주변을 수색하던 장한들이 낯선 무인을 만났다.
아무런 기척이 없어서 무심히 발길을 옮기던 중에 정면으로 딱 부딪쳤다.
눈앞에 한 사람이 누워있다.
땅에 담요를 깔고 천연덕스럽게 누워서 책을 읽고 있다. 매우 자연스럽게.
‘귀무살!’
장한들은 즉시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극히 평화로워 보이는 자는 귀무살이다. 대단히 위험한 자다. 천살단을 향해서 정면으로 검을 겨누고 있는 자이니, 시비는 철저히 피해야 한다.
장한들은 겁에 질려 덜덜 떨면서도 앞으로 걸어갔다.
자신들 뒤에는 무인들이 있다. 이가문 무인들은 십팔반 병기를 능숙하게 다룬다. 또한, 그들 뒤에는 천살단 무인도 받치고 있다. 귀무살도 함부로 난동부리지 못한다.
하지만 이것은 천살단 무인이나 이가문 무인이 하는 말이고…… 귀무살이 검을 휘두르면 당장 죽어 나가는 것은 자신들이다. 무슨 수로 대항한단 말인가?
이럴 때를 대비해서 장한들은 활로 무장했다.
착착착! 착착!
장한들이 일제히 활에 시위를 재웠다. 그리고 땅에 누워있는 귀무살을 겨눴다.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장정 중 한 명이 무인에게 물었다.
무인은 책을 들어 보였다.
“못 보던 분이신데 언제부터 계셨는지?”
“귀찮아. 가주면 안 될까?”
무인이 차갑게 말했다.
“아! 네, 네.”
말을 건 장한이 자신도 모르게 대답했다.
원래는 이런 말을 하려던 것이 아니다. 조금 더 압박을 가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칼을 품고 있는 듯한 음성을 듣는 순간, 소름이 오싹 돋으면서 저절로 물러서졌다.
책을 보는 무인의 살기가 피부를 저며온다.
검은 들고 있지도 않다. 담요 한쪽에 올려놓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살이 베이는 것처럼 아프다. 감히 눈을 마주칠 수가 없다. 눈길이 부딪히면 시비가 걸릴 것 같고, 여지없이 검이 날아올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그럼 저희는 이만……”
장한들이 조심스럽게 귀무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귀무살은 장한들이 지나가는 걸 보면서도 시비를 걸지 않았다. 눈길도 주지 않았다. 읽고 있는 책에서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싸울 생각이 없는 것이다.
‘없지?’
‘없어.’
장한들은 비록 물러섰지만, 눈길만은 사방을 훑었다. 사람이 숨어 있을 만한 곳이 있는지 살폈다.
귀무살이 워낙 탁 트인 곳에 누워있어서 세밀히 살펴볼 필요도 없었지만.
슈웃! 퍼엉!
장한 중 한 명이 폭죽을 쏘아 올렸다. 붉은 폭죽이다. 수상쩍은 곳이 있으면 푸른 폭죽을 쏘았을 텐데, 귀무살 이외에 다른 자는 없다고 확신한다.
물론 그래도 뒤따르는 이가문 무인들이 다시 한번 확인할 것이다.
* * *
십이비자는 움직임을 멈추고 기다렸다.
천라지망이 펼쳐진 것을 안다. 무자가 혈천방 비밀 거점을 뒤지고 있다. 천라지망은 사람 위주로 호발귀를 찾고, 무자는 거점을 수색해서 찾아내려고 한다.
천석지기 부자의 저택이 공공연하게 수색당했다.
비단 포목점을 꽤 크게 운용하던 상점도 느닷없이 들이닥친 무인들에게 짓밟혔다. 창고에 쌓아놓은 묶은 포목들까지 죄다 풀어 헤쳐졌다.
은밀한 동굴도 뒤졌다.
비보전이 지난 십여 년 동안 은밀히 찾아놓은 비밀 거점을 모조리 수색했다.
혈천방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발각되지 않은 줄 알았다가 깜짝 놀란 꼴이 되었다.
다행히도 누구를 숨겨 놓지 않은 상태에서 수색을 당했기 때문에 왜 이러냐고 따져 물을 수 있다.
천라지망과 무자는 각기 다른 수색을 하면서 백오십 리에 걸친 포위망을 좁히는 중이다.
십이비자는 수색하기보다는 숨어서 지켜보기로 했다.
지금, 수색하는 사람은 상당히 많다. 인원만으로 놓고 보면 남아돌 지경이다. 이럴 때는 차분히 은신해서 노출되는 것을 방지하는 게 낫다.
그때, 하늘에서 낯익은 매를 봤다.
검은 매, 흑응이 유유히 날고 있다. 아니, 흑응이란 놈이 떡하니 자신의 머리 위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저놈이 나를! 풋!’
십이비자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십이비자도 참응을 길들여봤기 때문에 흑응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참응과 함께 거의 매일 지켜보았고, 먹이도 주었고, 팔목 위에 앉혀보기도 했다.
그런데 놈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머리 위에서 빙빙 호선을 그리며 날고 있다.
“이놈아, 이제는 나도 못 알아보는 거야? 호발귀를 찾으라니까 왜 날 찾아내고 지랄이야.”
십이비자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그때,
스읏!
일비자가 수풀을 헤치며 나타났다.
“뭐하러 왔어요? 천라지망까지 펼쳐졌는데.”
십이비자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무리 망형이동이라고 해도 네가 놓친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어떻게 놓친 거야?”
“망형이동인지 몰랐지. 알았다면 무리를 해서라도 직접 쫓아갔을 텐데. 두 눈 빤히 뜨고 놓쳤어요.”
“그러면 부지런히 찾아 나설 것이지,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한가하게 늘어질 때야?”
“망형이동, 모릅니까? 알잖아요. 무자는 헛수고할 것 같고…… 놈들이 그런데 숨겠어? 천라지망은 모르겠네. 찾아낼 것 같기도 하고. 제대로만 운영된다면.”
십이비자가 히죽 웃었다.
“여기 계속 있을 거야?”
“전주님께서도 오셨다면서요?”
“무자하고 같이 움직이고 계신다.”
“그럼 전 여기서 기다려야죠. 아무래도 단주님, 이번 일이 마지막 일일 것 같은데, 저라도 옆에 있어 드려야지. 솔직히 별로 도움이 안 될 것 같지만.”
“그래라.”
일비자가 즉시 움직이려고 했다.
“흑응 저거…… 간수 잘하세요. 혈마에게 노출되면…… 후후!”
십이비자가 고소를 머금고 말했다.
자신이 어떻게 해서 참응을 잃어버렸는지는 이미 상세히 보고해 놓았다. 그러니 일비자도 알고 있을 것이다. 혈마와 부딪치면 흑응도 도망갈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단단히 준비하고 있어. 휘이이익!”
일비자가 흑응을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하늘을 빙빙 선회하던 검은 매가 힘차게 날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