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十八章 망형이동(網形移動) (5)
등여산은 강둑에 앉아서 강을 쳐다봤다.
저벅! 저벅!
귀에 익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검벽주.’
주치균이 걷는 발걸음 소리다.
주치균은 살단주가 된 지 오래되었지만, 등여산에게는 여전히 검벽주로 남아있다.
등여산은 주치균을 쳐다보지 않았다. 주치균도 등여산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두 사람은 묵묵히 차가운 한수만 쳐다봤다.
끄르르릉! 커엉! 컹컹!
늑대개들이 등여산을 향해 달려왔다.
낭견대는 주변 일대를 샅샅이 수색했다. 갈대밭을 뿌리까지 뒤집어엎었고, 절터도 쑥대밭을 만들었다.
그리고 냄새를 쫓아서 강둑까지 달려왔다.
“돌아가라.”
주치균이 차갑게 말했다.
그 말 한마디에 낭견대는 손발이 묶였다.
낭견대주가 시신으로 발견된 후, 낭견대는 급격하게 자신감을 잃었다. 아직도 낭견대에는 제삼대주인 안도가 남아있지만, 기세는 이미 꺾인 상태다.
제이대주에 이어서 제일대주도 죽었다.
낭견대에게 낭견대주 허경은 천살단주를 능가하는 존재였다. 말 그대로 하늘이나 진배없었다. 천살단주의 명을 따르지 않아도 허경 말은 쫓는다.
그런 낭견대주가 도저히 죽음이 예상되지 않는 용사들과 함께 시신이 되었다.
주치균의 한 마디가 법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귀무살을 쫓아라.”
낭견대는 즉시 방향을 틀었다.
컹컹컹! 컹컹!
늑대개들이 짖어대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갈 데가 없나?”
주치균이 말했다.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갈 데가 없네.”
등여산이 씁쓸한 웃음을 머금고 말했다.
“원래부터 갈 데가 없었다. 갈 데가 있다고 착각한 것이 잘못이지. 천살단에 발을 디딘 이상 빠져나갈 곳이 없어. 그 좋은 머리가 그런 쪽으로는 향하지 못했던 모양이군.”
“그러게. 앞에서 오는 칼만 봤지, 뒤에서 찌르는 칼은 보지 못했네. 멍청하게.”
“……”
주치균은 등여산 옆에 서서 등여산이 쳐다보고 있는 강을, 같은 곳을 바라봤다.
휘이이잉!
강바람이 두 사람을 쓸고 지나갔다.
“천살단으로 가라. 형옥에 갇힐망정 네가 있을 곳은 거기뿐이야.”
“예전 같았으면 그랬을 거야.”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달라. 천살단이나 혈천방이나 뭐가 다르다고. 다른 점이 있기는 하나?”
등여산이 자조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네가 뭐라고 생각하든, 무엇을 생각하든 네가 있을 곳은 천살단뿐이다. 갈 곳이 따로 있다면 가고.”
주치균이 뒤돌아섰다.
“계속 쓸 거야? 무령환살공.”
“……”
“쓰지 마.”
“네가 간여할 문제가 아니야.”
“무령환살공에 파신금령술. 흑포부시단. 호호호! 이건 혈마보다 더해. 혈마를 죽일 자격이 없어.”
“그 세 가지. 오직 귀축(鬼畜) 한 마리, 혈마에게만 쓴다. 다른 사람에게 평가받을 이유, 없다. 특히, 혈마후에게 평가받을 이유는 더더욱 없겠지.”
“혈마후. 호호! 듣기 좋은 말이네.”
주치균이 신경질적으로 홱 뒤돌아섰다. 그리고 사납게 등여산을 쏘아봤다.
“무슨 말이냐? 혈마후가 듣기 좋다니?”
“그동안 혈마후라고 하면 살인마의 부인으로 인식했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의 부인. 늘 죽음과 피 냄새를 맡으면서 살아야 하는 운명쯤으로.”
“그런데?”
“아직 모르겠는데, 이 세상에는 혈마보다도 더 나쁜 사람이 많은 것 같아. 그러니 혈마후라는 말을 들어도 조금은 떳떳할 수 있겠어. 적어도 호발귀는 혈마가 되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으니까. 목숨을 내놓기도 했고.”
“어떤 변명도……”
“됐어.”
“……”
“살단주. 살단주는 살단주의 입장에서 움직이면 돼. 난 혈마후로써 움직이면 되는 거고. 앞으로 우리가 만날 일은 없겠다. 무령환살공을 계속 사용하는 한…… 살단주, 넌 내 벗이 아니야.”
“하하하! 하하하하!”
주치균이 하늘을 쳐다보며 앙천광소를 터트렸다.
“내가 오늘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소리를 들었구나. 하하하! 등여산. 난 어느 한순간도 널 벗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내 여자, 내 것. 그걸 호발귀에게 빼앗긴 못난 놈이지. 간다. 다음에 만나면 파신금령술을 조심해라. 혈마후 역시 처참하게 죽여야 할 쓰레기에 불과하니까.”
저벅! 저벅!
주치균은 성난 일갈과는 다르게 차분하게 강둑을 걸어갔다.
등여산은 멀어져 가는 주치균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면서도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천살단!
천살단이나 혈천방이나 뭐가 다른가!
방금 주치균에게 한 이 말은 어제까지만 해도 생각하지 못했던 말이다.
천살단이 마공관 마공을 이용해서 낭견대를 만든 일은 확실히 충격이다. 하지만 낭견대의 탄생 목적이 혈마 척살인 이상 시도할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혈마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보통 수법으로는 안 된다. 극단의 조처를 취해야 하고, 마공관 마공을 사용하는 것도 충분히 타당성이 있다고 봤다.
그래서 천살단은 엄연히 정도이며 혈천방은 마방이라는 생각을 수정하지 않았다.
지금은 생각을 바꿨다.
천살단주가 절터 지하로 내려서는 순간부터 생각이 바뀌었다.
사람은 하루에 세 번 식사한다. 천살단 무인들도 마찬가지다. 하루 세 번 식사한다. 주변 농토에서 걷어진 쌀을 천살단 우물에서 길어진 물로 씻어서 밥을 짓는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천살단 우물물은 약수다. 우물물에 철분이 섞여 있어서 밥을 지으면 파란색을 띤다. 가뭄에도 마른 적이 없고, 삭풍이 몰아치는 한겨울에도 얼지 않는다.
웬만한 위장병이나 관절염, 심장병은 우물물만 마셔도 낫는다.
더욱이 우물물에는 화탄석(花炭石)이 녹아있다. 그래서 우물물을 마시면 풀잎을 베어 문 듯 상쾌한 맛이 난다. 기분이 좋아지고, 우울증이 가신다.
화탄석 녹은 물을 장복하면 사향(麝香)을 지녔을 때처럼 상큼하고 향긋한 향내를 풍긴다.
인체에는 전혀 해롭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천살단이 성지에 자리 잡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바로 이 냄새가 추격의 단초가 된다.
천살단주가 정확하게 폐사 밀실로 찾아올 수 있었던 것도 냄새를 쫓아왔기 때문이다.
천살단 땅속에 사는 두더지는 화탄석 냄새에 매우 민감하다.
두더지도 좋은 것은 알아서 화탄석 녹은 물이 힘이 되어 준다는 것을 안다. 실제로 천살단 땅에서 잡은 두더지는 향초를 만진 듯 상큼한 냄새를 풍긴다.
이런 성질을 이용해서 비보전에서는 일부러 두더지를 잡아서 길들인다.
원래 목적은 추격이 아니다. 격전을 벌이다가 중상을 입어서 의식 불명이 된 사람들을 찾아내서 치료하기 위해 길들였다. 선의의 목적에서 길들인 것이다.
그것이 나쁘게 쓰였을 때는 배반자를 찾는 추격 향이 된다.
천살단 사람들은 임의로 천살단을 벗어나지 못한다. 막말로 도주할 수 없다. 먼 이국으로 도주해서 숨어 살아도 반드시 두더지가 찾아내고야 만다.
천살단주가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고 그녀를 놔준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단주는 말했다. 결국, 호발귀를 갖다 바칠 사람은 너다.
자신이 호발귀를 만나는 순간, 천살단 무인을 호발귀에게 데려간 꼴이 된다. 호발귀와 지내는 모든 순간이 감시의 순간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디에 숨었건, 무엇을 하든 천살단은 그녀를 찾아낼 수 있다.
싸워서 이기는 것과 단지 찾기만 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천살단은 그녀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붙을 수 있다. 많은 사람을 동원하지 않고도 따라붙는다.
이런 점을 왜 새카맣게 잊고 있었을까?
‘이제는 만나지 못해.’
등여산은 망연히 앉아서 강물을 쳐다봤다.
강물 위에 호발귀의 얼굴이 그려졌다.
혼수상태에 빠져있는 모습도 그려지고, 활기차게 움직이는 모습도 그려졌다.
이대로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반드시 깨어날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다. 그래서 웃는 얼굴을 그려볼 수 있다.
호발귀는 분명히 살아있다. 살아날 것이다. 하지만 두 번 다시 그를 볼 수 없다.
등여산은 가슴이 아파서, 마음이 미어져서 아랫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호발귀를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는데…… 굉장한 아픔이다.
호발귀가 혈마 상태를 벗어나면 놔줄까?
어림도 없다. 천살단은 절대로 호발귀를 놔주지 않는다. 어찌 되었든 혈마가 되었던 사람이니, 어떤 식으로든 호발귀를 손에 쥐려고 할 것이다.
천살단은 이번처럼 사마를 이용해서 실험했던 것처럼 이리저리 돌릴 것이다.
혈마를 이용해서 더 강한 힘을 얻으려고 할 것이다. 결국은 혈마의 힘을 얻어내는 것이 목적일 것이고.
혈천방도 마찬가지다. 혈마를 지켜보면서 제이, 제삼의 혈마를 만들어 내고자 한다.
천살단과 혈천방을 혈마 이용방법이 다르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 죽일 것은 분명하다.
일단 천살단은 혈마를 죽일 수 있다. 주치균이 이미 확인시켜 주었다. 그리고 그 수법은 천살단주도 사용할 수 있다. 보지는 못했지만 확신한다.
혈천방 역시 혈마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본단에서는 손해를 무척 많이 봤지만, 그것 역시 혈마를 지켜보는 과정일 수 있다.
천살단이나 혈천방이나…… 혈마에 관한 연구가 상상 이상으로 깊다.
호발귀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
그 누구도 그 운명에서 호발귀를 빼내 올 수 없다. 천살단이 무너지거나 호발귀가 죽거나.
‘내가 무슨 생각을. 풋!’
등여산은 피식 웃었다.
호발귀가 살려면 어느 한쪽만 붕괴시켜서는 안 된다. 혈천방과 천살단 양쪽 모두를 소멸시켜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안전한데…… 가만? 그러면 중원 대 혈마의 싸움이다.
호발귀가 중원 전체를 피로 물들이지 않는 한은 안전하지 못하다는 말이 된다.
스읏!
등여산은 일어나서 강둑을 따라 걸었다.
특정한 목적지는 없다. 계속 강둑을 따라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앉아서 쉴 것이다. 적당한 장소가 나오면 허름한 오두막이라도 짓고 머물 것이다.
검을 놓고 농사나 지어볼까? 밭일도 하고 논 일도 하고…… 무엇을 하든 천살단 눈초리가 항상 따라붙겠지만…… 분명한 것은 호발귀를 만나면 안 된다는 것.
‘홀리. 그 사람 행복하게 해줘. 풋!’
다행스럽게도 호발귀 곁에는 홀리가 있다. 호발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도 던질 수 있는 여장부가 버티고 있다. 홀리는 결코 호발귀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등여산은 걷고 또 걸었다.
“이거 영 내키지 않는데.”
십사비자가 중얼거렸다.
그는 품에서 두더지를 꺼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일, 육, 구, 십이비자가 참응을 길들였듯이 십사비자는 두더지를 길들였다. 화탄석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두더지는 그에게는 애완동물 이상의 피붙이다.
꼭 추격 능력 때문에 이번 일에 투입된 것은 아니다. 추격 능력도 중요하지만, 이번 일에 투입된 이유는 그가 등여산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어서다.
십사비자는 등여산을 좋아한다.
나이는 한참 어리지만, 현명한 여인으로 존경하고 우러러본다. 지금은 서로 뜻을 달리하고 있지만, 그래도 등여산은 여전히 천살단 책사다.
언제나 밝고 활기차던 그녀가 잔뜩 시름에 젖어서 강독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언짢게 한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녀를 뒤쫓아야 한다는 거다.
“그거참……”
등여산에게 인간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녀의 수족이 되어서 보필해야 한다. 일종의 홀리와 해자수 같은 관계를 만들어서 필요할 때 같이 움직여야 한다.
비보전주라고 책사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모를까. 안다. 그녀가 호발귀를 만나지 않기로 작심했다면 절대로 만나지 않는다. 고문을 해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옆에서 정보도 주고 다독이기도 하면서 조금씩 마음을 얻어야 한다.
호발귀에게 가도록 유인하는 거다.
그것이 이번에 십사비자에게 맡겨진 임무다.
“영 내키지 않아. 하지만 어떡하나. 맡겨진 일인데. 오늘부터 급하게 접근하는 것은 너무 속이 빤히 보이고…… 며칠쯤 시차를 두었다가 차분히……”
십사비자는 등여산을 등지고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쫓아가는 것은 언제라도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