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十七章 대면(對面) (3)
“풍설은신(風雪隱身). 좋아. 정말 많이 발전했구나.”
단주가 웃었다.
등여산이 머리 위로 검을 들고 있는 모습이 보이나? 그렇다면 하수다.
등여산의 몸 주위로 흐르는 검기, 눈보라는 보지 못했다면 이 검과 싸울 자격이 없다.
검기를 눈여겨보면, 풍설은신이 보인다.
등여산이 눈보라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다. 눈보라가 몸을 숨겨 버렸다.
풍설은신은 고수만 알아볼 수 있다.
그때, 단주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홀리라는 아이가 호발귀를 데려간 것 같은데. 검벽주.”
“네!”
“추격하지.”
“넷!”
천살단주의 등 뒤에서 힘찬 대답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무인 두 명이 재빨리 계단을 내려오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홀리가 사라진 입구로 쏘아갔다.
어떻게 알았을까? 홀리가 들어간 곳을.
검벽은 여우굴 여섯 개 중의 하나를 정확하게 찾아서 들어갔다.
등여산은 검벽 무인들이 쫓아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움직이지 못했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천살단주를 앞에 두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저벅! 저벅!
천살단주가 두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자 무형의 압력이 전신을 칭칭 동여맸다.
“아!”
등여산은 나직이 탄식했다.
단주의 무공이 이 정도였나? 이렇게나 강했나?
친근한 할아버지로 옆에 있을 때와 적이 되어서 마주 섰을 때의 느낌은 전혀 다르다.
“훗!”
등여산은 피식 웃으면서 진기를 풀었다. 검도 떨궜다.
두 팔에 힘이 빠져서 검을 들고 있을 수가 없었다. 아니, 그 전에…… 적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단주와 싸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단주님을 어떻게 이기겠어요.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으면 다행이라 여겼을 뿐이죠. 맹수는 살려 달라는 말을 하는 게 아니라고 했죠. 그런 말, 더는 하지 않겠습니다.”
등여산은 눈을 감았다.
살려달라고도 하지 않지만, 죽이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어떤 짐승도 빨리 죽이라고 악을 쓰지 않는다. 죽음이 닥치면 담담하게 맞이할 뿐이다.
저벅! 저벅!
단주가 걸어와서 그녀 옆에 섰다. 그리고 손을 들어서 그녀의 어깨를 만졌다.
‘단주님!’
옛날에는 할아버지의 어루만지는 자상한 손길이었는데, 지금은 엄청난 무게로 어깨를 짓누른다. 단주의 손바닥이 창끝처럼 날카롭고 껄끄럽게 느껴진다.
“맹수의 아량으로 널 살려주마.”
“네?”
“가거라.”
단주가 어깨에 얹은 손으로 격려하듯 탁탁 두들겼다.
등여산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이지 못했다.
단주의 호의는 호의가 아니다. 자신을 놓아주고 뒤를 쫓을 생각이다. 일 년이 지나고 십 년이 지나더라도 뒤를 쫓는다. 언젠가는 호발귀를 만날 터이니.
지금 검벽이 호발귀를 쫓고 있지만, 놓치는 경우까지 생각하고 있다.
“너는 이쪽으로 가지 않을 테지?”
단주가 검벽 무인들이 뒤쫓아 간 밀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후후! 지금 넌 우리를 절대로 호발귀에게는 안내하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고 있을 것 같다만, 결국은 네가 우리를 호발귀에게 데려다줄 게다. 난 확신한다.”
“왜죠?”
등여산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그걸 아직도 모르면 곤란한데? 일부러 생각하지 않는 건가? 후후! 넌 뼛속까지 천살단 사람 아니냐. 천살단은 널 버릴 수 있어도, 넌 천살단을 버리지 못하지.”
단주가 등을 돌렸다.
등여산이 아직도 검을 들고 있는데 태연히 등을 돌렸다.
단주의 뒷모습에서 너는 결코 나한테 검초를 전개하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묻어나왔다.
저벅! 저벅!
단주는 홀리가 도주한 밀실로 걸어 들어갔다.
등여산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단주를 전혀 막아서지 못했다. 단주의 말에 변명도 하지 못했다.
‘홀리!’
등여산은 밀실 천정을 올려다보며 홀리를 떠올렸다.
검벽 무인 정도는 쉽게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단주까지 따돌릴 수 있을까?
답답하다. 우울해진다.
등여산은 손을 들어서 가슴을 쾅쾅 치고 싶었다.
그만큼 답답했다.
* * *
쉬잇! 쉬이이잇!
싸움이 끝나기 무섭게 세 방향에서 귀무살 세 명이 다가왔다.
그들은 각기 귀검의 귀에 대고 귓속말을 속삭였다.
“밀실로?”
“네.”
“음!”
귀검이 어두운 얼굴로 절터를 쳐다봤다.
“왜? 무슨 일인데? 안색이 시커멓게 변하는 것을 보니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같이 좀 압시다. 같이 싸운 인연도 있는데.”
“천살단주가 왔다.”
귀검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툭 말했다.
“뭐, 뭐, 뭐, 뭐, 뭐여?”
천살단주라는 말에 해자수가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천살 단주가 어디에……”
해자수는 말을 하다 말고 귀검의 눈길을 쫓아서 갈대밭 너머를 쳐다봤다.
귀검이 절터를 쳐다보고 있다.
“그, 그럼 벌써!”
“들어간 사람은 있어도 나온 사람은 없다. 들어간 지 이다경이 넘었어. 사달이 났어도 벌써 났어야 할 시간인데, 조용하다는 것은 아직 큰일은 벌어지지 않았다는 거다.”
귀검이 흔들림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 그래도 천살단주가 왔다면……”
“너희는 준비해라.”
귀검은 해자수가 하는 말을 무시하고, 옆에 서 있던 귀무살에게 명령했다.
귀무살은 가볍게 묵례를 취한 후, 재빨리 갈대밭으로 스며들었다.
해자수도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밀실에는 등여산과 홀리가 있다. 천살단주가 얼마나 강한지 모르지만, 두 여인도 만만치 않다.
두 여인이 생기를 끌어내서 저항한다면 누구도 쉽게 상대하지 못한다.
해자수는 두 여인을 믿었다.
두 여인이 도주를 선택했을 수도 있다. 밀실에는 여우굴이 여섯 개나 준비되어 있다.
누군가 저항하지 못할 정도로 강자가 들이치더라도 충분히 도주할 수 있다.
‘아냐! 천살단주가 들어가서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어. 그러면 저 안에서 사달이 난 거야. 제압당했다면 벌써 나왔을 것이고…… 맞아. 도주! 도주야!’
홀리와 등여산이 도주를 선택했다.
지금쯤 밀실을 통해서 맹렬한 추격전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다.
“하! 그럼 이거 곤란한데. 어느 굴로 도망갔는지를 알아야 쫓아가지. 굴이 여섯 개나 되는데.”
해자수는 혼자서 생각만 한다는 것이 그만 마음속 말을 입 밖으로 흘리고 말았다.
“쫓아가지 못한다.”
귀검이 딱 부러지게 말했다.
해자수가 놀란 얼굴로 귀검을 쳐다봤다.
“쫓는 사람이 천살단주다. 그 뒤를 쫓는다는 건 자살행위야. 누구도 천살단주의 뒤를 쫓지는 못한다.”
“그, 그럼 그냥 손 놓고 구경만 하란 말이우?”
“이제 호발귀에게 천운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볼 시간이겠지. 천운이 따르지 않는다면 지금 상태로 죽겠지.”
“지금 그걸 말이라고!”
“미로는 모두 몇 개나 있나?”
귀검이 해자수를 보며 물었다.
“여, 여섯 개.”
해자수는 귀검에게 사실대로 말해 주었다.
“여섯 군데 모두를 막아서 보지. 미로만 잘 빠져나오면 방법은 있을 것 같은데. 미로가 어디로 나오는지 적어놔.”
귀검은 명령하듯이 툭 내뱉고는 갈대밭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 이거 뭐 내가 종이야 뭐야? 누구 보러 적으라 마라 명령 질이야? 이거야 원 기분 나빠서.”
해자수는 투덜거렸다. 하지만 잠시도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다행히 귀무살이 도와주고 있지 않나.
왜 도와주는지는 모르지만, 귀무살이 천살단을 막아주고 있다.
‘이 힘을 잘 이용해야 해.’
지금 당장은 혈천방보다도 천살단이 더 무섭다.
해자수는 급히 지필묵을 꺼내서 여우굴 여섯 군데로 빠져나갈 수 있는 최종 도착지를 그려나갔다.
쒜엑! 쒜에엑!
귀검은 매우 빠르게 이동했다. 그러면서도 일절 소리를 내지 않았다. 지극히 은밀하게 움직이면서도 말을 타고 질주하는 것처럼 빠르게 움직인다.
지금쯤 낭견대가 야음을 틈타서 한수를 도강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도착한 곳은 텅 비어있다. 사람은 커녕 짐승조차도 반기지 않는다.
그들은 절터로 들이칠 것이다.
땅에는 귀무살이 남긴 발자국이 있고, 사람이 머물렀던 여러 가지 흔적이 널려있다.
당장 늑대개를 앞세워서 뒤쫓아 올 수도 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낭견대는 아주 큰 곤욕을 치르게 된다.
귀무살이라고 낭견대를 모를까. 낭견대가 늑대개를 데리고 있다는 사실을 버젓이 알고 있는데 그들이 뒤쫓아 오도록 흔적을 남겨 놓겠나.
귀무살은 갈대밭을 떠나기 전에 자신이 머물렀던 자리에 독가루를 뿌려놨다. 늑대개가 냄새를 맡으려고 코를 들이민다면 당장 독분이 폐를 녹여버릴 것이다.
그러면 낭견대의 손발이 묶인다.
낭견대는 늑대개 없이는 추격하지 못한다. 그들의 무공이라면 충분히 뒤를 쫓을 수 있지만, 항시 늑대개를 앞세워 버릇해서 개 없이는 움직이는 법을 알지 못한다.
쒜에엑!
해자수는 귀검을 쫓아서 부지런히 신형을 쏘아냈다.
귀검을 따르는 귀무살은 굉장한 무인들이다. 과거, 악불사왕이 혈의검을 따랐듯이 귀검 주위에도 네 명의 무인이 따른다.
실제로 악불사왕의 진전을 이어받은 자도 두 명이나 된다.
창파와 궁충.
월도와 무지라는 귀무살도 있는데, 그들은 악불사왕의 진전을 이어받은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무공 면에서는 창파, 궁충에 비해서 전혀 손색이 없다.
‘이놈들, 천살단보다 한 수 위야. 오택골이 이들과 비등하게 싸웠다는 건데…… 아무래도 주치균은 약해. 그것참 이상하단 말이야. 무공은 지금의 주치균이 훨씬 강한 것 같은데, 살단 전체로 보면 도통 미덥지가 못해.’
귀무살은 질서 있게 움직였다.
해자수가 밀지를 건네주자마자 저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여섯 조직으로 갈라졌다.
하나의 무리가 한 곳을 맡는다.
저들은 밀지에 적힌 장소가 어디냐고 묻지도 않았다. 밀지를 보고는 즉시 움직였다. 이미 그곳이 어디라는 것을 알고 있다. 주변 지형을 꿰뚫고 있는 것이다.
갈대밭에서 갈라진 귀무살은 어느 쪽에서 호발귀를 발견하던 즉시 신호를 보내주게 되어 있다.
도착지가 멀게는 십 리나 벌어져 있다. 그런데도 신호를 보내겠다는 것을 보면 아마도 폭죽 종류의 신호가 아닐까 싶다.
‘제발 좀 찾아서 도와줘라. 하! 내가 귀무살을 다 믿을 때가 있다니. 좌우지간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라니까.’
쒜엑! 쒜에엑!
해자수는 부지런히 귀검을 뒤쫓았다.
“은인문 잡종이라고 들었는데 이거 우리 찜쪄먹겠는데.”
창파가 말했다.
그들은 진기를 최대한으로 일으켜서 치달리는 중이다. 그런데 해자수가 전혀 뒤처지지 않고 쫓아온다.
해자수는 전력을 다하는 것 같지도 않다. 겉보기에도 여유가 넘친다.
“너희보다 한 수 위다.”
귀검이 말했다.
“설마 그럴 리가?”
궁충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돌려서 해자수를 쳐다봤다.
해자수는 이마에서 땀도 흘리지 않는다. 아주 태연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쫓아온다.
“정말인가?”
“정말 한 수 위인 것 같은데. 어떻게 이렇게 진기가 급진전했지? 기연이라도 얻었나?”
부대주들이 달리면서 말을 주고받았다.
“만약 저쪽 사람들과 싸우게 되면 시간을 끌지 말고 단숨에 몰아쳐라. 촌각도 주지 마. 네 명이 합공을 취하되, 일 초 승부를 벌인다는 생각으로 상대해라.”
“일 초요? 그 정도로 강합니까?”
“점점 더 강해질 거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강해지고 있으니까. 내 말대로 싸우면 승부는 반반이 된다.”
“네?”
창파가 눈을 부릅떴다.
정말 해자수가 그만한 고수인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귀무령이 하는 말이니 믿지 않을 수 없다. 믿어지지 않더라도 믿어야만 한다. 하지만 겉보기에는 아무리 좋게 봐도 그 정도까지 되지는 않는 것 같다.
귀검이 말했다.
“후후! 난검난사를 견뎌냈다는 것만 잊지 마라. 언제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