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十七章 대면(對面) (2)
‘왜 이러지?’
탁탁! 탁!
등여산은 연신 손으로 가슴을 쳤다. 가슴이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호발귀도 떠나고 없다. 불안한 요소가 깔끔히 제거되었다. 그런데도 미친 듯이 답답해진다.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아서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겠다.
“하악!”
등여산은 큰 숨을 쏟아냈다.
눈앞이 한순간 눈앞이 캄캄해졌다. 아득한 절망이 몰아쳤다.
지금까지 기분 나빴던 적은 많다. 호발귀가 혈마가 되어서 들이닥칠 때, 그때 정말 위험했다. 혈마에게 잡혀서 죽을 뻔하기도 했다. 그 느낌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안 보인다. 새까만 어둠뿐이다. 살면서 이토록 지독하게 답답했던 적은 없다.
“아!”
그녀가 한숨을 토해낼 때 덜컹! 지하로 내려서는 문이 열렸다.
‘해자수?’
해자수는 아닐 것이다. 벌써 돌아올 리 없다. 그런데도 막연히 해자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에 그를 떠올렸다. 그가 밝게 웃으면서 들어섰으면 좋겠다.
등여산은 겁에 질린 눈으로 계단 위를 쳐다봤다.
저벅! 저벅!
밝은 햇살을 등에 받으면서 한 사람이 계단을 걸어 내려왔다.
뒷짐을 지고, 경계 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은 채 여유 있게 걸어 내려온다.
황룡(黃龍)이 새겨진 가죽 신, 금단을 두른 장삼!
“단주님!”
등여산은 고개를 빠짝 쳐들고 걸어 내려오는 사람을 쳐다봤다.
잘못 보지 않았다. 맞다. 천살단주가 계단을 밟으면서 걸어 내려오고 있다.
스릉!
등여산은 자신도 모르게 검을 뽑았다. 그리고 재빨리 뒤로 물러서면서 천살단주를 겨눴다.
차창! 차아앙!
천살단주 뒤쪽에서 날카로운 검음이 울렸다.
천살단주가 가는 곳이면 늘 따라붙는 사람들, 검벽 무인들이다. 그들이 등여산을 향해 검을 뽑았다.
천살단주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검을 뽑았던 검벽 무인들이 다시 검을 집어넣었다.
스릉! 스릉!
검집에 꼽히는 검음이 들린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검음만 들린다. 하지만 등여산은 그들이 몇 명이며, 어디에 숨어있는지 즉시 파악했다.
‘세 명!’
한 명은 문을 지키고, 두 명은 천살단주를 따라서 막 지하실로 들어서려는 참이다.
“너희는 거기 있어라.”
천살단주가 말했다.
“네.”
검벽 무인들이 딱딱하게 대답했다.
‘임명강!’
등여산은 대답하는 음성 중 한 명의 음성을 알아냈다.
주치균 대신에 검벽주가 된 임명강이다. 그런데 대답이 묘하다. 절대복종이다.
지시하는 말을 절대적으로 따를 뿐,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지 않는다.
주치균은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지금 같은 경우, 주치균이라면 안된다면서 자신이 먼저 앞장을 섰을 것이다.
임명강은 지금도 부대주 시절과 똑같이 움직인다.
명령을 내리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을…… 부대주로는 적합하지만, 검벽주가 되어서 자발적으로 단주를 호위하기에는 부족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누구나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다.
옛말에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하인이었던 사람도 점주가 되면 점주의 위엄을 가진다.
점주의 능력과 안목을 지니게 된다. 스스로 배우기 때문이다.
자리에 앉았다고 무조건 능력이 생기는 게 아니다.
자신 스스로 그 자리에 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몸에 큰 옷을 입고 있는 것과 같다.
임명강이 그렇다. 이럴 때는 주위에서 누군가가 조언을 해주면 좋을 텐데.
자신이 지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닌데…… 임명강의 음성을 듣자 당장 모든 상황이 파악되었고, 그에게 도움이 될만한 생각이 떠올랐다.
아직도 등여산의 마음속에는 천살단 책사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단주님.”
등여산이 천살단주를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단주가 손을 들어서 검을 가리켰다.
“그거 계속 들고 있을 거냐?”
스륵!
등여산은 황망한 듯 즉시 손을 내렸다. 하지만 검을 검집에 꽂지는 않았다.
“이런 곳에서 머물다니. 쯧! 이렇게 지내는 것이 천살단 책사로 지내는 것보다 좋다는 거냐?”
“단주님, 저희 놔주세요.”
등여산이 불쑥 말했다.
“다짜고짜 놔달라니. 내가 언제 붙잡기는 했고? 또 네가 붙잡는다고 붙잡힐 사람이더냐. 뭘 놔줘.”
“단주님, 제발 저희 놔주세요.”
등여산이 간절히 말했다.
천살단주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말했다.
“네가 놔달라는 말이 혈마를 쫓지 말하는 말이라면, 글쎄. 천살단은 혈마를 제거할 목적으로 만든 조직이다. 혈마 제거가 제일 사명이야. 또 너는 그 조직의 책사였어. 혈마를 잡는데 지혜를 짜내야지. 지금 네 꼴이 이게 뭐냐.”
“단주님 저희 놔주세요. 그 사람 정신을 잃은 지 오래됐어요. 앞으로도 정신이 돌아올 것 같지 않고요. 혈마처럼 날뛰지 못해요. 제발 놔주세요.”
“그런다고 혈마 손에 죽은 사람들이 살아서 돌아올까.”
“……”
“혈마가 되어서 날뛰는 동안에 죽은 사람이 백 명도 넘어. 모두 애꿎은 양민들이었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하고? 살인했어도 움직이지 못하면 놔줘야 한다는 거냐?”
‘단주님이 그렇게 유도하셨잖아요.’
등여산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단주가 직접 이곳으로 왔다는 말을 혈마를 반드시 잡겠다는 소리다.
꾸욱!
등여산은 자신도 모르게 검을 힘주어 잡았다.
천살단주가 어찌 등여산의 움직임을 모를까. 단주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걸렸다.
“네 무공이 상당히 강해졌다고 들었는데. 주치균이 쩔쩔맸다지? 살단주가 특별히 폐관 수련까지 했는데도 너를 상대하지 못했다면 정말 강해진 모양이야. 어디 한번 보자.”
“단주님 제발 부탁드립니다. 저희 놔주세요.”
천살단주가 웃었다.
“너의 그 말, 상당히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무인은 적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면 안 돼. 이게 생존 법칙이야. 사슴이 늑대에게 잡혀서 먹힐 때도, 멧돼지가 호랑이한테 물렸을 때도 아프다고 비명을 지를지언정 살려달라고 애원하지는 않아. 생존 법칙은 딱 하나,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하는 것뿐이야.”
“단주님!”
“오직 인간만이 적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는데. 아, 너도 생각해봐라. 죽일 생각으로 칼을 들고 찾아온 놈이 살려달라는 말 몇 마디에 살려줄 것 같으냐? 그러니 살려달라, 놓아달라 이런 말들은 무인이 하는 말이 아니야.”
‘그런가요?’
등여산은 말을 하지 않는 대신,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단주 말이 옳다. 어떤 적도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그러니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을 해야 한다. 자신도 그런 생각으로 아직 검을 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등여산은 계속 애원했다.
“단주님, 제발!”
“난 너한테 단주라고 불릴 자격이 없고, 넌 나한테 단주라고 부르면 안 되지. 우리는 그런 관계가 됐잖니.”
“제가 적이 됐군요.”
“아니라고 생각하니?”
“알았습니다. 최선을 다해볼게요.”
등여산이 검을 들어 올렸다.
단주를 향해서 검을 겨누기는 처음이다. 감히 단주와 검을 섞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만큼 단주는 존경하고 경외하는 대상이었다.
‘기쁨!’
기쁨이 일어나야 한다. 생기를 사용해야만 간신히 천살단주와 검을 섞을 수 있다. 생기를 쓰지 않은 상태에서 단주를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니, 이기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몸을 빼낼 생각도 하지 않는다. 단주의 무공은 최강, 저항은 무의미하다. 홀리가 멀리 갈 수 있게끔 시간을 벌어주면 족하다.
천살단주는 바로 이곳에서 통로 여섯 개를 찾아내야 한다. 그것도 빨리 찾아야 한다.
운이 좋아서 홀리가 도주한 통로를 제일 먼저 찾아낼 수도 있다.
그러니 시간을 지체해야 한다. 단주의 손발을 가급적 오랫동안 묶어 두어야 한다.
검벽이 쫓아가는 것은 추격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홀리라면 그들 정도는 충분히 떼어놓는다. 그녀가 생각하는 추격은 단주가 직접 쫓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리 못해도 일다경(一茶頃) 정도는 버텨야 하는데. 버틸 수 있을까?’
승부는 순간적으로 끝난다.
기쁨! 기쁨을 일으켜야 한다!
하지만 기쁨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아무리 좋은 생각을 떠올려도, 즐거운 기억을 떠올려도 아득한 절망감만 피어난다. 생기가 꿈쩍도 하지 않는다.
‘생기를 사용하지 못해.’
등여산은 미간을 찌푸렸다.
생기를 포기한다. 하지만 아직도 사문의 진공이 남아 있다.
호발귀가 진기를 크게 일깨워 주었고, 생기를 사용하면서 한층 더 깊은 수준까지 전진했다.
지금 상태로 사문에서 검증을 받는다면 당장 수일(秀一), 문파에서 가장 강한 검으로 인정받을 자신까지 있다.
츠으으읏!
등여산은 설화팔극공을 일으켰다.
차가운 음기를 바탕으로 눈꽃이 피어난다. 차갑고 부드러운 기운이 전신 경맥을 휘돈다.
들뜨는 신경은 차가움으로 누르고, 무뎌진 감각은 예리하게 일깨운다.
등여산의 전신에서는 차가운 한기가 줄줄이 피어났다.
진기를 사용한 게 얼마 만인가. 검을 많이 사용했지만, 생기를 쓰면서부터는 설화팔극검을 일으키지 않았다. 초식이나 제대로 펼칠 수 있을까?
느낌상으로만 보면 진기를 사용하는 것이 생기를 사용하는 것보다 훨씬 강력하다고 느껴진다.
“많이 강해졌구나. 검 끝에서 설상(雪霜)이 어른거려. 후후! 천담노괴(天潭老怪)도 설상은 피워내지 못하는데. 노괴가 이 모습을 보면 좋아서 펄펄 뛰겠어. 후후!”
천살단주가 웃으면서 말했다.
태산에는 천담이라는 작은 호수가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장문인 거처가 있다.
강호인들은 천담검성(天潭劍聖)이라고 우러러 받드는데, 오직 천살단주만이 노괴라고 부르며 즐거워한다.
설상은 태산파 검공의 극치다.
설화팔극검을 극한으로 수련하면 검첨에 하얀 서리가 얹힌다.
등여산은 단주의 말에 자신의 검을 쳐다봤다.
“아!”
등여산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정말로 설상이 맺혔다. 단주가 말한 것처럼 검 끝에서 하얀 기운이 솟구친다. 아지랑이 같기도 한데 성질이 다르다. 검의 정기와 공기가 마찰을 일으켜서 생기는 이슬이다.
설상의 초보 단계다.
이런 이슬이 더욱 차갑게 일어나서 검에 서리가 맺혀야만 설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해보자!’
등여산은 자신 있게 조금씩, 조금씩 단주를 향해 다가갔다.
단주는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그녀를 쳐다봤다.
‘설풍검자!’
휘리리리릭!
등여산이 거세게 휘돌았다. 동시에 검풍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좁은 지하 밀실에 북풍한설이 몰아쳤다.
순간, 단주의 어깨가 꿈틀거렸다. 설풍검자를 받아내기 위해서 두 손에 진기를 운집한 것 같다.
검을 쓰지 않고 맨손으로 설화팔극검을 막아낼 생각이다.
그 순간, 등여산이 뒤로 쭉 빠졌다.
“후욱!”
등여산은 설풍검자를 끝까지 펼치지 못했다. 단주의 어깨가 들썩이는 것을 보고는 급히 물러섰으니까. 하지만 이번 공격에 심혈을 쏟아낸 듯, 거친 숨을 토해냈다.
스읏!
그녀가 다시 진기를 모은 후 검을 겨눴다.
그때, 단주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얘야. 내가 너를 모를까. 이렇게 해서 시간을 얼마나 끌 수 있다고. 설마 너는 내가 진초와 허초조차 구분하지 못하리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후욱!”
등여산은 진기를 검에 모으고 정신을 집중했다.
생기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는다. 기쁜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대신 진기를 폭증하고 있다. 태산파 무공만으로도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든다.
단주가 말했다.
“다음에 또 이런 얕은수를 쓰면 내가 쫓아갈 것이야. 그러면 진공을 펼쳐보지도 못할 텐데, 최선을 다해야지? 하하!”
등여산은 숨을 크게 몰아쉬면서 두 팔을 크게 휘둘러 머리 위에서 검을 마주 잡았다.
두 손으로 검을 잡고 단주를 쏘아봤다.
단주가 자신의 수를 읽었다. 어떻게든 시간을 더 벌어볼 생각인데, 이제는 틀린 것 같다.
그렇다면 자신이 공격해 들어가면 안 된다. 공격하는 바로 그 순간에 승부가 끝난다.
‘공격하세요. 그래야 시간을 더 끌 수 있으니까.’
등여산은 차분히 숨을 고르면서 단주가 공격해 오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