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十六章 사두(蛇頭) (5)
허경은 해자수를 잡을 수 있었다.
첫 검에서 허벅지를 베어냈다. 그때만 해도 무공 차이는 현격히 벌어져 보였다.
그 정도의 차이라면 앞으로 십 년을 더 연공한다고 해도 따라붙기 힘들다.
굉장한 차이다.
그런 점을 해자수도 알았고. 허경도 알았다. 그래서 허경은 대뜸 이 싸움을 벌였다.
먼저 귀찮은 방해꾼부터 처리하고, 그 후에 귀검에게 집중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게 뭔가. 오히려 자신이 당했다.
검이 어디서 흘러들어왔는지 모르겠다. 너무 빠르게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크크크!”
허경은 신음을 흘리면서 검을 들어 올렸다.
난검난사는 모두 이십팔 식이다. 그중 십사 식을 사용했다.
사실, 허경은 난검난사 이십팔 식을 끝까지 펼치지 못한다. 몸 상태가 최상이었을 때, 전력을 다해서 펼치면 간신히 십육 식까지는 쫓아갈 수 있다.
그 후에는 진기가 고갈된다. 땅에 털썩 주저앉아서 근 반 시진은 헐떡거려야 한다.
물론 이런 상황은 초식을 연이어서 펼칠 때 한한다. 지금처럼 각 초식을 쪼개서 사용하면 종일이라도 펼칠 수 있다. 다만 난검난사의 제 위력이 나오지 않을 뿐이다.
난검난사 십육 식을 펼친다.
그러면 귀검과 상대할 여력이 남아 있지 않게 된다. 해자수를 넘어서더라도 결국은 패배다. 하지만 낮은 산조차 넘지 못하고 무너질 수는 없지 않나.
그때, 뒤에서 싸움을 구경하던 낭견대 무인 세 명이 앞으로 나섰다.
“죄송하지만 저희가 먼저.”
허경이 그들을 쳐다봤다.
낭견대 무인은 허경이 무엇을 하려는지 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싸우면 결국은 귀검에게 먹힌다.
그러니 자신들이 나서서 해자수에게 조금이라도 타격을 준다면…… 지금보다는 훨씬 좋은 상황이 될 수 있지 않나.
허경이 그들의 의도를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컹컹컹컹컹! 컹컹컹!
늑대개 세 마리가 맹렬하게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해자수는 침착했다. 그는 아직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허경이 복부에서 피를 흘리고 있어도 여전히 생기 속에 파묻혀서 빠져나오지 않았다.
휘이이이잉!
맹렬하게 일어난 회오리바람이 몸통 안을 휘젓고 돌아다닌다.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을 처연히 지켜본다.
탕탕탕! 탕탕!
철벽이 급격하게 세워졌다.
‘온다!’
늑대개 세 마리가 와락! 달려들었다.
늑대개의 움직임은 난검난사에 비교할 바가 못 된다.
폭포 밑에서 물살을 견뎌낸 사람이라면 한두 방울 떨어지는 이슬비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쉬잇! 쒝! 깨깽!
간단하게 철벽을 피하면서 검을 쳐내자, 늑대개가 처절하게 단말마를 내지르며 나가떨어졌다.
철벽 세 개 중 한 개가 무너졌다.
다른 두 개는 여전히 양쪽 다리를 노리고 달려든다. 이제 막 다리를 물어뜯으려는 순간이다.
그때 느닷없이 또 하나의 철벽이 불쑥 솟구쳤다.
이번에 나타난 철벽은 먼저 나타난 철벽보다도 훨씬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다른 철벽들을 빠르게 제치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그것도 허리 아래로 매우 낮게.
‘백열!’
검이 다가오기도 전에 뜨거운 기운이 와락 덮쳤다.
해자수는 이런 뜨거움을 경험한 적이 있다. 제이 낭견대와 싸울 때 탄호가 사용했던 마공, 백열마공이다.
슈릿!
해자수는 검으로 철벽을 감쌌다.
그의 검은 백열마공을 품은 검을 단숨에 끌어당겼다. 마치 자석처럼 찰싹 달라붙었다.
그리고 탁탑천왕(托塔天王), 두 손으로 하늘을 떠받치듯 검을 들어 올렸다.
뜨거운 기운이 하늘로 들어 올려졌다.
그 순간, 해자수는 마검을 떼어내고 단숨에 철벽을 갈랐다.
슷! 퍼억!
철벽이 갈라진다. 밝게 빛나는 폭등(暴燈)이 입을 쩍 벌리면서 흩어졌다.
해자수는 다시 움직였다. 숨돌릴 틈도 없이 옆으로 움직이면서 검을 쳐냈다.
쒜에엑! 쒜엑!
검광이 일어나고, 철벽 두 개가 또 갈라졌다.
무인 한 명과 남은 늑대개 두 마리가 죽었다. 그때,
팡!
철벽 하나가 발밑에서 불쑥 솟구쳐 올라왔다. 검이 노리는 곳은 두 다리 사이, 낭심이다.
해자수는 훌쩍 뛰어올라 철벽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 올라선 탄력을 이용해서 다시 한번 위로 솟구쳤다.
허공에서 허리 반동으로만 신형을 재차 퉁겨 올렸다.
츄우웃!
해자수는 물찬 제비처럼 신형을 빙글 휘돌렸다. 그리고 땅을 향해 맹렬하게 검을 전개했다.
슈리리릭! 츄릿! 촤아아악!
해자수가 쳐낸 검은 무려 십팔 검이나 된다.
해자수는 자신이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을 펼치고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그는 매화검법을 수련한 적이 없다.
화산파(華山派) 문인 중에서도 후기지수(後起之秀)만 수련한다는 이십사수매화검법을 어떻게 알겠나.
지금까지 화산파에는 근처에는 얼씬거린 적도 없다.
해자수는 강호를 종횡하면서 매화검법을 딱 한 번 구경했다.
어느 날, 우연히 싸움을 구경했다. 누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왜 싸우는지도 모른다.
그가 싸움을 구경하기 시작했을 때는 싸움이 이미 한참 진행된 후였다.
검을 사용하던 청년이 매우 날렵하게 신형을 솟구쳤다. 그리고 아름다운 검호(劍弧)를 그려냈다.
매우 아름다우면서도 날카로운 검의 흐름이 허공을 난무했다.
매화꽃이 떨어진다.
한 송이, 두 송이…… 검이 그려낸 문양이 땅을 향해 내리꽂힌다.
‘아! 멋있다!’
굉장히 빠르고 신랄하고 아름다운 검공!
해자수의 머릿속에는 그 광경이 아주 깊이 틀어박혀 있다. 지금도 문득문득 생각나곤 한다.
그 검법이 이 순간에 불쑥 재현된 것이다.
쒜엑! 쒜에엑!
초식의 흐름도 모른다. 운기법도 모른다.
처음에 일으켜야 할 초식도 모른다. 첫수 이후에 이어받을 초식도 모른다. 매화검법 자체를 모르니 이십사 수를 연이어서 떨쳐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해자수가 표현한 것은 단지 겉모양일 뿐이다. 그러니 매화검법의 정수가 피어날 리 없다.
그런 검법을 무려 열여덟 번…… 십팔 검이나 터트렸다.
매화검법이 아니라 흉내만 낸 검법일지 모르지만, 연이어서 터진 십팔 검은 매우 위력적이다.
퍼퍼퍽! 퍼퍽!
땅에서 위로…… 하늘을 향해 복마검(伏魔劍)을 전개한 무인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백열마공, 복마검.’
귀검의 눈이 번쩍 빛났다.
낭견대 무인 두 명은 매우 사나운 마공을 펼쳤다. 능히 한 시대를 풍미한 마인들의 마공이다.
천살단 마공관에 수집된 마공이면 위력은 말할 필요가 없다.
무려 이백 년에 걸쳐서 거르고 거른 마공의 정수가 이들 손에서 터지고 있는 것이다.
복마검 역시 백열마공에 전혀 뒤지지 않는 절세 마왕의 검학이다.
복마사왕(伏魔邪王)이 복마검을 펼치면 상대는 저항도 하지 못하고 배가 갈려서 죽었다.
배가 옆으로 베인 것이 아니라 아래서 위로, 수직으로 가르며 올라갔다.
그런 검에 맞으면 차라리 일격에 즉사하는 것이 훨씬 낫다.
괜히 목숨을 부지했다가는 자신의 창자가 쏟아지는 모습을 보면서 죽어가야 한다.
해자수는 이런 무공들을 단숨에 무너트렸다.
“대단하군.”
귀검이 감탄했다.
이번에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해자수의 무공이 이 정도로 강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지금 해자수의 무공이라면 엊저녁보다 적어도 한 단계 이상 발전했다.
이 싸움을 통해서 해자수는 한층 더 고강해진 것이다.
“후후!”
귀검이 싸늘하게 웃으며 주위를 훑어봤다.
귀검도 싸움을 거의 끝냈다. 그를 둘러싼 낭견대 무인 중 살아남은 사람은 두 명밖에 없다.
해자수가 허경을 물리칠 때, 그는 이미 두 명만 남겨 놓은 상태였다.
저벅! 저벅!
귀검은 낭견대 무인들에게 걸어갔다.
낭견대 부인들이 인상을 확 찡그렸다.
그들은 죽음을 예감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일이.”
낭견대 무인이 툴툴거렸다.
그들은 자신들이 패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은 패했다. 더는 삶을 구할 수 없다.
두 사람은 눈빛을 서로 주고받았다.
‘이게 마지막이라면?’
‘큭큭! 그냥 죽을 수는 없지.’
그들의 눈가에 섬뜩한 살광이 어른거렸다.
두 사람은 동시에 귀검을 향해 덮쳐들었다.
파아앗!
두 사람의 얼굴이 피로 물든 듯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검을 들고 있는 손도, 눈동자와 머리칼까지도 시뻘건 혈광에 휘감겨서 활활 타올랐다.
“폭혈마공(爆血魔功). 육신을 터트려서 뼛조각까지 암기로 쓸 생각인가.”
귀검의 눈가에 싸늘한 한광이 맺혔다.
“크크! 혈천방 주구답게 눈치 하난 빠르다만, 이미 늦었다!”
낭견대 무인들이 귀검을 껴안듯이 바싹 달려들었다. 귀검이 터트릴 검초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다는 투다.
“누가 그래? 늦었다고.”
귀검이 싸늘하게 말하면서 마주쳐갔다.
탁탁!
순간적으로 격타음이 터졌다. 큰 소리는 아니다. 막대기로 거대한 고목을 두들긴 듯한, 지극히 맑은 타격음이다.
검으로 치는 소리가 전혀 아니었다.
그 순간 귀검은 언제 앞으로 달려들었냐는 듯이 뒤로 쭉 빠져나갔다.
낭견대 무인들이 눈을 끔뻑이는 사이에 벌써 이장 밖으로 물러났고, ‘엇!’하고 경악성을 내지르는 동안에는 훨씬 더 빨리 움직여서 십여 장이나 벗어났다.
팍팍! 파파파팟!
폭혈마공의 진수가 터졌다.
낭견대 무인 두 명은 뱃속에서부터 화약이 폭발한 듯 전신이 터져 나갔다.
폭발은 그들을 찢어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하겠는지, 그들이 남긴 살점과 피와 뼈를 몰고 사방으로 폭사 되었다.
파파파팟! 퍽퍽퍽퍽퍽!
귀검은 오장을 더 물러났다. 달려드는 것보다 물러나는 게 훨씬 빨랐다.
낭견대 무인들이 죽으면서 쏟아낸 암기는 귀검에게까지는 닿지 않았다. 십여 장 안팎은 거칠게 휩쓸었지만, 그 이상까지 타격하지는 못했다.
귀검은 미간을 찌푸렸다.
사방 십여 장이 피범벅이다. 잘게 찢어진 살점들이 수북이 깔려 있다.
폭혈마공은 시전자가 자신의 임의대로 몸을 폭사시킬 수 있다.
적을 끌어안은 채 폭혈마공을 일으키면 천신이라고 해도 죽음을 면치 못한다.
하지만 폭혈마공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폭혈마공을 일으킨 상태에서 선제공격을 당하면, 바로 그 순간에 응축된 진기가 폭발한다. 폭혈마공이 일어나면서 전신이 갈가리 찢어진다.
귀검이 가볍게 두들긴 타격은 죽음에 이를 정도로 심한 타격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은 선제공격으로 간주했다. 몸이 타격당하니 죽음이 닥쳤다고 생각했다.
폭혈마공은 즉시 발동되었다.
귀검은 이미 뒤로 물러서고 있는데, 이들은 귀검의 검이 더 깊이 찔러오고 있다고 착각했다.
귀검은 마공을 깨트릴 줄 안다.
저벅! 저벅!
귀검은 허경을 향해 걸어갔다.
“이 친구, 나한테 양보해 주겠나?”
귀검이 말했다.
해자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뒤로 물러났다.
사실, 그는 허벅지 상처 때문에 더는 서 있을 힘도 없었다. 그러잖아도 간신히 낭견대 무인들을 처리하고, 저놈과는 또 어떻게 싸우나 하고 걱정할 때였다.
귀검이 앞으로 나서자마자, 해자수는 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 상처부터 치료했다.
“아이고 조금만 더 달라붙었다면 다리 하나 날아갈 뻔했네. 이거 살 떨리게 아슬아슬해.”
해자수가 다 들으라는 듯이 크게 중얼거렸다.
귀검은 그런 해자수를 흘깃 쳐다보고는 허경에게 눈길을 주었다.
“이런 무공을 수련하느라고 고생깨나 했겠군. 능히 무림을 오시할 수 있는 절정 무공들이야. 그런데 졌어. 왜 졌는지 아나?”
“훈계는 그만두지.”
“아니.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너희는 이 무공을 비급으로 수련했어. 마공도 무공이다. 제대로 배우지 못하면 제 위력이 나오지 못해. 난검난사가 겨우 이 정도의 무공인 줄 아나? 보아하니 난검난사를 십육 식이나 십칠 식 정도까지 펼칠 수 있을 것 같은데, 맞나?”
“후후!”
허경은 웃기만 했다.
귀검이 두 눈에 한광을 번뜩이며 말했다.
“난검난사는 혈천방 무공이다. 혈의검을 모셨던 악불사왕의 무공이야. 내가 지금 난검난사를 펼친다면…… 나는 구식 이상을 이어가지 못한다.”
허경이 인상을 확 찡그렸다.
귀검이 여전히 눈가에 한광을 띈 채 말했다.
“그래서 말하는 거야. 너희는 마공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