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十六章 사두(蛇頭) (4)
탈혼음소가 연신 두 귀를 건드렸다. 하지만 귀검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순간,
삿!
낭견대 무인이 등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그런데 일절 소리를 내지 않는다. 도약하는 순간에 잠깐 소리를 어떤 소리가 울렸는가 싶었는데, 뒤돌아서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소리 없이 다가온다.
지독히 은밀히 검이다.
“유마은검(幽魔隱劍).”
귀검의 미간이 또 찌부러졌다.
상대방은 말로만 천살단 무인일 뿐, 이들이 펼치는 무공은 하나같이 마공이다.
불행히도 마공이라고 하면 귀검처럼 많이, 또 정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다.
귀검은 등 뒤에서 밀려오는 검기는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귀검 자신이 ‘유마은검’이라고 말했으니 등 뒤에서 벌어지는 일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무시하고 탈혼음소를 흘리고 있는 무인을 향해 걸어간다.
스읏!
귀검의 검이 탈혼음소를 향했다.
“네가 흘리는 소리, 상당히 시끄러워. 신경에 거슬리고. 그래서 너부터 베야겠다.”
확실히 탈혼음소가 귀검에게 먹힌 듯하다. 순간,
쒜에엑!
귀검의 검이 허공에서 번뜩 빛을 뿌렸다. 하지만 검 끝이 향한 곳은 앞이 아니라 뒤다.
어떤 초식이 펼쳐졌는지 보지도 못했는데, 벌써 붉은 혈화가 확 피어났다.
“크윽!”
유마은검을 펼치며 다가들던 무인이 답답한 신음을 흘렸다.
검은 정확하게 낭견대 무인의 목을 뚫었다. 유마은검의 움직임과 귀검의 검이 아귀를 맞춘 듯 착 들어맞았다.
검이 유마은검의 길을 막은 것인지, 유마은검이 검을 향해 달려든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정확했다.
귀검은 유마은검을 알고 있었다.
마검의 속도와 변화를 정확하게 꿰뚫어 봤다. 그리고 자신의 검을 상대방의 속도에 맞췄다.
쿵!
그는 공격하던 모습 그대로 쓰러졌다.
쒜엑!
귀검은 뒷 사내의 죽음이 신호라도 되는 듯 비호처럼 달려들었다. 그러자 낭견대도 즉시 반격했다.
“갓!”
일갈과 함께 늑대개를 잡고 있던 무인들이 일제히 목줄을 풀었다.
컹! 껑껑! 껑!
늑대개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하지만 먼저 베인 늑대개들처럼 무작정 물지는 않았다. 귀검의 주변까지는 확 달려왔지만, 그 후에는 더 달려들지 않고 짖기만 했다.
컹! 컹컹! 컹컹!
귀검이 움직이면 늑대개도 움직인다. 귀검이 공격하려고 하면 위험을 느낀 개는 즉시 물러선다. 하지만 다른 방향에 있던 늑대개는 즉시 달려든다.
미친 듯이 달려들지도 않지만, 물러서지도 않는다.
츠읏!
귀검이 검을 내렸다.
그러자 무슨 일인지…… 앞쪽에 있던 늑대개가 ‘으르릉!’ 이빨을 드러내는가 싶더니 와락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귀검을 물기 위해서 달려든 것이다.
늑대개는 귀검의 모습에서 방심을 엿본 듯하다.
쒜엑! 깨갱!
당연히 칼바람이 불었다. 늑대개가 내지르는 처절한 비명도 날카롭게 번져나갔다.
귀검은 허공에 떠오른 늑대개를 단숨에 베어냈다.
늑대개가 쏟아낸 피와 내장이 후드득 빗물처럼 쏟아졌다.
늑대개를 벤 귀검은 어느새 앞으로 달려들어서 탈혼음소를 흘리고 있는 무인 앞에 섰다.
“훅!”
상대가 너무 놀라서 탈혼음소마저 멈췄다.
언제 왔지? 이 거리를…… 어떻게 좁혔지? 이놈이 오는 동안 개들은 뭘 한 거야?
한순간에 수십 가지의 의문이 피어났다.
쒜에엑! 퍽!
검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머리를 찍었다.
아니, 머리에 닿는다 싶은 순간, 강한 용수철을 친 것처럼 퉁! 하고 다시 튕겨 올라갔다.
머리를 벨 생각이 없었나? 머리카락만 벨 생각이었나? 내가 이 정도로 검을 정교하게 사용한다는 자랑인가? 아니면 두타공(頭打功)처럼 머리에 검이 들어가지 않는 기공을 수련한 건가? 그래서 검이 튀어나온 거야?
어떤 생각도 맞지 않는다.
귀검은 이미 벨 만큼 베었다. 더 깊이 들어가면 검에 뇌수가 묻기 때문에 빼낸 것이다. 검에 기름기가 덕지덕지 묻으면 예리함이 손상되니까.
주루루루룩!
무인의 머리에서 붉은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리고 밑동 잘린 허수아비처럼 쿵! 쓰러졌다.
“투투자형(偷偷刺形)!”
낭견대 무인이 중얼거렸다.
귀검이 펼친 검형(劍形)을 투투자형이라고 한다.
검이 어떤 부위를 타격할 때, 어느 정도로 깊이 들어가야 절명시킬 수 있는지 정확하게 아는 것. 한 치만 덜 들어가도 죽일 수 없는, 딱 삶과 죽음의 경계에 걸쳐져 있는 검자(劍刺).
투투자형이라는 검형은 한두 번 정도 소일거리 삼아서 입에 담았다가 흘려버리는 검리(劍理)다.
특별하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격렬한 싸움이 벌어지는 와중에 굳이 이런 식으로 검을 쓸 이유가 전혀 없다.
투투자형으로 사람을 베면 검이 무뎌지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의 장점을 취하려고 일부러 투투자형을 수련하는 자는 없다.
귀검, 도대체 어떻게 된 놈이기에 이런 싸움판에서 투투자형까지 펼치나.
귀검은 튕겨 나온 검을 허공에 휘둘렀다.
휘릭!
검에 묻은 몇 방울의 피와 뼛가루가 흩뿌려졌다.
낭견대 무인들도 재빨리 포위망을 다시 구축했다.
잠깐 사이에 무인 두 명과 늑대개 한 마리가 죽었다. 늑대개는 전혀 쓸모가 없다. 낭견대 무인들이 수련한 마공도 귀검에게는 삼류 무공에 불과하다.
대책 없이 무작정 충돌하면 반드시 죽는다.
낭견대 무인들은 원래부터 지구전을 생각했다. 귀검하고 격렬하게 부딪힐 생각은 없었다.
그런 마당에 잠깐 부딪혀본 결과, 그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
귀검과는 정면 승부가 불가능하다. 너무 강하다.
삼재진으로 펼쳐서 오궁진을 보좌하던 무인 세 명이 진 속으로 빨려 들어왔다.
죽은 두 명 대신에 세 명이 보충되었다.
늑대개 두 마리도 즉시 귀검에게 달려와 짖어댔다.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지만, 그래도 여전히 발목을 붙들어 놓는 효과가 아주 조금은 있다.
컹컹컹컹! 스스스스스!
개들이 일차로 견제한 가운데 무인 여섯 명이 귀검을 에워싸고 빙빙 돌기 시작했다.
해자수는 허경을 보지 않았다. 오직 와선만 지켜봤다.
얼핏 이런 행동은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인다. 싸움을 벌이는 중에는 모든 신경을 예민하게 곤두세워야 한다.
감각을 최고 상태로 끌어올려야 한다. 긴장감을 놓지 말아야 하며, 상대방의 움직임을 자세히 살펴야 한다.
이 정도는 삼척동자도 아는 기본이다.
상대방에게 집중하지 못하면 찰나도 견디지 못한다. 즉시 격타당할 것이다.
상대에게 집중하지 않고 와선만 본다?
상대를 전혀 보지 않고, 상대방의 움직임을 헤아리지 않고 먼 산만 보는 것과 뭐가 다른가.
아니다. 와선만 본다는 것은 해자수만의 의식이다.
정작 해자수는 지극히 집중된 상태다. 해자수 자신이 그런 상태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집중한다는 사실 자체도 잊어버린 초집중 상태다.
몸 안을 보는 사람은 몸 밖의 상황이 한눈에 보인다.
일목요연(一目瞭然), 모든 움직임이 명확하게 보인다. 또한 예측도 가능해진다.
사람의 움직임은 빠르고 늦는 차이는 있지만, 일정한 곡선을 따라가게 되어 있다.
곡선의 흐름을 보게 되면 다음 움직임도 충분히 예상된다.
해자수가 쳐내는 검은 이런 흐름을 끊어버린다.
쒜에엑! 쒜엑! 쒜엑! 쒜에엑!
검광이 수없이 터진다. 검광이 섬광처럼 터진다. 난검난사가 해자수를 잡아먹을 듯이 훑어버린다.
난검난사는 사용하는데 신중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초식을 한 번 펼칠 때 무려 열다섯 번을 펼칠 수 있다. 그 말은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진기 소모가 크다는 말이 된다.
몸에 무리는 얼마나 많이 가겠나. 그런 무공을 끝없이 사용할 수는 없다.
처음에 펼쳐지는 한두 번의 타격이 가장 거셌다. 일차 타격만 빗겨내면 이차 타격은 좀 쉬워진다. 삼차, 사차…… 횟수를 거듭할수록 상대방의 초식이 환히 드러난다.
생기를 사용하는 무공은 상대방의 생기를 감지하기 때문에 강약의 변화가 훨씬 빨리, 자세히 파악된다.
톡톡톡! 톡톡!
철벽이 순식간에 사방을 에워쌌다. 숨이 탁 막힐 정도로 답답하게 몰아친다.
어디로 몸을 빼낼까?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
해자수는 당황하지 않았다. 생기는 철벽과 철벽 사이, 살짝 벌어진 틈을 잘 찾아낸다.
스으읏!
철벽 사이를 지나가면서 검을 쳐냈다.
꽈자자작!
검이 철벽을 갈랐다. 하지만 철벽은 베어지지 않는다. 그가 철벽을 갈라낼 때, 철벽은 두세 겹으로 겹친다.
검으로 갈라지지 않을 만큼 단단한 힘으로 버틴다.
해자수가 갈라낼 수 있는 철벽이 아니다.
이것 또한 당황하지 않았다. 격전을 이어가면서 검에 베이지 않는 철벽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니 그저 그러려니, 또 안 갈라졌겠거니 한다.
자신은 철벽과 철벽 사이로 몸을 빼낼 수 있는 것만 해도 다행으로 생각한다.
쒜에엑!
해자수는 벌어진 틈으로 몸을 빼냈다.
그러면서도 연신 철벽을 가격했다. 베지는 못하지만, 타격은 가한다. 타격할 만한 시간쯤은 있다.
몸을 빼내는 게 급급하지 않고 역공을 취할 수 있다.
솔직히 처음에는 철벽을 치는 것도 어려웠다. 몸을 빼내기 바빴다. 철벽이 너무 빽빽하게 사방을 에워쌌다. 자칫하면 철벽에 갇힐 것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제는 유유히 몸을 빼낸다. 그러다 보니 철벽이 보이고, 검으로 친다.
갈라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갈라지겠지 하는 마음으로 편안하게 타격한다.
휘이이이잉!
거친 회오리바람이 몸을 말아 올린다. 하늘 높이 띄웠다가 개구리 패대기치듯이 내던진다.
휘이익!
해자수는 강풍에 휩쓸려서 정신없이 날아갔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도 몸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환히 보인다. 강풍에 휩쓸린 몸과는 별개로 전혀 다른 세상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일어난다.
탁탁탁! 탁탁!
철벽이 사방을 둘러싼다.
해자수는 철벽이 어떤 형태로 공격해오는지 이미 알았다. 검 네 자루가 오른쪽 옆구리를 노린다. 하지만 한 자루는 뒤로 빠져있다. 마지막 순간에 가슴을 쑤셔올 것이다.
스으읏!
해자수는 몸을 왼쪽으로 기울였다.
그러나 강풍이 왼쪽으로 밀려 나갔다. 철벽을 피해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회오리바람이 밀려간다.
문득, 해자수는 매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뭐라고 할까? 밖은 무척 시끄러운데, 안은 절간처럼 조용하다고 할까? 사실은 정반대다.
안쪽에서는 굉장히 심한 회오리바람이 일어나고 있고, 그에 반해서 밖에서 펼쳐지고 있는 난검난사는 그저 가벼운 미풍 정도에 불과하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은 바깥 움직임보다 몇 배는 시끄럽고 거칠고 난폭하다.
그런 난폭함에 휘말려 있어서 바깥 움직임이 오히려 조용해 보인다.
정말 이상하지 않나. 강풍에 휩쓸린 자신은 오히려 조용하게 느껴지고, 겨우 미풍에 불과한 난검난사는 매우 요란하게 세상을 휘젓는다는 느낌이 드니.
스스스슷!
해자수는 철벽을 비켜 지나면서 검을 휘둘렀다.
철벽을 정면으로 치는 게 아니다. 옆으로 스쳐 지나면서 툭 건드린다.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철벽 모두를 베어내려고 노력은 한다. 나름대로 전력을 다한다.
쩌억!
드디어 철벽 하나가 갈라졌다.
“크윽!”
답답한 비명이 터졌다.
잘못 듣지 않았다. 분명히 철벽이 갈라지면서 고통을 꾹 눌러 참는 소리가 울렸다.
해자수는 비틀거리면서 물러나는 허경을 봤다.
그는 배를 타격당했다. 한 손으로 꾹 눌러 잡은 아랫배에서 붉은 피가 뭉클뭉클 쏟아졌다.
검이 가슴에서부터 시작해서 아랫배까지 쭉 그어 내렸다.
허경에게는 천만다행인 것이, 상처가 비교적 가벼운 편이다. 검이 깊게 들어가지 않았다. 싸움을 계속할 수는 없어 보인다. 그렇다고 죽을 정도로 심하지도 않다.
“큭큭!”
허경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그리고 핏물이 묻은 손을 들어서 혀로 쭉 핥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