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十四章 번개(翻個) (4)
혈천방주는 음문촌장을 데리고 산속 깊이 들어갔다.
혈천방은 호발귀에게 난자당한 후, 충령산(沖嶺山)에 새 거처를 마련했다.
음문촌장은 충령산이 어디에 붙어 있는 산인지 알지 못한다.
혈천방을 따라서 이동했고, 산에 도착해서는 방주가 떼어준 땅에서 살고 있다.
사실, 음문촌은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온종일 빈둥거리면서 쌀이나 축내는 것이 고작이다. 조그마한 공간에서 혈천방의 통제를 받지 않고 거처하는 데 만족한다고 할까?
음문촌장이 새로운 혈천방을 돌아다니는 것도 산에 들어온 후, 처음이다.
쫓겨온 주제에 무슨 좋은 일이 있다고 산속을 뻘뻘 거리면서 돌아다니겠나.
혈천방주는 풀어 헤쳐진 옷고름을 다잡을 생각도 하지 않고 휘적휘적 걸었다.
“요즘은 마음 놓고 취할 수 있어서 정말 좋아. 하하하! 혈마한테 그냥 한 방 맞으니까 아무 생각이 안 나요. 하하하!”
혈천방주는 술을 과하게 마셨다. 걸음걸이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다. 하지만 기분은 매우 좋은 듯 연신 큰 소리로 이야기를 들어놓았다.
“천살단주가 마공관을 제대로 썼어. 하하하! 우리 쪽 무공을 상당히 많이 수집한 거 같은데. 백열마공도 나오고…… 그런데 그런 거 제대로 알고 썼으면 좋을 텐데. 이놈들이 비급만 보고 수련하는 바람에 정수를 몰라.”
“그자들도 마공이라면 꽤 연구했을 텐데.”
“아니지, 아니지. 그런 식으로는 우리 무공의 정수를 제대로 알지 못하지. 우리 쪽 무공은 수련하는 게 아니야. 아! 죄송! 내가 천하의 음문촌장님께 무슨 말을 하고 있나. 하하!”
‘사람을 죽이면서 쌓는 무공……’
음문촌장은 혈천방주가 하고자 하는 말을 이해했다.
“우리 무공은 귀무살처럼 수련해야 하는데. 귀무살이 그런 건 참 잘했어. 하하!”
혈천방주와 연신 웃었다.
음문촌장은 묵묵히 듣기만 했다.
딱히 할 말이 없다. 이제 그만 음문촌으로 돌아가겠다는 인사를 하러 왔는데, 난데없이 끌려 나와 산책하고 있다.
혈천방주가 산속 깊숙이 들어갔다. 그런데,
척! 척! 척척! 척척!
사방에서 검례 올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 그래! 그래! 그래!”
혈천방주는 산에 대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놈들은 또 뭐야?’
음문촌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충령산 혈천방은 예전 혈천방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달라졌다. 예전보다 훨씬 강해진 것 같다. 충령산을 거니는 것은 처음이지만, 왠지 그런 느낌을 받았다.
저들…… 보이지 않는다. 산에 숨어 있는데 은신술이 대단하다.
물론 음문촌장은 저들을 봤다.
나무에 숨어 있는 자는 나무 색깔 옷을 입었다. 바위에 붙어 있는 자는 회색 옷을 입었다. 모두 자신이 숨어 있는 곳과 어울리는 보호색 옷을 입고 있다.
또한 숨어 있는 모습도 매우 은밀하다.
철저하게 준비하고 숨었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찾기가 힘들다. 만약 누군가가 숨어든다면 당장 발각될 것이다. 이들을 보지 못하고 지나칠 테니.
‘여기가 어딘데?’
음문촌장은 비로소 자신이 산책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혈천방주가 그를 모종이 비밀 장소로 데려온 것이다.
“열어!”
혈천방주는 커다란 바위에 대고 말했다.
꾸르르릉!
바위문이 열리면서 동굴 입구가 드러났다.
굉장히 은밀하고 정교한 장치이지만 놀랍지는 않았다. 혈천방의 기관토목술은 상당히 뛰어나다.
기진(奇陣)에도 능하다. 천망독진, 구십구미로진, 사멸강진 등등 혈천방이 보여준 기진만 해도 천하가 격동할 정도다.
혈천방에는 기진에 정통한 고수가 있다.
“여기가 참 재밌는 데야. 얼마나 재미있는지 깜짝 놀랄 테니까 기대 단단히 하라고. 하하!”
혈천방주가 기분 좋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은 깊었다.
중간중간 기관장치가 보인다.
‘호혈(虎穴)이군.’
음문촌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누구든 이 동굴에 함부로 들어오면 살아서 나가지 못한다. 십여 장을 걸어오는 동안 기관장치만 스무 개를 보았다.
침입자가 있다면 온갖 암기와 함정이 폭포처럼 쏟아져 내릴 것이다.
혈천방주는 동굴 깊숙이 들어갔다.
“응?”
음문촌장은 자신도 모르게 경악성을 내질렀다.
동굴 속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예전에 머물던 뇌옥을 상상했는데…… 이곳은 뇌옥이 아니다.
동굴 안은 굉장히 넓었다. 이삼백 명 정도는 한꺼번에 연무해도 좋을 만큼 넓었다. 물론 자연적인 동굴은 아니다.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파낸 자국이 있다.
사방에는 횃불이 박혀 있고, 공기 순환도 잘 되는지 동굴 특유의 텁텁한 냄새도 나지 않는다.
음문촌장은 사방을 둘러봤다.
책! 책! 책!
그렇다. 동굴은 거대한 서고다. 동굴 사방에 책들이 가득히 꽂혀있다.
동굴 한가운데는 글을 읽을 수 있는 의자와 책상이 놓여 있다. 그 옆에는 의자가 있어서 삼삼오오 모여서 한담을 나눌 수 있다. 당연히 사람도 있다. 책상에 앉아서 책을 읽는 사람, 웃으면서 잡담을 나누는 사람……
그들은 혈천방주를 보자 일제히 일어나서 허리를 숙였다.
“촌장님. 이놈들은 모두…… 가만? 몇이더라? 야! 너! 너희 모두 몇 명이지?”
“백이십삼 명입니다.”
허리를 숙인 자가 대답했다.
“백이십삼 명. 되게 많아. 이놈들 모두 백이삼 명이에요. 백이십삼 명. 하하하!”
“……”
음문촌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동굴 안에 있는 사람들을 예리하게 주시했다.
이들은 무인이 아니다. 무공을 수련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확실히 백면서생이다.
또 이들은 바깥출입을 잘 하지 않는다. 하나같이 얼굴색이 창백하다.
혈천방주가 그들에게 걸어가서 허리를 숙이고 있는 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놈들 되게 똑똑해. 이 대가리 하나는 정말 비상해. 자, 촌장님. 여기 있는 것들이 뭔 것 같아?”
혈천방주가 서가로 가서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책을 들추지는 않았다. 그저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뽑아본 것에 불과하다.
“이게 다 혈마에 관한 연구라는데, 난 뭐 아무리 읽어도 그게 그것 같아서.”
“뭐, 뭣!”
음문촌장은 깜짝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아니, 동굴 안에 있는 책들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책은 거의 만여 권에 이른다. 사방 벽에 빼곡히 꽂혀있다. 이것이 전부 혈마를 연구한 자료들이란 말인가. 혈천방 이 작자들, 그동안 무슨 짓을 하고 있었나?
“그 옛날…… 혈마가 자진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혈마에 대한 모든 것을 기록한 자료들인데. 내가 촌장님한테 제공했던 혈마도 기본 구조는 여기서 만들어졌으니까.”
“아!”
혈천방은 무려 이백 년 동안이나 혈마 연구를 해왔다.
음문촌이 구혼음소와 귀색혼령대법을 꽉 쥐고 있는 동안, 이들은 온갖 방법으로 혈마를 해부해왔다.
“지금 몇 개나 있어?”
혈천방주가 물었다.
“십삼 구 있습니다.”
“열세 개? 더 없어?”
“한 달 정도면 세 구 정도는 추가할 수 있습니다.”
“현재 열세 개, 한 달 후에 세 개 더.”
혈천방주가 음문촌장을 보면서 말했다.
음문촌장은 방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 뜬금없는 말인 것 같지만 확실히 알아들었다.
혈마가 되지 않은 미완성 혈마, 귀색혼령대법을 펼쳐야만 혈마가 될 수 있는 반혈마가 열세 명이나 있다. 그리고 한 달이면 세 명이 더 추가된다.
대답을 하는 자는 ‘구’라고 말했다. 반혈마를 시신으로 보는 것이다. 혈천방주는 ‘개’라고 말했다. 사람으로 보지 않고 물건으로 취급하고 있다.
“이것들, 음문촌의 귀색혼령대법이 아니면 혈마로 쓰지 못하는데, 이대로 버리기는 너무 아깝고.”
음문촌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물론 뱃속에서 손이 기어 나올 만큼 탐난다. 당장 인수하여서 혈마로 제련하고 싶다. 하지만 귀색혼령대법을 펼칠 만한 사람이 없다. 홀리를 데려오면 몰라도.
‘홀리!’
촌장은 홀리를 떠올렸다.
홀리는 절대로 귀색혼령대법을 펼치지 않는다.
“여기서 한 번 더 도전해 볼 생각이 있으면, 이것들 전부 넘겨주고. 원하면 여식도 데려올 수 있으니까.”
혈천방주는 역시 홀리를 염두에 두고 있다.
홀리가 없으면 이들은 무용지물이다. 모두 쓰레기장에 처박아놔도 주워갈 사람이 없다. 반혈마…… 얼마나 소중한 보물인가. 하지만 홀리가 없으면 쓸모가 없다.
혈천방주가 동굴 안을 걸었다.
음문촌장도 이끌리듯 방주를 따라서 걸었다.
“여식이 혈마하고 이미 뭐 부부지연은 맺은 것 같은데, 혈마한테 간택 받지 못했으니 버려진 것 같고. 쯧! 나 같으면 자존심 상해서 그런 남자는 버릴 텐데, 왜 쫓아다니는지 모르겠어.”
음문촌장은 혈천방주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동굴에 가득히 꽂혀있는 책들을 봤다. 그리고 서생들의 얼굴을 봤다. 이 사람들은 혈마에 대해서 꾸준히 연구해온 사람들이다.
더욱이 반혈마도 무려 열세구나 있다.
‘아깝다!’
음문촌장은 죽은 토초를 떠 올렸다.
토초를 죽이면 안 되는 거였다. 토초는 몸뚱이가 부서져 가면서도 귀색혼령대법을 전개했다.
혈천방주가 걸음을 멈추고 촌장을 쳐다봤다.
“솔직히 처녀라면 까탈스러워도 이미 뭐 알 것 다 안다면 귀색혼령대법도 치를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 이건 홀리를 비하하는 게 아니라, 홀리밖에는 대책이 없으니까 하는 말이고.”
“우리가 만든 혈마는 호발귀의 상대가 안 되는 것을 봤을 텐데. 다른 수라도 있나?”
“없지.”
혈천방주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대뜸 말했다.
“그런데도 혈마를 만들겠다고?”
“하하하! 진짜 혈마면 뭐해? 주치균한테 꺾였다면 이제 뭐 혈마의 한계는 드러난 셈이고. 굳이 뭐 완전한 혈마를 원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미완성 혈마로 족하다는 거군.”
“오히려 그게 더 좋아. 구혼음소로 조정도 할 수 있고. 토초가 만든 혈마가 딱 좋았어. 무적이면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움직이고, 딱 그 상태로만 부탁할까 하는데.”
혈천방주의 눈에 기광이 번뜩였다.
‘이놈 봐라?’
음문촌장은 혈천방주를 쳐다봤다.
혈천방주는 본인이 혈마가 될 생각이었다. 그것은 확실하다. 다만 이백 년 전 혈마 같은 방식은 아니다. 정신을 잃은 혈마는 원하지 않는다.
멀쩡한 상태에서 생기만 자유자재로 다루는 혈마를 원했다. 본인이 그런 혈마가 되어서 직접 무림을 제패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혈마가 무령환살공에 무너지자 생각이 바뀌었다.
혈마가 되어도 질 수 있다는 걸 확인했다.
무적이 되지 못한다면 굳이 위험을 무릅쓰면서 혈마가 될 이유가 전혀 없다.
혈마는 버린다.
현재, 천살단이 혈마를 쫓고 있으니 그들과 싸우라고 내버려 둔다. 그래서 꼼짝하지 않고 틀어박혀서 술만 마시고 있는 것이다. 남의 싸움을 구경하면서 기분 좋게.
그렇다고 손 놓고 있지도 않는다.
혈천방은 미완성 혈마를 최대한 많이 만든다. 그리고 무림을 칠 때, 그들을 앞세운다. 혈마를 도구로 사용할 생각이다. 그래서 반혈마를 헤아릴 때도 ‘개’라고 불렀다.
진작에 이런 생각이었다면 토초가 만들 혈마를 호발귀에게 던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모두 몇 명인가? 호발귀에게 그렇게 죽이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나. 그들 중 한두 명만 남겨놨어도 귀검 같은 초절정 고수조차도 상대할 수 있을 텐데.
‘홀리.’
음문촌장은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욕심은 끝없이 솟구치지만, 혈천방주의 제안을 받으려면 홀리를 데려와야 한다. 홀리가 반혈마와 몸을 섞으면서 귀색혼령대법을 치러야 한다.
“자식놈들과 상의해보지. 일곱째는 억지로 시키면 절대로 말을 듣지 않는 놈이라 설득을 해야 하는데…… 좋은 방법이 있는지 상의해보고 연락해줌세.”
“급한 건 아니니까 천천히 해도 돼. 여긴 음문촌에 개방해 놓을 테니까 언제든 와도 좋고. 하하!”
혈천방주가 웃었다.
혈마에 대한 미련을 버린 지는 오래다. 하지만 다시 혈마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거기에 혈마에 대해서 기록한 자료가 이렇게나 많다.
일자, 이자, 삼자, 사자, 육자는 동굴 서가를 보면서 할 말을 잃었다.
“홀리를 데려와야겠습니다.”
일자가 말했다.
“그 아이가…… 순순히 올 아이가 아니지.”
“여기 있는 책 중 몇 권만 가지고 나가면 됩니다. 이 책들을 보여주는 거죠. 이런 게 만 권 이상 있다. 어쩌면 혈마를 정상으로 돌려놓을 수도 있다. 지금 혈마는 제 여자들도 알아보지 못하지 않습니까. 가능성이 있습니다.”
일자가 차분히 말했다.
“흠! 그렇군. 그러면 올 수 있겠어.”
홀리는 구혼음소의 비밀을 알고자 호발귀를 떠나 아비 품으로 왔다. 아비에게 걸려들면 어떤 곤욕을 치를 줄 알면서도 왔다. 그리고 죽기 직전까지 시달렸다.
이번에도 그럴 것이다. 호발귀를 위한 일이라면 모든 걸 거는 아이니까.
“모두 짐을 이리로 옮기고. 일자, 넌 홀리에게 다녀와. 책은 십여 권 정도 가져가. 넉넉히 가져가서 보여줘. 난 혈천방주를 만나고 오지. 후후!”
음문촌장의 눈가에 활기가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