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十四章 번개(翻個) (2)
“해자수님이네?”
모닥불을 보면서 누워있던 등여산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뭐? 정말?”
홀리도 일어나 앉았다.
등여산의 생기가 해자수의 생기를 찾아냈다.
생기는 존재를 감지한다. 존재하면 감지하고. 존재하지 않으면 감지하지 못한다.
매우 단순한 이치다.
생기는 이 단순한 이치를 철저하게 따른다.
다만 어느 정도의 거리까지 파악할 수 있느냐의 문제는 다른 문제다. 호발귀에게 사정권이 있듯이, 세 사람에게도 사정권이 있다.
등여산은 해자수를 알아챘고, 홀리는 아직 알지 못했다.
등여산의 사정권이 홀리보다 멀다.
“아! 정말 해자수네!”
홀리가 뒤늦게 말했다.
이제는 홀리도 해자수의 생기를 감지했다.
등여산과 홀리의 사정권은 대략 세 호흡 정도 벌어진다. 하지만 등여산은 강한 생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다.
홀리는 등여산보다 사정권이 좁다는 것을 알지만, 불편한 점을 못 느낀다. 전혀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생기는 무공이 아니다.
무공처럼 의지로 펼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솔직히 생기를 어떻게 활용하는지 알지 못한다. 무공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세 사람은 운 좋게 자연의 기운 중 어느 한 부분을 얻어서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해자수! 여기야!”
홀리가 소리를 빽 질렀다.
쒜엑! 쒜에엑! 쒜에엑!
공기를 가르는 파공음이 들려왔다.
“생기다. 진기보다 생기가 빠를 거야.”
“같이 달릴 때는 몰랐는데, 무척 빠르네. 우리가 이렇게 빨랐나? 이건 발바닥이 땅에 닿지도 않겠는데?”
등여산이 파공음에 주의를 기울이며 말했다.
쒜에엑!
해자수가 신형을 날려서 절터로 들어섰다. 그리고 알려주지도 않았는데, 그녀들이 머무는 지하실로 쑥 들어섰다. 해자수도 그녀들의 생기를 감지한 것이다.
“아이고! 부처님 손바닥 안에 오공일세. 멀리를 못 가요. 멀리를.”
해자수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잘 찾아왔네?”
홀리가 활짝 웃으면서 반겼다.
“아니 그렇게 흔적을 뚜렷하게 남겨놓고 다니는데, 누가 못 찾습니까? 흔적 같은 건 잘 좀 숨기고 다니시던가.”
“어머! 그래요? 잘 숨긴다고 숨겼는데.”
“아! 책사님이 숨기셨어요? 전 또 아씨가 숨긴 줄 알고. 아, 그럼 취소. 잘 숨기셨습니다.”
“호호호!”
홀리와 등여산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역시 해자수가 오니까 웃는 일이 생기는 것 같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직도 이러고 있어요?”
“잠깐 손 좀 댔다가 지옥 구덩이에 빠지는 줄 알았어. 이제는 겁나서 손도 못 대.”
홀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해자수가 온 후에는 생활하기가 한결 편해졌다.
일단 먹을 걱정, 잘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 누가 쫓아오는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해자수는 낮이면 밖에 나갔다가 밤이 되면 돌아온다.
그동안 주변을 탐문한다. 천살단 동정을 살핀다. 만일의 경우, 퇴로도 모색한다.
그는 두 여인이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문제를 들춰냈고, 깔끔하게 해결하는 중이다.
두 여인은 자연히 호발귀에게만 집중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계집아.”
“이제 계집이라고 하지 않으면 안 돼?”
“듣기 싫어?”
“너무 거칠어.”
“야!”
“왜?”
“호호호!”
홀리가 깔깔대고 웃었다.
“야는 괜찮고 계집은 싫고…… 흠! 알았어. 내게 생각이 하나 있는데, 해볼래?”
“무슨 생각?”
“우리 어차피 지옥 구덩이에 빠져봤잖아. 이제는 그게 어떤 느낌인지도 알고.”
“그래서?”
“지옥 구덩이라는 게 뭐 별거 아니라는 거지. 환상이니까. 환상도 진해지면 죽으려나?”
“뭔데? 말 돌리지 말고 말해봐. 지금 너답지 않은 거 알지?”
“나 다운 게 뭔데?”
“야!”
“뭐?”
홀리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늘 침착하던 등여산이 갑자기 ‘야!’라고 부르니 상당히 신선한 충격이다.
사실, 등여산은 얌전하지 않다. 늘 천방지축이었다. 뭐 하나에 빠지면 다른 것은 일절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도 그런 성격은 맞다. 다만 주위에 어지럽힐 게 없어서 본래 성격을 볼 수 없었던 것뿐이다. 지금은 그런 성격 중 일부가 툭 튀어나온 것이고.
“빨리 말해. 뭔데?”
“너어?”
“빨리 말하라니까!”
“호호호! 좋아. 우리가 천지관통을 했을 때, 너와 나 동시에 지옥을 맛봤어. 다시 말해서 천령혈과 용천혈이 하나로 이어졌다는 거지. 같은 기운이 흐른 거야.”
“그야 당연하지. 혈기는 하나잖아. 호발귀 몸이고.”
“우리 음문촌에 착롱승명(捉弄繩命)이라는 게 있어.”
“좋지는 않은 것 같은데?”
등여산이 미간을 찡그렸다.
줄 위에 매달린 목숨을 잡고 희롱한다. 분명히 좋지 않은 방법인 것 같다.
“맞아. 좋지 않아. 계속 말해?”
“말해봐.”
“사실 이건 주화입마를 깨는 방법이야. 하지만 우리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주화입마에 걸렸는데 죽든지 깨어나든지 양자택일을 해야 할 때, 그럴 때나 사용하는 방법이야.”
“어떻게 하는 건데?”
“우리 음문촌 무공은 주화입마에 특색이 있어. 전신 경맥이 굳어버리는 거야. 몸이 그냥 돌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려서 온갖 짓을 다 해도 풀리지 않아.”
‘호발귀 상태!’
등여산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지금 홀리는 가볍게 말하는 게 아니다. 문득, 생각나서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음문촌 주화입마에 그런 것이 있다면, 홀리는 호발귀와 같은 상태를 자주 지켜봤을 것이다. 그녀가 지금 말하는 착롱승명이라는 것도 많이 해봤을 것이고.
호발귀를 보면서 계속 착롱승명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지금에서야 말하는 것은 착롱승명의 성공 가능성이 매우 희박해서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저간의 사정이 한눈에 읽힌다.
홀리가 말했다.
“이럴 때 마지막으로 한 가지 방법을 사용해. 우리가 했던 대로 두 사람이 천지관통을 해. 천령혈, 용천혈을 잡고 진기를 주입해. 물론 그래도 굳어진 경맥은 요지부동, 꼼짝도 안 해.”
“그래서?”
홀리가 나뭇가지를 집어 들었다.
“칼을 불에 달궈서 여길 지지는 거야. 다른 사람이 푹 쑤시는 거지. 그러면 어떤 경화도 깨져. 그때 천지관통이 들이치는 거야. 위아래서 단전으로 꽝!”
홀리가 손에 든 나뭇가지로 등 뒤 삼초혈(三焦穴)을 가리켰다.
삼초혈은 기(氣)가 오르내리고, 나가고 들어오는 승강출입(乘降出入) 통로다. 전신의 기(氣)를 주관하고 운행을 조절한다.
삼초혈은 망가져서는 안 된다. 삼초혈이 망가지면 몸의 신진대사가 정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장 운기에 이상이 생겨서 폐, 비장, 신장에 이상이 생긴다. 진액대사(津液代謝)가 원활하지 못해서 체내에 수액이 넘쳐난다.
자칫하면 목숨이 떨어진다.
“이거 해서 얼마나 성공했어?”
“한두 명?”
“몇 명 정도 해봤는데?”
“글쎄? 한 백 명?”
“거의 안 된다는 거네?”
“우린 지옥 구경 한 번 더 하는 거고, 호발귀는 어차피 몸이 망가질 대로 망가졌잖아. 파신금령술도 해제하지 못한 것 같고, 흑포부시단도 들어있고. 여기서 더 뭘 망설이나 싶어서.”
“하자.”
등여산이 말했다.
“뭐?”
“하자고. 네 말대로 뭘 망설여. 그럼 단검으로 삼초를 찌르는 사람은 해자수님?”
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지?”
“조심해서 찌르라고 해야지, 뭐.”
조심? 어림도 없는 말이다. 등여산은 ‘칼을 불에 달군다’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강력한 화기(火氣)와 도기(刀氣)로 딱딱하게 굳은 경화를 깨는 것이다.
불에 달군 칼로 삼초혈을 지지면 경혈이 깨진다.
‘그래. 파신금령술도 해제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차피 잘못돼봤자 칼 한 번 더 맞는 거고. 미안. 그래도 우리 최선을 다하고 있어. 잘못되어도 용서해줘.’
등여산은 호발귀를 보면서 방긋 웃었다.
해자수가 단검을 모닥불 위에 얹었다.
단검을 달궈지기 시작했다.
“이거 정말 할 겁니까?”
해자수가 못내 불안한 듯 두 여인을 쳐다봤다.
“불안해?”
“불안하죠. 내가 이걸 모릅니까? 솔직히 이거 해서 성공한 적도 없잖아요.”
“있어. 한두 번.”
“아이구야!”
해자수가 손으로 이마를 탁! 쳤다.
“그냥 해. 우리도 불안하니까.”
홀리가 호발귀의 용천혈을 슬슬 문지르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두 분이 비명을 지르면, 그때 사정없이 콱! 쑤셔라 이 말씀이죠?”
“사정없이는 빼고.”
“칼로 쑤시는데 사정을 어떻게 담아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빨리 하쇼. 나도 할 테니까.”
단검이 빨갛게 달궈졌다.
등여산과 홀리는 해자수의 말에 맞춰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생기를 일으켰다.
해자수도 눈을 반개하고 생기를 준비했다.
해자수는 생기가 아니라 진기를 쓰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호발귀 몸이 진기를 거부한다. 단검에 진기를 담아도 크게 효과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해자수도 생기를 쓰기로 했다. 천지관통이 먼저 일어나고, 해자수가 착롱승명을 일으킨다.
“학! 아……”
등여산이 먼저 경악성을 토해냈다.
그녀 스스로 비명을 참고 있다. 지금은 비명을 크게 질러도 되는데, 본능적으로 참는다.
확실히 홀리보다 등여산의 생기가 훨씬 더 깊다.
“크으으윽!”
홀리는 고통을 억지로 참아내는 듯한 신음을 쏟아냈다.
홀리도 등여산과 마찬가지로 비명을 참았다.
원래 약속은 비명을 지르는 것인데, 두 여인 모두 참는다. 두 여인은 이미 천지관통이나 착롱승명을 잊어버렸다. 오직 혈기를 맞이해서 사투를 벌일 뿐이다.
‘지금!’
해자수는 호발귀 삼초혈에 준비된 단검을 푹 쑤셨다. 순간,
“쿠아아아악!”
죽은 듯이 누워있던 호발귀가 소름 끼치는 비명을 토해냈다.
처절한 저항, 발버둥, 사슬에서 벗어나려는 악마의 몸부림?
그리고 모든 비명이 일시에 뚝 멈췄다. 등여산도, 홀리도, 호발귀도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호발귀는 다시 혼절에 잠겼다.
홀리와 등여산은 거센 반탄력에 튕겨서 뒤로 나가떨어졌다.
해자수도 마찬가지다. 단검을 찌르자마자 황소에게 들이 받히는 충격을 받고 붕! 나가떨어졌다.
쿵! 쿵쿵!
바닥에 거칠게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해자수는 벌떡 일어났다. 충격은 크지 않다. 그는 재빨리 호발귀에게 다가가서 등에 꽂힌 단검을 봤다.
지직! 지지직!
단검이 살을 태우고 있다.
해자수는 즉시 단검을 뽑았다. 그러자 여지없이 핏물이 흘러나왔다. 불에 달궈진 단검이 상처를 지져서인지 쏟아지는 피의 양은 많지 않았다.
해자수는 급히 금창약을 꺼내 상처에 발랐다.
어느새 다가온 홀리와 등여산이 호발귀를 진맥했다.
한 사람만 진맥해도 되는데, 두 여인이 팔 한 쪽씩 움켜잡고 동시에 진맥했다.
호발귀가 괴성을 토해냈다. 이런 반응은 혼절한 이후 처음이다.
“맥이 뛰어!”
등여산이 말했다.
“정말!”
홀리도 반색했다.
맥이 뛴다. 정말 뛴다.
“살았네. 호호호호!”
홀리가 활짝 웃었다.
“이거 마냥 기뻐할 노릇이 아닌데. 방금 그 괴성 생각 안 나요? 괴성. 이거 또 혈마로 깨어나면 어떡하지? 또 저번처럼 무작정 쫓기는 거야?”
해자수가 찬물을 끼얹었다.
“그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해요. 일단 깨어나는 것만 해도 어디에요. 영원히 숨을 못 쉴 줄 알았는데.”
등여산이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