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十三章 요요무기(遙遙無期) (5)
등여산은 즐거운 마음을 떠올렸다.
기쁨이 전신에서 회오리친다. 처음, 생기 맛을 봤을 때, 이렇게 기쁘다가는 미쳐서 죽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생기를 떠올릴 때마다 너무 기뻐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기분이 든다.
깔깔깔 미친 듯이 웃고 싶다. 어찌나 춤을 추고 싶은지 어깨가 들썩거린다. 한데,
팡!
갑자기 그녀의 즐거움이 싹 가셨다.
‘엇!’
등여산은 깜짝 놀랐다.
생기를 운용하던 중에 갑자기 기분이 나빠지거나 불쾌해지는 경우가 왕왕 있다.
적이 나타났을 때는 항시 그래왔다.
하지만 마음 일부분만 그런 식으로 떨어져 나갔다. 희열 전체가 갑자기 싹 사라진 적은 없었다.
아니, 생기를 느끼던 초기에는 그런 적이 많았다.
하지만 그때는 생기도 사라졌다. 희열이 있으면 생기도 있고, 희열이 없으면 생기도 푹 꺼졌다.
지금은 전혀 다른 느낌이다.
생기는 여전히 존재한다. 확실히 맑은 정기가 몸 전체에 퍼져있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희열은 일시에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아주 어두컴컴한 나락에 떨어진 듯 주위가 온통 시커멓게 변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마치 천 길 나락, 암동 속으로 뚝 떨어진 듯 세상이 캄캄해 보이기는 처음이다
그녀는 해자수가 느낀다는 생기처럼 몸이 어둠 속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뭐지?’
마음속에서 희열 대신 불안감이 싹텄다. 그런데도 생기는 무너지지 않았다. 여전히 생기는 흐른다. 그때,
우하하하하! 우아아왁!
암동 속에서 거대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악!”
등여산은 너무 놀라서 고함을 내질렀다.
무엇인가 어둠 속에 불쑥 솟구치더니 그녀의 다리를 확 낚아채려고 했다.
“아아악!”
등여산은 자신도 모르게 비명을 쏟아냈다.
아직 어둠 속에 있는 존재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잡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와락 치밀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겠지만, 이곳에서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아아아악!
등여산은 거세게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다가 화들짝 눈을 떴다.
”아아악!“
맞은 편에서 홀리가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다.
등여산은 급히 홀리에게 갔다. 그리고 용천혈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을 힘껏 빼냈다.
호발귀에게서 홀리를 떼어냈다.
순간, 홀리가 눈을 번쩍 떴다.
“내 다리! 내 다리!”
홀리는 잔뜩 공포에 젖은 눈으로 자기 다리를 쳐다봤다.
다리는 멀쩡하다. 아무렇지도 않다. 믿지 못해서 살짝 꼬집어보기도 했다.
“무슨 일이야?”
“내 다리가……”
“다리가 왜?”
“휴우! 내 다리가 갑자기 가루가 돼서 흩어지는 거야. 이런 경험은 처음이야. 진짜로 가루가 되는 것 같았어. 큰 맷돌에 다리를 집어넣고 갈아버리는 것 같았어.”
다소 마음을 진정한 홀리가 차분하게 말했다.
“나도.”
“너도?”
“나는 깊은 나락. 어딘지 알 수 없는 공간으로 떨어지는데, 누군가 내 발을 잡아채는 거야.”
“넌 참 웃겼겠다. 가슴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는데, 머리는 공포로 물들고.”
“아니, 기쁨이 사라지고 어둠만 보였지. 생기는 여전히 유지되었고.”
“가만! 그러고 보니 나도 그렇네. 지면 응집력은 사라졌어. 두 발이 갈렸으니까. 그런데도 생기는……”
홀리가 말하다가 말고 등여산을 쳐다봤다.
두 사람 모두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자신들이 생기라고 느꼈던 것들이 사실은 생기가 아니었다. 그런 것이 없어도 생기는 여전히 유지되었다.
희열이 없어도, 지면 응집력이 없어도.
물론 이런 일을 호발귀가 만들어 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호발귀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떤 작용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몸 안에 있는 혈기는 악마가 되어서 그녀들을 쫓아왔다. 그렇다. 혈기가 이런 일을 만들었다.
두 여인은 호발귀를 쳐다봤다.
호발귀는 여전히 죽은 듯이 누워있다.
“아! 어떡하지? 이 사람 아무래도 혈마가 되어 버렸나 봐.”
홀리의 말에 등여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도 같은 생각이다. 어쩌면 호발귀는 지금이 가장 편안한 상태인지도 모르겠다. 눈을 뜨면 다시 혈기에 휘둘려서 살상을 탐할지도 모르니까.
* * *
해자수는 개울에서 발가벗고 몸에 묻은 핏물을 닦아냈다.
몸을 닦고 닦아도 핏물이 여전히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아서 께름칙했다.
“으!”
해자수는 몸을 닦다 말고 부르르 치를 떨었다.
상대를 잔인하게 죽인다는 것…… 정말 사람이 할 짓이 못 된다. 단검으로 상대를 찌르는 도중에 핏물이 튀어서 옷으로 스며들었다. 처음에는 한두 방울이었지만, 곧 빗물처럼 스며들었다.
그때의 축축한 느낌을 지금도 기억한다.
핏물을 뒤집어쓴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는 실제로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해자수는 개울물에 머리를 감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 계속 머리를 감아도 핏물이 여전히 흘러나왔다. 정말 핏물이 흘러나오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직도 완전히 씻기지 않은 것 같다.
“에라, 모르겠다.”
첨벙!
해자수는 아예 개울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흐르는 물에 몸 전체를 맡겼다.
혈마가 이런 살인을 하고 있구나.
새삼스럽게 혈마의 무서움이 느껴졌다. 이런 살인을 하고도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더 무서웠다. 아니, 계속 이런 살인을 한다는 것이 소름 끼쳤다.
해자수는 옷도 깨끗이 빨아서 널었다.
옷도 몇 번을 빨았지만, 핏물이 빠지지 않아서 선홍색이다.
옷을 입기가 싫다
단검도 물에 씻었다. 원래 병기는 물속에 담그는 법이 아닌데, 개울에 집어넣고 싹싹 씻어내지 않으면 진득한 핏물이 씻기지 않을 것 같았다.
해자수는 근 반 시진에 몸을 씻었다.
아마도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긴 목욕일 것이다.
“이 양반들이 어디로 갔을까?”
해자수는 주변 지형을 살폈다.
생기는 풀었다. 생기를 끌어올린 채 추격할 수는 없다.
뒤를 추격하는 것은, 그것도 거리를 멀리 띄운 채 뒤를 추격하는 것은 느낌보다는 추격술에 의존해야 한다.
해자수는 다시 은인문 술사로 돌아갔다.
주변을 살피고 생각을 한다.
“개가 쫓아오니까 분명히 강 쪽으로 갔을 것이고, 싸움이 이쪽에서 벌어졌으니 저쪽으로.”
대충 등여산과 홀리가 뛰어갔을 법한 방향이 그려졌다.
쒜엑!
해자수는 신형을 쏘아냈다.
급하게 서둘지 않는다. 강을 찾는 것이 문제이지, 강을 찾기만 하면 두 여인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그녀들은 강을 건너간 외에는 느리게 나아갈 것이다.
어쩌면 강을 건너자마자 은밀한 안식처를 구해서 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틀림없이 쉬고 있다.
호발귀 상처가 매우 급하다.
생기를 일으켜서 조금 빨리 달렸다고 당장 상처가 터져서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런 상태로는 멀리 이동하지 못한다.
해자수는 신형을 쏘아내면서도 땅을 주의 깊게 잘 살폈다.
호발귀가 또 피를 흘렸을지 모른다.
이번에는 등여산도 한 번 경험이 있으니 핏물이 떨어지는 즉시 지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우는 행동을 하는 동안에 풀을 짓밟는다. 나무를 꺾을 수도 있고.
어쨌든 사람이 움직였다는 흔적이 드러난다.
“용케도 잘 지우고 가셨네.”
해자수가 중얼거렸다.
해자수는 산길을 타는 동안, 사람이 이동했다는 흔적은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는 두 여인이 어느 쪽으로 갔는지 확신한다.
“자! 이쯤 왔으면 위로 올라가서 강이 어디 있는지 봤을 것이고.”
쒜에엑!
해자수는 산정을 향해 치달려 올라갔다.
높은 데 올라가면 멀리 드넓은 산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강이 어느 쪽에 있는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다. 더불어서 도주 방향도 정해진다.
늑대개의 추격을 피하려면 무조건 강을 건너야 한다. 오직 강물만이 냄새를 없애준다.
해자수는 어딘지 모를 산정으로 올라섰다.
“하! 경치 좋다.”
해자수는 유유히 사방을 살펴봤다.
역시 예상했던 대로 강이 보였다.
“이럴 줄 알았다니까.”
두 여인은 망설이지 않고 저 강을 건너간다. 다만 사람들 눈을 피할 것이다. 그러면 일단 마을과 접한 곳은 무조건 피한다.
사람이 오가는 관도나 나루터도 피한다. 배가 묶여 있는 곳에도 사람이 있을 수 있다. 그 부분도 제외한다.
“저쪽으로 가셨군.”
해자수는 등여산과 홀리가 건너갔을 법한 곳을 찾아냈다.
강 앞쪽은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하지만 대부분 갈대숲이 펼쳐져 있다.
아마도 곳곳에 늪이나 진흙 수렁이 함정처럼 도사리고 있지 않을까 싶다.
사람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다.
도망자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길이다.
해자수는 망설이지 않고 산에서 내려갔다.
“흠! 호발귀를 데리고 강을 건넌다. 그러면 무조건 뗏목이지. 아씨 같으면 배를 훔쳤겠지만, 책사님이 계시니…… 뗏목을 만들더라도 나무를 베면 흔적이 드러나니까 자잘한 나무를 묶어서 뗏목을 만들었을 거야.”
해자수는 주위를 돌아봤다.
“버려진 나무로 뗏목을 만들자면…… 발자국이 남지 않을 수 없어.”
해자수는 강변으로 갔다. 그리고 산책을 하듯 유유히 강을 따라 걸었다.
한참을 걷자, 절벽이 나타났다. 절벽 위에는 숲이 있다. 소나무가 숲을 이루었다.
쏴아아아아! 철썩!
거센 물결이 절벽을 후려쳤다.
해자수는 그곳에서 두 여인의 흔적을 찾아냈다.
발자국을 깔끔하게 지웠지만, 은인문 술사의 눈에는 너무도 뚜렷이 보였다.
발자국을 지은 흔적!
발자국을 찾지 않는다. 무엇을 지운 흔적을 찾는다. 그것이 바로 술사가 보는 흔적이다.
“아유! 아씨들, 이런 것까지 지우셔야지.”
해자수는 잎이 많이 달린 소나무 가지를 꺾었다. 그리고 뒤로 걸어가면서 흔적을 살살 쓸어 나갔다.
자신의 발자국과 두 여인의 흔적을 깨끗이 지운다.
은인문 술사는 어떤 곳이라도 갈 수 있어야 한다.
길이 없는 곳이라면 길을 낸다. 강, 바다처럼 물이 있는 곳도 갈 줄 알아야 한다.
수영은 필수다.
해자수는 아주 뛰어난 수영 실력을 갖추고 있다.
자랑삼아 하는 말이지만 물속에서 밥도 먹고, 볼일도 보고, 잠도 잘 수 있다.
쉬잇! 첨벙!
해자수는 거침없이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쓱! 척! 스으읏! 척!
두 손을 유유히 움직여서 헤엄치다가 기분이 내키면 물속으로 온몸을 잠갔다.
꾸르르륵!
물속에서 자맥질로 사오 장을 쭉 나간다. 그리고 다시 물 위로 머리를 내밀고 숨을 들이쉰다.
“하아!”
해자수는 큰 숨을 토해냈다.
정말 살 것 같았다.
강물에 뛰어드니 비로소 몸에 묻은 핏덩이들이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개울에서 몸을 씻을 만큼 씻었지만 그래도 떨어지지 않고 달라붙어 있던 끈적끈적함이 말끔히 씻기는 기분이었다.
“하! 혈마가 되는 거, 두 번은 못 할 노릇이다. 난 못해. 이제는 안 해! 어유!”
해자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강을 건너갔다. 하지만 강변으로 곧장 올라서지는 않았다.
얕은 물길을 따라서 하류 쪽으로 흘러 내려갔다.
얼굴을 하늘로 돌리고 등을 물속에 잠그고…… 배영으로 천천히 물살에 떠밀려갔다.
등여산과 홀리도 곧바로 강변에 올라서지 않았다. 뗏목을 타고 하류로 내려가다가 출발한 곳과 뚝 떨어졌다 싶은 곳에 도착해서야 뗏목을 댔을 것이다.
그녀도 개들이 뗏목을 만든 지점까지 쫓아올 것은 예상한다.
만약 저들이 개를 끌고 강을 건너오면 당장 냄새가 드러난다. 그러니 강을 따라서 멀리 내려가는 것은 당연하다.
‘적어도 십 리 이상.’
해자는 물길을 따라서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딱 한 가지만 찾았다. 바로 뗏목을 풀어헤친 흔적이다.
뗏목을 만들어서 강을 건너려면 작은 나무만 모아서는 안 된다.
큰 나무도 있어야 한다. 그리고 큰 나무는 쉽게 떠내려가지 않는다. 어떤 나무는 떠내려가지 않고 얕은 강물에 버려져 있을 수도 있다.
두 여인은 추격에 대해서 깊게 알지 못한다.
강물에 잠긴 나무는 뗏목을 푼 장소다.
추격술을 배운 자들에게는 가장 기본이지만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저 눈에만 안 보이면 모든 흔적을 다 지웠다고 생각한다.
해자수는 강물을 따라 내려갔다.
“오! 우리 아씨, 우리 책사님! 거참!”
해자수가 혀를 끌끌 찼다.
생각이 맞았다. 얕은 강에 큰 나무 두 개가 떠내려가지 않고 쓰러져 있다.
누가 뗏목을 해체했는지 모르겠지만 마음이 급했을 것이다.
누가 보지 않을까? 호발귀에게 이상이 있지 않을까? 이런 조급함이 실수에 실수를 보태고 있다.
이거는 실수라고 할 수가 없다. 추격술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당연하다. 나무가 물에 잠겨서 보이지 않으면 흔적을 지웠다고 생각하는 게 맞다.
해자수는 나무를 들어서 강심 쪽으로 힘껏 던졌다.
쉬잇! 풍덩!
나뭇가지가 강물에 떨어졌다. 아니 떨어지는가 싶더니 둥실 떠올라 하류로 흘러 내려갔다.
모든 나무를 힘껏 던져서 떠내려가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바위라든가 이런 것에 걸리더라도 흔적을 찾아내지 못한다.
쉬잇! 풍덩!
또 하나의 나뭇가지를 던졌다. 그리고 나무가 눕혀져 있던 강바닥도 살살 발을 문질러서 흔적을 지웠다.
그는 강독으로 올라섰다.
발자국 정도는 남아도 상관없다. 모르는 사람들은 발자국조차 남기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헛된 심력 낭비다.
강변은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이다. 사람 발자국이 있다고 해도 누구 발자국인지 알지 못한다.
특히, 해자수처럼 혼자 걷는 발자국은 오히려 추격을 따돌릴 수도 있다.
무리를 지어서 이동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들이 쫓는 사람이 아닐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자! 여기까지는 찾아왔고. 다음은 어디로 갈까요?”
해자수가 주위를 둘러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