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十三章 요요무기(遙遙無期) (4)
“강이야!”
홀리가 큰 짐을 덜은 듯 홀가분하게 말했다.
이제 강만 건너면 늑대개의 추격에서 벗어난다. 강을 건넌다고 해서 추격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한숨 돌릴 수 있는 여지는 있다.
“하! 저기 나루터가 있는데 배를 이용하지 못하네. 호호! 재미있는 일이야.”
홀리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두 여인은 모든 행적을 숨기고 움직였다.
“배를 훔쳐 올까? 도강한 후에 흘려보내면 되잖아.”
홀리가 나루터에 있는 배를 보면서 말했다.
“그러지 말고 그냥 뗏목을 만들자. 아예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게 더 좋잖아.”
“그래. 그게 편하면 그렇게 하지 뭐.”
홀리가 활짝 웃었다.
홀리와 등여산은 나무를 모아서 뗏목을 만들었다.
“없지?”
“없어.”
두 여인은 서로 확인했다.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살핀다. 추격자를 염려하는 게 아니다. 누가 되었든 사람이라면 무조건 피한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을 때, 강을 건넌다.
물론 이렇게 움직여도 누군가는 보게 되어 있다.
우연히 산책 나온 사람이나 소를 몰고 가는 목동이 볼 수도 있다. 사람 사는 마을을 지나가면서 완전히 숨기는 정말 어렵다.
하지만 두 여인은 누구도 지켜보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그녀들은 생기를 감지할 수 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은 감지하지 못한다. 존재하면 저절로 감지가 된다.
물론 생기 감지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다. 눈은 백 장 밖에 있는 물체도 볼 수 있지만, 생기는 겨우 십여 장, 혹은 이십여 장만 파악한다.
눈으로 백 장을 확인하고, 생기로 다시 한번 살폈다.
“가자.”
두 여인은 뗏목에 호발귀를 실은 채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차악! 차악!
물살이 뗏목을 두들겼다.
호발귀는 뗏목 위에 죽은 듯이 누워있다. 몸에 난 상처는 많이 아물었다. 피도 더는 흘리지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혼수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이 사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등여산이 호발귀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걸.”
홀리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이상해. 전혀 살이 빠지지 않아. 꼭 잘 먹고, 잘 자고, 잘 쉰 사람 같아.”
“그러고 보니 그러네.”
홀리도 신기한 듯 호발귀를 쳐다봤다.
호발귀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미음을 쑤어서 억지로 입 안에 넣은 적이 있는데, 삼키지를 못해서 다시 헹궈냈다. 자칫하면 미음이 식도에 걸려서 숨을 막아버릴까 봐 급하게 헹궈냈다.
그 후부터는 입안에 물만 흘려준다.
하지만 호발귀는 물도 마시지 않는 것 같다. 넣어주는 족족 흘린다. 거의 태반은 입 밖으로 새 나오는 것 같다.
그래도 목이라도 축이라고 계속 물을 집어넣기는 한다.
그런데 등여산 말마따나 정말 살이 빠지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 이 정도로 굶었으면 바짝 말라서 피골이 상접했을 텐데, 호발귀는 여전히 살에 탄력이 넘친다.
정말로 잘 먹고 편히 쉰 사람 같다.
혈색도 상당히 좋아졌다. 상처가 나아서인지 혈색이 제 색깔로 돌아왔다.
도대체 호발귀는 무슨 일을 겪고 있는 것일까?
“이 정도 흘러왔으면 된 것 같아. 저쪽 강변에 대자.”
등여산이 맞은 편 강변을 가리켰다.
반대편 강둑은 어둠이 짙게 깔려있다. 구름이 잔뜩 깔려서 더욱 어둡다.
두 여인은 부서진 널빤지를 노 삼아서 물살을 저었다.
철썩! 철썩!
뗏목이 느리게 강둑으로 붙었다.
홀리는 재빨리 호발귀를 안아서 강둑으로 옮겼다.
그러는 동안에 등여산은 뗏목을 분해해서 나뭇가지들을 강물에 흘려보냈다.
“자, 이제는 어디로 갈까?”
홀리가 어둠에 휘감긴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 이 강이 한수(漢水)일 거야. 저기 저 바위산은 낙타봉. 여기가 어디쯤인지 알겠어.”
등여산이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곱사등이처럼 생긴 산봉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와봤어?”
“아니. 이 부근에서 한수대전(漢水大戰)이 벌어졌잖아.”
“그게 뭔데?”
“위나라와 한나라가 여기서 전쟁을 벌였어. 이 강물에 잠긴 사상자만 이만 명이 넘어. 이 강을 넘으면 평야가 나오거든. 대략 천 리는 차지할 수 있어.”
“이런 것, 저런 것 주워 담느라고 네 머리도 참 고생했겠다.”
“호호! 저기 낙타봉 쪽으로 가다 보면, 중간에 폐허가 된 절이 있을 거야.”
“절이면 피해야 하지 않아?”
“미륵교(彌勒敎)라고 사이비 교주가 있었는데, 사람들에게 맞아 죽었어. 그때 절도 불살랐는데, 사이비 교주가 하는 짓이 있잖아. 아직도 지하실은 멀쩡할 거야.”
“너 별거 다 안다?”
“천살단에 있다 보면 이것저것 보고 올라오는 게 많아. 대부분 흘려보내는 정보이지만…… 필요하다 싶어서 기억해 둔 게 몇 개 있는데, 이렇게 써먹네.”
두 사람은 들것을 들고 걸었다.
강을 건너온 이상 급할 필요가 없다. 사방이 어두워서 누가 볼까 우려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생기는 받아들였다.
홀리는 두 다리에 집중했고, 등여산은 기쁜 마음을 떠올렸다.
장벽 같은 것은 없다. 생기는 그녀들에게 어떠한 악기도 읽어주지 않았다.
정말로 절터가 나왔다.
겉보기에는 완전한 폐허다. 지붕은 불에 타서 없어지고 벽도 거의 허물어졌다.
간신히 주춧돌 몇 개만 남아 있는 형국이다. 사실, 이곳이 절터였다는 것도 믿지 못하겠다.
등여산이 절터를 천천히 걸었다.
홀리도 반대편으로 천천히 걸었다. 등여산이 무엇을 하는지 알려주지 않았지만, 묻지 않아도 안다. 절터 지하에 만들어져 있을 지하실을 찾는다.
츠으으읏!
진기를 일으킨다. 두 발에 진기를 집중시킨 채, 걸음을 옮긴다.
발걸음 소리, 발이 땅에 닿는 소리를 듣는다. 텅 빈 공간 울림이 일어나는지.
생기가 아니라 진기를 일으킨 것은 생기로는 지하 공간을 알아낼 방도가 없어서다.
생기는 목숨에 위협이 가해질 때만 발동한다. 그녀가 땅 위에 서 있거나, 물 위에 서 있거나, 지하실 위에 서 있어도 위협만 없으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쿵!
지하 암동의 울림이 들렸다.
“여기야! 여기 암동이 있어!”
홀리가 소리쳤다.
미륵교주가 맞아 죽은 지 삼십여 년이 지났다. 한데도 지하실은 멀쩡하다.
거미줄이 처져 있고, 곰팡내가 물씬 풍기지만 비바람은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
“조금만 손 보면 당분간 지낼 수 있겠네.”
“그렇지?”
“여기 정말 사람이 안 올까?”
“와도 상관없어. 여긴 미로가 있어.”
“미로? 어디?”
“찾아야지. 미로가 나중에 발견되어서 삼십 년 전에 맞아 죽은 교주도 진짜가 아니라는 말도 있었거든.”
“진짜야?”
“모르지. 오늘은 쉬고, 미로는 내일 찾자.”
“쉬긴 뭘 쉬어? 피곤해?”
“아니.”
“그럼 넌 미로 찾아. 난 여기 정리부터 할게. 거미줄은 치워야 잠을 자지.”
홀리가 움직였다.
생기 감응은 좋은 면이 무척 많다.
생기를 펼치면 기운이 한층 북돋아진다. 무인의 경우에는 운공조식으로 피로를 푼다.
그런 운공조식을 매 순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딱 맞는다.
백 리를 걸어도 피곤하지 않다.
두 사람은 정신적인 면에서 피로를 느낀다. 하지만 육체적인 면에서는 아직도 펄펄 날 수 있다. 온종일 움직였는데도 전혀 피로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타탁! 탁! 탁!
지하 밀실 한가운데에 모닥불을 피웠다.
미로에서 들어와 들어온 입구 쪽으로 빠져나간다.
밀실 안에 연기가 매캐하다. 하지만 벌레도 쫓을 겸, 몸도 녹일 겸 일부러 모닥불을 피웠다.
등여산이 습관처럼 호발귀의 맥을 잡았다.
“여전하지?”
등여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맥이 뛰지 않는다. 상세를 살펴보려고 해도 맥이 뛰지 않으니 살펴볼 수가 없다. 진기를 밀어 넣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진기조차 들어가지 않는다.
호발귀의 몸은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몸도, 경맥도 화석처럼 굳어서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피는 흐르고 있는지 모르겠다. 칼 맞은 곳에서 피가 흘러내리니, 혈액은 돌고 있는 것 같다.
“이대로 깨어나지 않으면 어떡하지?”
홀리가 망연히 호발귀를 쳐다보며 말했다.
등여산은 말없이 모닥불 앞으로 돌아와서 불길에 손을 내밀었다.
타탁! 타탁! 탁!
침묵이 흘렀다.
그때, 등여산이 혼잣말처럼 조용히 말했다.
“우리 이대로는 아무것도 못 하지? 저 사람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어.”
“그렇지. 아무것도 못 하지.”
“홀리, 우리 모험 한 번 해볼까?”
“모험? 어떤 모험?”
“우리 생기 말이야. 특이하지? 나는 감정 반응이 일어나고, 넌 두 발이 땅에 붙고.”
“그거야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게 각기 다르니까.”
“내 말은 그게 아니라, 난 가슴에서 일어나고, 넌 발에서 일어난다는 거야.”
“그게 뭐?”
“천지관통(天地貫通).”
“뭐? 호호호! 말도 안 돼.”
홀리가 고개를 저었다.
천지관통은 머리, 천령혈(天靈穴)과 땅, 용천혈(湧泉穴)을 진기로 관통시키는 행위다.
주로 고수가 어린아이의 근골을 건강하게 바꿔줄 때 행한다. 허약한 근골도 단숨에 강건한 근골로 바꿔줄 수 있어서 많은 사람이 탐내는 공부다.
하지만 제약도 크다.
먼저 천을 맡은 사람과 지를 맡은 사람이 있어야 한다. 두 사람의 무공은 비등해야 하며, 타인의 경맥을 단숨에 돌파할 정도로 고수여야 한다.
또한 몸 안에서 진기 교차가 일어나기 때문에 두 사람이 진기 호흡을 맞추지 못하면 피시술자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등여산이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천지관통을 하는데 진기를 사용하자는 게 아니야. 우리가 느끼는 생기를 쓰는 거야.”
“진기도 안 들어가는데 생기가 들어가? 그리고 생기를 어떻게 집어넣어?”
홀리가 여전히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두 사람은 분명히 생기를 느낀다. 하지만 마음대로 움직이지는 못한다. 진기처럼 사용하지 못한다. 오히려 생기에 몸을 맡기는 처지이지 않은가.
그래도 등여산은 포기하지 않았다.
“넌 다리에서 생기를 느끼니까 용천혈을 잡아. 나는 가슴에서 느끼니까 천령혈을 잡을게. 우선 자리만 잡고 생기를 써보는 거야. 그러면 뭔가가 일어나겠지.”
“호호! 이거야 원. 이건 정말로 아무거나 해보자는 거잖아.”
“우린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하자. 뭐라도 해봐야지.”
“그래.”
두 여인은 당장 등여산이 말한 대로 호발귀의 머리맡과 다리 쪽에 앉았다.
홀리가 호발귀의 신발을 벗기고 용천혈을 잡았다.
“해자수가 말한 게 있는데. 생기를 운용하면서 뭔가를 간절히 생각하면 생기가 그쪽으로 유도해준대. 이건 해자수만의 방법이라서 해보지는 않았는데.”
“해보지 뭐.”
등여산은 호발귀의 천령혈을 잡았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혈도를 슬슬 문질렀다.
해자수 방식대로 무엇인가를 간절히 생각한다.
이번에 생각하는 것은 천령혈이다. 가슴에서 피어난 희열이 손가락을 통해서 천령혈로 스며들기를. 그리고 경맥을 타고 하반신으로 움직여주기를.
홀리도 등여산처럼 용천혈을 잡고 손가락으로 살살 문질렀다.
홀리는 생기를 일으키기 전에 진기를 살짝 밀어 넣어봤다.
퉁!
진기는 여지없이 튕겨 나온다.
“진기를 넣어봤는데 튕겨 나와. 경맥이 꽉 막힌 거 같아. 이거 파신금령술은 아니지?”
“그럴 수도 있어. 파신금령술에 당하면 경맥 경화가 온다는 말도 있는데, 그거일 수도 있어. 하지만 내 생각에는 그건 아닌 것 같아. 호발귀 안색이 너무 편안해.”
“이럴 때 당 언니가 있으면 좋을 텐데.”
홀리가 당홍을 떠 올렸다.
당홍은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의원이다. 그녀라면 호발귀 상태를 단숨에 알아냈을 것이다.
아니, 그녀도 몰랐으려나? 현재, 생기에 관해서는 당홍보다도 자신들이 훨씬 더 많이 안다.
“그러면 지금부터 생기 운용.”
“그래.”
두 여인은 일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용천혈과 천령혈을 슬슬 쓰다듬으면서 자기만의 생계 속으로 함몰되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