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十三章 요요무기(遙遙無期) (3)
척! 척! 척!
그가 걸을 때마다 숲에서 기척이 들려왔다.
검벽 무인들이 그에게 보내는 예의다. 굳이 신호를 보내지 않아도 어디 있는지 아는데, 신호를 보낸다. 한편으로는 반갑다는 인사이기도 하다.
현재 검벽주는 임명강이지만, 검벽 무인들은 여전히 주치균을 잊지 않고 있다.
스읏! 척!
검벽주 임명강이 다가와서 검례를 취했다.
“이번에 수고하셨습니다.”
“결국은 놓쳤는데 뭘. 실수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는데. 후후!”
“그러게 말입니다.”
팟!
주치균은 눈썹을 찡그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검벽 부단주 임명강…… 검벽주가 되더니 말투도 바뀌었다. 온종일 천살단주를 모시면서 크고 작은 일들을 모두 보다 보면 어느덧 자신이 대단한 사람인 줄 알게 된다.
벌써 그럴 때가 되었나?
툭! 툭!
주치균은 손을 들어서 임명강의 어깨를 툭툭 쳤다.
“보고하지. 먼 길을 왔더니 피곤해. 빨리 보고하고 가서 좀 쉬어야겠어.”
“알겠습니다.”
임명강이 다시 검례를 취했다.
그는 여전히 주치균을 존중하는 듯하다. 하지만 아니다. 어깨를 칠 때, 기분 나쁘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조만간 한 판 뒤엎자고 들이받는 날이 올 것이다.
“훗!”
주치균은 혼자만 아는 웃음을 흘렸다.
“살단주님께서 드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천살단주가 힘없이 말했다.
주치균은 단주의 집무실로 들어가서 깊이 부복했다.
“임무 마치고 귀환했습니다.”
끄떡! 끄떡!
천살단주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이만.”
주치균은 바로 돌아가려고 했다. 더는 보고할 것이 없다고 해도 오랜만에 만났으니 정담이라도 나눌 수 있는데, 가타부타 말도 없이 돌아나갈 태세였다.
“잠깐. 이것 좀 보고 가야겠다.”
천살단주는 호음각주가 전해온 전서를 주치균 앞에 내밀었다.
주치균이 의아한 눈으로 단주를 쳐다본 후, 앞으로 걸어와서 전서를 받아 읽었다.
순간, 주치균의 표정이 확 일그러졌다.
“이럴 리가!”
주치균은 기어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띠었다. 입에서는 경악성이 쏟아졌다. 낯빛은 하얗게 질렸다.
“네가 죽였다는 혈마, 살아 있구나.”
“다시 가겠습니다.”
주치균이 깊이 허리를 숙였다.
“아니. 넌 좀 나중에.”
허리를 숙이고 있던 주치균이 고개를 들어 천살단주를 쳐다봤다. 두 눈에는 무슨 뜻이냐는 물음이 담겨 있었다.
“생포해 오라고 했더니 빼앗기지를 않나. 흑포부시단을 먹여놓고는 나한테는 죽었다고 거짓 보고를 하지 않나. 주 왕자. 그만 왕부(王府)로 돌아가시게.”
천살단주가 말했다.
주치균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왕부를 떠나 무림으로 왔는데, 다시 왕부로 돌아가란다. 무림에서는 필요 없다. 천살단에서는 당신이 할 일이 없다. 그러니 그만 돌아가라.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겁니다. 반드시 호발귀를 생포해 오겠습니다.”
“아니. 아니야. 안 해도 돼.”
“제가 호발귀와 셈할 게 있다는 것, 아시잖습니까? 다시 가겠습니다. 보내주십시오.”
“왕부로 돌아가기 싫으면 좀 쉬던가. 살단…… 예상 생각 밖으로 나약해. 그런 아이들로 뭘 하겠어? 그래도 오택골 단주가 있을 때는 일 하나는 믿고 맡겼는데. 쯧!”
천살단주가 혀를 찼다.
“호발귀, 제가 잡겠습니다.”
“오 단주가 죽고 난 후에는 살단도 끝이야. 뭘 하나 시켜도 제대로 하는 게 있어야지. 이번 기회에 살단이나 제대로 키워보던가. 마공관도 조만간 폐쇄해야 할 것 같으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가져가고. 무공이 안 되면 악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천살단주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농담이 아니다. 진담이다. 이번 일, 자신에게 시킬 생각이 전혀 없다.
주치균은 천살단주를 쳐다보다가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단주님, 잘못했습니다. 절 다시 보내주십시오.”
천살단주가 주치균을 쳐다봤다.
“호발귀, 반드시 생포해 오겠습니다. 무령환살공을 수련한 사람은 저밖에 없지 않습니까. 저만이 호발귀를 잡을 수 있습니다. 한 번 잡아본 경험도 있으니……”
“누가 그래? 무령환살공을 수련한 사람이 너밖에 없다고?”
주치균이 고개를 벌떡 쳐들었다.
또 있나? 또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누구냐고 물어도 절대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만은 좋지 않아. 세상에 나밖에 없다? 이런 건 없어. 혈마가 나타나고 이백 년이 지났어. 그동안 혈마를 상대할 방법이 얼마나 많이 나왔겠나? 무령환살공은 그중에 하나일 뿐이야. 혈마를 잡을 방법은 수두룩해.”
“저를 보내주십시오.”
주치균이 차분하게, 그러나 절실하게 말했다.
“쯧! 정히 가고 싶다면 가. 가되 호음각주의 지시를 받아.”
주치균이 고개를 들어서 천살단주를 쳐다봤다.
천살단주가 졸린 듯 눈을 감으며 말했다.
“호음각주도 관망하라고 했어. 너도 관망하란 말이야. 지켜보기만 해. 이번에는 낭견대를 움직일 거야. 네가 한가하게 오는 동안에 벌써 제이 낭견대가 몰살당했고, 제일 낭견대와 제삼 낭견대가 곧 투입될 거야.”
‘허경!’
주치균은 제일 낭견대 대주 허경을 떠올렸다.
검벽주로 지내다 보면 천살단의 비밀을 거의 알게 된다. 천원주도 이제야 알게 된 비밀을 그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불마촌 마인들과 호음각이 연결된 것도.
“이번에는 낭견대주 허경에게 일을 시켰어. 그놈이 수련한 무공도 혈마를 상대할 수 있지. 두고 보자고. 후후! 무령환살공만이 최선은 아내.”
“제일 낭견대주가 실패하면 그때는 제가 나서도 되겠습니까?”
“장난치면은……”
천살단주가 말을 하다가 중간에서 멈췄다. 그리고 주치균을 쳐다봤다.
“살단주, 정말로 이번 일에 장난치면 어쩔 수 없이 널 죽여야 해. 그때는 나도 감당하지 못할 화가 일어날 거야. 생포해 오라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 너이니, 이번 말이라고 알아들을 턱이 없지만…… 정말 죽어.”
주치균이 조용히 머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천살단주가 허리를 숙여서 주치균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바싹 붙였다.
“다시 말하마. 장난치지 마. 장난치면 정말 죽어. 움직이지 말라면 움직이지 말고, 지켜보라고 하면 지켜보고. 낭견대가 움직이는 데 일절 방해하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숨만 쉬면서 지켜봐. 널 죽이는 일은 없어야지.”
천살단주가 주치균의 어깨를 두들겼다. 주치균이 임명강의 어깨를 두들겼던 것처럼.
‘후후!’
주치균은 이를 악물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혈마가 살아있다니.
흑포부시단을 분명히 복용시켰다. 식도를 넘어간 흑포부시단은 위장으로 밀려 들어간다. 흑사 껍질은 위장에 들어가는 즉시 위액에 녹는다.
호발귀의 입을 벌리고 흑포부시단을 넣었다. 검은 단약을 손가락을 쭉 밀어 넣었다. 목젖 옆에 있는 인영혈(人迎穴)과 수돌혈(水突穴)을 눌러서 독단이 식도 안으로 넘어가는 것을 확인했다.
독단은 확실히 위장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여기서도 몇 가지 변수가 나올 수 있다.
제일 먼저, 흑사 껍질이 위에서 녹지 않았을 수 있다.
두 번째 가정, 흑사 껍질이 위에서 녹았어도 부시독이 제 역할을 못 했을 수 있다.
부시독이 가짜이거나 아니면 호발귀 위장이 부시독을 소화할 정도로 강하다면 말이 된다.
어떤 게 맞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첫 번째 가정, 흑사 껍질이 위에서 녹지 않았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흑사 껍질은 특수 독액으로 제련한 것이다. 안쪽은 부시독을 밀어내는 독액을 발라놔서 썩지 않는다. 하지만 바깥쪽은 침에도 자국이 남을 정도로 무르다.
위장에 들어가면 반드시 녹는다.
두 번째 가정, 호발귀의 위장이 부시독을 견딜 수 있을 만큼 강하다는 부분도 생각할 수 없다.
호발귀는 혈마이기 이전에 인간이다. 혈마도 굶으면 죽는다. 물을 마시지 않으면 탈진한다. 잠도 자고, 칼에 찔리면 피를 흘리는 것도 똑같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 부시독이 가짜였나?
‘약전주!’
부시독이 가짜일 경우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데…… 장난칠 여력이 남아 있었다.
물론, 부시독은 자신이 만들어 냈다. 약전주의 도움을 받아서 부시독의 성질을 극대화했다. 살짝만 뿌려도 염산을 뿌린 듯 녹아버리게 만들었다.
틀림없이 제대로 만들어서 제공했다.
하지만 부시독을 흑사 껍질 속에 넣어준 사람은 약전주다. 부시독을 흑포로 감싼다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배워서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흑포와 부시독의 성질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이 극도로 조심해서 밀봉해야 한다.
그때…… 약전주가 장난을 칠 기회가 딱 한 번 있었다.
‘약전주…… 능구렁이였단 말인가? 당신이?’
주치균은 피식 웃었다.
여전히 이해하지 못할 것은 약전주가 왜 흑포부시단에 장난을 쳤냐는 것이다. 자신이 그것을 누구한테 쓸 줄 알고. 혈천방주에게 쓸 수도 있었는데.
아니다. 약전주는 이미 알고 있었다. 단주가 마공관으로 찾아와서 강제로 폐관을 풀었다.
그즈음, 약전주는 이미 소식을 전해 들었다.
살단이 호발귀를 치기 위해서 움직인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렇다면 흑포부시단을 쓸 대상자는 혈마밖에 없다. 혹은 혈마와 함께 있는 등여산이거나.
자신이 설마 흑포부시단을 등여산에게 쓸 것으로 생각했던 건가? 하기는…… 등여산과 약전주가 사이는 좋았으니까. 아니면 혈마가 이런 식으로 죽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일까?
“후후! 겁 많은 척 벌벌 떨면서 속으로는 엉큼하기는. 약전주, 당신도 재밌는 사람이야.”
주치균은 웃었다.
실패의 원인을 찾은 것 같다. 그리고 이번 일을 통해서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모든 사람의 마음이 내 마음 같은 게 아니다.
지금까지 웃고 떠들면서 지내왔던 사람이라도 한순간에 돌변할 수가 있다.
이것이 사람이다.
덜컹!
주치균은 문을 거칠게 열고 약전으로 들어섰다.
순간, 약재 냄새가 확 풍겼다. 약재를 써는 사람, 환단을 만드는 사람, 고약을 병에 담는 사람, 침을 정리하는 사람…… 약전 안은 도떼기시장처럼 분주했다.
주치균은 약전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약전 의원들은 그를 흘깃 쳐다보기만 할 뿐, 말을 붙이지 않았다.
주치균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또 약전주와 가깝게 지내는 사이라는 것도 안다.
주치균은 약전을 자주 방문했었다.
“어! 왔어!”
약전주가 활짝 웃는 얼굴로 반겼다.
약전주는 작두로 녹각(鹿角)을 얇게 썰고 있었다.
“이번에 도움을 줬는데, 고맙다는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주치균이 웃으면서 말했다.
“아, 말도 마. 나 그거 때문에 단주님한테 불려갔잖아. 도대체 뭘 주었냐고 물으시는데,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더 있어? 단주님 성격 알잖아. 삐끗하면.”
약전주가 손을 들어서 자신의 목을 그었다.
“그거 또 부탁하죠.”
“안돼! 안돼! 이제 더 이상은 안 돼! 나 그거 때문에 단주님한테 경을 쳤다니까.”
“그런데…… 그 흑포부시단을 혈마한테 먹였는데 그놈이 살아서 펄펄 날뛰고 있어. 죽은 줄 알았다가 오자마자 단주님한테 완전 개쓰레기 취급을 받았는데.”
“혈마가 흑포부시단을 견뎌냈다고! 그럴 리가!”
약전주가 눈을 부릅떴다. 정말 놀랐다는 표정이다.
“후후! 왜 그래? 몰랐던 것처럼.”
“살단주, 지금 무슨 소리를…… 그리고 말투는 그게……”
주치균은 약전주를 쏘아봤다.
단주가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약전주에게 바싹 다가서며 말했다.
“단주님이 나한테 그러더라고. 장난질 그만 치라고. 이 말 내가 약전주한테 고스란히 돌려주려고. 모른 척할까 하다가 이번에 그냥 넘어가면 다음에 또 장난질 칠 거 같아서. 나한테 이따위 수작질 또 한 번 하면 죽어.”
“살단주! 지금 말이 너무 지나치지 않나!”
“입 다물고. 지금부터 당신에 대한 모든 것을 샅샅이 조사할 거야. 아! 지금 말하는 것은 협박. 아주 천한 것들이나 사용하는 협박. 당신의 모든 것을 조사했다가 아니다 싶으면 쳐내려고. 내가 뭘 어떻게 쳐내는지 지켜보던가.”
“……”
약전주가 주치균을 빤히 쳐다봤다.
“우리 그런 일 없도록 하자고.”
주치균은 손을 들어서 약전주의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두 손가락으로 꾹 눌러서 약간의 고통을 주었다.
큰 고통은 아니다. 경고성 고통이다.
“다음에는 서로 웃자고.”
주치균이 사악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