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七十章 혈마제압(血魔制壓) (5)
사박! 사박!
등여산은 차분히 걸었다.
저 멀리…… 야산 밑에 살단 무인들이 보인다. 멀리서 보니 마치 군대가 주둔해 있는 것 같다.
그들이 아침을 지어 먹고 있다.
거의 일흔 명에 가까운 많은 사람이 여기저기 흩어져서 아침 식사를 한다.
길에서 먹는 음식이라고 해서 대충 때우는 게 아니다.
살단 무인이 잘 먹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불을 피우고 솥을 걸어 놓고 정식으로 밥을 지어 먹는다.
등여산은 그들을 보면서 걸었다.
옛날 같았으면 한달음에 달려가서 밥 한 끼 얻어먹었을 것이다.
지금은 오히려 반격을 조심하면서 걷는다. 주변에 매복이나 함정이 없는지 살펴야 한다.
“엇! 저기!”
“뭐야?”
밥을 먹던 무인 중 몇 명이 일어섰다.
그들은 등여산을 쳐다보며 손가락질을 했다.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지만, 등여산이 나타난 걸 알아봤다.
스읏! 스읏! 슷!
등여산은 그들의 눈길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함정이 없네. 매복도 없고.’
살단 무인은 호발귀까지 잡아놓고도 전혀 경계하지 않는다.
누가 감히 공격해 올까 하는 자신감일까, 아니면 오히려 공격해 오라는 유인책인가.
‘주치균.’
등여산은 한 사람을 생각하면서 걸었다.
살단 무인은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 사람, 주치균은 움직인다. 그는 자신이 보내는 신호를 안다. 그리고 자신의 움직임이 그를 끌어내기 위한 함정이라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나온다. 그도 함정에 대비하고 있다.
서로가 상대방의 수를 읽고 패를 던졌다. 그러니 주치균은 틀림없이 나온다.
사락!
등여산은 나무 그늘에 앉았다. 그리고 짊어지고 온 봇짐에서 다기를 꺼내 늘어놓았다.
마른 나뭇가지를 주어 불을 지피고, 주전자를 올려놓았다.
타탁! 타타탁!
작은 나뭇가지는 빨리 타들어 간다. 불길도 금방 일어난다. 주전자에 새까만 그을음이 앉으면서 물이 끓기 시작했다.
그녀도 정식으로 차를 끓였다.
저벅! 저벅! 저벅!
등여산이 차 한 잔을 다 마시고 또 한 전을 따를 때, 한 사람이 걸어왔다.
“왔네.”
등여산이 담담하게 말했다.
“겁이 없구나.”
“앉아. 차 한 잔 마셔.”
“후후! 주제 파악을 못 하는군. 건방진 계집. 네 몸에서는 악취가 풍겨. 아주 지독한 냄새가 나. 일어나라. 앉아있는 계집을 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러지 말고 앉아.”
등여산은 화내지 않았다.
“항상 그래. 너 같은 것들은 칼을 맞아야 정신을 차려. 말로 하면 안 듣는단 말이야.”
스릉!
주치균이 검을 뽑았다.
“그렇구나. 너 정말 완전히 정을 뗐네?”
“네가 그렇게 잘난 년이 아니거든.”
“정말 차 한 잔 같이 마실 여유도 없는 거야?”
“호발귀를 빼가기 위해서 온 주제에 차 한 잔 운운하는 건 역겹지 않아?”
“후유!”
등여산이 한숨을 토해냈다.
주치균의 표정은 시종일관 냉담하다. 얼음 그 자체다. 마음이 완전히 닫혀버렸다.
“그래도 너하고는 말 몇 마디 정도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갈라질 수도 있는 거구나. 미안. 난 우리가 차 한 잔은 해도 괜찮은 사이인 줄 알았어.”
“후후후!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가증스러운 말을 줄줄 늘어놓네. 너도 참 뻔뻔해졌어.”
“너 정말 말 못 되게 한다.”
등여산이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궁금해서 그러는데.”
“호발귀를 어떻게 잡았는지 묻고 싶은 거냐?”
“맞아. 알려줄래?”
“호발귀, 호발귀, 호발귀! 네 머릿속에는 온통 호발귀만 들어 있는 거야? 하기는…… 살을 섞은 사내가 저 꼴이 되어서 나뒹굴고 있으니 억장이 미어지겠지.”
“얘기가 또 그렇게 되네.”
“검, 안 뽑으면 바로 친다.”
“뽑아. 재촉하지 마.”
스릉!
등여산이 검을 뽑았다.
“호발귀에게 쓴 수법, 파신금령술이지? 파신금령술을 최강 살법인데, 호발귀가 아직 살아있는 걸 보면 손에 사정을 남겼을 테고, 현장에 피가 적게 흐른 걸 보면 단검을 뽑지 않았어. 죽이지는 않지만 살기를 바라지도 않아. 맞지?”
스읏!
주치균은 대답 대신 검을 들어 올렸다.
“난 널 알아. 아무런 제약이 없었으면 호발귀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어. 죽이고 싶은 사람을 살려서 데려가는 거야. 단주님이 명령한 거네. 살려서 데려오라고.”
“그러니까.”
“뭐?”
“네년 분석 따위는 듣고 싶지 않다고. 그 계집 말귀 한번 더럽게 못 알아 처먹네. 물과 불이 만났으면 하나가 꺼져야지. 주둥이만 나불대지 말고.”
“후유!”
등여산이 한숨을 내쉬었다.
주치균이 이렇게까지 사납지는 않았는데. 자신 때문에 웃음 많던 사람이 이렇게 된 건가 싶어서 마음이 좋지 않다. 하지만 그녀는 웃었다. 활짝 웃었다.
호발귀하고의 관계를 떠올리는 것은 아니다. 주치균이 자신을 찾아올 때를 생각했다.
자신은 늘 무언가에 몰두해 있었다.
머리도 헝클어지고 옷매무시도 엉망이었다. 얼굴이며 옷이며 먹물이 묻어서 사람 몰골이 아니었다.
바닥은 온갖 책과 서류가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주치균은 방안을 들어설 때마다 깨금발로 조심해서 걸어들어왔다. 인상은 팍 찡그리면서.
“어휴! 이 쓰레기장!”
그러면서도 주치균은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내버려 둬. 곧 어질러질 텐데 뭐.”
“그걸 말이라고! 넌 어떻게 여자가!”
“나 여자 아냐. 여자로 생각하지 말아줘.”
“에효! 말을 말자.”
그때를 생각하면 즐겁다.
그 당시에는 즐거운 줄 몰랐다. 모든 게 일상생활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매우 아름다운 추억인데, 당시는 하루하루 평범한 나날들이었다.
그때를 떠올렸다. 그러자 희열이 피어났다.
“조롱이냐?”
“무슨 말이야?”
“네 웃음…… 뭐야? 내 칼이 널 베지 못할 줄 아나 보군.”
“정말 사람이 삐딱해졌네. 조롱 아니야. 옛날 네가 내 방에 찾아왔을 때를 생각했어.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리면서도 방을 청소해 줬잖아. 기억나?”
“이거 생각보다 형편없는 계집이군. 그런 일을 꺼내서 시간을 벌려는 거야? 그런데, 암습해야 할 것들은 왜 아직도 조용하지? 내가 나왔으니 공격해야 하잖아.”
“……”
“왜? 속이 찔렸어? 후후! 내가 그 정도도 못 보고 여길 온 것 같아? 넌 날 무시하는 경향이 있어.”
쒜에에에엑!
주치균이 검초를 펼쳐냈다. 비사칠초다.
순간, 등여산은 전력을 다해서 뒤로 물러섰다.
이번에 그녀가 펼친 신법은 설화팔보다. 태산파 신법을 펼쳐서 비사칠초를 벗어났다.
“계속해 볼까?”
주치균의 검이 뱀이 기어가듯 꿈틀거렸다. 검신이 구불거리는 뱀처럼 낭창낭창 휘어졌다.
꿈틀거리던 뱀이 머리를 꼿꼿이 세우더니 와락 달려든다.
“오분폭사!”
등여산이 깜짝 놀라서 다시 물러섰다.
오분폭사는 지극히 빠르고 난폭하다. 순식간에 주위를 할퀴어버린다. 비사칠초 중에서는 사초(死招)에 속한다.
정말로 그녀를 죽일 생각이다.
“이러지 마! 싸우려고 온 거 아니야!”
“싸우기는 싫고, 호발귀는 구해야겠다? 이거야말로 미친년 헛소리 아냐. 날 유인하고 살단 배후를 치겠다는 생각이 아니라면 검을 거두지. 네가 지금까지 말한 것, 차 한 잔 나눌 수 있는 사이라고 생각해서 말해봐. 날 유인한 게 아닌가?”
“맞아. 그럴 목적이야.”
“그러니까 미친년 헛소리라는 거야!”
쒜엑! 쒜에엑!
주치균이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주치균은 등여산이 생기를 사용한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무령환살공은 자신의 생기를 감출 수 있을 뿐, 타인이 생기를 쓰는 것은 알아내지 못한다.
호발귀의 경우에는 사전에 이미 혈기를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혈마를 보자마자 무령환살공을 펼쳤다. 혈기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무령환살공이 나온 것이다.
주치균은 지금도 혈기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이백 년 전부터 혈기에 관해서 수많은 연구가 거듭됐지만, 지금까지도 혈기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없다. 막연하게 ‘생명을 가진 자가 일으키는 기운’ 정도만 안다.
이 부분은 연구를 거듭해도 좀처럼 진척이 없다.
이백 년 동안 대를 이어서 연구한 사람이나 혈기를 전혀 알지 못한 사람이나 아는 것이 똑같다.
‘생명을 가진 자가 일으키는 기운’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혈마와는 전혀 다른 생기, 희열로 일으키는 생기를 어찌 짐작이나 하겠나.
주치균은 등여산의 내공이 상당히 높아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등여산이 한 말은 거짓이 아니다. 그녀는 싸우려고 온 것이 아니다.
진심으로 싸울 경우, 주치균을 십 초 안에 무너트릴 수 있다.
차마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다. 주치균을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싶지 않다.
호발귀를 구하기 위해서 온 것은 맞다. 하지만 여기서 잠시 대화만 나눠주면 된다.
조그만 시간을 벌어주면 홀리와 해자수가 호발귀를 꺼내올 것이다.
사실, 이것조차도 주치균에게는 미안하다. 하지만 호발귀를 구해야 하니 어쩔 수 없지 않나.
등여산은 아직도 주치균이 어떻게 해서 호발귀를 잡았는지 알지 못했다.
‘이상해.’
주치균을 보자마자 일어난 생각이다.
주치균의 무공은 아무리 높게 쳐도 생기보다는 아래다.
자신의 아래라고 확신한다. 비사칠초보다 더 강한 무공, 호발귀를 잡은 무공을 아직 꺼내지 않은 건가?
“비사칠초를 장난처럼 흘려버리다니 놀랍군. 내 앞에 나타날 때 뭔가 한 가지 재주는 있다 싶었지. 하지만 내 검을 이렇게 피할 줄은 몰랐는데. 그렇다면 방법을 바꿔야겠지.”
스릉!
주치균이 장검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단검 두 자리를 뽑아 들었다.
척! 척!
그가 양손에 단검을 쥐었다.
“안돼!”
등여산이 눈살을 깊이 찡그리면서 말했다.
주치균이 취한 자세는 백인백팔투다. 몸이 바싹 붙은 상태에서 단검, 단도로 펼칠 수 있는 근접 전투 기술이다. 또한 주치균의 몸이 단단한 막에 휘감긴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임 살단주 오택골이 사용하던 반야호신공의 기운이다.
주치균은 바짝 붙어서 서로 찌르고 찔릴 생각이다.
물론 백인백팔투를 펼치기 위해서는 절정의 신법이 필요하다. 도주하는 상대를 따라잡을 수 있어야 한다.
상대방이 어디로 피하던 즉시 따라붙으면서 검을 쳐낸다.
상대방은 반격하는 수밖에 없다.
서로 몸을 찢고 찢는다. 자신은 반야호신공으로 몸을 보호하면서 상대방을 찌른다.
반야호신공을 펼친다고 칼이 들어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언제든 목숨 한 줄기는 남겨둔다.
주치균은 등여산을 향해 아주 지독한 살법을 꺼내 들었다.
“미안. 나 이 싸움 못 하겠어. 너하고는 정말 이런 식으로 싸우고 싶지 않아. 미안!
쒜에에엑!
등여산이 신법을 펼쳐서 도주하기 시작했다.
”후후! 올 때는 마음대로 왔어도 갈 때는 허락을 받아야 해. 누구 마음대로 안 싸워.“
쒜에엑!
주치균은 등여산을 쫓아서 치달렸다. 하지만 그는 등여산을 쫓기 전에 화탄을 꺼내 허공에 쏘았다.
퍼엉!
허공에 화탄이 터졌다.
이제 곧 홀리와 해자수가 공격해 올 테니 준비하라는 신호다.
주치균은 등여산의 일그러진 표정을 봤다. 자신과 싸우기 싫어서 물러가는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이것도 호발귀를 구하기 위한 속임수일 것이라는 생각도 떨치지 않았다
등여산은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여우다. 여우짓에 말려들면 혼을 빼앗긴다.
쒜엑! 쒜에엑!
주치균은 은섬비광(隱閃飛光)을 펼쳤다.
마공관에 수집된 마공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신법이다. 은섬비광을 펼치면 뼈에 강한 충격이 가해진다.
근육이 걸레 짜듯이 비틀어지고, 그 중심에 뼈가 있다. 모든 압력이 뼈에 가해진다. 하지만 근육은 매우 단단해진다.
그 힘이 고스란히 두 발에 전달된다.
쒜에엑!
등여산이 먼저 출발하고 그가 뒤늦게 출발했지만, 순식간에 등 뒤까지 따라붙었다.
그러자 등여산이 이를 악물더니 더 빨리 내달렸다.
조금 거리가 벌어졌다.
주치균도 진력을 뽑아냈다. 뼈와 근육을 쥐어 짜냈다. 은섬비광을 더욱더 강하게 펼쳤다.
두 사람은 비호처럼 치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