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十九章 정관기변(靜觀其變) (5)
“아!”
“저, 거것!”
살단 무인들이 동요했다.
그들은 무림에 나서면 자신들이 무적일 줄 알았다. 한데 나오자마자 부딪힌 사람이 호발귀다.
산에 올라갔던 부단주와 무인 열 명이 단숨에 쓰러졌다.
부단주가 쓰러지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산을 치달려 내려오던 동료 여섯 명이 쓰러지는 것은 봤다.
저항 한 번 못해보고 펑펑 나가떨어지는 모습을 봤다.
그들은 거미줄에 걸린 나방 신세였다.
죽음에서 빠져나오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죽음은 여지없이 밀려들었다.
호발귀는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 철천지원수를 대하듯 사정없이 검을 내지른다.
단순히 죽이는 정도가 아니다. 아예 영혼을 말살시켜 버리려는 듯 처참하게 짓이겨 버린다.
“조용.”
주치균이 나직하게 말했다.
살단 무인은 일시 조용해졌다.
주치균은 여전히 흔들리지 않는다. 호발귀의 신위를 똑똑히 목격했는데도 담담하다.
“너희 중 누가 가장 강하지?”
주치균이 불쑥 물었다.
살단 무인은 일시 말을 하지 못했다. 주치균이 무슨 뜻에서 묻는 것인지 의도를 알지 못했다.
주치균이 길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마음이 짚이는 자가 있잖아. 저놈하고 붙으면 도저히 이길 수 없다 하는 놈. 누구야?”
“화, 황석개(黃淅開)가 강하죠.”
무인이 말했다.
“석준호(碩俊濠)도 강한데.”
각기 평소에 자신보다 강하다고 여겨지던 동료 이름을 말하기 시작했다.
“너무 많군.”
주치균이 귀찮다는 듯 말했다.
“손철목, 이놈. 도대체 뭘 가르친 거야?”
순간, 살단 무인들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했다.
부단주는 살단주의 명령을 쫓다가 죽었다. 죽음을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확실하다. 그런데 살단주라는 사람은 죽은 수하를 핀잔하고 있다니.
주치균은 살단 무인들의 심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히 말했다.
“귀 파고 잘 들어. 살단은 내가 제일 강해야 한다. 지금처럼 누가 가장 강하냐고 물으면 자신 있게 자신을 말해야 해. 너희처럼 누군가의 이름을 말하면, 이 중에 나보다 강한 자가 적어도 열 명 이상 있다는 말이 된다.”
주치균이 말을 하면서 살단 무인들을 쭉 훑어봤다.
“너!”
주치균이 그중 한 명을 지목했다.
주치균의 지목을 받은 자는 팔짱을 낀 채 쳐다보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았다.
“네가 부단주 해.”
“싫은데.”
사내가 거칠게 말했다.
“네 이름 뭐야?”
“그런 건 알아서 뭐 하게?”
“경고를 한 번 줬는데도 못 알아먹으면 개돼지지. 개돼지한테도 이름이 있을까 하고.”
주치균이 사내를 쳐다봤다. 순간,
“웃!”
사내가 팔짱을 풀고 급히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주치균에게서 지옥의 고통을 봤다. 주치균에게 말려들면 지옥으로 끌려들어 간다.
“이름?”
“연…… 소부(燃蘇扶).”
“연소부. 네가 개돼지인지는 나중에 알아보기로 하고…… 지금 즉시 미끼를 던져.”
“알겠습니다.”
연소부가 삐딱하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무인으로써 굴종한 것이 아니라 직위에 굴종한다는 뜻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미끼를 던진 후에는 뒤로 물러나 있어. 가까이 있으면 오히려 방해돼.”
“네.”
“뭐해? 시작하지 않고.”
주치균이 피곤한 듯 목을 휘휘 내둘렀다.
스슷! 스읏! 스으윽!
살단 무인들이 움직였다.
그들은 마을에서 데려온 인질 십여 명을 십이비자가 점찍어 놓은 골짜기 공터에 늘어놓았다.
열 명은 모두 마혈이 제압되어서 꼼짝하지 못한다.
일부는 나무에 기대어 앉혀놓았고, 일부는 바닥에 눕혀 놓았다.
반듯하게 세워서 나무에 묶어 놓은 자도 있다. 몇 명쯤은 서 있어야 하지 않겠나.
“빠져나간다.”
연소부가 말했다.
“어디까지 빠질 생각이야?”
곁에 있던 살단 무인이 속삭이듯 낮게 물었다.
“저놈, 제 잘난 맛에 살잖아. 그렇게 자신 있다니 한 번 붙여보지 뭐. 혼자 하라고 해. 호발귀도 혼자 잡고, 뒤따라오는 자들도 혼자 잡고. 그냥 뒤로 쭉 빠져.”
살단 무인들에게 주치균은 낯선 자였다.
느닷없이 불쑥 나타나서 ‘나, 이만큼 잘났다’하고 자랑질만 했다. 동료 한 명을 죽이면서.
괴물, 인정머리 없는 괴물이다.
살단 무인 중 인정이 있는 자는 없지만, 그중에서도 싹수없기로는 최강이다.
한 마디로 밉상이다.
살단 무인들은 주치균을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살단주의 명령까지 거역할 수는 없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미끼를 투척해 놓았다.
“이제 빠져나간다. 즉시!”
연소부가 말했다.
아니, 그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살단 무인들은 죽을힘을 다해서 움직였다.
아차 실수하면 죽은 부단주와 같은 길을 걷게 된다.
부단주와 살단 무인 열 명을 일시에 죽일 정도라면 호발귀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솔직히 주치균이 어떤 자신감으로 혈마를 저토록 만만하게 보는지 모르겠다. 이미 수중에 걸려든 노리개처럼 여기고 있으니.
하지만 자신 있다고 하니 알아서 하라고 하고……
쉬이잇! 쒜엑! 쒜에엑!
살단 무인들은 골짜기 밑으로 쭉 빠져나갔다. 이번 일에서 완전히 손을 떼려는 듯이.
저벅! 저벅! 저벅!
주치균은 마을 사람들이 널브러져 있는 공터로 걸어왔다.
“흐음!”
그는 어깨를 쭉 펴고 산속 맑은 공기를 흠뻑 들이켰다.
혈마의 솜씨는 잘 봤다. 그 솜씨를 또 한 번 드러내려고 이곳으로 걸어온다.
“여기가 좋겠군.”
주치균은 숲속 공터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솔잎이 잔뜩 쌓여서 방석처럼 푹신해 보이는 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스릉!
검을 뽑았다.
손철목이 자신있다던 부시독 같은 것은 사용하지 않는다. 그저 무공이면 족한 것을.
주치균의 검은 묵검이다.
새까만 검은 색은 아니다. 약간 회색빛이 들어간 검은 색이다.
원래는 검은색이었는데 세월에 퇴색했다고 해야 하나? 검 색깔이 맑지 못하고 투박하다.
햇볕이 검신을 밝혔다. 하지만 검광은 쏟아지지 않는다. 칼은 잘 갈려있지만, 반사가 일어나지 않는다.
주치균은 날 선 검을 무릎 위에 놓았다.
단검도 끌어냈다.
장검과 마찬가지로 단검도 색깔이 퇴색되어 있다. 햇볕 반사는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장검 한 자루, 단검 세 자루.
혈마 호발귀를 잡을 병기다.
주치균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무령환살공을 운기해서 깊은 침묵으로 들어갔다.
* * *
“음! 이거야 원……”
해자수가 널브러진 시신을 보고 탄식했다.
혈마가 사람을 어떤 식으로 죽인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너무 잔혹하지 않나.
이런 광경은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다. 아니, 보면 볼수록 인상이 찡그려진다.
“아!”
등여산이 한 사람을 찾아냈다.
“아는 사람이야?”
홀리가 물었다.
“살단 부단주. 살단에 꽤 오래 있었어. 살단은 천살단에 잘 들어오지 않는데, 부단주는 몇 번 들어와서 봤어.”
“쯧! 부단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이런 데서…… 참 억울하겠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죽었을 테니. 쯧!”
해자수가 혀를 끌끌 찼다.
혈마에게 죽은 무인은 정말 억울하다. 고수일수록 억울하다.
그동안 수련한 무공을 써보지도 못하고 죽으니 검을 맞고도 차마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해자수는 즉시 움직여서 시신들을 수습했다.
땅에 묻어줄 시간은 없다. 한쪽에 놀아놓고 그들이 들고 있는 옥병을 들이부었다.
치익! 치이이익!
살단 무인들이 순식간에 뼈만 남았다.
“보기는 흉측하지만 이게 그래도 낫지. 아무리 보시 어쩌고 해도 들짐승한테 뜯겨 먹히는 것보다야.”
“휴우!”
홀리는 한숨을 쏟아냈다.
해자수가 시신을 수습하고 있다. 하지만 솔직히 등여산이나 홀리 자신은 시신에는 눈길도 가지 않는다.
호발귀를 생각하는 측면에서 보면 해자수도 한 다리 건너 남일 뿐인 건가.
지금 해자수는 호발귀의 상태를 염려하기나 할까? 호발귀가 어떤 상태인지는 생각하지 않고 손속이 잔인해진 것만 탄식하고 있지 않나.
등여산과 홀리는 호발귀가 일으킨 혈겁은 보지 않는다. 더욱 짙어진 혈기를 염려한다. 이러다가 정말로 호발귀가 혈마 상태에서 빠져나오지 못할까 봐 마음이 조급해진다.
“살단, 호발귀를 유인하고 있어.”
등여산이 말했다.
“뭐라고? 그게 사실이야?”
홀리가 등여산에게 바싹 다가서며 말했다.
“여기서 죽은 다섯 명은 이쪽 길로 왔어. 그런데, 요 아래서 죽은 여섯 명은 저쪽 아랫길로 내려갔어.”
등여산이 산등성이, 갈라진 길을 가리켰다.
“아!”
홀리가 탄성을 토해냈다.
등여산 말이 맞는다. 무리에서 갈라져 산 밑으로 내려간 살단 무인들은 곧바로 산 아래로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방향을 틀어서 중간 산길로 접어들었다.
자신들을 일부러 호발귀 앞에 드러냈다.
죽을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다. 호발귀에게 노출되자마자 죽을힘을 다해서 산 아래로 쏘아 내려갔다.
물론 그런다고 호발귀의 마수를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들은 여지없이 절명했다.
“여기서 한번. 저기서 한 번. 두 번에 걸쳐서 열 명을 죽였어. 그 정도면 혈기를 채운 거지?”
그동안 경험에 따르면 호발귀는 이 정도 살상을 벌이면 개울을 찾아서 물을 마셨다.
등여산이 계속 말했다.
“그런데도 호발귀는 또 달려 내려가고 있어. 저 아래 사람이 또 있다는 거야.”
“살단 무인이 목숨까지 내놓을 정도라면 함정이 확실한데. 호발귀한테 함정을 파서 뭘 어쩌자는 거지?”
“화약이나 독을 쓸 수도 있죠.”
해자수가 말했다.
그들은 혈천방 귀문을 떠올렸다. 귀문 같은 경우에 기관진식과 화약을 버무려서 호발귀를 잡으려고 했다. 천살단이라고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말란 법은 없다.
“그런데 호발귀에게 화약이 통할까?”
해자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발귀 혈기를 정확히 모르니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하지만 화약을 설치했어도……
적어도 자신들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 같다. 앞에 화약이 매설되어 있다면 등여산은 당장 기분이 나빠진다. 위기를 느낄 것이다.
홀리는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질 것이고, 해자수는 앞에 철벽이 둘러쳐진 듯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아니다. 장담하지 못한다.
생기가 화약이 매설된 것도 알려줄 수 있을까? 화약은 아무런 기운도 내뿜지 않는데, 무기(無氣)도 감지할 수 있나?
이 부분은 직접 확인해봐야 한다. 지금은 장담하지 못한다.
“화약이라면 호발귀도 당할 수 있겠는데.”
홀리가 말했다.
그때다. 등여산이 무척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홀리. 호발귀, 어떻게 돌이킬 수 있을까?”
“글쎄. 모르지.”
“다시 한번 물어볼게. 호발귀, 돌이킬 수 있을까?”
등여산이 빤히 홀리를 쳐다봤다.
등여산의 눈에는 눈물이 촉촉이 젖어 있었다.
“너 지금!”
“나는 내려가지 않으려고.”
“뭐! 너 정말!”
“난 아무리 생각해도 호발귀를 돌이킬 수가 없을 거 같아. 혈마에서 벗어나게 할 자신이 없어. 계속 우리가 유인한다고 해도…… 호발귀는 계속 죽이잖아. 노루도 죽이고, 멧돼지도 죽이고, 호랑이도 죽이고. 눈에 닥치는 대로 죽이잖아. 죽인 다음에야 만족해하고 있어. 이건 악마인데…… 이 상태에서 벗어나게 할 자신이 없어.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홀리가 뒤에 있는 나무에 털썩 등을 기댔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거? 아무것도 없지.”
“그래. 저기가 호발귀를 잡을 함정이라면…… 충분히 준비했을 거야. 살단이 하는 일이니까. 난 여기서 그냥 지켜볼래.”
“그래……”
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휴우!”
해자수는 한숨만 크게 내쉬었다.
두 여자가, 호발귀를 그토록 연모하는 두 여자가 호발귀를 포기한다.
여인들은 지금 호발귀가 죽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과 여기에서 혈마의 인생을 끝냈으면 하는 두 마음을 함께 가지고 있다.
어떻게 할 것인가? 호발귀를 혈마에서 빼낼 수 없다면 여기서 죽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
“휴우!”
나오는 건 깊은 한숨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