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十九章 정관기변(靜觀其變) (4)
손철목은 사력을 다해서 치달렸다.
한쪽 옆에서 호발귀가 달려오고 있다. 산 정상을 향해 비호처럼 날아온다.
손철목은 깜짝 놀랐다. 산을 치올라오는 속도가 상상 이상으로 빠르다.
“정말 빠른데요!”
“저렇게 빠를 수도 있나?”
살단 무인들이 혀를 내둘렀다.
정말 저렇게 빠른 사람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저 속도라면 우리가 정상에 도착하기 전에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살단 무인이 보고했다.
‘아니. 그것보다 더 빨라. 아마 우리는 정상을 밟아보지도 못할 것 같은데. 오히려 우리 쪽을 향해서 치달려 올 거야. 충분히 그러고도 남아.’
손철목은 지금이라도 방향을 바꿔서 산 밑으로 뛰어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다.
자신이 그런데 살단 무인들은 어떨까? 단지 달려오는 모습만 봤는데도 싸우고 싶은 생각이 싹 가신다. 산에서 맨손으로 호랑이와 마주친 기분이다.
“가자!”
손철목은 하지 않아도 될 명령을 토해냈다.
정상을 향해 치닫는 중이다. 이미 가고 있다. 그런데도 고함을 내질렀다.
“저게 무슨 신법이지?”
뒤쫓아오던 살단 무인 중 한 명이 말했다.
“신법이 아닌 것 같아.”
“그렇지?”
모두 같은 의견으로 좁혀졌다.
호발귀는 그저 굳건한 다리와 엄청난 체력으로 무작정 질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자신들보다 훨씬 빠르다 그들은 비로소 혈마가 얼마나 무서운 자인지, 왜 다들 혈마라고 하면 치를 떠는지, 혈천방이 왜 당했는지 절실히 깨달았다.
무공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아직 싸워보지도 않고 너무 겁에 질린 소리를 하는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무인에게는 무인의 직감이 있다. 상대방을 제대로 못 읽은 때도 있지만, 대부분 직감이 맞는다.
쒜엑! 쒜에엑!
손철목과 살단 무인 열 명은 이를 악물고 신법을 펼쳤다.
산등성이는 길이 편하게 뻗어있다. 경사도 완만하다. 산에서 올라오는 길보다는 훨씬 편하다. 하지만 그 길이 매우 불편하고 위험하게 느껴졌다.
“미치겠네.”
살단 무인 중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손철목은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해도 늦어.’
호발귀와 충돌을 피할 수 없다.
호발귀보다 먼저 통과해서 미끼가 있는 곳으로 치달려 내려가야 하는데, 정상 부근에서 충돌하게 생겼다
호발귀는 이미 정상 부근에 거의 다 올라와 있다.
“너, 너, 너, 너! 너희 넷은 나 따라오고. 너희 여섯은 옆으로 빠져. 미끼가 어디 있는지 알지?”
“넷!”
“거기로 가!”
손철목이 예정에 없던 명령을 내렸다.
지금 모두 옆으로 빠지면 호발귀가 당장 달려든다. 그러면 미끼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격돌한다.
자신들을 치고, 다른 곳으로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다.
어떤 변수도 용납하지 않는다.
살단 무인들은 명령 속에 포함된 뜻을 안다. 손철목과 네 명이 호발귀를 막는 동안, 나머지 여섯 명은 산 정상과 미끼 사이로 파고든다.
미끼 있는 곳으로 가라는 말이 아니다. 호발귀의 속도를 고려하면 거기까지 가지 못한다. 정상과 미끼 중간 부근에서 모습을 드러내어 호발귀를 유인해야 한다.
이 명령은 손철목을 포함해서 살단 무인 열 명이 모두 죽는다는 뜻이다.
“부단주님!”
떨어져 나가는 여섯 명이 손철목을 쳐다봤다.
“살아라.”
“넷! 그럼 저희는!”
쉬잇! 쉬이이이잇!
여섯 명이 바로 옆으로 빠졌다.
어쩔 수 없다. 살단은 자신의 목숨보다도 임무 완수를 우선으로 여긴다. 지금이 그런 상황이다. 임무를 완수하다 보면 죽는 일은 항상 일어난다.
죽음에 연연하지 말고 임무를 완수하라. 하지만 살 방법이 생긴다면 악착같이 살아라.
부단주 손철목은 평소에 하던 말을 다시 한 것뿐이다.
처억!
호발귀가 산 정상으로 올라왔다.
예상했던 대로 손철목이 죽을힘을 다해서 뛰었지만, 호발귀보다 느렸다.
원래 계획에는 없던 차질이 생겼다.
쒜엑! 쒜에엑!
손철목과 무인 네 명은 거침없이 호발귀를 향해서 마주쳐갔다.
이미 대책은 세워놨다. 단순하게 호발귀만 유인하면 끝날 줄 알았던 임무였지만, 이런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어쨌든 그렇게 됐다.
그래도 임무는 완수한다!
“검독(劍毒)!”
손철목이 소리쳤다.
살단 무인들은 즉시 품에서 옥병을 꺼내 물약을 검집 속에 흘려 넣었다.
치익! 치이익!
검집에서 하얀 연기가 뭉클 피어났다.
부시독이 검집을 타고 안으로 흘러 들어갔다. 그리고 검에 묻은 불순물을 태웠다.
검에는 인간의 피가 묻어있다. 살을 베면서 묻은 기름기도 있다. 거의 매일 검을 손질하지만, 여전히 그런 부분들이 미세하게나마 남아있다.
부시독은 그런 여분의 기름기까지 말끔히 썩혀버린다.
“한 호흡만 참아!”
손철목이 소리쳤다.
그 말에 살단 무인 모두가 이를 꽉 깨물었다.
아직 검은 뽑지 않았다. 검을 뽑으면, 바로 부시독이 튀어나온다. 검에 묻은 독액이 사방을 퉁겨나간다.
자칫하면 옆에 있는 사람이 맞을 수도 있다. 또 재수 나쁘면 검을 뽑으면서 자신에게 부시독이 튈 수도 있다.
이 모든 점을 다 고려해야 한다.
검을 뿜으면서 자신이 당할 가능성이 이 할이나 된다. 옆 사람에게 튀길 가능성이 삼 할이다.
온전히 상대방을 공격할 가능성은 오 할밖에 안 된다.
검독은 주변 누군가에게는 피해를 끼치면서 검을 써야 한다.
한 호흡…… 자신에게 부시독이 튀었을 때, 극심한 고통이 일어난다. 생살이 썩어들어가는 고통은 끓는 기름 속에 풍덩 빠진 고통에 비견된다.
그 고통을 한 호흡만 참으라는 것이다. 한 호흡만 참고 호발귀를 향해서 검을 쓴다.
그런데 무섭게 달려오던 호발귀가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그들을 쳐다보며 검을 들어 올렸다.
드디어 공격하려는가!
그 순간, 손철목은 자신이 크게 잘못 생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호발귀가 검을 쳐들자, 갑자기 진기가 연기 꺼지듯 사라졌다. 손발에서 힘이 팍 풀려나간다.
열흘 동안 피죽 한 그릇 먹지 못한 사람처럼 무기력해졌다.
그리고 몸이 질질 끌려간다.
“옷!”
손철목은 깜짝 놀라서 저항을 시도했다.
“앗! 이거!”
“뭐야? 왜 이래?”
살단 무인들이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다. 그야말로 최선을 다해서 저항했다.
소용없다. 어떤 저항을 해도 여전히 끌려간다.
호발귀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검을 든 채 차분하게 서 있다. 어떠한 행동도 취하지 않는다. 그런데 자신들은 동아줄에 묶인 죄인처럼 질질 끌려가고 있다.
아! 이런 거였구나!
마을에서 죽은 사람들!
호발귀가 섭혼술을 쓴다는 말이 있다. 일부는 최면의 일종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말들은 틀렸다. 섭혼술이나 최면에 당하면 정신을 잃는다. 의식이 멀쩡하지 않다. 하지만 지금은 의식이 너무도 또렷하다. 너무 맑아서 어떻게 저항해야 할지 머리가 획획 돌아간다.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손철목이 말했다.
살단 무인 모두 자신들이 무형의 철삭에 묶였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여기서 벗어나려고 노력을 해봤지만, 진기 자체가 일어나지 않으니 속수무책이다.
“검독을 쓴다. 지금 바로! 되겠지?”
“네!”
살단 무인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물었다.
호발귀와의 거리는 이제 겨우 육칠 장으로 좁혀졌다. 확! 달려들면 단숨에 검권(劍圈)이다.
“발검!”
스릉!
손철목이 검을 뽑았다. 살단 무인도 검을 뽑았다. 확! 잡아뽑지 않고 매우 느리게, 자신이나 옆 사람에게 튀지 않게 조심하면서 슬그머니 뽑았다.
철삭에 묶여서 끌려가고 있으니 다급하게 뽑을 필요가 없다.
“간다!”
손철목은 살단 무인들에게 신호를 보낸 후, 즉시 신형을 허공으로 띄웠다.
살단 무인 중 한 명이 앞으로 달려 나와 손철목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다른 세 명은 두 명의 뒤를 바싹 따라붙었다. 두 명이 앞에서 치고, 세 명이 뒤를 잇는다.
앞선 사람이 가림막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뒷사람은 더욱 은밀한 검초를 전개할 수 있다.
검을 쓴다. 호발귀! 어디 네가 얼마나 빠른가 보자!
쒜엑! 쒜에엑! 쒜에엑!
평소에 수련한 대로 공격 진형을 이루고 솟구쳤다. 한데,
“웃!”
손철목은 높이 뛰지 못하고 급히 내려섰다.
아예 공중으로 솟구치지도 못했다. 두 다리에서 힘이 쭉 풀리는 바람에 도약할 힘을 잃어버렸다.
도약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림도 없다.
“이게?”
손철목이 땅으로 내려서며 비틀거렸다.
그와 함께 신형을 날렸던 살단 무인도, 뒤따라서 공격하려고 세 명도 마찬가지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진기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허!”
살단 무인이 기가 막혀서 헛바람을 토해냈다.
“이렇게 되면 방법은 하나다. 죽을 때 친다.”
“네!”
살단 무인들이 대답했다.
호발귀가 검을 쳐올 때, 검이 몸에 틀어박힐 때, 그 마지막 한순간에 검을 쳐낸다.
설마 그 정도야 할 수 있겠지. 아무리 진기가 빠졌다고 해도 동귀어진까지는 할 수 있겠지.
저벅! 저벅! 저벅!
손철목과 살단 무인들은 오히려 호발귀를 향해 걸어갔다. 어차피 검을 부딪쳐야 한다면 굳이 억지로 끌려갈 필요가 없다. 자신들이 적극적으로 앞으로 걸어간다.
‘일 장!’
거리가 무척 좁혀졌다. 바로 검권에 들어섰다.
그때, 손철목은 호발귀의 눈을 봤다.
‘아! 악마!’
호발귀의 눈에서는 핏빛 혈광이 뿜어져 나왔다. 얼굴은 무표정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다만 생명을 빼앗고자 하는 혈기만큼은 확실히 읽힌다.
이건 살기가 아니다. 혈기다. 살기라면 저항이라도 할 수 있다.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칠 것이다. 하지만 죽을 수밖에 없는 어둠이 몰려온다면…… 저항도 하지 못한다.
“으!”
손철목은 부들부들 떨었다.
누군가한테 이토록 겁을 집어먹기는 처음이다. 주치균도 상당히 두렵지만, 호발귀에게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호발귀는 말 그대로 악마다.
평생 쌓았던 무공이 일시에 사라진다. 저항할 수가 없다. 어떤 무공도 소용이 없다. 이게 혈마인가. 이백 년 전, 북제도 이런 검에 당한 것인가.
‘거리가…… 됐어.’
검만 들어 올리면 상대방을 칠 수 있는 거리가 되었다. 호발귀의 검이 코끝에 닿았다.
순간, 손철목은 마지막 사력을 다해서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호발귀를 향해 발악하듯이 뻗어냈다.
파앗! 파파파팍! 파파파파팍!
순식간에 검광이 난무했다.
손철목은 일 검만 뻗어냈다. 나머지 검초를 호발귀가 쳐낸 것이다.
손철목을 짓이긴다. 살단 무인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연속적으로 타격한다. 검이 몸을 그을 때마다 사지가 떨어져 나갔다.
“아아아악!”
“크아아악!”
손철목은 비명을 쏟아냈다. 옆에 있던 살단 무인도, 뒤따르던 무인도 일시에 비명을 토해냈다.
그들이 사력을 다해서 떨쳐내려던 검독조차 소용없다.
그들은 다른 손에 옥병을 들고 있었다. 검을 쓸 수 없으면 옥병을 깨트려서라도 호발귀에게 타격을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깨뜨리지 못했다.
검이 너무 아파서…… 몸이 너무도 빠른 순간에 찢겨나가서…… 깨뜨릴 생각조차 잊어버렸다.
저항이라는 말은 무의미하다.
호발귀와는 무공으로 싸우는 것이 아니다. 괴물한테 끌려가서 도살당한다.
파파파팍! 파파파파팟!
다섯 명은 순식간에 살점 덩어리가 되어서 흩뿌려졌다.
“크크큭! 크크크큭!”
다섯 명을 죽인 호발귀가 산을 뛰어 내려가는 무인 여섯 명을 쏘아봤다.
벌써 다음 목표를 정했다.
호발귀는 천천히 산에서 내려갔다.
다섯 명을 죽여서 혈기를 충분히 취했는지 서둘지 않았다.
어차피 잡아 놓은 먹이라고 생각하나? 전혀 서둘지 않고 천천히 산에서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