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十九章 정관기변(靜觀其變) (2)
살단 무인들은 십이비자가 물러선 곳까지 후퇴했다.
부단주가 후퇴선을 지정해 주었기 때문에 두말하지 않고 얌전히 물러섰다.
그런데…… 십이비자가 낯선 자에게 무릎을 꿇고 있다.
사내는 매우 침착해 보인다. 나무 그늘에 앉아서 단검으로 사과를 깎아 먹고 있다.
십이비자는 그 앞에 무릎을 꿇었는데, 숨소리도 내지 않는다.
“단주님!”
손철목이 청년에게 달려와서 즉시 예를 취했다.
“이놈들이야?”
“네.”
손철목이 자신 있게 대답했다.
손철목이 양성한 살단은 전임 살단주의 살단보다도 강하다. 아주 강한 자들만 추렸다.
“피해는?”
사내, 주치균은 살단 무인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넷입니다.”
비로소 주치균은 살단 무인들을 쳐다봤다.
살단 무인 중에는 아는 얼굴이 있다. 하지만 대부분이 처음 보는 자들이다.
주치균이 연공에 들어간 후에 입단한 자들이라서 낯설 수밖에 없다.
낯설기는 살단 무인도 마찬가지다. 눈앞에 건방지게 앉아 있는 청년이 살단주라는 것은 알겠다.
부단주가 허리를 납작 숙이는 것을 보니 직위가 꽤 높은 것 같다.
하지만 살단 무인들 눈에는 주치균이 한낱 골방 샌님으로 보였다.
주치균의 기도는 매우 미약하다. 강성한 진기가 엿보이지 않는다.
이자가 살단을 이끄는 살단주라면 다른 것은 몰라도 무공 면에서는 부단주에게 먹힌다.
살단 무인들의 눈빛에서는 주치균을 무시하는 듯한 표정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그들에게는 손철목만 주인일 뿐 주치균은 주인이 아니다.
“풋!”
주치균이 살단 무인들의 표정을 보고 피식 웃었다.
“부단주.”
“네!”
“이놈들 눈빛이 왜 이 모양이야?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잖아? 똑바로 안 가르칠래?”
그때다. 살단 무인 중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어디서 굴러먹은 개뼈다귀가 주둥이만 살아서.”
그의 음성은 미약했지만, 주위에 있는 사람이 모두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또렷했다.
순간, 부단주가 사색이 되어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똑바로 가르치지 못해서……”
슛!
부단주의 음성은 한줄기 가느다란 파공음에 묻혔다. 아니, 파공음이 들리자 부단주가 말을 멈췄다. 즉시 고개를 돌려서 말이 터져 나온 쪽을 돌아봤다.
퍼억!
어느새 검이 허공을 날았다. 그리고 정확하게 방금 말한 무인의 관자놀이에 틀어박혔다.
왼쪽 관자놀이를 뚫고 들어가서 오른쪽 관자놀이까지 일직선으로 관통했다.
단 일수에 머리를 꿰뚫어버렸다.
풀썩!
방금 입을 열었던 자가 그대로 무너졌다.
“손철목.”
“네.”
“내가 말했잖아.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개새끼는 필요 없다고. 자꾸 두말하게 할래?”
“죄송합니다!”
“똑바로 가르쳐.”
“넷! 알겠습니다!”
손철목이 급히 허리를 숙였다.
주치균의 일수는 모두를 놀라게 했다. 살단 무인뿐만이 아니고 부단주 손철목조차도 깜짝 놀랐다.
주치균은 예전의 그가 아니다. 검신 구학봉의 비사칠초만 해도 거의 무적에 가깝다. 어린 나이에 검벽주가 되어서 살단주와 어깨를 나란히 한 것만 봐도 무공 높이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훨씬 강해졌다. 말도 못 하게, 소름이 쫙 끼칠 정도로 강해졌다.
살단 무인치고 무공이 약한 자는 없다. 그래서 주치균의 무공을 단번에 알아봤다.
주치균은 검이 뽑을 때 소리를 흘리지 않았다. 언제 검이 뽑혔는지 알지 못했다.
검을 발출할 때도 기척이 없었다. 검을 손에서 떠나보냈는데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검이 허공을 나른 후에야 공격이 시도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비명이 터졌을 때 비로소 경각심을 느꼈고, 모두가 ‘앗!’하고 놀랐을 때는 이미 상황이 끝난 후였다.
주치균은 입으로 담을 무공이 아니다.
살단 무인들이 무리 지어서 달려들어도 주치균을 잡아낸다고 보장하지 못한다.
“으으!”
살단 무인들은 어금니만 꽉 깨물 뿐, 도발하지 못했다.
“비자.”
“네.”
십이비자가 즉시 대답했다.
“인근에 마을이 있나?”
“한 시진 거리에 있습니다.”
“비자 따라가서 열 명만 잡아 와.”
“열 명이라면 저희 얘들을……”
“……”
주치균이 사과를 깎아 먹다 말고 손철목을 쳐다봤다.
“아! 예. 죄송합니다.”
손철목이 주치균의 말뜻을 알아듣고 즉시 허리를 숙였다.
살단주는 열 명을 이용해서 호발귀를 유인할 생각이다. 호발귀에게 미끼로 내주는 것이다. 그러니 호발귀에게 던져진 자들은 죽는다. 살단 무인을 써도 마찬가지다. 호발귀에게는 무인이나 일반인이나 하등 다르지 않다.
“언제까지 준비될까?”
“가는 데 한 시진, 오는 데 한 시진. 한 시진 반이면 됩니다.”
계산이 이상하다. 한 시진 더하기 한 시진이면 두 시진인데 한 시진 반이라고 말한다. 반 시진을 앞당기겠다는 뜻이다. 그야말로 죽을힘을 다해서 다녀와야 한다.
“오늘은 쉴 거야. 천천히 다녀와.”
주치균이 먹다 남은 사과를 던져버렸다. 그리고 살단 무인들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뭐해? 쉴 자리 준비하지 않고. 이런 것도 말해야 하나? 너 정말 어떻게 가르친 거야!”
정확히 두 시진 후, 살단 무인들이 누군지 모를 열 명을 어깨에 메고 달려왔다.
양민은 마혈이 제압되어서 꿈쩍도 하지 못했다.
살단 무인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잡아 왔다. 열 명 중 넷은 여자였고, 두 명은 노인이었다.
“십이비자.”
“네.”
급하게 인근 마을까지 살단 무인들을 안내하고 돌아온 십이비자가 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십이비자는 비보전주가 아니면 명을 들을 이유가 없다. 한데, 이상하게도 새파란 애송이 주치균의 말은 거역하지 못하겠다. 거역하기에는 너무 두렵다.
“가서 호발귀를 쫓아.”
“쫓는 것은 언제든 가능합니다. 따라가실 준비가 되면 즉시 모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미끼를 던질 장소도 모색해보고.”
“이해가 안 돼서 그렇습니다만…… 사실을 정확하게 알면 장소를 고르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미끼를 던진 다음에는 어떻게 하시려는지?”
십이비자가 주치균을 쳐다봤다.
호발귀에게 미끼를 던져주면, 호발귀가 쫓아온다. 이것은 하늘을 하늘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매우 당연하다.
다른 변수가 생길 수 없다. 그러면 그다음은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호발귀가 쫓아오면 도주해야 하는데, 뭐하러 불러들이나.
주치균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혈마가 미끼를 치는 동안 난 혈마를 잡는다. 됐어?”
십이비자가 멍한 표정으로 주치균을 쳐다봤다.
“지금 호발귀를 잡으신다고……?”
호발귀가 보이는 신위는 거의 무적이다. 호발귀는 무신이라도 된 듯 날뛰고 있다.
누구에게 잡힐 사람도 아니고, 잡을 방법도 없다. 오죽하면 혈천방이 박살 났겠나.
그런데 주치균은 혈마를 마치 동네 강아지 보듯이 하찮게 말하고 있다.
‘이건 마치 다 잡아놓은 먹이처럼 말하잖아?’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알겠습니다. 그런 계획하에 장소를 물색해 보겠습니다.”
스으으읏!
십이비자가 신형을 날려 사라졌다.
“너희 둘, 따라가.”
손철목이 살아남은 정탐꾼 두 명에게 말했다.
두 사람을 왜 십이비자와 동행시키는지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안다.
그들은 산을 오가면서 연락을 맡는다. 십이비자가 장소를 물색하면 즉시 말해야 한다.
“십이비자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손철목이 주치균에게 지도를 펼쳐 보였다.
“호발귀는 이 산 정상으로 향하고 있답니다. 십이비자가 선정한 장소는 여기입니다.”
손철목이 지도를 짚었다.
주치균이 흥미로운 듯 지도를 유심히 들여다봤다.
십이비자는 산 너머에 있는 깊은 골짜기를 선정해왔다.
골짜기가 호리병처럼 생겨서 입구만 틀어막으면 빠져나갈 곳이 없다. 호발귀를 막을 수 있다는 전제가 깔리지만…… 매복하기는 딱 좋은 곳이다.
“미끼를 여기에 놓아라.”
주치균은 손철목이 가리킨 곳을 주시했다.
‘호발귀를 잡을 곳.’
손철목은 주치균에게서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눈빛을 찾아냈다.
지금 주치균은 긴장하지 않고 있다. 미끼를 풀어놓는 살육전인데, 매우 즐기고 있다.
“호발귀가 산 정상에만 올라서면 바로 미끼를 찾아내겠군.”
“네. 정상에서는 골짜기 상황이 환히 보입니다.”
“그럼 안 오지.”
“네?”
“그 여자가 호발귀를 끌어내고 있다면서? 그러면 호발귀가 보기 전에 그 여자가 먼저 볼 거 아닌가. 그 여자가 보면 단번에 함정이라는 것을 눈치챌 거야.”
주치균은 책사 등여산을 ‘그 여자’라고 지칭했다.
손철목은 묵묵히 지도만 쳐다봤다.
그는 주치균이 어떤 식으로 호발귀를 상대할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말을 할 수가 없다. 어떻게 싸울지 짐작조차 못 하니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나.
“일단 미끼는 여기다 둬. 십이비자가 선정한 곳이면 틀림없을 거야. 문제는 호발귀를 산 정상까지 끌어온다는 것인데…… 이건 네가 맡아.”
“알겠습니다.”
손철목이 대답했다.
“뭘 알았다는 거야?”
“네?”
“무조건 대답만 하지 말라고. 얘들 열 명 정도 데리고 이쯤에 매복해 있어.”
주치균이 이상한 곳을 가리켰다.
호발귀가 달려오는 쪽이 아니다. 산 정상으로 넘어가는 길목도 아니다.
멀리서 감시할 수는 있지만 직접 어떤 행동을 유도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이곳에 있다가 그 여자가 지나가면 보내. 바로 뒤따라서 혈마가 올 텐데, 그때 모습을 드러내. 이쯤까지 달려내려 가라고. 절벽 위쪽이니까 위험하지는 않아.”
“네.”
손철목이 지도를 뚫어지게 봤다.
주치균 말대로 움직이면 절벽 위에서 호발귀를 내려다보게 된다.
“혈마도 너희를 어떻게 하지는 못해. 하지만 너희를 봤으니 방향은 틀 거야.”
“아! 네.”
손철목은 주치균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호발귀가 방향을 틀면 그때부터 유인한다. 십여 명이 일제히 움직이면 절대로 등여산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풍부한 먹잇감을 찾아서 자신들만 쫓아온다.
“저희는 이리로.”
주치균이 산등성이를 가리켰다.
“아슬아슬해. 너희가 이리 달려오는 것하고, 호발귀가 쳐 올라오는 것 하고 비슷해. 자칫하면 충돌하겠는데?”
호발귀가 움직이는 거리는 손철목이 움직이는 거리보다 배는 멀다. 더욱이 손철목은 산등성이를 따라서 치달리고, 호발귀는 산을 올라와야 한다.
그런데도 주치균은 호발귀가 손철목을 따라잡는다고 봤다.
“충돌해도 일부 희생은 생기겠지만 전부 당하지는 않을 겁니다. 잘하면 혈마를 잡을 수도 있고요.”
스릉!
손철목이 검을 뽑아서 주치균에게 보여주었다.
검신에는 물방울처럼 생긴 작은 구멍 다섯 개가 음각되어 있다. 검첨에서부터 검 자루까지 일정하게 간격으로 정교하게 파놓았다.
원래 검을 만들 때부터 파놓은 구멍은 아니다. 나중에 정으로 쪼아서 파놓은 흔적이 뚜렷하다.
“이 구멍에 부시독을 넣고 검을 쳐내면, 부시독이 안개처럼 흩뿌려집니다. 천하의 그 누구도 쉽게 다가서지 못합니다. 죽이는 것은 몰라도 막는 것이라면 할 수 있습니다.”
손철목이 자신 있게 말했다.
“좋아. 하지만 호발귀를 막을 필요는 없어. 너희는 곧바로 미끼가 있는 곳까지 달려와. 그래야 호발귀가 따라오지. 미끼를 지나친 다음, 호발귀가 미끼를 건드릴 때, 너희는 다시 돌아서 위로 올라간다. 무슨 말인지 알지?”
“네.”
호발귀를 뒤쫓아오는 자들을 막으라는 소리다.
등여산, 홀리, 해자수를 막아야 한다.
“내가 호발귀를 잡으면 그때는 막을 필요 없어. 길을 터줘. 후후! 그 세 명은…… 내 상대가 안 돼. 내가 잡는다.”
“네. 알겠습니다.”
손철목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