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十八章 무생(無生) (1)
‘안 돼……’
등여산은 한계점을 느꼈다.
생기가 갑자기 사라졌다. 처음에는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순간, 그야말로 눈 깜짝할 순간에 희열이 사라지고 피곤함이 몰려왔다.
즐겁게 뛰자!
희열을 일으켜서 피곤함을 밀어내자, 다시 두 다리에서 힘이 넘쳐흘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모든 게 무너졌다.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이 피곤하다. 두 발이 무거워서 떼어놓기가 힘들다. 희열을 일으키려고 하지만, 피곤함에 짓눌려서 어떤 감정도 치밀지 않는다.
오직 푹 쉬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생기의 한계점이다.
꽈아아아아!
호발귀가 일으킨 거센 돌풍이 사정없이 휘몰아쳤다.
사실, 그녀는 진작 이런 한계점을 느꼈다. 하지만 그때마다 호발귀가 사정을 봐줬다.
아니다. 호발귀가 봐준 것이 아니라 천지자연이 도와주었다.
호발귀는 그녀를 쫓아오는 와중에도 많은 생명체를 죽였다.
멧돼지가 겁 없이 달려들다가 갈기갈기 찢겨 죽었다. 새끼 곰도 한 마리 걸려들었고, 늑대 대여섯 마리도 혈마 혈기의 제물이 되었다.
늑대 무리가 전력으로 펼친 마영심도 십칠 식에 걸려서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그리고 다시 등여산을 쫓아왔다.
산에 사는 짐승들이 그녀 대신에 생명을 잃은 덕분에, 그녀는 잠시 숨을 돌렸다.
짐승들이 일부러 희생한 것은 아니다.
호발귀는 치달리는 중에도 사정권 안에 들어온 생명체를 끌어당긴다. 그리고 죽인다.
짐승들을 죽이는 행동은 거의 순간적이다. 고개 한 번 돌리는 사이면 늑대 무리가 죽어 나간다. 하지만 그 정도의 시간이라도 벌어주었기 때문에 계속 달릴 수 있었다.
호발귀는 놀라울 만큼 빠르다.
‘크게 잘못 생각했어.’
맞다. 호발귀는 그녀가 감당할 사람이 아니다. 이런 식으로 혈마를 유인하면서 평생 쫓고 쫓기는 놀이를 하려고 했다니 얼마나 터무니없는 생각인가.
호발귀는 너무 강하다.
‘이제 더는 무리야.’
그녀는 더 이상 한 걸음도 걸을 수 없다고 느꼈다. 단지 느낌만 그런 게 아니다.
정말 움직이지 못하겠다. 두 다리가 철근을 달아놓은 듯 무겁다.
그녀는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는 더 못가.’
희열은 완전히 사라졌다. 온몸에 피곤함만 몰아친다.
꽈아아아아!
하늘을 가득 메우는 돌풍이 다가왔다. 호발귀가 달려올 뿐인데, 돌풍이 부는 것처럼 보였다.
불행 중 다행인가? 비록 악마로 변한 모습이지만, 호발귀의 얼굴이 보였다.
호발귀는 살인마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두 눈에서는 혈광이 진하게 뿜어진다. 온몸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다. 온몸이 피투성이다.
검도 피에 젖어 찐득거린다. 아예 검 전체가 검게 변해 있다.
‘저런 검으로는 잘 베어지지도 않을 텐데.’
등여산은 자신이 당한다는 생각보다도 잘 들지 않은 검으로 사람을 죽이는 호발귀가 안쓰러워 보였다.
저렇게 무딘 검으로 살생을 벌였다. 검으로 벤 것이 아니라 힘으로 썰어낸 것과 다르지 않다. 베는 사람도 힘들지만 당하는 생명체도 고통스러웠다.
‘얼굴을 닦아주고 싶어.’
등여산은 호발귀를 보면서 활짝 웃었다.
호발귀는 누가 뭐라고 해도 살인마다. 등여산을 쳐다보는 눈에 잔인한 살광이 담겨있다. 그런데도 등여산은 호발귀를 보자마자 웃음부터 나왔다.
너무 반갑다!
도망 다닐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정말로 이 사람이 내 남자였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잘 있었어?”
등여산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호발귀는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다.
쒜에에엑!
호발귀가 덮쳐온다.
손에 들고 있는 뭉툭한 검으로 등여산을 공격한다. 검이 흐르는 형태를 보면 제일 먼저 머리를 가격할 것 같다.
바로 이어서 목을 치고, 가슴을 친다. 그리고 다리까지 일시에 쳐낸다.
등여산은 이 검식을 알고 있다.
‘무정삼절 제일식 멸천겁.’
등여산의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그래도 호발귀 손에 죽을 수 있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자신이 호발귀를 죽이지 않고, 그의 손에 죽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된다.
정녕 호발귀를 죽이는 것은 싫었다.
그때, 갑자기 산에서 산새 한 무더기 날아와 호발귀를 향해 부리를 들이밀었다.
아니, 산새들은 결코 호발귀 앞으로 날아들고 싶지 않았다. 호발귀가 다가서자 혈기 사정권이 저절로 형성되었다. 산새가 돌풍에 휩쓸린 낙엽처럼 빨려들었다.
쒜엑! 쒜에엑! 쒜엑!
호발귀가 산새들을 쳐내기 시작했다.
한 마리, 두 마리…… 두둑…… 두둑…… 두두둑…… 참새들이 핏덩어리가 되어서 떨어졌다.
“뭐해! 정신 빼놓고 앉아서!”
홀리 음성이 귓전을 강하게 때렸다.
환청인가? 잘못 들었나?
아니다. 잘못 듣지 않았다. 갑자기 강한 힘이 목덜미를 낚아채더니 냅다 내던졌다.
쉬익!
그녀의 신형이 가랑잎처럼 날아갔다.
등여산은 생기를 잃은 상태다. 누가 다가오는 것을 감지하지 못한다.
진기는 여전히 남아있으니 기척 정도는 감지할 수 있지만, 홀리가 사용하는 생기는 감지하지 못한다.
그녀는 홀리가 다가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이제 내가 맡아. 가서 쉬어! 해자수!”
“넵!”
해자수가 잽싸게 달려 나와 등여산을 낚아챘다. 그리고 옆으로 슉! 빠졌다.
“잘 따라와! 나는 얘처럼 주저앉고 싶지 않아!”
홀리가 버럭 소리 질렀다.
“그게 부탁입니까! 부탁을 하라고요! 부탁을!”
“내 다음 차례는 해자수 너야! 정신 차려!”
“아! 넵! 죄송합니다!”
해자수가 즉시 머리를 조아렸다.
홀리는 해자수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그녀는 호발귀를 피해서 정신없이 치달리기 시작했다. 호발귀가 등여산 쪽으로 향하면 곤란하기 때문에 약간 방향을 틀어서 도주했다.
호발귀가 홀리는 쫓아간다.
홀리는 등여산이 그랬던 것처럼 말 한마디 던질 수 없었다.
호발귀와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직접 경험한다. 멀리서 지켜보는 것이 아니다. 한순간만 삐끗하면 바로 죽임을 당한다. 상당히 처절해졌다.
호발귀에게 쫓기는 심정이 어떤지는 직접 당해보지 않고는 말로 설명하기가 곤란하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정말 열심히 도주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열심히만 도주하면 괜찮을 것처럼 보인다. 결국은 생기 차이로 따라잡히겠지만 한동안은 괜찮지 않을까 싶다.
천만에! 막상 쫓기는 처지가 되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바로 등 뒤에서 호발귀의 숨결이 느껴진다. 차가운 검의 감촉이 생생하게 감지된다.
혈기와 생기!
호발귀가 사용하는 것도 천지의 기운이고, 홀리가 사용하는 것도 같은 기운이다. 서로 같은 기운을 사용하기 때문에 연결도 부드럽게 이어진다.
살기가 더 강하게 느껴진다는 거다.
더욱이 호발귀는 뒤를 추격해 오면서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살상한다. 날짐승, 들짐승 모두 살육한다.
그때마다 목숨을 떨구는 생명체의 절규가 공포로 변해서 등짝을 후려친다. 너도 곧 죽을 것이라는 협박이 된다. 절대로 호발귀를 떼어놓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은 이 사람에게 죽을 것이라는 좌절감이 깊이 스며든다.
호발귀에게 쫓긴다는 것은 단순한 도주가 아니다. 죽음 속에서 탈출하는 과정이다.
‘절대 마을로 데려가면 안 돼. 사람이 없는 산으로. 가급적이면 더 깊은 산으로.’
슉슉!
홀리는 사력을 다해서 도주했다.
“우와! 빠르네!”
해자수가 놀라서 입을 쩍 벌렸다.
홀리의 호발귀의 추격전이 상상 이상으로 빠르다. 혈기 사정권에 근접해서 살펴보니 조금 멀리 떨어져서 봤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공포감이 치솟는다.
“해자수님. 나 좀 쉬어요.”
등여산이 힘든 음성으로 말했다.
“아, 예.”
해자수는 얼른 등여산의 완맥부터 잡았다.
몸에 이상은 없다. 진기도 충실하다. 다만 너무 무리한 탓에 탈진 증세가 일어나고 있다.
“홀리가 위험해요. 해자수님은 어서 쫓아가요. 저는 좀 쉬었다가 쫓아갈게요.”
“뭐하러 그럽니까? 쉬는 것은 제 등에서.”
해자수가 등여산에게 등을 보이며 앉았다.
“그래도 될까요?”
“다른 건 몰라도 우리 은인문 놈들이 달리는 것 하나는 빼어나죠. 아씨, 충분히 따라가니까 걱정하지 마십쇼. 책사님은 뭐 별로 무겁지도 않고. 킥!”
“그럼 실례할게요.”
등여산은 해자수에게 업혔다.
할 수만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서 쉬는 것이 낫다. 물론 바로 등에서 내려와야 한다. 홀리 다음에 해자수가 뛰어야 한다면 해자수도 쉴 시간이 필요하다.
“그럼 갑니다!”
쒜에에엑!
해자수가 쾌속하게 호발귀를 쫓아갔다.
등여산은 해자수 등에서 눈을 고요히 감았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에 집중했다.
희열이 일어나 피곤함을 밀어내야 한다.
자연적으로 피곤한 몸이 풀리고, 희열이 감지될 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
지금 그녀는 너무 피곤해서 거의 혼절 직전이다.
이 피곤함을 달래려면 하루 정도는 푹 쉬어야 한다. 그럴 시간이 없다.
그러니 생기를 일깨워서 피곤함을 밀어내야 한다.
하지만 몸이 너무 피곤하면 희열이 떠오르지 않는다. 호발귀 앞에서 경험해봐서 안다.
호발귀를 보고 기쁜 마음이 일어났는데도 생기가 일어나지 않았다.
생기와 분리된 기쁨이 찾아왔다. 생기를 몰랐을 때 느꼈던 순수한 기쁜 마음이다.
생기를 동반한 희열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 희열도 순수하다. 순수하지 않으면 생기를 일으키지 못한다. 온전한 기쁨 속에 잠겨야 한다.
몸이 한계점에 이를 정도로 피곤하면 기쁨이 느껴지더라도 생기를 사용할 수 없다.
등여산은 일단 눈부터 붙였다.
잠을 청한다. 잠시라도 잠을 자서 피곤한 몸과 마음을 달랜다.
극한에 이른 몸을 조금 아래로 끌어내려야 한다. 극한 상태만은 벗어나야 한다.
“해자수님 반 시진만 있다가 깨워줘요.”
해자수는 등여산이 하는 말을 들었다.
“넵! 그럽죠. 안심하시고 푹 주무시길!”
쒜에에엑!
해자수가 치달렸다.
등여산의 입가에 미소가 베였다.
마음이 즐겁다. 다시 즐거운 놀이가 시작되었다.
호발귀가 홀리를 쫓아간다. 해자수와 자신이 뒤를 쫓고 있다. 이 얼마나 즐거운 놀이인가.
희열이 일어나면서 피로가 가셨다.
‘지금까지는 내가 쫓겼는데, 이제는 내가 쫓아가네?’
등여산은 호발귀의 등을 보면서 빙긋 웃었다.
얼마나 즐거운 놀이인가. 평생 이렇게 쫓고 쫓기면서 지내는 것도 재미있지 않나.
희열은 최악의 상황까지도 즐거운 상황으로 바꿔준다.
“해자수님, 이제 됐어요. 내려주실래요?”
“아이구, 무슨 말씀을. 조금 더 쉬세요.”
“아니요. 다음은 해자수님 차례잖아요. 해자수님도 체력을 아껴야 해요. 그리고 저도 활력이 필요하고요. 멀리서 쫓는 거니까 천천히 움직여 볼래요.”
“그러시겠습니까?”
해자수가 즉시 그녀를 내려놓았다.
그들은 일정한 간격을 두고 홀리를 쫓아갔다.
“아씨가 아직 지친 것 같진 않죠?”
“아뇨. 바로 바꿔야 해요. 조금 더 지체하면 완전히 무너져요. 조금 여유가 있을 때 바꿔요.”
“그럼 제가 바로.”
해자수가 홀리와 교대하기 위해서 신형을 쏘아내려고 했다.
그때다. 호발귀가 추격을 포기하고 물가에서 엎드려 물을 먹기 시작했다.
호발귀가 쉰다.
쒜엑! 쒜에엑!
해자수와 등여산은 단숨에 멀리 돌아서 홀리에게 다가섰다.
“허억! 헉! 헉!”
홀리는 두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곁눈질로 보면서 급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씨, 해보니까 어때요?”
“아! 미치겠어. 이 짓을 평생 하자고?”
홀리가 혀를 내밀어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면서 말했다.
“내가 잘못 생각했지? 방법을 생각해 볼게. 하지만 당분간은 이 방법밖에 없어. 이러면서 우리 생기도 키우는 중이니까.”
“또 뭐 강이 어쩌고저쩌고 그런 말 하려고? 아! 우선 좀 쉬고 보자. 나, 한 마디도 못 하겠어.”
홀리가 두 다리를 쭉 펴고 벌렁 드러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