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혈마전인-283화 (283/500)

第六十七章 사마사(死魔死) (3)

“어떻게 할까?”

홀리가 말했다.

호발귀는 죽이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 놓기도 어렵다.

무력은 감당할 수 없고, 회유는 아예 말이 통하지 않아서 안 된다.

호발귀를 어떻게 잡아야 하나? 지금부터 방법을 세워야 한다.

등여산이 눈빛을 반짝 빛냈다.

“일단 뒤는 다 끊었지?”

“아직 해자수가 천살단 무인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곧 정리할 거야. 싸우는 거 보니 안심이 되더라고. 이제 해자수도 이거 제법 능숙하게 사용해.”

“잘됐네.”

“잘 됐지. 호호!”

“그럼 뒤는 끊었고, 사마도 끊어버리자.”

“그게…… 가능할까?”

“일단 여기서 혈겁을 저지르고 나면, 호발귀는 다시 사마를 쫓아갈 거야.”

“그렇겠지.”

“그 일을 내가 맡을게.”

“뭐?”

“내가 사마 대신에 호발귀를 유인한다고.”

“지금 그게 무슨 말이야? 사마 대신에 호발귀를 유인한다니?”

등여산의 말뜻을 몰라서 되물을 게 아니다. 사마 대신에 호발귀를 유인할 방법이 없어서 묻는 말이다. 호발귀를 유인하면 죽는다.

호발귀 앞에 나서면 죽는다. 사는 방법은 없다. 사마는 몰라도 다른 사람은 여지없이 죽인다.

등여산이 말했다.

“호발귀를 유인해서 계속 산으로 빙빙 돌 거야. 호발귀가 쉬면 나도 쉬고, 호발귀가 쫓아오면 또 도망가고. 계속 일정한 거리를 두고 유인하는 거지.”

“안 돼! 너 호발귀한테 잡혀!”

“그러니까 네가 빨리 와야 해. 빨리 와서 나하고 교대를 해줘야 해. 그렇지 않으면 정말 네 말대로 잡혀.”

“교대하면? 그래서 어쩌자고?”

“우리 평생 호발귀를 끌고 다니자.”

“평생? 말도 안 돼!”

“해자수님이 오면 잔일 거리는 해자수님에게 부탁하면 돼. 우리가 먹고 마실 거, 해자수님에게 부탁하고, 너하고 나는 교대로 호발귀를 유인하고.”

“그러면서 늙어 죽을 때까지 호발귀를 끌고 다니자고?”

“응.”

“너도 미쳤구나?”

“지금 방법이라고는 이것밖에 없어. 하지만 희망이 전혀 없는 건 아냐. 호발귀를 끌고 다시면서 우리 생기를 양성하는 거야. 아주 능숙하게.”

“뛰어다니다 보면 그거야 되겠지. 그 전에 잡혀서 죽지 않는다면야 조금은 나아지겠지.”

“호발귀가 눈치챌 만큼만 다가서. 그리고 죽을힘을 다해서 도주해야지. 남은 사람은 멀찍이 따르다가 위험해진다 싶으면 즉시 도와줘야 해. 그러니 두 명이 같이 붙어 다녀야 해.”

“한 명은 죽을힘을 다해서 도주하고, 그사이에 한 명은 조금 쉰다는 것뿐이네.”

“평생 그 짓을 하자. 어쩔 수 없잖아?”

등여산이 활짝 웃었다.

‘아!’

홀리는 등여산의 웃음이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

등여산의 웃음이 날이 갈수록 비정상이다. 사람을 아예 홀려버린다. 웃음만 봐도 마음이 즐거워진다.

전에도 예쁜 웃음이었지만, 이렇게까지 아름답지는 않았는데.

“아까 한 말, 다시 말해봐. 그렇게 해서 생기를 양성하면 그때는 어떻게 하려고?”

“호발귀와 싸워야지.”

“얘, 정말 미쳤네. 이게 책사의 머리에서 나온 말이야? 우린 호발귀에게 안 된다니까!”

“지금은 안돼. 지금 호발귀는 거대한 강이야. 아주 큰 강이고, 우린 작은 물방울일 뿐이야. 물방울이 강에 부딪히면 당장 흡수돼. 하지만 우리도 강이 되면……”

“그래도 호발귀한테는 안돼! 우리가 발전하면 호발귀도 발전해. 호발귀는 뭐 가만히 있을 줄 알아?”

“호발귀가 아무리 큰 강이어도 상관없어. 우리도 큰 강이 되는 거야. 호발귀만큼 크지는 못하더라도, 그래도 강다운 모양만 되면 돼. 큰 강과 작은 강이 합치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

“더 큰 강이 되겠지.”

“제삼의 강이 돼. 수하(水河)와 위수(偉水)가 만나면?”

“민강(憫江).”

“그래. 위수는 큰 강이고 수하는 작은 강이야. 하지만 두 강이 만나서 민강이라는 새로운 강이 돼. 우리가 호발귀를 죽이지는 못해도 제 삼의 강으로 변형시킬 수는 있어.”

“그게 의미가 있나? 우리는 그 일을 하다가 죽을지도 몰라.”

“아니, 죽을 거야. 하지만 호발귀는 바꿔 놓을 수 있어. 지금은 혈기만 보는 혈마이지만, 만약 우리가 큰 강이 되어서 부딪힌다면…… 격렬하게 부딪히면 혈기도 변해. 그 변한 혈기가 악기(惡氣)만 아니면 되잖아?”

“만약 더 큰 악기면?”

“우리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마.”

“음!”

“우리가 세상을 구원하는 구원자도 아니고,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거야. 딱 거기까지만 해. 우리.”

“그래! 좋아! 그게 천살단 책사의 머리에서 나온 방책이라면 그렇게 하자. 내가 네 편 안 들어주면 누가 들어줘. 너와 난 죽으나 사나 한 몸이잖아.”

홀리가 싱긋 웃었다.

호발귀는 개울로 갔다.

무슨 영문에서인지 살인을 한 다음에는 꼭 물을 마신다.

상당히 많이 들이켠다. 그저 목을 죽이는 정도가 아니고 물속에 얼굴을 묻고 벌컥벌컥 계속 들이킨다.

그러고 보니 호발귀가 무엇을 먹는 것을 보지 못했다.

빈속을 물로 채우나?

호발귀는 거의 반 시진 가까이 개울에 얼굴을 묻고 물을 들이켰다.

물을 배불리 마신 후에는 큰 대 자로 드러누운 채 칼로 툭툭 바닥을 쳤다. 그러다가 또 물을 마셨다.

호발귀는 화전민촌을 박살 낸 것에 만족했는지 배부른 맹수처럼 드러누워서 빈둥거렸다.

“나, 가. 빨리 와야 해.”

등여산이 홀리를 보면서 말했다.

“계집애! 나한테 사마 두 명을 떠맡겨 놓고, 빨리 오라고까지. 너 욕심이 너무 지나치다.”

“나중에 내가 차 한 잔 끓여줄게.”

등여산이 웃었다.

차 한 잔…… 별것 아닌 일인데, 지금은 무척 생소하게 들린다. 마치 영원히 이루어지지 않을 희망을 말한 것처럼 들린다.

차분히 앉아서 차 한 잔 마시는 것…… 이제는 꿈같은 일이 되어 버렸다. 어쩌면 영원히 차를 마실 일이 없을 수도 있다.

“가. 늦지 않게 갈게.”

홀리가 말했다.

등여산은 한순간 망설였다.

그녀는 양쪽 기운을 다 읽었다. 왼쪽과 오른쪽에서 강한 기운이 끌어당긴다.

마음이 전혀 기쁘지 않다.

홀리와 해자수는 적이 나타나면 생기가 방향까지 지시해주는 것 같다. 하지만 등여산은 그렇지 않다. 기쁨이 사라지고 무딘 감정이 들어서기는 하지만 방향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감정이라는 것은 한순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어느 쪽으로 사라지는지 방향까지 제시하지는 않는다.

신경을 예민하게 곤두세우면 기쁨이 사라진다는 것은 알 수 있지만, 어디로 사라지는 알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직접 몸을 움직여봐야 한다.

왼쪽으로 가면 어떨까? 기쁨이 사라진다. 감정이 무뎌진다. 더 걸으면 기분이 불쾌해지기까지 한다.

갑자기 소화도 안 되는 것 같고, 속도 니글거리고, 현기증도 치민다. 그러면 적이 나타났다고 확신해도 좋다.

이번에는 오른쪽으로 걸어본다. 역시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양쪽! 모두 다!’

등여산은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지 안다. 기분을 저하시키는 자들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자신이 호발귀와 사마 사이에 들어서 있다.

왼쪽으로 가면 호발귀가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사마가 있다.

이 가운데로 툭 끼어들면 여지없이 누군가가 달려든다. 사마가 달려들거나, 호발귀가 달려들거나. 아니, 사마는 달려들지 않는다.

사마는 앞에 호발귀가 있다는 걸 안다. 그러니 호발귀가 달려들 것이고, 사마는 냅다 도주할 것이다.

“좋아! 시작해보자!”

스읏!

등여산은 호발귀를 향해서 걸어갔다.

순간 개울에서 물을 먹던 호발귀가 벌떡 일어섰다.

등여산은 즉시 설화팔보를 펼쳤다. 전력을 다해서 사문의 보법을 전개했다.

쒜에에엑!

그녀는 바람처럼 질주했다.

설화팔보는 사문을 나오기 전, 이미 극성으로 수련했다. 천살단에 있으면서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진기는 아주 많이 강해졌고, 이제는 생기까지 보태졌다.

그녀는 적토마보다도 빠르게 질주했다.

달리는 방향은 정해놓지 않았다. 무조건 호발귀에게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는 생각뿐이다.

파아아아앗!

갑자기 등 뒤에서 파도가 몰아쳐 왔다. 단지 느낌일 뿐이지만, 산악처럼 높이 치솟은 파도가 후려쳐온다는 게 감지된다.

호발귀가 쫓아온다.

‘아아!’

등여산은 탄식했다.

호발귀가 쫓아온다는 느낌이 이런 것인 줄 몰랐다. 그야말로 말로 표현하지 못할 엄청난 광풍이다.

호발귀가 사마를 쫓아갈 때는 이런 기운을 풍기지 않았다. 매우 담담하게 쫓아갔다

빠르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난폭하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때와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사마는 ‘어디 네 역할을 충실히 해봐라.’ 하고 사냥개를 앞세운 엽사의 입장에서 쫓아간 것이다. 반면에 지금 자신에게 달려드는 것은 완전한 사냥꾼의 모습이다.

호발귀가 먹이를 노리는 사냥꾼이 되어서 덮쳐든다.

쒜에에엑!

등여산은 최대한 진기를 떨쳐냈다. 그녀 역시 한 줄기 돌풍이 되어서 도주했다. 하지만 더욱 폭풍이 점점 가깝게 느껴진다. 거리를 좁혀온다.

‘안 돼! 이렇게 하면 잡히고 말아.’

등여산은 어금니를 잘끈 깨물었다.

생기가 아니면 호발귀를 따돌리지 못한다. 아니, 따돌리는 것은 생각하지도 않는다. 홀리가 올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되는데, 그 정도도 하지 못한다.

등여산은 걸음을 멈춰 세웠다.

호발귀가 쫓아오는데 도주를 멈춰? 미쳤나? 맞다. 미친 짓이다. 하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빨리 치달리기 위해선 멈춰야 한다. 달리면서 더 빨리 달리는 방법은 없다.

‘그때…… 호발귀에게 안겼을 때……’

사냥꾼이 검을 들고 쫓아오는데, 한가하게 우뚝 서서 옛 추억을 생각했다.

자신에게 가장 행복했던 시절, 호발귀 품에 누워있을 때, 처음으로 나신이 되어서 사내와 살을 맞댔을 때……

끔찍하던 호발귀가 자신을 보며 던지던 눈빛, 미안하다는 표정, 사랑이 느껴지던 애무…… 모든 걸 떠올렸다.

‘후후!’

등여산이 웃었다.

기쁨이 일어났다. 희열이 생긴다.

이 희열은 호발귀에 의해 금방 묻힐 것이다. 혈기와 접하면 당장 공포심으로 변한다. 희열이 붙잡을 사이도 없이 밀려나고 그 자리를 두려움이 차지한다.

‘나도 사랑해.’

등여산은 호발귀의 몸짓에 반응했다. 호발귀가 사랑한다고 말한다. 그녀도 같이 말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솟구친 희열을 놓치지 않고 꽉 잡았다.

타타탁! 타탁! 타앗!

두 발이 저절로 떨어졌다. 호발귀를 피한다는 마음은 없다. 지금부터는 재미있는 놀이일 뿐이다.

‘그래. 가보자. 이 폭풍으로부터 멀어져 볼까? 즐거운 마음으로 도주하는 거야. 지금부터 숨바꼭질 놀이야. 호발귀, 나 잡으려고? 어디 한번 잡아봐.’

등여산은 숨바꼭질 놀이를 하는 연인의 심정이 되어서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쒜에에엑!

그녀의 신형이 섬전처럼 쏘아졌다.

그녀는 신법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설화팔보는 물론이고 어떤 절기, 어떤 초식도 떠올리지 않았다.

오직 기쁨만 간직하면서 치달렸다.

쒜에에엑! 쉐에에엑!

희열은 두 발을 가볍게 만들어 준다. 몸도 백지장처럼 가볍다.

나뭇잎이 얼굴을 스치며 지나갔다. 발밑에 밟히는 풀잎에서 통통 튕기는 듯한 울림이 터졌다.

몸에 베여서 저절로 일어나던 신법은 완전히 사라졌다. 하지만 그녀의 신형은 쏘는 화살처럼 빨랐다.

신법을 전개하고 있지 않은 데도, 어느 때보다 빨랐다.

뒤쫓아오는 광풍은 한 치도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콰콰콱! 콰콱!

성난 해일이 금방이라도 작은 쪽배를 집어삼킬 듯이 거칠게 몰아쳐 왔다.

호발귀가 내뿜는 혈기는 숨 막힐 정도로 광오하다. 검으로 끌어당길 때와는 전혀 다르다.

그때는 ‘속수무책’이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지금은 ‘일엽편주(一葉片舟)’라는 생각이 든다.

거친 풍랑이 몰아치는 바다에 쪽배 하나에 몸을 싣고 움직인다.

무섭다! 거칠다!

“허억!”

등여산은 숨이 턱에까지 차는 걸 느꼈다.

몸이, 체력이……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 이제 더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어디로 얼마나 어떻게 뛰어왔는지 모르겠다. 정신없이 뛰어왔기 때문에 홀리가 찾아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더 달려야 한다. 호발귀에게 잡히면 죽는다

‘사람이 없는 곳, 절대 마을로 가면 안 돼!’

그녀는 무조건 앞으로 치달렸다. 산으로, 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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