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十七章 사마사(死魔死) (1)
깡깡깡! 깡깡!
해자수는 부지런히 검을 쳐냈다.
정신없이 끌려가다가 갑자기 무엇인가가 막아서는 느낌이 들면 바로 검을 쳐냈다.
벽(壁)을 향해서 검을 쳐낸다.
뭔가가 막아섰기 때문에 끌려가는 것이 멈춰졌다.
해자수는 그것을 벽이라고 가정했다. 무형의 강벽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니 검으로 벽을 가른다. 무형의 강벽을 허물어트리고, 계속 끌려가야 한다.
검을 쳐내면 벽은 허물어졌다. 그리고 또 누가 확 끌어당겼다.
거센 물살에 휩쓸렸을 때처럼 정신없이 빨려 들어갔다. 일단 휩쓸리면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물살이다.
츠읏!
해자수가 검을 들어 올렸다.
이 순간, 해자수는 정지되었다. 우뚝 멈춰 섰다.
그의 내면에서는 천지가 뒤집힐 정도로 엄청난 격변이 일어나고 있다. 몸도 마음도, 영혼까지도 무엇인가에 끌려가고 있다. 하지만 몸 밖은 조용하다.
끌려가는 것은 정신이다. 몸은 끌려가지 않는다. 몸은 고요함을 유지한 채 조용히 섰다.
천지가 무너져도 꼼짝하지 않을 것 같다.
‘정중동(靜中動)!’
홀리는 해자수의 검에서 극고의 정중동을 봤다.
소림사 공부 중에 금강부동신법(金剛不動身法)이 있다. 지진이 일어나도 흔들림이 없는 자세로 굳건히 선다.
고요함의 극치다. 하지만 어떤 공격도 막아낸다. 어느 방향에서 어떤 공격을 취해도 모두 막는다.
금강부동신법은 정중동의 요체로 정평이 났다.
맞는 말이다. 금강부동신법은 정중동의 요체다. 금강부동신법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은 몸뿐이다.
진기는 끊임없이 순환한다. 너무 빨리 순환해서 정신이 없을 정도다. 그런 순환이 신경을 예민하게 각성시킨다. 미세한 바람에도 작용하게 만든다.
무엇보다도 진기는 세상의 움직임을 환히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을 심어준다.
병기가 쏘아져 오면 그 즉시, 방향, 속도, 힘, 변초 여부를 확인해 낸다. 병기가 몸에 닿는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았다가 팔로, 다리로 툭 쳐낸다.
약간의 움직임만으로 피할 수 있다면 즉시 피했다가 제 자리로 돌아온다.
금강신(金剛身)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면에서는 활화산 같은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반면에 마음은 호수처럼 고요했다.
해자수가 꼭 그런 모습이다.
내면에서는 끝없이 끌려가고 있는데, 육신은 망부석처럼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다.
그러다가 병기가 날아오면 즉시 반응한다.
쳐내기도 하고, 몸을 움직여서 피한 후에 빈틈을 노리면서 파고들기도 한다.
홀리가 보기에 해자수는 더할 나위 없이 고요하다.
‘이건 또 나와는 반대네.’
홀리가 피식 웃었다.
해자수는 내면이 동(動)이다. 육신은 정(靜)이다. 홀리는 내면이 정이다. 육신은 동이다.
쒜엑! 쒜에엑!
검이 눈부신 속도로 터져 나왔다.
두 발이 굳건하게 땅에 붙어있다. 지금 이 상태를 홀리에게서 찾으면 지면 응집력이 굳건하게 일어난 상태다.
주위에 위협을 가하는 자가 없다는 뜻이다.
해자수는 반대다. 주위에 적이 있을 때, 두 발이 굳건해진다.
사실, 지금 해자수는 정신이 없을 것이다.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통에 완전 죽을 맛일 것이다.
머리가 빙빙 돌고, 속이 울렁거린다. 토악질까지 치민다.
홀리는 즉시 뛰쳐나가지 않고 숨어서 싸움을 지켜봤다.
지금 상황에서는 해자수가 위험하지 않았다.
‘이거…… 정말 죽을 노릇이네.’
해자수가 탄식했다.
힘들다고 생각하면 생기가 무너진다. 정신이 수습된다. 끌려가는 것이 멈춰진다. 그리고 천살단 무인들이 눈에 들어온다. 물론 그때는 더 위험해진다.
생기가 빠져나가면 천살단 무인들이 더 악착같이 공격해 온다.
저들은 생기로 몸을 지킬 때와 빠져나간 후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한다.
정중동이 무너지고, 고요함이 무너지고, 움직임이 일어난다. 즉시 알아채지 못할 리 없다.
저들의 공격은 더욱 급격해지고 해자수의 손발은 어지러워진다.
생기를 잃은 후에는 오로지 본인의 무공으로만 저들을 상대해야 한다. 훨씬 급박하게 쏟아지는 공격을 오직 본신 무공으로만 막아내려니 죽을 지경이다.
쒜엑! 쒜에엑!
“이크!”
해자수는 급히 은인문의 절공을 쏟아냈다.
한순간에 몸이 사라진다. 은인문 술사의 경신술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하지만 적의 눈앞에서 몸을 숨긴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항상 꼬리가 잡힌다.
까앙! 깡! 깡! 깡깡!
검과 검이 무척 빠른 속도로 부딪혔다.
퍼억!
검초 하나가 어깨를 헤집고 지나갔다.
“크윽!”
해자수는 신음을 토해냈다.
은인문의 술법은 적이 없을 때 펼쳐야 한다. 몸을 숨길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그것조차도 없을 때는 여지 없이 휘말린다.
그나마 뇌옥에서 기연에 버금갈 정도로 큰 내공 진전이 있었기 때문에 천살단 무인들의 합격을 받아내는 것이다. 예전의 해자수였다면 벌써 쓰러졌다.
“안 되지. 이길 수 있는 데, 지는 것은 너무 억울하잖아. 킥킥!”
해자수가 키득키득 웃었다.
이 순간, 해자수는 생기를 다시 생각해냈다.
어깨에 상처를 입은 순간, 생기가 스르륵 피어올랐다.
이미 생기를 알아버린 몸이다. 전혀 몰랐던 사람은 들어가는 방법조차 모르고 있지만, 이미 생기 맛을 본 사람은 그 속으로 쉽게 뛰어든다.
츠으읏!
내면에서 회오리가 일어났다. 정신이 또 어딘지 모를 곳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천살단 무인들은 보이지 않고 잔뜩 술 취한 사람처럼 세상이 빙빙 휘돈다. 손발이 자유롭지 못하다. 마구 허우적거리지만 잡을 것이 없다.
취이잇!
문득, 좌상방에 벽이 생겼다.
거센 물줄기가 좌상방 쪽으로는 흐르지 않는다. 거침없이 밀고 나가다가 좌상방에서 방향을 바꾼다.
“저기!”
쒜에엑!
해자수는 있는 힘껏 검을 쳐냈다.
벽을 헤집는 검초이기 때문에 찌르는 검이 될 수 없다. 후려치는 검초가 펼쳐진다.
퍼억!
등 뒤에서도 바람이 몰아친다.
그가 일으킨 회오리가 뒷벽에 맞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해자수는 볼 것도 없다는 듯 뒤를 향해 검을 후려쳤다. 좌상방도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뒤를 후려친 검으로 계속 이어서 좌상방을 다시 한번 후려쳤다.
풀썩!
등 뒤에 세워졌던 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좌상방에서 나타났던 벽은 뒤로 쭉 물러섰다. 그러다가 종래에는 사라졌다.
죽었거나, 위협이 될 수 없는 거리까지 물러선 것이다.
생기는 삶과 죽음을 가리지 않는다. 위협이 감지되면 반응하고 사라지면 소멸한다.
분단 무인 중 한 명이 뒤에서 공격해 오고 있던 무인 중 한 명이 머리에 검을 맞고 풀썩 쓰러졌다.
이 싸움의 결과가 어떻게 됐나?
해자수는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봤다.
좌상방에서 공격했던 자는 역시 뒤로 물러서 있다. 해자수와 검을 섞으면서 상당히 큰 충격을 받은 듯 검 든 손을 바르르 떨어대고 있다.
해자수는 상대방의 무공 수준을 가늠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공격을 받아내지 못하고 있다.
츠읏! 츠으읏!
천살단 무인들이 바쁘게 움직였다.
저들은 해자수가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즉시 알아챘다.
정말 웃기는 것이…… 정신을 차리고 천살단 무인들을 지켜보면 내면에서는 생기가 수그러든다. 정신을 놓치고 내면만 들여다봐야 생기가 일어난다.
“제길! 이놈을 끝까지 붙잡고 늘어져야 하는데. 걸핏하면 사라지니, 이거야 원.”
해자수가 투덜거렸다.
쉬이잇!
홀리가 신형을 날려 싸움에 가세했다.
홀리는 해자수보다 더 능숙하게 생기를 사용한다.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즉시 검을 쳐냈다.
쒜엑! 쒜에엑!
“크아악!”
비명과 함께 천살단 무인들이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졌다.
홀리는 양 떼 속에 뛰어든 늑대다. 사납게 움직이면서 단숨에 양 몇 마리를 쳐 죽였다.
“아, 아씨! 아씨! 잠깐만! 잠깐만!”
해자수가 급히 홀리를 불렀다.
“왜?”
“이건 내 거라니까! 나도 좀 어떻게 먹고살아야지. 간신히 이놈 멱줄 잡는 법을 배우고 있는데, 그걸 가로채면 어떻게 합니까? 뒤로, 뒤로 빠져요!”
“힘들어 보이던데? 어깨에도 한 대 맞았잖아.”
“하! 좀 봐주슈. 나 이거 이제 막 어떻게 써야 할지 알게 된 것 같은데. 호발귀 만나기 전에 능숙하게 쓸 수 있도록 만들어놔야 한판 붙을 것 아뉴!”
“호호호! 그럼 호발귀와 만나면 선수 양보해도 되나?”
“그건 안 되지. 다 같이 해야지.”
해자수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해자수 말에 홀리가 뒤로 물러서면서 말했다.
“그럼 나 저쪽에 가봐도 돼?”
“아! 가셔! 가!”
해자수가 가라고 손짓했다.
홀리가 등여산을 따라가겠다는 거다. 천살단 무인들은 해자수에게 완전히 떠맡기고.
“정말 혼자서 되겠어?”
“큭큭! 걱정하지 말고 가슈. 이제 어느 정도 감 잡은 것 같으니까. 이거 할수록 쉬워지네.”
해자수는 불안한 마음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이제는 정말로 생기를 믿는다. 그래서 진심으로 가도 좋다고 손짓을 했다.
쉬이잇!
홀리는 정말로 신형을 날려서 사라져갔다.
“후후!”
“이놈만은 죽여야 하지 않겠나. 죽은 형제들을 위해서라도.”
천살단 무인들의 눈에 잔인한 살광이 번뜩였다.
그들은 홀리의 검초에 깜짝 놀랐다.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검초를 전개해서 단숨에 네 명을 죽였다.
홀리의 검초에는 인정이 담겨 있지 않다. 검광에 베인 자는 여지 없이 절명했다. 너무 빨리 죽어서 큰 고통 없이 편안하게 죽은 셈이다.
홀리가 계속 싸웠다면 승산이 전혀 없다. 그래서 빠져나갈 방도를 모색하던 참이다. 그런데 홀리가 사라져준다면…… 홀리만 없다면 이 비루먹은 망아지처럼 생긴 놈 하나는 처리할 수 있지 않겠나.
그들은 다시 검을 잡고 주춤주춤 모여들었다.
“새끼들. 난 만만하다는 거네. 좋아. 어디 한번 해보자고. 누가 이기나 보자.”
해자수가 검을 들었다.
이 순간 그의 머릿속은 이미 정신없는 소용돌이 속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몸은 머릿속과는 정반대로 아주 고요했다. 차분하게 착 가라앉았다.
천살단 무인들이 슬그머니 품에서 비수를 꺼냈다.
정중동,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상대는 암기로 움직임을 유도해 낸다. 무작정 공격하지 않고, 암기로 먼저 움직임을 일으켜 놓고 공격한다.
쒜엑! 쒜에엑! 쒜에엑!
단검이 날카로운 파공음을 흘리면서 날아왔다.
사방에서 무형의 벽이 생겼다. 하지만 지금까지 봤던 커다란 벽이 아니라 방패 정도 되는 작은 벽들이 밀려왔다.
‘이 정도는!’
해자수는 가볍게 손목만을 비틀어서 방패를 가로 그었다.
까앙! 깡!
무려 십여 자루나 되는 단검이 맥없이 튕겨 나갔다. 하지만 이 순간, 해자수는 몸을 움직였다. 분명히 허점이 드러났다. 가만히 서서 움직임을 지켜보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큰 허점이 보였다. 단검을 쳐내느라 어쩔 수 없이 드러낸 허점이다.
쉐에에엑!
천살단 무인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그 순간 해자수는 자신을 끌어당기는 회오리를 쫓아서 몸을 빙글빙글 돌렸다. 이번에는 정신만 도는 것이 아니다. 완전히 생기 속에 몰입되어 있어서 몸까지 함께 휘돌았다.
파파파팟! 파파파팟!
몸이 돌자, 검도 휘돌았다.
몸의 회전력을 빌어서 방패를 쪼개듯이 쳐냈다. 하나를 치고, 옆에 있는 것을 친다.
빙그르르…… 패애애액!
그는 회오리를 따라서 돌기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빠르게 휘도는지 알지 못했다.
“크윽!”
“악!‘
천살단 무인들이 펑펑 나가 떨어졌다.
조금 전까지는 보지 못했건 검력이다. 엄청난 힘이 검에 실려서 쏟아졌다.
“이, 이게 뭐죠? 왜 이렇게 강해진 거죠?”
천살단 무인 중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주눅 들지 마라! 우리는 오늘 여기서 죽는다. 하지만 저 새끼는 함께 가야지. 우리만 죽을 수는 없잖아!’
천살단 무인들이 이를 부드득 갈면서 검을 고쳐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