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十六章 절후(絕後) (5)
츠으으읏!
형옥주가 검에 진기를 집중시켰다. 전신 경맥에 두루 퍼졌던 진기가 검 한 자루에 응축된다. 형옥주의 감각은 최고 상태로 끌어 올려진다.
형옥주는 최고의 전사로 탈바꿈했다.
불광은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없다. 아무리 은밀한 곳이라도 부드럽게 스며든다.
불광노하검은 불광이 강물을 건너갈 때처럼 지극히 빠르고, 고요하고, 온유한 검초를 전개한다. 검초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고 하는데, 실은 빛살처럼 빨라서 일어난 착각이다.
불광은 빛이다. 빛이 강을 건넌다.
촤아앗!
형옥주는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온 전신이 검과 동화되었다.
‘상당한 무공!’
홀리는 감히 경시하지 못했다.
형옥주가 진실로 불광노하검을 터득했다면, 혈맥참 검공으로도 승리를 자신하지 못한다.
이백 년 전, 불광노하검은 혈마를 상대하는 최강 무인 십인 중 한 자리를 차지했었다.
결국 혈마에게 꺾이기는 했지만, 혈맥참이 우습게 볼 검공은 아니다.
물론 형옥주가 이런 상태를 오래 유지하지는 못한다.
불광노하검은 진기 소모가 극심해서 길어봤자 일다경 정도 유지하는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검 대 검의 싸움에서 일다경이라는 시간은 수십 명을 죽이고도 남을 정도로 넉넉하다.
일 대 일의 싸움이라면 승부를 열 번은 가르고도 남는다.
또한 일다경이 지났다고 해서 불광노하검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스읏!
형옥주가 무릎을 굽혀서 낮은 자세를 취했다.
보폭은 넓고 무릎은 굽혀져 있다. 검은 하복부를 노리는 듯 낮게 깔려있다.
불광노하검의 쾌검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기수식이다.
‘왼쪽 옆구리.’
홀리는 무심히 형옥주의 왼쪽 옆구리를 쳐다봤다.
형옥주가 기수식을 취하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눈길이 왼쪽 옆구리 쏠렸다.
옆구리가 텅 비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점이 즉시 파악되었다고 할까?
지면 응집력은 형옥주에게도 작용했다.
땅이 형옥주의 몸을 단단히 끌어당기고 있다. 한데 유독 왼쪽 옆구리만 풀어준다.
땅은 계속해서 왼쪽 옆구리를 끌어당기려고 하는데, 좀처럼 당겨지지 않는다.
형옥주에게 이런 말을 하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며 웃을 것이다.
형옥주는 불광노하검을 정순하게 펼쳐내는 중이다. 전신 진기가 검에 응축되었다. 몸도 마음도 최고 상태다. 어떤 싸움도 벌일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데 옆구리가 빈 것처럼 보인다고 하면 믿을까? 코웃음만 칠 것이다.
물론 이것은 홀리만의 단순한 느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홀리는 이 느낌을 믿었다.
‘약점이 옆구리였어?’
그렇다면 왼쪽으로 움직여야 한다. 옆구리를 공격하려면 형옥주가 방비하기 힘든 쪽으로 움직여서…… 왼쪽으로 돌면 아무래도 검을 쓰기가 불편할 테니까.
‘아니야. 이런 생각도 버려야지 해.’
홀리는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잡념을 떨쳐내고, 아예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생기를 본다.
땅이 자신을 어떻게 붙잡고 있는지, 어디를 풀어주는지 본다.
불광노하검 같은 절정 검공을 마주한 상태에서 눈을 감아버린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다. 예전의 홀리였다면 결코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형옥주가 이런 기회를 놓칠 리 없다.
싸악!
검이 흘러들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하다. 전혀 불안하지 않았다. 검이 허공을 가르고 있고, 몸을 쳐오는데…… 불안하다는 느낌이 일어나지 않는다. 땅이 두 다리를 꽉 잡고 있어서인가?
탁!
갑자기 땅이 그녀를 놓았다.
홀리는 자유를 얻은 다리와는 정반대 쪽…… 왼 다리 쪽으로 신형을 퉁겨냈다.
땅은 오른쪽 다리에 자유를 주었다. 왼 다리는 여전히 땅에 붙잡아 놓고 있다. 생기가 변하지 않았다면…… 오른쪽에서 공격이 일어나고 있다. 왼쪽은 안전하다.
‘서둘 필요가 없어.’
홀리는 일단 안전을 확인했다.
쒜엑! 쒜에엑!
검이 오른팔을 스치면서 흘러갔다.
검 끝에서 일어나는 차가운 감각이 몸서리쳐질 만큼 예리하게 팔을 훑고 지나갔다.
홀리는 눈을 감은 상태에서 형옥주의 검을 피했다. 그것도 불광노하검을 피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홀리는 여전히 땅을 지켜봤다. 땅이 붙잡고 있는 쪽으로만 움직였다. 놓아주는 쪽과 정반대 방향으로 퉁겨나갔다.
‘오른발, 오른발, 왼발……’
형옥주가 치고, 치고, 몸을 휘돌린 후에 반대쪽으로 쳤다.
쒜엑! 쒜에엑! 쒜엑! 쒜에엑!
검이 몸 주위로 흘러 다녔다.
느낌을 자각한다. 아니, ‘자각’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이미 늦었다. 느낌이 일어나고 곧바로 몸이 움직인다. 느낌과 동시에 몸이 움직인다.
느낌이 곧 행동이다.
생기는 이런 일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제는 공격.’
피하기는 비교적 쉽다. 풀어주는 쪽을 피하고, 잡아당기는 쪽을 취하면 된다.
이런 방법은 확실하게 안전을 보장해준다.
공격은 정반대 행위를 해야만 한다. 위험 속으로 스스로 뛰어 들어가야 한다.
어디를 어떻게 공격하지?
모른다. 공격 역시 방어 때처럼 눈을 감고 뛰쳐들어갈 생각이다. 땅이 알려주는 대로만 움직인다. 설혹 불광노하검에 격타당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
‘통과 의례.’
홀리는 해자수에게 해준 말을 떠올렸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야 한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특이한 현상을 믿어야 한다.
막연하게 믿으면 곧 회의가 밀려든다. 절벽에서 뛰어내리라고 하면 서슴없이 뛰어내릴 정도로…… 맹목적인 믿음이 있어야 한다. 행동한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생각한다면 절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믿지 못하게 된다.
쒜에에엑!
홀리는 검을 떨쳐냈다.
생기가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생기를 모르는 무인은 지금 같은 경우에 다른 말을 사용한다. 감각이 이끄는 대로, 아니면 본능에 이끌려서 검을 쳐냈다고 말할 것이다.
쒜에엑! 퍼억!
검이 흐르고 무엇인가 무른 물체를 격타하는 느낌이 손목을 저려 울렸다.
‘됐어!’
홀리는 눈을 떴다.
형옥주가 한 손으로 왼쪽 옆구리를 움켜잡고 비틀비틀 물러서는 모습이 보였다.
홀리는 자신이 어떻게 형옥주를 베었는지 알지 못한다. 생기를 믿고, 자유를 주는 방향으로 검을 뻗어냈을 뿐인데…… 이런 일이 벌어졌다.
“이, 이럴 수가……”
형옥주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그는 왼손으로 옆구리를 틀어막고 있다. 하지만 콸콸 쏟아지는 핏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검이 아주 깊게 들어갔어.’
홀리는 고개를 설래설래 흔들었다.
형옥주의 상처는 화타가 치료해도 살릴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검이 살과 뼈만 갈라낸 것이 아니다. 장기까지 일시에 갈라버렸다. 창자가 가닥가닥 끊어졌다.
털썩!
형옥주가 힘을 쓰지 못하고 무너졌다.
“어떻게…… 방금…… 방금 네가 쓴 검…… 뭐냐?”
형옥주가 물었다.
“몰라.”
홀리는 담담하게 말했다.
“큭큭! 요즘…… 젊은것들은……”
형옥주는 홀리가 자신을 놀린다고 생각한 듯했다.
홀리는 사실을 말하려고 입을 벙긋거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막상 말을 하려고 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형옥주를 놀리려는 게 아니라 정말 모른다.
‘나도 내가 어떻게 공격했는지 모르겠어.’
생각을 돌이켜봐도 정말 모르겠다. 어떤 신법을 펼쳤고, 어떤 검을 썼는지…… 기억나는 게 없다.
휘릭! 철컥!
홀리는 검을 거뒀다.
땅이 그녀를 단단히 붙잡고 있다. 두 발에 지면 응집력이 강건하게 일어났다.
땅이 그녀의 몸 전체를 끌어당긴다.
적은 없다. 위협이 없다. 형옥주가 앞에 있지만, 위협으로 여기지 않는다.
더는 검을 쓸 필요가 없다는 거다
형옥주 정도 되면 저 정도의 상처는 딛고 일어날 거 같은데.
살지는 못하더라도 검초 몇 번은 더 쓸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런데 생기가 이제 됐다고 한다.
홀리는 생기를 무시할 수가 있다. 검을 들고 걸어가서 형옥주에게 다시 일검을 쳐낼 수도 있다. 땅은 그녀가 하고자 하는 행동을 막지 못한다.
지면 응집력이라는 것은 실질적인 힘이 아니다. 땅이 그녀를 끌어당기는 감각이다. 하지만 이것이 실질적인 힘이 될 때도 있다.
완전히 감각 속에 몰입해 들어가면 실제 힘으로 작용한다.
실제와 환상이 공존한다.
슷!
홀리는 돌아섰다.
“아직…… 끝나지……”
형옥주가 검을 짚고 일어서려고 했다.
“불광노하검은 딱 한 번 패한 적이 있어. 이백 년 전, 혈마에게. 지금 내가 사용한 검, 혈마의 혈기야. 혈기와는 상당 부분 다르지만 같은 부분도 있어. 불광노하검이 패한 것, 억울해하지 않아도 돼. 패할 것을 패한 것뿐이야.”
“뭐!”
형옥주가 놀란 듯 눈을 부릅떴다.
원래, 홀리는 이런 말도 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녀 자신도 생기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데, 누구에게 무슨 말을 해줄까. 도대체 어떻게 이겼다고 말할까.
하지만 형옥주가 악착같이 바동거리자, 마음 편히 가라는 뜻에서 말을 해줬다.
쿵!
형옥주가 거칠게 무너졌다.
홀리는 뒤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형옥주가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생기의 판단이 옳았다. 그녀의 일 검은 치명적이었다.
형옥주가 불광노하검을 펼쳤다.
‘불광노하검은 이백 년 전에 실전되었는데 그걸 어떻게 수련한 거지?’
홀리는 좀처럼 찌푸려진 미간을 풀지 못했다.
형옥주는 소림 승려도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불광노하검을 수련할 수 있었나.
‘아! 마공관!’
홀리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서 이마를 탁! 쳤다.
천살단에 마공관이 있다. 마공관에는 극악무도한 마공뿐만 아니라 극강한 패공도 수집되어 있다.
너무 위력이 강해서 결과가 참혹한 무공은 정종 무공일지라도 수련을 금한다.
불광노하검은 극악무도한 마공이나 패공은 아니다. 하지만 천하 최강의 검학인 것만은 분명하다.
마공관에 당연히 수집되어 있을 것이다.
이백 년 전에 실전된 검학으로 알려져 있으니, 소림사에는 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천살단에서 구했고, 구하는 즉시 마공관에 소장한 게 분명하다.
마공관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두 명뿐이다. 마공관주와 형옥주다. 열쇠는 세 개가 모여야 한다. 두 사람 외에 마공관 경비를 맡은 무인도 열쇠 하나를 지니고 있다.
형옥주는 마공관을 출입할 수 있는 사람 중의 한 명이다.
마공관주와 형옥주, 두 사람이 동의해야만 마공관의 마서를 움직일 수 있다지만…… 마공관 안에 있는 비급을 수련하는 방법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틀림없이 형옥주는 마공관에서 불광노하검을 수련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것…… 천살단주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그래서 형옥주에게 사마를 맡긴 것이라면?
‘사마와 혈마를 벨 생각까지 한 거야.’
천살단주가 형옥주에게 사마를 맡긴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단순하게 사마를 형옥에서 양성했기 때문에 형옥주에게 맡긴 게 아니다.
만일의 경우에는 사마와 혈마를 동시에 제거하는 것까지 생각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백 년 전, 불광노하검은 혈마의 혈기가 극성한 상태에서 마주쳤다. 혈마 상태가 최고조로 치달았을 때 정면에서 부딪혔다. 최고와 최고가 싸웠다.
지금 호발귀 상태는 그 정도는 아니다. 아직 미친 듯이 날뛰지는 않고 있다.
이런 상태라면, 어쩌면 불광노하검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형옥주가 마공관 무공을 수련했다면…… 천살단주는 아무것도 수련하지 않았을까? 뭔가를 수련하지 않았을까? 형옥주 정도는 우습게 여길만한 것.
‘천살단주!’
홀리는 미간을 깊이 찡그렸다.
천살단주는 최소한 형옥주보다는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다. 불광노하검보다 더 강한 무공을 펼친다.
‘정말로 무서운 사람은 천살단주였네.’
홀리의 눈가에 암울함이 깃들었다.
천살단주라는 사람을 조금은 안 것 같기도 하고……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혈천방주 못지않게 경계해야 할 사람인 것만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