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十六章 절후(絕後) (4)
“홀리, 해자수님. 뒤를 막아주세요.”
“뭐?”
“난 당최 무슨 소리인지?”
홀리와 해자수가 동시에 눈을 끔뻑거리면서 되물었다.
“뒤따라오는 천살단 무인…… 호발귀가 저지른 혈겁을 정리하기 위해서 오고 있잖아요. 그 사람들을 차단해주세요.”
“어쩌려고?”
홀리가 즉시 물었다.
뒤를 막아달라는 말이 천살단 무인들을 막아서라는 말인 줄 모르고 되물었던 것이 아니다. 뒤따라오는 자들이라면 그들밖에 더 있나. 즉시 알았다.
문제는 혈겁이다. 그들이 그나마 호발귀가 저지른 혈겁을 불로 태워주고 있는데, 그들을 막으면 어쩌자는 것인가? 혈겁이 만천하에 드러나지 않겠나.
등여산이 다시 눈빛이 반짝 빛냈다.
“단주님은 호발귀가 일으킨 혈겁을 막아서고 있어. 그걸 무너트려 보는 거야. 혈마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이미 퍼졌을 테니까, 혈마가 저지른 혈겁도 보여주는 거야.”
“그건 알겠는데, 이 일이 호발귀에게 더 나쁜 거 아냐? 무슨 도움이 되지?”
“시간이 없어. 일단 그렇게 해줘.”
“알았어.”
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계속 쫓아가 볼게. 여기 일 정리되는 대로 바로 쫓아와. 호발귀를 쫓아가는 것…… 나 혼자서는 벅차. 이번 혈겁은 놓치더라도 다음 혈겁은 막아봐야지.”
“계집애, 가.”
홀리가 등여산의 어깨를 떠밀었다.
쒜엑! 쒜에엑!
등여산은 간다는 말도 하지 않고 신형을 쏘아냈다. 그만큼 마음이 급한 것이다.
“아가씨, 이거 어떻게 사용하는지 알아요?”
해자수가 불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호발귀까지 네 사람이 감지하는 생기가 모두 다르다. 호발귀를 제외하고 세 사람이 느끼는 생기도 다르다. 세 사람 중에서도 등여산이 가장 다르다.
홀리와 해자수는 비교적 같은 생기에 속한다.
두 사람은 내면에서 극심한 격변을 겪는다. 홀리는 정적인 격변이고, 해자수는 동적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겪는 격변은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다.
겉으로 보기에 두 사람은 항상 조용하다.
등여산은 내면의 격변을 표면으로 드러낸다. 그녀를 보고 있자면 가슴 벅찬 희열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활짝 웃는 얼굴 속에서는 어둠을 읽을 수가 없다.
현재, 등여산의 마음은 개미굴처럼 번잡하다. 호발귀 때문에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다.
그런데도 얼굴은 웃는다. 소리 내서 깔깔거리며 웃기도 한다.
등여산의 생기는 겉모습에 영향을 미친다.
호발귀를 제외하고 세사람은 거의 동시에 생기를 감지했는데, 어떻게 하면 이리 다를까?
형옥에서 받은 타격대로 행운이 따르고 있다.
가장 거세게 얻어맞은 사람이 가장 큰 행운을 얻었다. 등여산이 첫 번째 행운을 얻었고, 그다음은 홀리다. 도천패, 당홍, 해자수는 거의 그만그만하게 얻어맞았다.
그 순서대로 생기가 열리고 있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격변을 외부로…… 싸움에 응용하는 것도 거의 같은 순서로 능숙해진다.
등여산은 이미 생기를 신법에 활용하는 수준까지 올라섰다.
호발귀를 쫓을 때…… 그녀의 신형이 매우 가벼웠다. 종이가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듯했다.
반면에 해자수는 아직 생기를 유지하는 것도 벅차다. 그런 상태이니 내면에서 일어나는 격변을 어떤 식으로 끌어내어서 권각에 얹을지 막막하기만 하다.
이것이 내공이라면 운기법을 알려달라고 할 것이다. 의념으로 단전을 지켜보라. 단전에서 일어난 진기를 임맥, 혹은 독맥으로 끌어낸다.
어떤 혈을 거쳐서 어떤 경맥으로…… 내공법에 따라서 진기 운행도는 다르지만 명확한 순서가 있다.
수련하면 얼마든지 능숙해질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는다.
한데 생기는 시작부터가 막막하다. 정신없이 끌려가면 정상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비정상이다.
여기까지는 안다. 그다음은 뭣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해자수는 이런 점이 너무 막막해서 물었다.
“아주 답답하나 보네.”
홀리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답답하죠. 이건 뭐 앞뒤도 없고…… 차라리 이렇게 하라고 누가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그런 것도 없고. 뭔가에 정신없이 끌려가면 괜찮은 거고, 멈추면 안 좋은 건데…… 아! 끌려가는 방향도 있구나. 느슨해지는 방향도 있고. 그것까진 알겠는데…… 정작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느냐 이거죠.”
어떤 보법을 밟고, 신형은 어떻게 움직이며, 어떤 초식을 전개할 것인가.
싸움 중에는 정신을 바짝 차려도 부족하다.
완전히 초긴장 상태에서 적과 마주 서야 한다. 하지만 생기에 휩쓸리면 초긴장 상태는커녕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도 없다.
정말 싸울 수 있을까?
“이거…… 한 번은 통과해야 하는 의례(儀禮) 같은 거야. 나도 처음이니까, 아는 게 없어서 말해줄 수 있는 건 없고. 어쨌든 한번 믿어봐야지.”
“그렇죠? 믿어야겠죠?”
“어쨌든 호발귀는 이걸로 거의 무적처럼 움직이고 있으니까.”
“아! 정말 고민이네.”
해자수가 머리를 긁적거리면서 중얼거렸다.
“잡담할 시간 없어.”
“아, 이거 끝까지 고민이네.”
해자수가 곤혹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여기 맡을 수 있지?”
해자수는 홀리의 말에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안심하고 가세요.”
두 사람은 현재 상황을 즉시 파악했다. 아니,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데 저절로 알아졌다.
움직임이 감지된다.
움직임은 두 방향에서 일어나고 있다. 조금 앞서서 움직이는 자가 있고, 뒤따르는 무리가 있다.
홀리는 앞선 움직임을 쫓아가려는 것이다.
사마를 쫓아가려는 움직임…… 형옥주다.
해자수가 말했다.
“평소 내 무공이라면 저들을 막을 수 없을 건데, 형옥에서 기연을 얻었으니 막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이걸 쓰면 완전 제압도 가능할 것 같은데, 쓰는 방법을 모르겠고.”
해자수가 자신의 두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에라이! 싸우다 안 되면 내빼지 뭐. 나중에 내가 못 막았다고 원망하지 말고 빨리 돌아오기나 하슈.”
“알았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올게.”
쒜에에엑!
홀리가 신형을 날려서 사라져갔다.
탁!
줄이 끊어졌다.
땅이 그녀를 놓았다. 단단히 붙잡혀 있던 두 다리가 고삐 끊긴 말처럼 쏘아져 나갔다.
홀리는 형옥주를 의식하지 않았다. 단지 몸이 퉁겨지는 대로 맡겼다. 두 발이 풀리는 방향을 따라서 쏘아져 갔다.
몸은 매우 가볍다. 진기를 극상으로 끌어올렸을 때처럼 가뿐하다.
땅을 딛는 두 발에 힘이 넘친다. 몸에서는 힘이 넘치고, 대지는 그녀를 밀어준다.
그녀는 그야말로 나는 듯이 질주했다.
기분은 나쁘지 않다. 등여산은 나쁜 일이 일어나면 기분이 나빠진다고 했는데, 그녀는 정반대다.
몸이 너무 가벼워서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다.
분명한 것은 이토록 가볍고 날랜 상태가 바로 적이 근처에 있다는 뜻이라는 거다.
홀리는 상대를 굳이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형옥주인지 아닌지 알지 못한다. 다만 의식이 한 곳을 향하고 있다. 의식이 향한 곳으로 고삐가 풀렸다.
‘어떻게 쫓아가는 건지는 알겠고……’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아이처럼 모든 것을 배워나간다. 하나씩 경험해 보면서 습득한다.
홀리는 자신들이 느끼는 생기가 호발귀와 상당히 다르다는 점을 알았다.
자신은 해자수와 등여산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생기를 의식할 때, 두 사람이 옆에서 강력한 생기를 이끌고 있어도 줄이 끊어지지 않는다.
생기가 어떤 작용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적이 나타나면 당장 끈을 풀어버린다. 두 발에 채워놓은 족쇄를 탁! 풀어낸다.
몸이 경쾌해지고, 힘이 샘솟는다. 진기를 극성으로 끌어냈을 때보다 더 좋다.
그녀는 적아를 구분한다. 등여산과 해자수도 적아를 구분한다.
나한테 해를 끼치지 않을 사람은 편안하고, 해를 끼칠 사람은 거칠게 반응한다.
호발귀는 적아를 구분하지 않는다.
분명히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
신형이 퉁겨지는 곳에 적이 있다.
이런 내면의 격변이 행동까지 좌우하지는 않는다. 신형이 앞으로 튕겨질 때도 의식을 반대쪽으로 두면 신형은 뒤로 물러선다.
적을 피해서 반대쪽으로 간다.
물론, 일부로 의식을 반대쪽으로 흘리지 않는 한, 그녀의 신형으로 앞으로 쏘아진다. 두 발이 퉁겨진 방향으로 날아간다. 아주 쾌적하게 쫓아간다.
쒜에에엑!
상대방과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흘리는 달려가면 달려갈수록 몸에 힘이 넘쳐나는 것을 감지했다.
진기와는 정반대다. 진기는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소진된다.
처음에 일어난 강성함을 끝까지 유지하기가 힘들다. 그러니 초식을 거듭할수록 진기는 약해진다.
하지만 그녀가 느끼는 생기는 일종의 차력과도 흡사하다.
본신의 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외부의 힘을 빌려와서 쓴다. 이 기운이 어디서 밀려드는지 모르겠는데, 거센 힘이 몸을 가득 채워준다. 그리고 외부의 힘을 빌려오는 과정에서 진기가 한층 더 강화된다.
생기를 사용할수록 진기는 더 강해진다.
싸움에 필요한 힘도 외부에서 빌려온다. 전혀 진기 손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 힘을 무공에 응용하면 그야말로 천하무적이다.
이백 년 전의 혈마는 호북평야에서 무인 천여 명을 격살했다.
사흘 동안 이어진 싸움에서 차륜전(車輪전)으로 맞선 무인 천여 명을 죽였다.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은 채 오직 혈검만 휘둘렀다.
초인적인 체력이다. 초인적인 진기다.
이 싸움은 호북천인살육전(湖北千人殺戮戰)이라는 이름으로 무림사에 기록되어 있다.
홀리는 호북천인살육전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아무리 미친 혈마라고 해도 쉼 없이 삼 일 동안이나 검을 쓰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이런 힘이라면 얼마든지 그런 일을 벌일 수 있다. 지금 기분이라면 홀리 자신도 삼 일 내내 검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격전에서는 이 힘이 어떤 식으로 터질지 모르겠다.
그녀는 아직도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아는 것은 손톱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전부 모른다.
쒜에에엑!
형옥주와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녀의 무공은 음문촌에서도 강자에 속한다. 형옥주가 상대할 무공이 아니다.
처음부터 그녀는 형옥주를 쉽게 따라잡을 수 있었다.
생기를 사용하지 않고 진기를 사용했다면, 벌써 머리채를 낚아챘을 것이다.
스슷!
형옥주가 걸음을 멈췄다.
형옥주도 천살단 십삼당 당주 중 한 명이다.
자신을 뒤쫓아오는 자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리 없다. 홀리가 일부러 신형을 숨기고 따라붙은 것도 아니다. 아예 내놓고 따라붙었다.
스읏!
홀리가 형옥주 앞에 내려섰다.
“홀리. 후후!”
형옥주가 홀리를 알아보고 웃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할 처지가 아닐 것 같은데. 상당히 여유가 있네?”
스릉!
홀리가 검을 뽑으면서 말했다.
“후후! 설마 천살단 형옥주가 음문촌 계집 하나 당하지 못할까. 요즘 어린 것들은. 쯧!”
형옥주가 혀를 차면서 스릉! 검을 뽑았다.
“어쩌지? 옆에 사마가 없어서.”
“방금 말했는데, 촌구석에서 자란 계집이라 기억력도 엉망이군. 음문촌 계집 하나 감당하지 못할까. 자, 똑똑히 들었나? 두 번 말해준 거야.”
“그러네.”
스읏!
홀리가 검을 들어 올렸다.
홀리는 기수식을 취하지 않았다. 자신이 알고 있던 모든 무공을 버렸다. 아니, 잊어먹었다. 그저 본능처럼…… 아무 뜻도 없이 싸우자는 의미로 검을 들었다.
츠으으읏!
형옥주의 몸에서 뿌연 서광(曙光)이 피어나는 듯했다.
“불광노하검(佛光鷺河劍)?”
홀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후후! 역시…… 음문촌 계집이라 안목이 상당하군. 이 검을 알아보다니.”
“으음!”
홀리는 침음했다.
불광노하검은 소림사(少林寺) 삼대검공 중 하나다. 중원에 딱 네 번 모습을 드러낸 후, 사전 삼승 일패를 기록한 검공이다. 그중 일 패는 이백 년 전 혈마에게 당한 것이다.
혈마 외에는 무너진 적이 없는 무적 검공이다.
“놀랍네. 형옥주가 소림사 검공을 수련했다니.”
“사람마다 사연이 있는 법이지. 어쨌든 좋아. 이 검공을 수련한 후 평생 써보지 못하고 죽을까 봐 걱정했는데. 죽어줄 상대가 나타나서 좋군. 후후후!”
형옥주가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