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十五章 대적(對敵) (4)
홀리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등여산을 쳐다봤다.
등여산은 잔뜩 화난 표정이었다.
‘말 안 듣더니! 이제 어떻게 할래!’
그녀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했다.
만약 호발귀가 잡아끄는 대로 가까이 다가가면 어떻게 되나? 여지없이 검을 쳐낼 것이다.
호발귀는 아니, 혈마는 검권 안에 들어온 사람을 살려주지 않는다.
하다못해 무심이 날아든 잠자리라도 검권 안에만 들어오면 무조건 베어버린다.
칼이 닿는 거리, 그 거리 안에 있는 생명체는 살아남지 못한다.
“다른 방법 없어?”
홀리가 쓴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구혼음소를 읊어봤는데 안 돼. 꿈쩍도 안 해.”
“그건 안 된다고 했잖아.”
“촌장님한테 배운 첫 번째 구혼음소는 안 될까? 난 죽어도 되지만 호발귀를 이대로 놔둘 수 없어. 혈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죽여야 해. 호발귀, 죽여야 할 것 같아.”
등여산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리듯 울먹였다.
“휴우! 이 사람, 우릴 알아보지도 못하고 무조건 죽일 생각인데, 넌 불쌍하다고 울기까지 해? 너도 참. 구혼음소도 안 될 텐데, 해보긴 할게. 크게 기대하지는 말고 다른 방법을 생각해봐.”
“타악 투 파 비투 쏘 추우 탄 치……”
홀리가 음률이 전혀 다른 첫 번째 구혼음소를 읊기 시작했다.
호발귀를 즉사시킬 수 있는 구혼음소, 이 구혼음소를 읊으면 장진 스님이 나타났고, 반야심경이 터졌다.
이번에도 나타나 주기를.
하지만 호발귀는 두 여인이 무엇을 하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쓱! 쓱쓱!
등여산과 홀리는 땅에 발자국을 깊게 패면서 질질 끌려갔다.
두 명 모두 끌려가기 시작했을 때, 이번에는 해자수가 나타났다.
“너 이 정신머리 없는 새끼! 이게 뭐 하는 짓거리야! 어디 나도 해봐라, 이놈아! 나도 끌고 가봐!”
해자수가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현재, 호발귀는 양팔을 모두 사용하고 있다. 오른손에 든 검으로는 등여산을 가리키고 있고, 왼손은 홀리를 잡아끈다.
비록 아무것도 없는 빈 허공을 끌고 있지만, 반드시 손을 써야 하는 무엇인가가 있는 듯했다.
이제 또 한 명이 나타났다. 잡아끌 수 있을까?
호발귀가 해자수를 쳐다봤다.
“이놈의 새끼가! 어른을 보고도 인사도 안 하고 말이야! 어디서 눈이 새빨개져서는! 이게 뭐 하는 짓거리야!”
해자수가 고래고래 고함 질렀다. 하지만 해자수의 고함은 곧 경악성으로 바뀌었다.
“엇! 이게, 이게 뭐야? 이게 뭐야? 인마! 이거 안 놔! 안 놔!”
해자수도 무형의 그물에 걸린 듯 고래고래 고함질렀다. 하지만 여지없이 질질 끌려왔다.
호발귀는 등여산이나 홀리처럼 손으로 가리키지 않았다. 단지 쳐다만 봤다. 아니다. 왼손 새끼손가락을 약간 바깥으로 돌려서 꽉 움켜잡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홀리와 해자수가 한데 묶였다.
무형의 그물은 사실처럼 존재한다. 어떤 기운으로 어떻게 만들어내는지 모르겠는데, 진짜 줄에 묶인 기분이 든다. 아니, 그물로 덧씌워진 듯하다.
츠읏! 스읏! 슷!
세 명이 질질 끌려갔다.
“이거! 이거 뭐야! 이거 뭐야! 이거 안 놔! 인마! 정신 차리라니까! 어우, 이, 이거 어떡하지? 이거 이러다 죽는 거 아니야? 너 인마 정말 우릴 죽일 거야?”
해자수가 정신없이 떠들었다.
홀리는 해자수가 떠들거나 말거나 구혼음소만 읊었다.
이상하다? 기분이 나쁘지 않다.
지금 호발귀 검에 천참만륙 당하기 위해서 끌려가고 있는데, 기분 나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구혼음소를 읊고 있을 때는 감정의 변화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어떻게든 구혼음소로 호발귀를 일깨워야만 했다. 하지만 그 역할을 홀리가 맡자, 잠시 생각할 시간이 생겼다.
등여산은 제일 먼저 감정의 변화부터 생각했다.
죽으러 간다면 당연히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나쁘지 않다. 그렇다고 희열도 일어나지 않는다.
마음이 죽었다. 마음속에는 공포심만 가득히 들어있다.
공포, 두려움, 절망감……
희열과는 정반대의 감정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그런데도 기분은 나쁘지 않다.
이런 감정들이 들어차 있어서 희열이라든가 기분이 나쁘다는 감정이 생기지 않는 것일까?
마음은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떠올릴 수 없다. 공포심이 일어나면서 희열까지 느끼는 경우는 성향이 그런 쪽이 아닌 이상은 일어나지 못한다.
‘호발귀가 너무 강해!’
등여산은 문득 어떤 생각이 들어서 호발귀의 눈빛을 쳐다봤다. 호발귀의 눈에서 혈광이 번뜩인다. 저 눈빛을 보면 오금부터 저린다.
도저히 살아날 수 없다는 절망감이 든다. 마치 지옥에서 갓 튀어나온 악귀를 보는 것 같다.
호발귀는 예기라든가, 살기를 일으키지 않는다. 사실이 그렇다.
사람을 죽일 때 드러나는 흉포함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눈빛만 보면 생각이 싹 달라진다. 악귀도 이런 악귀가 없다는 생각과 동시에 공포감이 와락 일어난다.
호발귀가 홀리와 자신의 생기를 압도하고 있다!
생기와 생기가 통하는 게 아니다. 자신들의 생기가 호발귀의 생기에 짓눌렸다.
호발귀는 푸른 빛을 본다. 생기는 푸른 빛을 띤다. 그렇다. 호발귀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서 본 것과 마찬가지로 푸른 빛일 뿐이다.
홀리가 일으키는 푸른 빛, 자신이 일으키는 푸른 빛.
호발귀는 단지 푸른 빛을 소멸시킬 생각뿐이다. 그 외에는 일절 다른 생각이 없다.
호발귀는 생기를 소멸시키기 위해 끌어당긴다. 자신들의 생기는 저항하지 못한다.
왜? 호발귀보다 약하기 때문에. 만약 자신들의 생기가 호발귀보다 강했다면 이 싸움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진행됐을 것이다. 호발귀를 혈마에서 빼내 올 수도 있었지 않을까?
‘생기에 답이 있어!’
등여산은 퍼뜩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그렇다면 자신의 생기를 일깨워야 한다. 어떻게 일깨울까? 이미 죽어버린 생기인데, 전혀 감지가 안 되는데 어떻게 하나? 희열, 기쁨이 일어나야 한다.
‘생기를 보면 희열이 생겨. 그 반대…… 희열부터 떠올리는 거야. 그러면 생기가 따라서 일어나. 그때 생기를 잡는 거야. 어떻게든 생기를 일으켜야 해.’
등여산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 순간이 어떤 순간일까? 그 순간…… 그 순간!
어처구니없게도 그녀가 떠올린 가장 희열에 들떴던 순간은 호발귀에게 무참하게 유린당하던 그날 밤의 기억이다.
혈마를 제정신으로 돌리고자 음고를 복용했다. 음고의 영향으로 호발귀는 미쳐 날뛰었다. 마구 그녀를 짓밟았고, 그녀는 망가졌다. 엉망진창으로 유린당했다.
그 순간은 분명히 지극한 고통의 순간이었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호발귀가 혈마에서 벗어났을 때, 그녀는 진심으로 희열을 느꼈다.
이 사람, 살았어!
짧은 한마디가 그토록 강한 희열을 불러올 줄은 몰랐다.
희열이 있기 전에 극한의 고통이 있었다. 그래서 희열이 더 강하게 일어났다.
극에서 극은 극전(極轉)한다.
극음(極陰)은 극양(極陽)으로 한순간에 바뀔 수 있다.
극강한 사내가 부드럽기 시작하면 한없이 부드러워진다. 어떻게 이런 사내가 그렇게 강할 수 있었나 싶을 정도로.
한쪽 끝을 밟은 사람은 다른 쪽 끝으로 이동하는 것도 빠르다.
거부(巨富)가 한순간에 거지가 될 수 있다. 거지도 한순간에 거부가 될 수도 있다. 이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어중간하게 잘 사는 부자가 제일 부자가 되기는 굉장히 어렵다.
어중간하게 돈이 없는 자가 거지가 되기도 어렵다.
그와 마찬가지다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서 원하는 것을 얻었다는 걸 느꼈을 때 그녀의 모든 고통은 희열로 변했다.
그 희열!
등여산은 제대로 된 희열을 생각해냈다. 그때의 희열만 다시 일으키면 생기는 돌아올 것이다.
‘고마워. 혈마에서 벗어나 줘서 고마워. 정말 고마워!’
등여산은 혈광을 이글이글 토해내고 있는 호발귀를 보면서 방긋 웃었다.
‘그때처럼 지금도 벗어나 줄 거지? 정말 고마워. 나 원하는 대로 끌고 가. 검으로 찔러. 얼마든지 아프게 해도 돼. 하지만 넌 깨어나 줄 거잖아. 그렇지? 고마워.’
그녀는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채워졌다.
혈마에서 벗어난 호발귀를 생각하면 희열을 느껴진다.
그녀는 전신을 바르르 떨었다.
쓱!
그녀는 호발귀가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검이 코앞에 있다.
그래도 웃었다. 아예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호발귀가 다시 정신을 차린 순간만 만끽했다.
기쁨이 말도 못 하게 피어나는 순간이다. 가슴 벅찬 희열이 일어난다.
순간, 공포가 밀려났다. 겁이 사라졌다. 그 순간,
탁!
그녀를 잡아끌었던 무형의 검기가 거센소리를 울리면서 툭 끊어졌다. 실제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등여산의 귀에는 탄력 있는 밧줄이 끊어지는 소리처럼 들렸다.
“흑!”
밧줄이 끊어지자, 당겨지는 힘만큼 저항하고 있던 등여산은 반대 방향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호발귀의 검력이 깨졌다.
스슷!
등여산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세웠다.
“생기를 일으켜! 생기는 안 일어나! 절대 볼 수 없어. 그러니 억지로 일으켜! 지금 생기는 호발귀에게 압도당해 있는 거야. 절대로 생기를 일으킬 수 없으니까, 그 작용을 생각해!”
등여산이 횡설수설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뭘 하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생기는 일어나지 않는다. 일으킬 수 없다. 그런데 일으켜라. 작용? 무슨 작용?
등여산이 하는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등여산은 검력을 깼다. 호발귀가 여전히 검으로 가리키고 있지만, 등여산은 딸려가지 않는다.
‘우리도 할 수 있어!’
등여산이 검력을 깨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길을 알려주고 있다.
홀리와 해자수는 귀를 바싹 기울였다.
“홀리! 진기를 일으켜서라도 다리를 땅에 붙박아. 하지만 생기가 일어났을 때의 느낌을 살려야 해. 그 느낌을 일부러 일으키라고! 다리를 붙인다는 느낌은 중요하지 않아! 홀리, 너는 평온함이야. 평온함. 평온함을 느껴야 해! 그냥 두 발을 붙인다는 느낌이 아니라 땅이 너를 평온하게 해준다는 느낌을 받아야 한다고!”
등여산이 답답한 듯 연신 소리를 질렀다.
“해자수! 달려! 달려나가! 무언가가 끌어낸다고 했잖아! 호발귀 앞으로 달려나가!”
등여산은 오죽 급했으면 해자수에게 반말로 지시했다.
하지만 이 순간, 등여산은 또 실수를 저질렀다. 홀리와 해자수를 보면서 순간적으로 마음이 동요했다. 두 사람이 질질 끌려가는 모습을 보자 조급함이 치밀었다.
희열 대신 다른 감정이 들어찬다.
쉬리리리릭!
호발귀의 검기가 여지없이 그녀를 칭칭 옭아맸다.
‘실수!’
등여산은 자신의 실수를 곧 깨달았다. 그녀는 곧 정신을 차렸고, 희열을 느끼기 위해서 다시 옛날 그 순간을 떠올렸다.
그녀를 짓밟은 호발귀가 정신을 차렸다. 그녀에게 다정하게 속삭인다. 그녀를 부인으로 맞아들여 주었다. 그날 이후 호발귀와 부부가 되었다.
두 사람의 첫 관계는 매우 고통스러웠지만, 세상에서 가장 큰 고통과 가장 큰 희열을 동시에 안겨준 관계였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홀리의 가슴에서 희열이 피어났다. 등여산은 그 희열을 놓치지 않으려고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남들이 보면 미쳤다고 할 것이다. 홀리와 해자수가 보면 정말 섭섭할지도 모른다.
자신들은 고통스러워서 죽을 지경인데, 혼자 검력에서 빠져나갔다고 방긋방긋 웃고 있다니. 비웃는 것도 아니고, 놀리는 것도 아니고, 정말 정신이 나갔나!
꼭 그렇게 볼 것이다.
하지만 어쩌나. 자신의 생기가 이런 종류인 것을.
등여산은 자신이 직접 홀리와 호발귀 사이로 끼어들 생각을 했다. 자신이 중간에 끼어서 검력을 끊어버리는 거다. 홀리와 해자수가 아직 생기를 찾지 못한 듯하니.
하지만 그녀가 막 발을 옮기려고 할 때, 그녀의 가슴이 또다시 덜컥 무너졌다.
당장 희열이 사라지고 공포가 들어섰다.
희열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데, 기쁨이 한순간에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무섭다는 느낌이 일어났다.
희열을 지켜보는 눈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면 당장 변형이 생긴다.
‘안돼!’
그녀는 일부러 더 웃었다.
하얀 이까지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다시 눈을 감고 그때 희열을 떠올렸다.
그러자 겁이 사라져갔다. 공포감이 사라져 갔다.
홀리와 해자수를 도와주려고 했는데 도와줄 수가 없다. 자기 몸 하나만 지키는 것도 벅차다.
“홀리, 해자수. 생기, 생기만 일으켜 봐. 생기를 일으켜야 해.”
그녀는 더는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박박 악을 쓰지도 않았다. 알지 못할 소리로 윽박지르지도 않았다.
그녀는 직접 자신의 생기를 보여주었다.
희열에 들뜬 모습, 기쁨에 겨운 모습을 여실히 드러냈다.
남들이 미친 여자라고 손가락질할지도 모르겠지만, 죽음의 순간에서도 깔깔거리며 웃는 모습을 보였다,
그녀의 음성은 아이를 재우는 어미의 자장가처럼 포근하고 아늑했다.
활기차게 생기에 넘쳤으며, 사랑과 기쁨이 충만해 있었다. 음성을 듣기만 해도 마음이 평온해졌다.
“생기를 보면 풀려나. 그러니 생기를 봐.”
속삭이는 듯 나긋나긋한 음성이 조용히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