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六十五章 대적(對敵) (3)
등여산은 희망을 안고 걸어갔다.
생기와 생기가 통한다. 호발귀의 생기를 느낄 수는 없지만, 호발귀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은 있다. 희열이 계속 피어나고 있지 않은가.
그때, 잠자듯 누워있던 호발귀가 꿈틀거렸다.
등여산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 움츠렸다. 단지 호발귀가 몸을 약간 뒤척였을 뿐인데도 겁이 와락 치밀었다.
사랑스러운 낭군인데, 어떤 모습을 해도 두렵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몸이 전혀 뜻밖으로 반응했다.
‘괜찮아. 저 사람은 날 해치지 않아.’
등여산은 머릿속에 각인 시키듯 자신감을 되뇌면서 사박사박 걸어갔다.
호발귀와 겨우 십여 장만 남겨놨다.
호발귀는 누가 지척에 다가오면 당장 눈치채는데, 그녀가 십여 장 앞까지 다가와도 돌아보지 않았다.
‘역시 생기끼리는 통해.’
그녀가 안도의 한숨을 불어 쉴 때,
스읏!
호발귀가 눈을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 살쾡이처럼 퀭하게 들어간 눈으로 무심이 쳐다봤다.
아니, 강렬하게 쏘아봤다. 무심한 듯 보이는 눈에서 마광(魔光)이 번뜩였다.
“웃!”
등여산은 깜짝 놀라서 얼어붙었다.
호발귀의 눈빛이 아니다. 혈마의 눈빛이다. 그녀를 알아보는 눈빛이 아니라 잔인한 살인자의 눈빛이다.
“호발귀, 나야.”
등여산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그녀는 여전히 가슴에서 일어나는 희열에 집중하려고 했다. 한데 어느 틈엔가 희열이 사라지고 없다.
희열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기분이 나쁘지도 않다. 단지 겁만 난다. 호발귀의 눈빛이 두렵다는 생각만 일어난다.
‘내 생기가 깨졌어!’
등여산은 즉각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지금도 계속 희열이 지속되어야 하는데, 정말 감쪽같이 기쁘다는 감정이 사라져버렸다.
생기와 생기가 통한다는 말은 순전히 착각이었다.
스읏!
호발귀가 상체를 일으켰다.
다리는 움직이지 않고 상반신만 일어서는, 순전히 복근의 힘만 이용해서 상체를 일으켰다.
파앗!
등여산을 쳐다보는 눈빛이 더욱 사악해졌다.
이제는 확실히 살광이다. 죽이겠다는 눈빛? 아니, 저것은 살광도 아니다. 살광은 단지 죽이겠다는 눈빛인데, 호발귀가 띄우는 눈빛은 조롱이다.
가지고 놀겠다는 거다.
생명을 쉽게 죽이지 않고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고, 발로 툭툭 차기도 하고, 그렇게 데리고 놀다가 싫증이 나면 버리겠다는 사악한 눈빛이다.
‘도, 도망가야 해!’
마음속에서 공포가 확 피어났다.
하지만 등여산은 곧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눈을 질끈 감고 단단히 각오한 듯 구혼음소를 읊조렸다.
‘호발귀! 나야! 등여산! 정신 차려!’
“타악 투 파 비투 쏘 추우 탄 치……”
지금 호발귀를 깨울 것은 구혼음소밖에 없다. 말로 해도 듣지 않는다. 그녀가 하는 말은 짐승의 울음소리만도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를 알아보지도 못한다.
스읏!
호발귀가 옆에 떨어져 있던 검을 집어 들었다.
‘안 돼!’
호발귀는 검으로 등여산을 가리켰다.
순간, 호발귀의 눈빛이 변했다. 먹잇감을 노려보는 맹수의 눈빛이다. 강렬한 살광이 눈빛에 담겨서 쭉쭉 뻗어 나왔다.
등여산은 무형의 검기가 전신을 칭칭 감아온다고 느꼈다.
마치 어부가 그물을 던지듯이, 커다란 그물에 걸린 고기처럼,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이 전신을 옭아맸다.
쓰으읏!
그물이 당겨졌다.
“으음!”
등여산은 신음을 흘리면서 따라가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쓱 끌려갔다.
‘아! 이런 식으로 끌려갔구나!’
염창촌 마을 사람들, 호발귀 앞에 나섰던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죽었다. 형옥 무인들이 이런 식으로 딸려가서 죽었다.
스읏! 창!
등여산은 검을 뽑았다. 그리고 땅에 푹 찔러 넣었다.
더는 끌려가면 안 된다.
스읏!
그물이 당겨졌다.
등여산은 딸려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역부족이다. 당기는 힘이 너무 강하다.
그녀가 버티는 힘은 가녀린 하루살이의 날갯짓에 지나지 않는다.
쓰으윽! 부우우우욱!
등여산은 땅에 박힌 검과 함께 질질 끌려갔다. 땅에 깊은 자국이 패였다.
“처러카 미이 개자오라 도미……”
등여산은 계속 구혼음소를 읊었다.
설화공을 일으켰다. 음성에 진기를 실어서 폭발하듯 터트렸다.
봉황후(鳳凰吼)!
봉황의 울부짖음이 십 리를 건너간다는 소문처럼, 그녀의 음성이 커다란 북소리처럼 증폭되어서 터져나갔다.
스읏!
호발귀는 등여산이 무슨 짓을 하든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천천히…… 무형의 그물을 잡아당길 뿐이다. 별로 힘들이지도 않고, 기분 내킬 때마다 한 번씩 끌어당긴다.
등여산을 가지고 놀뿐, 당장 죽일 생각은 없는 듯했다.
스스! 스스슷!
등여산은 호발귀가 이끄는 대로 끌려갔다.
“티록 타 미 고토 고토 하……”
등여산은 구혼음소를 계속 읊었지만, 확실히 호발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검이 계속 그녀를 가리키고 있고, 그녀는 검 앞으로 질질 끌려갔다.
가기 싫어서 발버둥 치는 어린애를 부모가 억지로 끌고 가듯이 죽을 위험을 다 해서 버티는데도 가차 없이 끌려갔다. 땅바닥에 끌려가는 자국을 뚜렷이 남기면서.
“타마 하마 주누 사 으원 여 바타.”
등여산은 구혼음소를 끝냈다. 효력이 없다. 호발귀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틀렸어.’
등여산은 자포자기 심정으로 호발귀를 쳐다봤다.
순간, 호발귀가 잠깐 당기는 힘을 멈췄다. 그리고 옆을 쳐다봤다.
숲에 한 사람이 있다. 하지만 숲에 있던 사람은 호발귀가 쳐다보자마자 쏜살같이 사라져버렸다. 이미 호발귀의 눈빛이 지닌 의미를 알고 있다.
‘형옥주!’
등여산은 형옥주를 안다. 어떻게 모르겠나.
형옥주가 자신을 일부러 보내주었다. 사마를 보내서 막지 않은 게 이런 이유였다. 일부러 보내놓고 호발귀에게 죽는 모습을 지켜본 것이다.
무엇이 궁금했을까?
쓰윽!
호발귀가 다시 검기로 뭉쳐진 그물을 당겼다.
“으!”
등여산은 저항하지 못하고 질질 끌려갔다.
* * *
형옥주는 호발귀가 쳐다보자, 깜짝 놀라서 신형을 빼냈다.
자칫하면 자신도 책사처럼 혈마의 먹잇감이 된다. 한순간만 늦어도 바로 딸려간다.
형옥주는 정말로 깜짝 놀랐다.
혈마가 사람 죽이는 모습을 너무도 생생하게 목격했다.
바로 눈앞에서, 숨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거리에서 공포에 질린 책사 모습을 뚜렷하게 봤다.
호발귀는 검으로 쓱 가리키기만 했다.
그런데 책사가 제 발로 질질 끌려갔다.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도 쳤고, 주문도 외웠지만, 완벽히 소용없었다.
사람을 병기 앞으로 끌어당겨서 죽인다?
그 실체를 똑똑히 봤다.
책사는 무공을 숨긴 고수였다. 평소에는 자신보다도 하수라고 여겼는데…… 사마의 공격을 두세 번이나 막아낸 진짜 고수 중의 고수였다.
그런 고수를 장난감처럼 끌고 갔다.
또한 자신은 등여산과 상당한 거리를 벌린 채 따라갔다.
책사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런데도 혈마는 단숨에 알아챘다. 진기가 아니라 생기로 파악한 것이다.
“으! 저놈하고는 거리를 얼마나 둬야 하는 거야?”
형옥주가 중얼거렸다.
형옥주는 책사가 죽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혈마 편으로 돌아선 여자다. 천살단 입장에서는 변절자다. 형옥주가 계속 형옥을 맡고 있다면, 등여산을 잡아들여서 자기 손으로 벌을 내려야 한다.
변절자에게 가해지는 벌은 천참만륙(千斬萬戮)이다. 영혼도 남지 않게 갈가리 찢어 죽인다.
시신도 만인이 보고 느끼게끔 광장에 늘어놓는다. 그래야 변절자가 또 나오지 않는다.
일벌백계(一罰百戒) 중에서도 변절자에 대한 형벌은 매우 지독하다.
등여산은 그만한 죄를 저지른 죄인이다.
죽어도 하등에 상관이 없다.
형옥주는 재빨리 도주하면서도 곁눈질로 책사 사정을 살폈다.
책사는 계속 혈마에게 끌려갔다. 급하게 끌려가지는 않았다. 장난하듯이 슬금슬금 끌어당긴다.
혈마도 사람을 막 죽이지는 않는다.
배고플 때는 급하게 죽이고, 배부르면 지금처럼 장난질을 치면서 죽이다.
염창촌 주민들을 죽일 때는 매우 급하게 죽였다.
벼락에 콩 볶듯이 화다닥 끌어내서 죽였다. 하지만 복운촌 주민을 죽일 때는 양상이 상당히 달랐다. 역시 끌어내어서 죽이기는 했지만, 죽이는 속도가 상당히 느렸다.
사람들이 끌려오면서 얼굴에 띄우는 공포심을 즐기는 듯했다.
그렇다면 혈마는 정말 악마다.
혈마는 책사도 복운촌 주민들처럼 죽인다. 단숨에 숨을 끊지 않고 공포심을 즐긴다.
‘도대체 단주님은 뭘 알아보려는 거지? 저런 놈은 살려주면 안 되는데. 이러다가 괜히 아까운 사마만 잃는 거 아니야. 그럼 정말 아까운데.’
형옥주도 사마가 언제까지 혈마를 유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지극히 한시적이다.
그래서 늘 조심을 하고 있긴 한데, 이게 어디 조심한다고 될 문제인가.
쉬이이잇!
형옥주는 호발귀가 달려들까 봐 부리나케 신형을 쏘아냈다.
* * *
“안돼! 호발귀! 안돼!”
숲에서 쩌렁! 일갈이 터졌다.
호발귀가 고개를 돌려 숲을 쳐다봤다.
홀리다. 그녀가 숲에서 뛰쳐나오고 있다. 다짜고짜 호발귀를 향해 신형을 쏘아낸다.
“홀리! 안돼! 도망! 도망가! 안돼! 도망가!”
등여산도 다급해서 고함을 빽 질렀다.
호발귀에게는 누구도 상대가 안 된다. 알아보는 사람도 없다. 구혼음소도 통하지 않는다. 도망만이 최선이다.
“호발귀! 왜 이래! 정신 차려! 안된다니까!”
홀리는 홀리대로 소리쳤고, 등여산은 그녀대로 소리쳤다. 양쪽에서 서로 고함을 내질렀다.
홀리는 등여산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녀의 말은 무시하기로 작정했는지, 오직 호발귀에게만 고함을 내질렀다.
“네 부인이야! 등여산! 몰라! 너 어쩌려고 이래! 나중에 어쩌려고 이러냐고!”
홀리가 있는 힘껏 고함을 질렀다.
츠읏!
호발귀가 홀리의 말에 반응했다. 짙은 핏빛을 쏘아내던 눈빛에서 반짝! 마광이 터졌다.
호발귀가 그런 눈빛으로 홀리를 쏘아봤다.
슷! 쓰읏!
호발귀가 왼손을 들어 올렸다.
“헉!”
홀리가 헛바람을 내질렀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안다. 그녀도 등여산처럼 몸에 찰싹 달라붙는 거미줄이 씌워졌다.
빠져나올 수 없는 무형의 밧줄에 몸이 칭칭 휘감겼다.
스으읏!
홀리도 등여산처럼 질질 끌려오기 시작했다.
“이익!”
홀리도 등여산처럼 생기를 떠올렸다. 그래서 진기를 일으키지 않고 생기를 생각했다.
홀리의 생기는 용천혈이 땅에 붙는 데서 시작한다.
두 다리가 굳건하게 땅에 푹 박힌다. 최대한 안정을 유지한다. 그러면 안전하다. 만약 땅이 밀어내면 위험한 것이다. 현재, 땅은 그녀를 튕겨내지 않는다.
호발귀가 위협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이럴까? 호발귀는 분명히 위협을 가하고 있다. 자신을 죽일 생각으로 끌어당긴다. 그런데 이걸 왜 위협이라고 느끼지 못하지? 왜 생기가 경고를 말하지 않는 거지?
홀리는 급기야 진기를 일으켰다. 진기를 용천혈에 운집해서 땅에 고착시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여지없이 끌려갔다.
‘생기가 일어나지 않아!’
이미 생기가 죽어버렸다.
그녀가 일으킨 것은 진기일 뿐이다. 진기로 용천혈에 운집해서 땅에 발을 붙이려고 했는데, 호발귀가 여지없이 끌어냈다.
쓱쓱! 쓱쓱!
한 번은 등여산을, 한 번은 홀리를…… 호발귀는 두 여인을 가지고 놀듯이 끌고 갔다.